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만여(萬汝) |
호 | 실곡(實谷) |
출생 | 1857년 4월 14일 |
한성부 (현 서울특별시) | |
사망 | 1900년 3월 3일[1] (향년 42세) |
청나라 봉천부 회인현 (현 중국 랴오닝성 번시시 환런만주족자치현)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385호 |
본관 | 덕수 이씨[2] |
상훈 |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만여(萬汝), 호는 실곡(實谷)이다.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2. 생애
1857년 4월 14일 한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아버지 이우권(李佑權, 1818 ~ 1879.7.10.)[3]과 어머니 남양 홍씨[4] 사이에서 2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형 주산(住汕) 이준희(李寯熙, 1845.11.23. ~ 1926.8.24.)[5]가 있었다. 충무공 이순신의 9대손으로, 고조부는 황해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한 이계상(李啓祥, 1707 ~ 1771.5.26.)[6], 증조부는 이한오(李漢五, 1730 ~ 1788.6.18.)[7]와 조부 이형수(李馨秀, 1762 ~ 1819.12.26.)[8]는 모두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다. 아버지 이우권은 경상좌도 병마우후를 역임하였다.일찍이 충청도 단양군 매포에서 살았으며, 이원규(李元珪)의 딸 한산 이씨(? ~ ?.12.28.)와 결혼했다. 1878년 무과에 급제한 뒤 당대의 대학자인 화서 이항로의 제자인 성재 유중교와 중암 김평묵의 문인이 되어 두 사람으로부터 위정척사 정신과 존화양이를 익혔다. 1893년 유중교 사후 유인석을 스승으로 모셨다. 갑오개혁 중 변복령이 내려지자 관직을 버리고 단양으로 내려갔다. 1895년 11월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잇달아 발발하자 제천에서 안승우, 서상렬, 오인영, 배시강, 이춘영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의병대가 원주성에 입성하여 정비할 때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고, 12월 3일 자신의 명의로 <격고팔도열읍>이라는 제목의 격문을 발표하고 8도 전역에 발송하였다. 이후 안동부 안동군으로 진군하다 단양군에서 친위군과 교전해 승리했다. 그러나 내부 문제로 의병대가 흩어지자 단신으로 안동군으로 들어갔다. 1896년 1월 말 유인석을 총대장으로 하는 제천의진이 결성되어 충주성을 공략하자, 그는 즉시 여기에 가담하였다. 3월 31일에는 진동장(鎭東將) 겸 별모장(別募將)으로 선임되어 원주성을 지키고 군사를 모집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잇달아 패한 유인석은 국경을 넘어 중국에서 재기하려 했다. 이필희는 유치경, 송상규 등과 함께 유인석보다 먼저 중국으로 가서 청나라 정부에 군사지원을 요청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만주 통화현 오도구, 회인현(懷仁縣) 팔왕동에 머물면서 중국 정부와 접촉하는 한편, 팔왕동에 공자묘를 건립하고 이곳을 의병대의 근거지로 삼아 재기를 도모하려 했다. 그러나 1900년 3월 3일 황도천 홍도진에서 타고 있던 배가 전복되는 바람에 물 속에 가라앉았다. 유해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199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95년 5월 1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3. 참고 문헌
- 김기승, 천경석, <이순신 후손의 항일독립운동>, 이순신연구논총, 201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