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7-12 20:53:14

고광순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고광순
高光洵[1], 高光 등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파일:고광순.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고광욱(高光旭)
자 / 호 서백(瑞伯) / 녹천(鹿川 또는 鹿泉)
본관 제주 고씨[2]
출생 1848년 2월 7일
전라도 창평현 현내면 유천리
(현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3][4]
사망 1907년 10월 16일[5][6] (향년 59세)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연곡사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567호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고광훈은 그의 남동생이며, 독립유공자 기산도는 그의 사위이다.

2. 생애

1848년(헌종 14) 2월 7일 전라도 창평현 현내면 유천리(현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에서 아버지 고정상(高鼎相, 1819 ~ 1872. 7. 25)[7]과 어머니 광산 김씨(1817 ~ 1879. 8. 19)[8] 사이의 4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딸만 셋 있던 21촌 지간의 족숙(族叔) 고경주(高慶柱, 1826 ~ 1858. 9. 16)에게 입양되었다. 그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고경명의 12대손이자 고경명의 차남 고인후(高因厚, 1561 ~ 1592. 7. 10)의 11대 봉사손(奉祀孫)이었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하는 상소를 한 후 기우만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관군에 의해 해산당한다. 후에 최익현의 의병 세력에 가담하려했으나 최익현의 의병들이 해산당하자 본인이 의병장이 되어 다시금 창의하는데, 조상인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킬 당시의 나이와 같은 60세의 일이었다.

1907년 2월 12일, 고광순은 남원도호부 향리 출신의 의병장 양한규와 연합하여 남원성을 장악하기로 하고, 담양군 창평면 저산(猪山)의 전주 이씨 제각에서 의진을 결성했다. 이때 모인 인원은 40명이었고, 의병장에는 고광순이 추대되었으며, 부장엔 고제량[9], 선봉장에 고광덕, 좌익장 고광훈[10], 우익장 고광채[11], 참모 박기덕(朴基德), 호군에 윤영기(尹永淇), 종사에 신덕균과 조동규(曺東圭)가 임명되었다.

당시 구례의 천재 매천 황현에게 사람을 보내어 글을 하나 써달라 청하나 거절당한다. 그 후 지리산 일대에서 투쟁하다가 구례 연곡사에서 일제에 의해 최후를 맞이한다. 일제는 연곡사 뿐 아니라 근처의 절도 모두 태워버렸다. 매천 황현이 그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눈물을 흘리며 사람들과 무덤을 만들고 후일 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비를 세운다.

[1] 문헌에 따라 高[2] 장흥백파-의열공파(毅烈公派)-진위공파(振威公派) 22세 광(光) 항렬. 본래 의열공파-유계공파(柳溪公派) 후손이었다.[3] 인근의 삼천리·용수리와 함께 제주 고씨 장흥백파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고광문·고광채·고광훈·고제량·고홍석고영한 전 대법관도 이 마을 출신이다.[4] #[5] 음력 9월 10일.[6]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9월 14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7] 족보명 고정주(高鼎柱).[8] 김경섭(金京燮)의 딸이다.[9] 20촌 지간의 족조(族祖)이다.[10] 생가 쪽 친동생이다. 입양된 뒤로는 22촌 지간으로 멀어졌다.[11] 18촌 지간의 족제(族弟)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