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차병수(車炳修) |
생몰 | 1873년 10월 12일 ~ 1928년 3월 8일 |
출생지 | 평안남도 용강군 하대덕동 |
사망지 | 평안남도 용강군 |
추서 | 건국훈장 독립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차병수는 1873년 10월 12일 평안남도 용강군 하대덕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개신교에 입교해 신앙 생활을 하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본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을 듣자 김하원(金河苑), 이기범(李基範) 등 기독교인들과 함께 <경고아이천만동포(警告我二千萬同胞)>이란 제목의 격문을 작성해 배포하고 연설회에서 을사조약 폐기 운동을 벌였다.그러던 중 일본 헌병 수십명이 칼을 휘두르며 군중에게 돌입하여 여러 사람을 찔러 거꾸러뜨렸다. 그러자 그는 헌병 앞으로 가서 “우리는 국가의 독립을 위하여 죽으려한다. 죽어도 영광이니 빨리 죽이라”고 말했다. 이에 헌병 한 사람이 그를 칼로 찌르자, 격분한 군중이 기왓장과 돌을 던졌다. 이에 헌병들은 총을 쏘며 군중을 해산시킨 뒤 차병수를 비롯한 주동자들을 헌병사무소로 끌고 갔다. 이후 그는 며칠간 곤욕을 치르다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차병수는 이후에도 5년간 평안북도의 주요 도시를 돌아다니며 일제의 침략상을 연설과 격문으로 폭로하고 구국의식을 고취시켰으며, 청소년을 상대로 자립의식을 심으려 노력했다.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그는 간도에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해 군자금 모집 계획을 추진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3년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한동안 고향에 잠적했다가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고향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일제 경찰의 추적을 피해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만나며 효과적인 독립운동의 진로를 찾던 중 연통제에 가담하기로 했다. 1921년 국내 연락책임을 맡고 국내에 잠입해 논밭을 팔아 평양경찰서 정문 건너편 잡화상회를 빌러 '자전거상회'를 세우고 그곳을 비밀 연락기지로 삼았다. 그 후 임시정부의 각종 기밀문서 전달과 제작 배포를 맡았으며, 군자금이 마련되는 대로 임시정부 및 국내의 독립투사들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연통제 활동이 일제의 탄압으로 어려워지자 미국으로 망명하려 했지만, 그의 정체가 발각되면서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15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평양, 서울형무소를 전전하다가 8년만에 특사로 풀려났지만, 1928년 3월 8일 고문 후유증으로 고향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차병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