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4 05:07:43

조지 애쉬모어 피치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조지 애쉬모어 피치
George Ashmore Fitch
파일:조지 애쉬모어 피치.jpg
<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한국 이름 비오성(費吾生)
출생 1883년 1월 23일
청나라 장쑤성 쑤저우시
사망 1979년 1월 20일 (향년 96세)
미국 캘리포니아주 클레몬트
국적
[[미국|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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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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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가족 아버지 조지 필드 피치
어머니 메리 멕레란 피치
배우자 앨버타 피치(1910년 결혼~1919년 사별)
배우자 제랄딘 타운젠드 피치(1924년 결혼~1976년 사별)
슬하 4남 2녀
종교 개신교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2.1. 미국의 선교사2.2. 한국 독립운동 지원2.3. 이후의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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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장로회 선교사. 1968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2.1. 미국의 선교사

조지 애쉬모어 피치는 1883년 1월 23일 중국 쑤저우시에서 미국의 장로회 선교사였던 부친 조지 필드 피치와 모친 메리 멕레란 피치 사이의 2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00년 미국으로 건너가 교육을 받았고, 1906년 우스터대학을 졸업한 뒤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 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에 진학해 1909년 졸업 후 장로교회 목사가 되었다. 그해 12월 25일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1945년까지 중국 각지에서 YMCA 총간사를 역임했다.

애쉬모어는 1910년 미국에서 대학생활 중 사귀었던 앨버타와 결혼하기 위해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해 영국으로 가 영국 브리스톨에서 결혼했다. 이후 모스크바를 거쳐 상하이로 돌아왔는데, 앨버타는 2남 2녀를 낳았으나 1919년 2월 장티푸스에 걸려 요절했다. 이후 애쉬모어는 감리회 선교사로 상하이에 온 제랄딘 타운젠드와 1924년 미국 미시간주 앨비언에서 결혼했고, 2남을 낳았다.

결혼 후 상하이에 돌아온 애쉬모어는 상하이 YMCA에서 중국국민당인사들과 함께 성경공부 모임을 지속하고, 상하이 로타리클럽의 창립멤버가 되는 등 중국인 사회에서 주로 활동을 벌였다. 그가 자주 교유했던 인사들은 쑨원, 장제스, 장췬 등 중국 국민당 인사들이었다. 특히 부인 제랄딘은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2.2. 한국 독립운동 지원

부친 조지 필드 피치는 일찍이 상하이에서 활동하면서 한국의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고 한인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애쉬모어는 이 영향으로 한국의 여러 인사들과 친분을 맺을 수 있었다. 1923년 부친이 사망한 후에는 중국 내 YMCA 활동에 전념했지만, 1932년 윤봉길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김구의 피신을 도와주게 된다. 윤봉길의 의거 직후 김구 일행은 프랑스 조계에 위치한 애쉬모어의 자택으로 찾아왔다. 이에 애쉬모어는 한달 동안 그들을 보호했고, 일본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이들을 중국인으로 변장시켜 상하이 탈출을 도와주었다.

또한 그는 안창호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된 과정에 대해 문제삼으며 석방운동을 전개했다. 다음은 애쉬모어가 프랑스계 언론사에 보낸 서한이다.
안창호는 잘 알려진 대로 한국에서 높은 존경을 받는 인물로 불법 체포되어 일본 당국에 인계된 지 10일이 지났습니다. 심지어 일본은 그가 홍커우 공원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 사건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체포했습니다. 일본은 안창호에 대한 체포영장이 없었지만, 다른 사람의 영장으로 그를 체포하고 나중에 체포영장을 수정했습니다. (중략) 안창호는 일본 당국의 손에 무한정 잡혀 있어야 하나요? 그는 주어진 권리에 따라 합법적, 공개 재판을 해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한국인에 대한 검색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일본은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한국인 체포와 검색에 대한 위임장이 있습니까? 프랑스의 정치적 난민에 대한 태도를 보면 프랑스는 전통적인 시대(민주공화정 이전)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그는 프랑스 조계의 경찰서장이었던 에티엔 피오리(Etienne Fiori)에게도 서한을 보냈다. 피오리에게 보낸 서한 역시 위의 자료와 같은 논조로 인성학교 교장 출신인 상하이교민단의 이유필(李裕弼)에 대한 압박을 중지하고, 일본 경찰의 불법 행위에 대해 프랑스 조계가 도움을 주지 않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1936년 9월 상하이를 떠난 애쉬모어는 난징 YMCA 총간사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난징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37년 7월 7일 일본군은 노구교 사건을 일으켜 중일전쟁을 본격화하고 12월 13일 국민정부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했다.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난징 대학살을 자행했다. 이에 애쉬모어는 난징에 있던 독일 지벤스사 난징지사장 존 라베, 난징대학교의 미국인 교수 마이너 베이츠, 찰스 릭, 선교사 존 매기 등과 함께 일본군의 학살극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안전지대를 설정하고, 이를 운영할 국제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는 국제위원회에서 활동하는 동안 난징에서 벌어진 참극을 전 세계에 널리 알려 일본군의 만행을 폭로하며 일제와 정면으로 맞서 행동하기 시작했다.[1]

1941년 미국으로 간 부인 제랄딘은 이승만이 결성한 한미협회의 후견인을 맡았다. 그녀는 한미협회에서 한국 독립의 당위성에 대한 연설을 수행했고, <뉴욕타임스>에 한국 상황에 대한 기고를 통해 미국 사회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또한 그녀는 쑹메이링에게 서신을 보내 국민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해줄 것을 촉구했다.
난 당신이 내 남편과 그의 아버지가 한국 사람들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승만과 김구처럼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망명자뿐만 아니라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수십 년 동안 쉬지 않고 헌신하고 자기 희생하는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다. (중략) 지금 총통이 이끄는 중국 사람들이 중경에서 한국 임시정부에 기꺼이 피난처를 제공한 데에 대해서 우리의 국무부(미 국무부)는 이승만의 활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국무부는 극동에서 중국의 리더십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서방 국가들도 점차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중략) 나는 워싱턴에서 제안된 한미협회 회의에 참석할 것입니다. 또한 루즈벨트 부인과의 회동 약속을 확보해서 한국 독립의 문제를 언급하여 그녀가 임정과 한국독립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할 것입니다.

부인 제랄린이 이렇듯 미국에서 임시정부의 승인을 위해 분전하는 사이, 애쉬모어는 중국에서 활동했다. 그는 국민정부를 따라 충칭으로 이동했고, 1944년 란저우로 이동해 YMCA 총간사로 활동했다. 그는 이동하는 동안 버마 랭군과 충칭을 연결하는 버마로드(Burma Road)를 오가는 미군의 수송작전에 참가했으며, 중국에서 벌어지는 미군 작전에 고문자격으로 참가해 중국어 통역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44년 6월 애쉬모어는 미국무부에 임정의 인적구성과 이들이 종전 이후 한국에서 어떠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지에 대해 총 12개항목으로 정리해 보고했다. 애쉬모어의 보고는 1919년 임정 수립과 이후 모든 활동에 대한 내용을 포괄하고 있으며, 중국 국민당 정부에서 파악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시각까지 담겨있다. 또한 광복군의 활동에 주목하여 이들을 활용하여 대일전에 나서면 미국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게다가 임정 내부인사들의 정치적 성향까지 파악하여 보고하고 있다. 이러한 애쉬모어의 보고는 광복군 제2지대와의 OSS 합동작전과 미국의 전후 대한정책 수립과정 및 그 내용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2.3. 이후의 행적

1945년 8월 태평양 전쟁이 종결된 뒤, 애쉬모어는 YMCA 총간사에서 은퇴했다. 하지만 곧이어 전후 복구를 위해 조직된 연합국구제부흥기관(UNRRA)의 중국 담당관으로 활동했다. 이후 애쉬모어는 다시 한 번 은퇴를 하고자 했으나 1947년 7월 한국 YMCA 총간사로 임명되어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1947년 7월 7일 한국에 내방한 애쉬모어 부부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앞서 대한적십자사의 정식 발족 준비와 한국 YMCA조직에 나섰다. 애쉬모어 부부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한국 각지에 YMCA조직과 함께 상하이에서 해왔던 것처럼 구호에도 앞장섰다.

이후 1949년 8월 8일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간 애쉬모어 부부는 이후에도 한국과의 관계를 지속하며 구호 및 원조활동에 종사했다. 이러한 활동에 힘입어 애쉬모어는 1952년 1월 8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문화공로훈장을 수여받았고, 1968년 3월 1일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애쉬모어와 제랄딘은 1963년 모든 활동에서 은퇴하여 타이완을 떠나 캘리포니아주 클레몬트(Claremont)로 돌아갔다. 은퇴 이후 클레몬트 자택에서 여생을 보내다 제랄딘은 1976년 9월에 84세로, 애쉬모어는 1979년 1월 20일 96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운명했다. 이들은 뉴욕 주 에섹스 카운티(Essex County)에 있는 밸리 뷰 묘역(Valley View Cemetery)에 합장되었다.


[1] 애쉬모어는 난징 대학살 당시 일본군의 만행에 대해 자신의 일기에 상세히 기록했으며, 훗날 아이리스 장이 자신의 베스트셀러 <난징의 강간>을 집필할 때 이 애쉬모어의 일기 내용을 자세히 참고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