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4 21:24:12

나병삼

성명 나병삼(羅炳三)
생몰 1893년 ~ 1922년 8월 28일
출생지 평안남도 덕천군 태극면 풍정동
사망지 평양 형무소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나병삼은 1893년경 평안남도 덕천군 태극면 풍정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1년 2월 조맹선 사령장을 중심으로 하는 대한독립광복군(大韓獨立光復軍)의 산하 청년조직인 대한독립청년단연합회(大韓獨立靑年團聯合會)에 가입하여 모험부(冒險部)의 부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이원보(李元輔) 등과 함께 덕천군 일대 부호들의 집에 잠입하여 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한 뒤 660원의 군자금을 평안남도 총무인 김봉규(金琫奎)에게 전달했다.

또한 그는 이원보, 안국정(安國鼎), 최석모(崔錫模) 등과 함께 일제 식민 통치기관을 파괴하기 위해 폭발물을 준비하고 맹산군 선유봉 중턱의 동굴을 근거지로 삼는 한편, 이 곳에 인쇄기를 갖춰놓고 독립운동 관계 문서를 제작하여 배포했다. 이후 1921년 3월 19일, 이운서(李雲瑞)의 집에서 나신택(羅信澤), 예낙원(芮樂園), 김병훈(金秉薰), 이원보 등과 함께 일제 기관의 파괴, 무기 탈취, 친일부호 처단, 군자금 모집 등을 결행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들은 일제의 우편차를 공격하기로 하고 1921년 3월 20일 덕쳔우편국에서 영원 우편국으로 이송하는 우편차를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3월 20일 당일, 그들은 덕천군 풍덕면 신흥리 대현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우편차를 급습해 우편차를 호위 중이던 영원 경찰서 박의창(朴義昌)을 사살하고 공금 5,000원과 권총 1정을 확보했다.

그러나 나병삼은 일제 경찰의 추적으로 1921년 6월에 체포되었고, 1921년 11월 21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에 불복해 공소했지만 1922년 7월 22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고, 1922년 8월 28일 평양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나병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