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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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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2년 7월 17일
함경북도 온성군 영충면 북창평동#
사망 1941년 11월 25일 (향년 59세)
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투먼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본관 진산 최씨#
성명 최진동(崔振東, 崔鎭東)
본명 최명록(崔明祿)
아명 최희(崔熹)
이명 최명록(崔明錄)·최희(崔喜)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2. 생애3. 변절 논란4. 여담5. 관련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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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1884년 7월 17일 함경북도 온성군 영충면 북창평동에서 북간도 연변의 '도태(道台)' 직책을 맡고 있던 아버지 최우삼(崔友三)과 어머니 이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설에 따르면, 최우삼은 청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 간도 지역이 조선의 영토임을 선포하고 연변 일대에서 청군과 무력 충돌했다가 패배해 국내로 도주했다고 한다. 이후 1904년경 가족과 함께 연변으로 이주한 최진동은 1908년 동생 최운산, 최치흥과 함께 동삼성의 중국군 보위단에 군관으로 입대했으며, 뒤이어 어느 만주족 대부호의 양자로 들어갔다.

1919년 무렵, 최진동은 양부로부터 9천만 평에 달하는 토지를 물려받았다고 한다. 그는 이 재산을 바탕으로 간도 왕청현 봉오동 일대를 사들였다. 그는 이곳에 한인 마을을 세우고 황무지를 개간했으며, 학교를 설립해 청년들에게 역사와 지리, 군사교육을 실시했다. 한편으로는 이동휘 등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했고, 1919년 늦가을에 의친왕과 서신을 교류하며 독립운동 전략에 대해 논의했다.

이윽고 두 아우들과 함께 무력 항쟁을 벌이기로 결의한 최진동은 600명의 동지를 모아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를 조직하고 본부를 왕청현에 두었다. 사령관에 이봉남(李鳳南), 부사령관에 이원(李園), 참모장에 김호석(金浩錫)을 각각 추대하고, 자신은 부장에 취임했다. 이후 무기를 구입해 군인들을 장총으로 무장시키고 4개 중대로 나누었다. 그 후 1920년경, 그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안무의 국민회군과 연합해 약 1천여 명의 연합부대를 편성하고 대한군북로독군부를 결성했다.

1920년 6월 4일,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1개 소대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1개 소대가 각각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의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지대를 기습 공격하여 타격을 준 뒤 퇴각했다. 이에 일본군 남양수비대는 1개 중대를 출동시켜 이들을 추격했다. 이에 일본군 남양수비대가 추격해오자, 최진동과 홍범도의 연합군은 6월 6일 삼둔자(三屯子) 부근에서 이들을 기습했다가 철수했다.

이후 일본 제19사단 소속 야스카와 지로(安川二郞) 소좌가 이끄는 일본군 보병 및 기관총대 1개 대대가 추격해오자, 독립군은 6월 7일 안산 촌락에서 기습 공격을 가한 뒤 후퇴했다. 대오를 정비한 야스카와의 대대가 야마자키 중대를 파견해 독립군을 추격하자, 독립군은 고려령(高麗嶺) 부근에서 한 차례 기습한 뒤 봉오동 골짜기까지 철수했다.

한편 최진동과 홍범도, 안무 등은 봉오동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다가 일본군이 봉오동 골짜기로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를 접하자 이에 대비하기 위해 지휘체계를 재편성했다. 그는 사령관을 맡았고 홍범도는 연대장을 맡았으며, 안무는 사령부 부관이 되었다. 또한 독립군을 연대본부와 7개 중대로 재편성하고, 제1중대는 상촌 서북방에, 제2중대는 봉오동 동부 산악고지에, 제3중대는 북부 산악고지에, 제4중대는 서산 남부 나무 숲속에 매복하고, 연대장 홍범도는 별도로 편성된 2개 중대를 서북북단에 매복해 있다가 이들 2개 중대 병력을 이끌고 일본군 선발대 시야에서 보이도록 천천히 움직이면서, 일본군의 선봉이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하도록 계획을 짰다.

또한 유인책을 잘 썼던 소대장 또는 분대장 이화일에게 다시 약간의 병력을 주어 고려령 북쪽 1200m 고지와 그 북쪽 마을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일본군이 나타나면 교전하는 척하면서 일본군을 각 중대들의 포위망 안으로 유인하게 했다. 이어 일본군 선발대와 주력부대가 모두 봉오동 골짜기 안에 들어와 독립군이 잠복한 포위망 안에 들어오면 사방에서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도록 했다. 이윽고 6월 7일 오후 1시 일본군이 홍범도 부대를 추격하다가 봉오동 골짜기로 진입하자, 독립군은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여 3~4시간 동안 전투를 치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보고서에 따르면, 이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에게 전사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 100여 명의 피해를 주고 승리했다고 한다. 반면 독립군의 피해는 전사 4명, 중상 2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 측 기록에는 전사자 1명, 부상자는 2~10명이었다고 한다. 사실 6월 22일에 임시정부가 발간한 <독립신문>에는 "적 사상병 12명, 아군의 손해는 미상하나 시체 24구, 그 외에도 상당한 사상자가 있는 것 같다" 고 기재한 것을 보면,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세력의 사기 진작을 위해 일본군의 사상자 수를 과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일본군이 독립군 섬멸이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만은 분명하다.

이후 일제가 간도 참변을 자행하자, 최진동이 이끄는 군무도독부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에서 연해주로 이동했다.

이때 소련이 독립군에게 무장을 해제하고 자신들이 식량과 군복, 무장을 책임져 줄 테니 자유시로 이동하라고 권유했다. 서일, 김좌진, 이범석, 김홍일 등은 이에 반발하여 만주로 돌아갔지만, 최진동, 안무, 홍범도 등은 이를 받아들여 자유시로 집결했다. 그러나 그는 곧 자유시 참변을 목도해야 했고, 많은 독립군 장병들이 사살되거나 포로로 전락했다.

최진동은 자유시 참변 후에도 무장 항쟁을 지속했다. 그는 1921년 9월에 흑하 일대에 근거지를 두고 무장대원을 지휘해 왕청현 라자구 방면에 있던 일제 관공서를 공격했다. 또한 1922년 6월에 러시아 옴스크 지방에 군관학교를 설립해 생도들에게 민족의식을 가르쳤으며, 1923년 초 북만주 일대의 군소 독립군 단체들을 통합해 '의병대'라는 항일무장조직을 결성하여 군무장으로 취임하고,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했다. 1924년 1월 10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그런 그의 활동에 대해 "북간도와 아령 방면의 독립당수 등 부 3,4천명을 거니리고 대활약하였다."고 소개했다.

1924년 1월, 최진동은 북만주의 한인들을 모아 이상촌 건설을 시도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의열단의 김지섭이 천황 암살 시도를 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에는 자신도 결사대를 조직하기로 결심하고 휘하 독립군 장병들을 대상으로 의열단체를 조직하고 상하이의 의열단과 연락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4년 9월, 최진동은 만주에서 중국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1926년 8월 석방되었다.

최진동은 이후 1927년경 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투먼에 거주하면서 '생육사', '조선족 원로회'를 조직해 만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권익을 증진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만주사변 이후엔 친일로 의심되는 행적을 보였고(자세한 내용은 후술), 1941년 11월 25일에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현지에 매장되었다가 2005년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최진동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3. 변절 논란

2003년 10월, 연변 조선족 자치주 대표회의 상무위원이자 소설가이며 연변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류연산은 정치 월간지 <말>에 "항일에서 친일로 변절한 인물: 봉오동 전투의 최진동은 독립투사가 아닌 친일파"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그리고 1년 후인 2004년에는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는 제목의 책을 출간해 최진동을 친일파로 소개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최진동은 만주사변 이후 일제에 투항했을 뿐만 아니라 비행기 한 대 살 만큼의 엄청난 돈을 일제에 기부했고, 1938년 일본군 토벌대의 선두가 되어 항일무장세력 진압에 앞장섰으며, 일제가 내세운 만주국의 건국이념을 받들고 독립운동을 했던 과거사를 용서받기 위해 일제에게 충성을 바친 인물이라고 한다. 일제는 그런 그의 '충정'을 높이 평가하고 그가 죽자 장례를 성대하게 치러줬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 측 자료와 최진동과 관련된 인사들의 증언을 종합해 볼 때 이 주장은 의문의 여지가 많다. 먼저 최진동이 비행기 한 대 살만큼의 돈을 기부했음을 입증할 기록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그가 거주하고 있던 도문 일대에 일제의 군용 비행장이 건설된 것은 사실이다. 2006년 흑룡강 출판사에서 펴낸 <최진동 장군>에 따르면, 최진동은 자신이 보유한 땅에 군용 비행장 확충용으로 강탈해가려 하자 극렬히 저항했다가 헌병대로 끌려가 극심한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아내 최순희가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고 판단하고 남편이 계약서에 지장을 찍도록 강권했고, 결국 최진동의 도문 일대 땅은 일본군 군용 비행장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다음으로 일본군 토벌대의 선두가 되어 항일무장세력 진압에 앞장섰다는 것 역시 확실하지 않다. 1949년 8월 16일 반민특위로부터 조사를 받던 이기권[1]이 진술한 바에 따르면, 최진동이 귀순한 건 사실이지만 일제의 요구대로 순순히 선무공작을 하지 않았으며, 일본 헌병대장이 만들어준 귀순 권유문을 살포하지 않고 포장 대용 용지로 썼다고 한다. 또한 최진동은 연길현 대흥구에 있는 3만 정보에 달하는 자신의 토지에 벌목 허가를 받아내고자 일제와 교섭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일제에 귀순한 독립군들의 생활안정책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직접 독립군에 대한 공작을 시행하진 않았다고 한다.

아나키스트로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8년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 후 만주로 망명했던 이정규는 1949년 8월 18일 반민특위로부터 증인으로 소환되어 심문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만주로 갔을 때 최진동 자택 사무실에 '관동군 위촉 선무공작부'라는 간판이 내걸린 걸 봤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그는 최진동이 그 사무실을 일본 헌병이나 관헌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썼을 뿐이라며, 선무공작을 하고 있다는 표시로 간판을 걸어놓았을 뿐 실제로 선무공작을 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당시 최진동은 고문 후유증으로 와병 중이었기 때문에 대외 활동을 적극적으로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흑룡강 출판사에서 펴낸 <최진동 장군>에 따르면, "일제가 최진동의 '충정'을 갸륵하게 여겨 장례를 성대하게 치러줬다."는 류연산 작가의 주장 역시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이 책에 따르면, 일제는 최진동이 사망한 후 감시를 강화해 가까운 친척 외에 부고 사실을 전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고, 장례를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치르게 했으며, 시신을 선산에 묻지 못하게 하고 봉오동 입구의 작은 언덕 밭에 묻도록 명령했다. 심지어 일제 헌병대는 시신을 넣은 관을 양철로 덮어 씌워서 최진동의 혼백이 다시 살아나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이에 분개한 최진동의 둘째 아들 최국량은 헌병들이 돌아간 뒤 관을 다시 꺼내어 양철을 벗겨내고 관을 다시 땅에 묻었다고 한다.

이렇듯 최진동의 1930년대 이후의 행적은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그가 실제로 친일 행각을 벌였는지는 기록이 부족하고 진지한 연구가 이뤄지지 않아서 불확실하다. 일단 민족문제연구소에서 2009년에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는 그의 이름이 기재되지 않았지만, 차후에 연구가 진행되면서 그의 친일 행각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면 기재될 가능성이 있으며, 그에게 추서된 건국훈장 역시 박탈 논란이 일 것이다. 이에 대해 최진동의 유족은 “(친일 의혹은) 몇몇 학자들이 감정에 기반해 작성한 그릇된 자료가 바탕이 됐다”면서 “특히 일제의 비행기 제조를 돕고자 헌금을 했다는 일부의 주장은 터무니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4. 여담

2018년 8월, 한국외대 사학과 반병률 교수는 7월 러시아 모스크바 근교의 사진, 영상물보관소에서 1922년 1월 21일 모스크바 크렘린 소극장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 개회식 영상을 입수했다고 밝혔다. 이 영상에서 홍범도와 함께 찍힌 인물에 대해 러시아 적군 장교라는 추측이 많았지만, 2019년 12월 유족의 증언으로 최진동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영상에는 그 외에도 동생 최운산 역시 찍혀 있다고 한다. #

다만 이 영상 속 여운형 오른편에 앉아있는 인물이 최운산이라고 단정지을만한 근거가 전혀 없다. 아마 최운산의 아들 사진과 얼굴이 유사해서 그렇게 주장했을 듯 싶은데 이건 충분한 근거로 활용되지 못한다. 게다가 최운산은 형 최진동과는 달리 당시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파견된 조선대표단 중 한 명도 아니었다.

5. 관련 논문



[1] 의친왕의 사돈이자 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