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이름 | 김미하일 |
출생 | 1896년 |
[[러시아 제국| ]][[틀:국기| ]][[틀:국기| ]] 블라디보스토크 연해주 지신허 마을 | |
사망 | 1938년 5월 25일 (향년 41~42세) |
[[틀:깃발| | ]][[틀:깃발| ]][[소련| ]]|
사인 | 총살형[1] |
국적 | [[소련|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항일운동가, 교사 |
학력 | 블라디보스토크 사범대학(졸업) |
정당 | 한인사회당 |
서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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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항일운동가, 일제강점기 한인사회당 부회장, 노보에쿠스코예의 구역당서기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자.2. 일생
1896년경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지신허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 집안의 자제로 태어났으며 러시아 연해주 아지미에 있는 2년제 학교를 마치고 라즈돌리노예의 교사 양성 과정과 블라디보스토크 사범대학을 졸업한 후 교사로 일했다. 1914년 러시아 제국군에 징집된 그는 러시아 이르쿠츠크에 있는 군사 학교를 마치고 소위로 독일 전선에 파견되었는데 군에서 볼셰비키들과 교류하였으며 제국주의 전쟁을 반대하는 선전 활동을 했다.1917년 러시아 혁명 후 동원 해제되어 연해주로 귀환했고 한인 애국자들이 조직한 빨치산 부대에 입대하여 지휘관이 되었다. 1920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김진,장두정 등과 함께 항일독립을 목적으로 혁명주의의 일세당을 조직하고 러시아 혁명군사령부의 승인을 얻어 조선인혁명군을 편성하였다.
조선인혁명군은 기관총, 소총 및 폭탄 등 무기와 피복을 러시아군으로부터 공급받고 당원 약 2백명, 의용병 지원자 8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20년 2월 23일,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가 중심이 되어 각 독립운동단체 대표자회를 열고 독립선언기념회 거행에 관해 협의하였는데 이때 독립선언기념회의 접대부장(接待部長)에 선임되었다.
1920년 3월 14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 정교사원(正敎寺院)에서 열린 한인사회당 중앙총회에서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1924년 3월경 고려공산당 창립대회 준비위원회(오르그뷰로)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소집되었을 때 준비위원회의 선전부원이 되었다. 이후 연해주 노보에꾸스꼬예 구역 당서기 등을 역임했다.
공산당 회의에서 스탈린과 함께 참석한 김미하일 미하일로비치.(빨간 원으로 표시된 인물)
러시아 내전 후에는 러시아 니콜스크우수리스크시에서 토지국 위원, 소비에트 대표로 정치 활동을 수행했으며 1926년 3월 17일 제5회 고려공산당 야체이카 회의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될 때 고려공산당원 지도원으로 참가하였다. 1926년 4월 14일부터 3일간에 걸쳐 연해도(沿海道) 집행위원회에서 고려부협의회(高麗部協議會)를 개최할 때 연해도집행위원회 고려위원으로 참가하였다.
1931년 제4차 원동 지방 소비에트 대표가 되었고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붉은교수대학에서 수학했다. 1934년 전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17차 대회 대표로 선출되었지만 1938년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총살되었다. 1957년 소비에트 연방 최고재판소 군사위원회 의결에 따라 완전 복권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에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