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이름 | 고운기(高雲驥) |
출생 | 1890년 12월 29일 |
오스트레일리아 애들레이드 | |
사망 | 1980년 1월 17일 |
오스트레일리아 캔버라 | |
약력 | 중국의료원조 미국 사무국 부회장 |
서훈 | 건국훈장 독립장 |
1. 개요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치인. 195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윌리엄은 1890년 12월 29일 오스트레일리아 애들레이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애들레이드의 부농이었고, 윌리엄이 4살일 때 머레이 브리지로 이사했다. 윌리엄은 건축 도급업자로 근무하다가 1914년 모빌롱 지역구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15년 주 선거에서 통합노동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머레이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당시 24살로 최연소 의원이었다.그러나 1917년 노동당이 분열하자 노동당을 탈당하고 국민당에 입당했고, 1918년 선거에서 국민당이 보수자유연합당과 연합해 후보를 선출할 때 제외된 것에 반발해 국민당을 탈당하고 선거에 도전했지만 낙선했다. 이후 10년간 정계를 떠났던 그는 1929년에 노동당에 재입당했고, 1934년 머레이 밸리 스탠더드 신문사를 설립했으며, 1947년부터 신문에 자신의 정기 칼럼을 기재했다.
1942년 미국을 방문한 윌리엄은 그해 3월 1일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국독립선언기념 축하회'에 참석해 연설자로 나섰다. 그는 이 자리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 격려하는 연설을 발표했다.
나는 지금 일본·이태리·독일이 무너지고 침략당한 국민이 자유를 되찾을 날이 오늘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말하는 자유는 모든 나라에 대한 자유입니다 (중략) 세계는 한국에 대해서 불의를 저질렀습니다. 우리가 20세기의 국제문제를 연구하면 한국을 지적할 수 있으며, 세계는 한국에 큰 죄를 저질렀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한미협회 전국위원회 위원이 된 그는 뉴욕에서 '한국의 날' 행사를 기획하여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의 중재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로부터 300달러의 선전비를 지원받고 5월 27일 행사를 개최했다. 또한 7월 19일 로스엔젤레스 재미한족연합회 집행부가 주최한 한영회에 참석해 대미 선전의 필요를 역설했으며, 8월 9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쑨원 동상 헌화식 이후에 열린 환영회에도 참여해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내용의 연설을 발표했다.
나는 이번 도처에 한인 친구를 만난 것을 기뻐합니다. 한국은 28개 동맹국의 하나인 즉 한인이 원하는 독립 목적은 우리의 목적과 동일하고 위는 동일한 목적을 달성하려는 입장에서 동일 전선에 나서는 것이올시다. 만일 누구나 이 동일한 목적에 합동하지 않고 반대하는 자는 반역자로 볼 수 있습니다.
8.15 광복 후인 1948년 2월 21일 한국을 한국을 방문한 윌리엄은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고 지원해준 귀한 손님으로서 국빈의 예우를 받았다. 이때 그는 고운기(高雲驥)라는 한국식 이름을 사용했다. 또한 1950년 3월 1일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캔버라로 이주한 그는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80년 1월 17일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