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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버트 테일러

<colcolor=#fff><colbgcolor=#000> 앨버트 테일러
Albert Taylor
파일:앨버트 테일러.jpg
본명 앨버트 와일더 브루스 테일러[1]
Albert Wilder Bruce Taylor
출생 1875년 3월 14일
미국 네바다 주 실버
사망 1948년 6월 29일 (향년 73세)
미국 캘리포니아 주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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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기업인, 언론인
부모 아버지 조지 알렉산더 테일러 (1829~ 1908)
형제 남동생 윌리엄 테일러
배우자 메리 린리 테일러 (1917년 결혼)
자녀 장남 브루스 테일러 (1919~2015)
묘소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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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평양 너머에 내 나라가 있고, 내 집이 있다"
최초로 3.1 운동을 세계에 알린 언론인기업가.

2. 생애

1875년 3월 14일 미국 네바다 실버 시에서 금광 기술자였던 조지 알렉산더 테일러(George Alexander Taylor)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금광 기술자가 되었고, 1896년 그는 조선 정부로부터 평안도 운산금광의 채광 허가를 받은 동양합동광업사의 운영책임자였던 아버지 조지 테일러와 함께 조선에 들어와 운산금광에서 생산하는 가장 중요한 두 광물의 채광을 담당한 감독자가 됐다.

1908년 아버지 조지가 사망한 후에도 테일러는 조선을 떠나지 않고, 조선에 남아 직산광업사에서 기술 및 경영책임자로 일하는 AP통신의 서울 특파원으로도 활동했다.

1912년 앨버트는 동생 윌리엄과 함께 태평통 2정목 40번지에 테일러상회[2]를 설립했다. 또 고미술품 수집이 취미였던 앨버트는 장곡천정 113-1번지에 테일러상회에 속한 사업부 중 하나인 테일러골동품점을 열어서 한국 전통 가구나 의상, 도자기, 병풍을 비롯한 고미술품, 여러 전통 공예품을 판매했다.

일본 요코하마에서 당시 여러 나라에서 순회공연을 하던 영국 출신의 연극배우 메리 린리[3]와 사랑에 빠져 1917년 6월 15일 인도 뭄바이 성 토마스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여러 항구를 거쳐 조선으로 입국해 신혼 생활을 보내게 된다.

1919년 2월 28일 경성 세브란스 병원에서 외아들 브루스[4]를 얻었다. 당시 세브란스 병원 지하실에서는 3.1 운동을 준비하기 위해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있던 곳 중 하나여서 일제가 이 사실을 알고 세브란스 병원에 들이닥치자 조선인 수간호사가 외국인 병실은 함부로 탐색하지 못할 것임을 판단하고 미국인 병실에 이를 숨겼는데 그곳이 메리가 막 출산을 마친 병실이었던 것이다. 메리의 침상 밑에 숨긴 독립선언서를 병실에 방문한 앨버트가 발견하고 이것을 동생 윌리엄의 구두 뒤축에 숨겨 순사의 눈을 피해 몰래 몸에 지니고 도쿄로 반출하여, 도쿄의 통신사망을 통해 타전하면서 한국의 3·1 운동은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테일러 부부는 인왕산 성벽을 따라 산책하다 만난 큰 은행나무 아래에 1923년 붉은 벽돌로 집을 짓고[5] 이름을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을 가진 딜쿠샤로 정하며 조선에서 정착하기로 결심한다.

이후에도 제암리 학살사건을 취재하고, 스코필드, 언더우드와 함께 조선 총독을 항의 방문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1930년 12월 테일러골동품점 자리에 새롭게 테일러빌딩이 지어지면서 테일러골동품점은 테일러상회와 통합 운영되었고, 윌리엄이 중극으로 영업 활동을 옮긴 1930년대 후반부터는 앨버트가 주로 맡아 운영하였다.

1940년의 어느 날, 아들 브루스는 미군 입대를 위해 딜쿠샤를 떠나 미국으로 갔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며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적국의 국민이라는 이유로 앨버트는 6개월형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보냈고, 부인 메리는 딜쿠샤에 가택연금되었다.

1942년 5월 조선총독부의 외국인추방령에 따라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광복 직후인 1945년에는 한국에 남겨두고 간 재산을 찾기 위하여 미군정청 고문 자격으로 한국에 입국하기도 하였다.

"When I die, please bury me next to my father in my beloved land of Korea."
내가 사랑하는 땅 한국, 아버지의 묘소 옆에 나를 묻어주시오.

1948년 6월 29일 미군정청 광업담당관으로 새 일을 하기 직전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73세를 일기로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르기 위해 부인 메리가 성공회 헌트 신부님과 언더우드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 미군함을 타고 대한민국으로 들어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앨버트를 묻고 딜쿠샤를 방문했다.

3. 여담

메리는 1942년 한국에서 강제 추방되자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남편 앨버트과 함께 노년을 보내며 회고록을 썼고, 훗날 그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는 이것을 '호박 목걸이(Chain of Amber)'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하였다.

파일:테일러 상회.jpg
1927년 10월 4일자 동아일보에 게시된 테일러상회의 시보레 자동차 광고. 윌리엄이 자동차 판매를 전담한 것으로 보이며 그렇다면 윌리엄은 우리나라 최초의 수입자동차 딜러인 셈이다. 또한 윌리엄은 시보레뿐만 아니라 포드제너럴 모터스의 차종들도 취급했다. 형제는 무역업으로 돈을 벌어 조선호텔 옆에 빌딩 몇 채도 사들여 소유했다. 서울 서대문 돈의문 박물관마을에는 테일러상회 전시실이 있다.

테일러 일가의 집인 딜쿠샤는 이후 앨버트의 동생 윌리엄 테일러에 의해 잠시 관리되다 6.25전쟁 시기에도 끄떡없이 살아남아 1959년 정치인 조경규이 매입하여 그의 소유가 되었으나 1963년 군사정권에 압수되었으나 정부는 건물을 방치하였고 불법주거자가 임의로 이 건물을 증개축하여 왔다.1997년유태흥대법원장이 딜쿠샤가 대한제국 시절 신문인 대한매일신보의 사옥인 것 같다고 제보하면서 딜쿠샤가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현재는 딜쿠샤를 복원하고 역사 전시관을 개설해 기존 내부 1·2층 거실은 테일러 부부가 거주할 당시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고, 나머지 공간은 테일러 가족의 한국에서의 생활상과 테일러의 언론활동 등을 조명하는 6개의 전시실로 구성했다고 한다.

2006년 딜쿠샤를 떠난 지 66년 만에 앨버트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아내 조이스, 딸 제니퍼와 함께 딜쿠샤를 찾았다. 군대 입대를 위해 그 곳을 떠난 브루스가 87세의 노인이 되어 다시 돌아온 것이다.서울특별시는 대한민국을 방문한 앨버트 테일러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와 그의 가족들에게 명예 시민증을 부여하였다.

2015년 4월 29일 외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별세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있는 앨버트의 묘비명에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시 <Fear no more the hert of the sun>[6]라는 시의 구절 중 하나가 쓰여져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Thou thy worldly task hast done, Home art gone, and ta’en thy wages
그대여, 그대는 이 세상의 모든 일을 마치고 돌아가 보상을 받았다.


[1] 본명은 브루스(Bruce)다.[2] 생활용품, 사무도구, 건축자재 등 다양한 수입품을 들여와 팔거나 주문을 대행했을 뿐만 아니라 자동차 판매와 수리, 배편 예약, 보험 판매, 영화 배급 등 다양한 업종하는 망라하는 종합무역상사[3] 결혼 전 본래 이름은 힐다 무아트 빅스(Hilda Mount-Biggs, 1889~1982)로 1889년 영국 첼트넘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모험을 좋아하고 독립심이 강해서 부모님의 바람으로 프랑스 신부학교에 입학했다가 그 길을 거부, 연극배우 '메리 린리'로 살게 된 것이다.[4] 브루스 티켈 테일러(Bruce Tickell Taylor, 1919~2015)[5] 본래는 임진왜란의 명장 권율의 집터였던 곳으로,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 앞에 권율 장군 집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이런 우연이?[6] 해석하자면 <태양의 열기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