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가에 대한 내용은 조지 버나드 쇼 문서 참고하십시오.
출생 | 1880년 1월 25일 |
청나라 복건성 복주부 영북리 마미 (現 중국 푸젠성 푸저우시 마웨이구) | |
사망 | 1943년 11월 13일 (향년 63세) |
중화민국 푸젠성 푸저우 (現 중국 푸젠성 푸저우시) |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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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아버지는 아일랜드계 영국인이었고, 어머니는 일본인이었다.
2. 생애
1880년 1월 25일에 청나라 복건성 복주부 영북리 마미(현 중국 푸젠성 푸저우시 마웨이구)에서 아버지 새뮤얼 루이스 쇼(Samuel Lewis Shaw)와 어머니 엘런 오시(Ellen Oh'sea)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선원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아일랜드풍의 이름[1]을 쓴 탓에 후손들도 일본인이 아니라 아일랜드인으로 착각했다. 일본 정부에서도 중국인으로 알았을 정도. 새뮤얼과 엘런은 1879년에 결혼했고 1880년에 조지를 낳았다.[2]조지는 1900년부터 조선 평안남도 은산금광에서 회계로 근무했는데 채산성이 맞지 않아 1907년 청나라 봉천성 봉황청(鳳凰廳) 안동현(安東縣)[3]으로 옮겨 무역 회사 겸 선박업 회사인 이륭양행(怡隆洋行)을 세웠다. 1912년에 일본인 사이토 후미와 결혼하였다. 후미[4]와의 사이에서 아들 새뮤얼 조지 쇼와 루이스 쇼를 낳았다. 둘째 아들인 루이스도 일본인과 결혼해 막내며느리도 일본인이었다.
1919년에 아일랜드에서 아일랜드 독립 전쟁이 일어났다. 같은 해 3월에 3.1 운동도 일어났는데 조지 쇼는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그는 그해 7월부터 자회사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국 사무소를 설치해 임시정부와 국내 사이의 연락책을 수행하며 무기 운반, 군자금 전달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계림호라는 군수지원함의 함장을 맡고, 1919년 일제가 회유를 위해 남작 작위까지 수여한 김가진의 임시정부로의 망명을 도왔으며, 같은 해 11월 대한제국의 황족인 의친왕 추가 망명 계획에도 동참[5]했으나 후자는 미수에 그쳤다.
1920년 7월에 일본 정부는 그를 계획적으로 소위 내란죄의 명목으로 체포하여 구금하였다. 그 후 4개월만인 1920년 11월 19일에 영국 정부의 강력한 요구로 보석으로서 석방된다. 당시 일본은 영국과 영일동맹을 체결하고 있었지만, 조지 쇼 체포에 관해 영국의 항의가 빗발쳤고 자칫하면 조지 쇼 체포 문제가 영국과의 외교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
1943년 11월 13일에 세상을 떠났다.[6]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나 후손을 찾지 못해 수여되지 않았다가 50년 만에 쇼의 핏줄이 호주에 살고 있음이 확인, 국외 거주 독립유공자 후손 초청행사에 손녀 마조리 허칭스와 증손녀 레이첼 서시를 초청하였고 2012년에 친손녀인 마조리 허칭스(Majorie Hutchings)에게 수여되었다. #
[1] 얼핏 보면 오셰이(O'Shea)와 굉장히 유사하다.[2] 정작 쇼 본인은 "내가 아일랜드인이기 때문에 한국인이 겪고 있는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는 논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3]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와 이름이 같아서 안동시에 살았던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4] 사이토 후미는 일본인임에도 조지 쇼의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해주었다. 일제 당국은 이륭양행을 와해시키기 위해 사이토 후미를 매수하려고 했지만, 사이토 후미는 일제 당국의 탄압에 오히려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이 때문에 사이토 후미 본인도 남편과 마찬가지로 일제 당국의 철저한 감시를 받았다.[5] 前 부평군수 전협이 조직한 대동단이 중국 안동역까지 의친왕을 수행하고 이후 이륭양행에서 배를 타기로 되어 있었다. 영화 덕혜옹주에서 황실 사람들을 상해로 망명시키려던 작전과도 유사하다. 당시 이륭양행의 사무실이 안동역 부근이었다고.[6] 안타깝게도 조지 쇼가 묻힌 무덤은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파헤쳐져서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