최근 수정 시각 : 2020-03-06 22:09:15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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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Horace Grant Underwood
한국식 이름 원두우
생몰 1859년 7월 19일 ~ 1916년 10월 12일 (57세)
출생지 영국 런던
학력 미국 뉴욕 주 뉴욕 대학교 졸업
미국 뉴저지 주 뉴브런즈윅 신학교에서 공부
가족 아내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
아들 호러스 호튼 언더우드
종교 개신교 (장로회)

1. 개요2. 일생
2.1. 젊은 시절2.2. 조선에서의 활동
3. 후대의 평가4. 언더우드 가문과 한국5. 연세대학교의 기념 현황6. 경신고등학교의 기념 현황7. 기타


가족보다 이 조선 청년들을 챙겨주시오.

1. 개요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당시 한반도에서 활약한 미국선교사이자 한국 장로회의 아버지. 한반도에 장로회를 전도한 최초의 목회 선교사이며, 비 개신교 인들에게는 연세대학교의 설립자로(연세대학교 뿐만 아니라 경신고등학교도 설립했다) 꽤 알려진 인물이다. 본인 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도 한국과 연세대에 대대로 기여하면서 좋은 인연을 유지해 온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한국식 이름은 원두우인데, 이는 언더우드를 빠르게 발음한 말로, 당시 고종황제가 직접 지어줬다고 한다. 커피가 아니다.

명암이 분명한 호러스 뉴턴 알렌과는 달리, 헨리 아펜젤러, 어니스트 베델, 호머 헐버트,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후세 다쓰지, 조지 쇼, 메리 스크랜튼 등과 함께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들을 위해 헌신했던 외국 은인들 가운데 한 명이다.

2. 일생

2.1. 젊은 시절

1859년 7월 19일에 영국계 미국인으로 태어난 언더우드는 1881년 뉴욕대학을 졸업하여 문학사학위를 받고 그해 가을 뉴 브런즈윅 시에 있는 화란 개혁 신학교(The Dutch Reformed Theologica Seminary)에 입학하였다. 힌디어의학을 배운 후 장로회 목사가 된다. 그리고 당시 영미권의 선교사들이 주로 파견되던 인도 제국에 건너가 목회 활동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조선이라는 당시 생소한 국가에 파견할 선교사 한 명을 찾지 못한다는 소문을 듣고 조선에서의 선교 활동을 결심한다. 당시 언더우드가 약혼녀와 조선에 함께 가는 문제를 두고 나눴다는 대화가 전해진다.
"그 곳에서는 무얼 먹고 살고 있나요?"
"모르겠소."
"병원은 있나요?"
"모르겠소."
"그럼 당신은 조선에 대해 아는 게 뭔가요?"
"내가 아는 것은 오로지 그곳에 주님을 모르는 1,000만의 민중이 살고 있다는 것 뿐이오."[1]

허나 이에 약혼녀는 동의하지 못했고, 결국 언더우드는 파혼 통보를 받고 나서 홀로 조선으로 향하게 된다.

2.2. 조선에서의 활동

그가 한국으로 건너가려던 1884년에 갑신정변이 터지는 바람에 후유증으로 외국인 입국이 막혔으며, 언더우드는 1년간 일본에 머물면서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한국어를 배우고 감리회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와 함께 헐버트의 도움을 받아 마가복음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다. 당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 가운데 한국어를 가장 잘 구사하는 축에 들었다.

1885년 언더우드는 호러스 뉴턴 알렌의 도움으로 조선에 입국한다. 알렌이 조선 정부에 제출한 설립안에 의거해 1885년 4월 개원한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의 설립 목적에는 의학생 교육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1886년 3월 29일 개교한 한국 최초의 서양 의학 교육 기관인 제중원 의학교에서 언더우드는 수학, 물리, 화학의예과 과정의 과목을 가르치면서 본격적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한다. 언더우드는 1888년에 파견된 선교사이자 제중원의 여의사인 8살 연상의 릴리어스 호튼(Lillias S. Horton)과 결혼했다.

1887년 서울에서는 한국 최초의 장로회 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하고, 평양 지방까지 교세를 확장했다. 이 해부터 거의 20년 동안 언더우드는 평안도 전역을 순회하는 선교 여행을 반복했고, 1891년 게일 선교사와 마펫 선교사가 여행에 합류하면서 신앙 공동체를 설립하는 등 본격적으로 서북 지역에 포교활동을 하게 된다.

1894년, 영국 출생의 캐나다 선교사 올리버 에비슨 (Oliver R. Avison)이 조선 정부와의 협상 끝에 제중원을 선교부로 이관받았고, 이로써 제중원은 온전한 사립 선교 기관으로 재편됐다. 1900년, 록펠러의 석유회사 '스탠다드 오일'의 창립 멤버 중 하나였던 루이 세브란스 (Louis Henry Severance)가 병원 건립을 위해 제중원에 거액을 기부했다. 이 기금을 두고 평양의 선교사들이 문제를 제기했으나 언더우드의 협조에 의해 갈등은 해결되었고, 1904년 제중원은 새로 지어졌으며 기증자의 이름을 따서 세브란스 병원, 그리고 세브란스 의학교가 되었다. 세브란스의 건립에도 언더우드의 공이 컸던 것이다.

번역과 교육에도 힘써서 입국한 직후부터 신약의 4대 복음서를 번역했으며, 한국에 머문 30년 동안 한국어 자료를 모아 한불 사전, 한영 사전, 한영 문법을 편찬했다. 입국하자마자 한국 최초의 고아원 언더우드 학당, 1885년에는 근대적 교육 기관인 경신학당을 설립했고, 1915년에는 경신 학당을 모태로 경신학교 대학부(현 연세대학교의 전신)를 설립했다. 경신 학교 대학부는 1917년부터 연희전문학교의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타자기 재벌이었던 그의 형 존 언더우드 (John Thomas Underwood)가 토지 매입과 교사 건축 비용을 제공했다.[2]

그러나 평양의 새로운 교회 설립, 경신학교 설립 작업과 번역 작업으로 후유증을 얻었고, 일제가 '조선의 모든 교육자는 일본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교육 시행령을 내리면서 일본어 공부까지 겹쳐 과로로 몸을 상하게 된다.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자 1916년 4월 미국으로 건너가 치료를 받으며 요양했으나 결국 그 해 10월 16일 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그의 시신은 한국으로 옮겨져 양화진 외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3. 후대의 평가

같은 조선에서 활동했지만 언더우드는 알렌과 달리 민중에게 직접 다가가는 아래로부터의 선교 방식을 지향했다. 또한 선교 활동을 하면서도 자기 잇속 챙기기 급급했던 알렌과는 달리 청렴결백했으며 자신의 집을 고아원 겸 교회 건물로 기꺼이 내놓을 정도였다. 하지만 의외로 자신의 선교 방식과 교리에 대해서는 일체 타협을 하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다른 선교사들과 갈등을 겪기도 하고 일제에 의한 압력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장로회에서는 최초의 장로회 선교사로, 연세대학교에서는 설립자로 추앙하고 있으며 한국 개신교 역사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1928년 연희전문학교 교정에 동상이 세워졌다가 1940년대 태평양 전쟁 중에 일제가 포탄을 만든다고 동상을 뽑아가는 바람에 광복 이후에 다시 세우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이 동상을 또 뽑아가는 바람에 전쟁이 끝나고 3번째 동상을 다시 만들게 되었다.(...)

4. 언더우드 가문과 한국

언더우드는 본인 뿐만 아니라 후손들 역시 한국과 연세대에 대대로 공헌하며 좋은 인연을 이어나가고 있다. 가문의 구성원 전원이 한국식 이름을 갖고 있으며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다고 한다. 아래의 인물들은 각 세대의 장남이며, 이게 이 집안의 업적 전부가 아니다.
  • 2대 - 호러스 호톤 언더우드(Horace Horton Underwood, 한국명 원한경)
    언더우드 집안의 2대 호러스 호톤 언더우드(Horace Horton Underwood, 한국명 원한경) 박사는 제암리 학살사건을 외신에 알렸다. 대학 인가를 받고 취임하게 된 연희전문학교 교장 시절에는, 자신이 미국 국적을 가졌기에 치외법권을 내세워 일제의 손에서 최현배, 정인보 등 한국어 학자들을 보호하면서 한국어 연구에 힘쓰게 했다. 하지만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지면서 연희전문학교는 가장 많은 피해를 입게 되고, 교원 겸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이윤재 박사와 한징 박사는 옥사한다.[3][4] 원한경 박사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진 태평양 전쟁 직전에 일제를 피해 미국으로 떠났다가, 광복 후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1951년 부산에서 한국전쟁 구호 사업을 돕던 중 심장마비로 병사한다.
  • 3대 -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주니어(Horace Grant Underwood Jr. 한국명 원일한)
    언더우드 집안의 3대가 되는 손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주니어(Horace Grant Underwood Jr. 한국명 원일한)는 한국전쟁 당시에 유엔군으로 참전했으며, 정전 협정 당시에는 통역관을 맡았다. 전역 후에는 장로회 목사가 되었으며 장로회 계열 미션스쿨한남대학교배재대학교의 설립에 이바지한다. 1980년에는 5.18 민주화운동의 실상을 해외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이로 인해 전두환 정부에 의해 강제 추방당했다. 5공이 막을 내린 후 복권되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연세대 이사를 역임하고 한국 땅에서 삶을 마쳤다. 연세대 대학 교회 루스채플에 이 분의 이름을 딴 원일한홀이 있다.
  • 4대 - 호러스 호톤 언더우드 주니어(Horace Horton Underwood Jr. 한국명 원한광)
    언더우드 박사의 증손자 원한광 박사는 연세대 영어영문학과에서 30년간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인의 영어 교육론에 대해 연구했으며, 한미 교육 위원단장을 역임했다. 2004년 아버지 원일한 박사가 작고한 후 언더우드 일가의 모든 고서 보관본과 근대사 자료를 기부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3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주니어 박사가 세상을 떠난 후, 언더우드 일가의 대부분은 2005년에 한국 땅을 떠나 미국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2011년 10월, 방우영 조선일보 상임 고문의 영향으로 이사회가 교단 파송 이사에 대한 조항을 삭제[5]하게 되자, 조선일보가 연세대 법인의 지분을 노리는 것이 아닌가 또는 법인을 사유화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쏟아져나왔다.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2012년 현재까지 한국에서 컨설턴트로 활동 중인 언더우드 박사의 3대손 피터 언더우드(Peter F. Underwood, 한국명 원한석) 씨와 4대손 리처드 언더우드(Richard A. Underwood, 한국명 원특한) 씨가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의 협력을 얻어 연세대 사유화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있다.#

5. 연세대학교의 기념 현황

파일:underwood.png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의 언더우드 동상
파일:external/i62.tinypic.com/244bcc9.png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의 언더우드관

연세대에서 언더우드 일가 기념관도 운영 중이다.

해외 벽지나 오지 등 선교 활동이 어려운 지역에서 15년 이상 선교 활동을 한 사람을 대상으로 연 1회 언더우드 선교상을 시상한다. #

연세대학교 '언더우드 국제대학(Underwood International College)' 이 하나의 단과 대학으로 존재한다. 줄여서 UIC라 부른다.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의 기숙사는 12개의 하우스(House)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중 언더우드 하우스가 있으며, 국제캠퍼스의 중앙 도서관 이름은 '언더우드 기념 도서관'이다.

6. 경신고등학교의 기념 현황

연세대학교와 마찬가지로 언더우드가 설립한 경신고등학교 또한 교내에 언더우드 동상이 있다.

2019년 03월에는 학교 정문위치에 언더우드 기념관을 건설하기 위해 시공식을 했으며, 추후 체육관 및 강당 등 다목적 복합시설로 이용될 예정이다.

7. 기타

그의 형 존 토머스 언더우드 (John Thomas Underwood)가 바로 유명 타자기 브랜드 언더우드의 설립자이다.

한편 언더우드는 당시 한국 천주교에 대해서는 상당히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언더우드 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던 개신교, 특히 미국 출신 개신교 선교사들의 공통점. 당시 한국에서 개신교와 천주교의 관계는 매우 불편한 상태였는데[6] 자세한 이야기는 개신교/대한민국 문서를 참조.

고종이 호러스 언더우드에게 하사한 사인참사검 1자루가 2016년 10월 11일 손자 원득한 박사에 의해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 이 사인참사검은 2017년 6월 18일 TV쇼 진품명품 1101회에 나와 3억 원의 감정가를 받았다.

생전 성격이 불같았고 거침없었다고 한다. 어릴 적 ‘넓은 날개’(wide wings)와 ‘불 동가리’(a bundle of fire)라는 두 개의 별명이 있었다.


[1] 이는 어디까지나 개신교 선교사로서의 관점에서 나온 말이다. 당시 로마 가톨릭(천주교)은 조선 후기에 남인, 소론 계열 학자들에 의하여 이미 들어와 있었고, 숱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근근히 신앙을 이어나가고 있었다.[2] 존 언더우드가 운영했던 언더우드 타자기 회사는 최초의 근대식 타자기를 제조한 회사로, 타자기 역사에서 중요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위키피디아 해당 항목[3] 결국 일제의 압박에 의해 연희 전문 학교에서 쫓겨나다시피 물러가게 되는데, 바로 이때 학교장을 꿰찬 이가 윤치호였다.[4] 이러한 역사의 상흔 때문인지, 연세대학교에는 아직까지 일어일문학과가 없다.[5] 미션스쿨인 연세대의 특성상 이 조항에 따라 이사회 가운데 1/3은 반드시 기독교단에서 이사를 보내도록 하게 되어 있었다.[6]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이라 천주교는 개신교를 때려잡아야 할 열교이자 이단으로 취급했고 개신교 역시 마리아를 숭배하는 사탄교로 공격하며 서로를 적대시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