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0-26 23:10:27

제임스 헨리 로버츠 크롬웰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제임스 헨리 로버츠 크롬웰
James Henry Roberts Cromwell
파일:james henry roberts cromwell.png
<colbgcolor=#0047a0> 한국 이름 한인수(韓璘守)
출생 1896년 6월 5일
미국 뉴욕주 뉴욕시 맨해튼
사망 1990년 3월 19일 (향년 93세)
미국 캘리포니아주 밀 밸리
직업 외교관, 정치가
상훈 건국포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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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당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미국 외교관 겸 정치가. 2015년에 대한민국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제임스 헨리 로버츠 크롬웰은 1896년 6월 4일 미국 뉴욕주 뉴욕시 맨해튼에서 태어났다. 그의 누나인 루이지 크롬웰 브룩스는 더글라스 맥아더의 첫 번째 아내로 알려져 있다. 만16세가 되던 1912년에 그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내게 되었다.

1922년에 크롬웰은 한 대기업의 후계녀와 결혼하였고[1]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같은 해 그는 미국 국무부에서 초급외교행정공보비서관으로 임명되어 2년간 근무하게 되었다. 1928년에 그는 첫 번째 아내와 이혼을 하게 되었고 1935년에 담배 대기업 CEO의 딸이었던 22살의 도리스 듀크와 결혼하였다. 이후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 그의 뉴딜 정책을 강력하게 지지하였고 이 시절 그의 경제정책을 홍보하고 설파하는 책들을 출판하였다.[2] 1933년에서 1935년까지 2년간 출판한 책만 40권에 달할 정도이다.[3] 그 중에서도 그가 1933년에 뉴딜정책을 옹호하기 위해 낸 ‘젊은 미국의 목소리'는 루스벨트 대통령도 읽었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1940년에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주캐나다 미국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었고[4] 민주당 국제정치외교행정위원으로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서 4달 반만에 공사 직에서 사퇴했고 뉴저지 제1부 상원의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고 말았다.

1942년에 크롬웰은 워싱턴에서 개최된 한인자유대화에 연사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과 무장지원을 촉구하였다. 같은 해 5월 한미협회 회장으로 미국 국무장관에게 임시정부 승인청원서와 독립운동 지원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같은 해 6월 30일에는 헐 국무장관을 면담하고 임시정부의 승인과 한국인 독립운동 지원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1943년 3월 임시정부 승인을 촉구하는 서한을 뉴욕포스트지에 게재하고, 같은 해 4월 미국 MBS방송국에서 임정 승인을 호소하는 연설을 하였다.[5]

그 후 1946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을 방한하여 외교관으로서 서울에서 2년간 주재하게 되었다. 이 시절 그는 한국독립당의 국제외교행정특보위원을 도맡기도 하였다. 1948년에 미국으로 귀국한 그는 미국 펜실베니아 주 필라델피아에서 거주하다 1990년 3월 19일 9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1] Pony Duke. Too Rich.The Family Secrets of Doris Duke. HarpersCollins, 1996. p. 83ff.[2] Fowler, Glenn (March 23, 1990). "James H. R. Cromwell Dies at 93. Married 'Richest Girl in World'". The New York Times.[3] http://www.worldcat.org/identities/lccn-n96049284/[4] Embassy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Ottawa. 2005-06-29.[5] 제임스 헨리 로버츠 크롬웰-독립유공자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