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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렬

1. 제천시 출신 독립운동가, 서상렬2. 신안군 출신 독립운동가, 서상렬3. 의병장, 서상렬4. 김화군 출신 독립운동가, 서상렬

1. 제천시 출신 독립운동가, 서상렬

파일:서상렬.jpg
<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이명 서상열(徐相說)
자 / 호 경은(敬殷) / 경암(敬庵)
본관 대구 서씨[1]
출생 1856년 2월 10일[2]
충청도 제천현
(현 충청북도 제천시)
사망 1896년 6월 13일
강원도 낭천군
(현 강원도 화천군)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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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렬은 1856년 2월 10일 충청도 제천현(현 충청북도 제천시)에서 아버지 서진순(徐進淳)과 어머니 진주 강씨 강영환(姜永煥)의 딸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본래 선조의 서장녀인 정신옹주(貞愼翁主)와 혼인하여 달성위(達城尉)에 봉해진 도위공(都尉公) 서경주(徐景霌)의 9대손으로, 8대조 서진리(徐晉履)가 종6품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7대조 서문택(徐文澤)이 진사시에 급제하여 종6품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를 지냈고, 6대조 서종업(徐宗業)이 진사시에 급제하여 종9품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을 지냈고, 증조부 서유진(徐有鎭)이 진사시에 급제하여 정5품 형조정랑(刑曹正郞)을 지냈으며, 조부 서긍보(徐肯輔) 또한 진사시에 급제하는 등 대대로 진사시에 급제해서 꾸준히 관직에 나아가던 문벌가문에서 태어났다.

출생 이후에는 도위공 서경주의 둘째 형으로 정4품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을 지낸 서경수(徐景需)의 8대손 서제순(徐濟淳)에게 입양되었다. 입양된 집안의 8대조 서광리(徐匡履) 또한 진사시에 급제하여 정6품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으며, 7대조 서문위(徐文緯)는 생원시에 급제하여 정6품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지냈다. 6대조 서종질(徐宗耋)은 관직 없이 정5품 통덕랑(通德郞)의 품계만을 받았으나, 5대조 서명무(徐命茂)가 무과에 급제하여 종3품 풍덕도호부사 및 종2품 겸사복장(兼司僕將) 등을 지내면서부터 무반으로 진출하기 시작해서, 고조부 서혁수(徐赫修) 또한 무과에 급제하여 정2품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고, 증조부 서유화(徐有和) 역시 무과에 급제하여 정2품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에 올랐으며, 조부 서기보(徐器輔)는 음서로 종6품 전옥서주부(典獄署主簿)에 오르는 등 부친과 6대조를 제외한 직계 7대가 모두 벼슬길에 올랐고, 그 중 5대조 이하로는 무반직으로 진출하여 가까운 직계에서는 무반가문을 이뤘다.

그는 14살 되던 1869년 3월 24일 부친을 여읜 뒤 지친(至親)[3]서광범[4]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가 박영효와 친하게 지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는 멀리했다.

한편, 무예에 일가견이 있어 일찍이 무과에 급제한 그는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가 통리아문 참의로 임명되자, 서양 오랑캐가 조정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을 통탄해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런 판에 어찌 사대부가 벼슬할 때라고 하겠는가. 도대체 발을 붙일 땅이 어디인가."

이후 김평묵(金平默)과 유중교(柳重敎)의 문하에서 수학한 그는 1890년 조정으로부터 종9품 숭령전참봉(崇靈殿參奉)을 제수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고, 1892년 조정으로부터 선전관(宣傳官)을 제수받았지만 재차 사양했다. 또 후일 다시 세자의 사부로 초빙을 받았으나 역시 거절했다. 갑신정변으로 서광범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시국을 한탄했으며, 갑오개혁이 발표되자 깊은 충격을 받고 병석에 누웠다. 1895년 군수 김익진(金益鎭)이 의복을 개혁시키고 머리를 깎게 하려 하자 이에 따르지 않았고, 그해 여름 입암(立庵) 주용규(朱庸奎)와 더불어 유인석을 뵙고 춘추를 강론했다.

1895년 8월 19일 을미사변이 벌어졌다. 서상렬은 이 소식을 접하자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선산에 이별을 고하려 했지만 단발령이 발표되어 길이 막히자 되돌아왔다. 이후 동문인 이춘영(李春永)과 안승우(安承禹)가 11월 28일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서상렬은 이필희(李弼熙), 오인영(吳寅泳), 배시석(裴是碩)과 더불어 단양에서 거병하고 제천으로 달려갔다. 동지들은 그를 대장으로 추대하려 했지만 그는 굳이 사양하고 이필희를 대장으로 추대한 뒤 자신은 참모가 되었다.

1895년 12월 8일 단양에서 관군과 접전할 때 아군을 매복시켜뒀다가 좌우에서 협공해 상당한 전과를 거뒀으며, 승세를 타서 충주부로 들어가려 했지만 장졸들이 영남 각지의 의진과 합세할 것을 주장하자, 이에 따라 죽령을 넘어서 풍기 고을에 도착해 이곳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영월에 당도해 안승우. 신지수 의병대와 합세했다. 이후 제천에 이르러 관료 권숙(權潚), 서상기(徐相蘷)를 참수하고 병졸을 모집하고 무기를 수리해 갑옷을 만들고 군사를 훈련시켰다.

유인석이 충주성에 입성한 뒤, 그는 영남 의병을 불러모으자고 건의해 허락을 얻어낸 뒤 원용정(元容正)과 더불어 재를 넘어 각읍 의병을 불러모았다. 이에 여러 인사들이 호응해 예천군에 모여 서상렬을 맹주로 추대했다. 이때 회강(會剛), 회복(會福) 등 7읍이 맹약에 참석했고, 서상렬은 원용정에게 맹약의 글을 짓게 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역적의 당이 되지 말 것.
둘째, 중화의 제도를 변하지 말 것.
셋째, 죽고 사는 것으로써 마음을 바꾸지 말 것.
넷째, 두 마음을 갖고 사사로운 이익을 생각하지 말 것.,
다섯째, 적을 보기만 하고 진격하지 않는 행동을 하지 말 것.

서상렬은 맹약을 체결한 뒤 유인형(柳仁馨) 등 일곱 군수를 베고 상주에 있는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예천으로 회군했다. 그 후 관군이 일본군과 더불어 대공세를 가해 전세가 불리해지자, 그는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고 제천으로 후퇴했다가 유인석의 명령에 따라 단양으로 나아가 방비했다. 며칠 후 제천 의병대가 붕괴되고 안승우, 홍사구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통곡했으며, 이후 풍기로 이동했다가 영춘을 거쳐 정선으로 나아가 유인석과 합세했다.

유인석은 서북의 황해, 평안도 일대에서 의병을 모집하기로 하고 북상했다. 서상렬은 이에 따라 북상하던 중 여러 차례 적군과 교전했다. 그러던 1896년 6월 12일, 그는 낭천(狼川. 현재 강원도 화천군)에서 적군의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이때 처음부터 그의 시중을 들어오던 김선이(金仙伊)가 그를 비호하다가 함께 죽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서상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 신안군 출신 독립운동가, 서상렬

파일:서상렬2.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이천 서씨
출생 1920년 10월 5일
전라남도 무안군 암태면 기동리 오산
(현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기동리 오산마을)[5]#
사망 1977년 11월 1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자택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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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렬은 1920년 10월 5일 전라남도 무안군(현 신안군) 암태면 기동리 오산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1944년에 학도병에 징집되어 중국 전선에 보내졌다가 그해 7월 5일에 일본군 진영을 탈영하여 한국광복군에 입대해 총사령부 기간요원으로 활동하였고, 적정 탐지, 선정 방송, 암호문 해독 등의 임무를 맡았다. 그해 10월에 안휘성에서 한광반(韓光班)을 수료했으며, 이후 임시정부 경위대 대원으로서 임시정부 고위 인사들의 경호를 담당했다.

1945년 1월부터는 광복군 총사령부 경리처에서 근무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했고, 임시정부가 귀국할 때까지 임시정부 내무부 총무과장으로 재직하면서 김구, 김규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을 보필했다. 그 뒤 김구의 경위대원을 맡으며 주석단을 경호하다가 1945년 11월에 귀국했다. 1949년 1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발족되자 제2조사부에서 조사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1977년 11월 1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서상렬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3. 의병장, 서상렬

성명 서상렬(徐相烈)
생몰 ? ~ ?
출생지 미상
사망지 미상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서상렬은 1908년 의병을 일으킨 이석용에게 가담해 전라도 일대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1908년 9월 임실 전투에서 패배한 이석용은 의병대를 해산하고 유랑했다가 1913년 겨울 임실에서 체포되어 1914년 4월 4일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서상렬은 이석용이 의병대를 해산할 즈음에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사망 일자 및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서상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4. 김화군 출신 독립운동가, 서상렬

성명 서상렬(徐相烈)
생몰 1871년 12월 12일 ~ ?
출생지 강원도 김화군 금성면 방충리
사망지 미상
추서 대통령표창

서상렬은 1871년 12월 12일 강원도 김화군 금성면 방충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김화군에서 교회 목사로 활동하다가 1919년 한희수 등이 결성한 대한청년회지부(大韓靑年會支部)에 가담해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역할을 수행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1921년 6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그의 생애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서상렬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1] 전첨공 경수(景需)파. 대구 서씨 24세 상(相) 항렬.[2] 대구서씨세보 2권 전첨공파 병(丙)편에는 1854년 8월 3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3] 굳이 서상렬과 서광범의 촌수를 따지자면 서광범은 서상렬의 19촌 조카뻘 된다.[4] 서상렬과 같은 전첨공파이나, 서상렬과는 달리 전첨공 서경수의 장남 서형리(徐亨履)의 후손이다. 서상렬은 전첨공 4남 서광리(徐匡履)의 후손이다.[5] 이천 서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서태석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