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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익

파일:송종익.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명 송종수(宋鍾壽)
우강(友江)[1]
본관 야성 송씨
출생 1886년 2월 27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서상면 계산동
(현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2]
사망 1956년 1월 7일 (향년 69세)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636호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3.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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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종익은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송종익은 1887년 2월 27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서상면 계산동(현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에서 농사꾼이었던 아버지 송인구(宋寅球)와 어머니 윤씨(尹氏) 사이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래로 여동생 송종숙(宋鍾淑)과 첫째 남동생 송억수(宋億壽)를 비롯해 이름을 알 수 없는 두 명의 남동생이 더 있었다.

그는 1896년 부모님을 따라 경상북도 신녕군 신촌면(현 영천시 신녕면)으로 이주하여, 마을에 있던 한문서숙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이듬해인 1897년 가족들과 함께 대구로 다시 돌아와서 영어일본어를 수학했으며, 1902년에는 경상남도 부산부로 가서 4년간 의술을 배웠다. 이 사이 약학을 배우기 위해 상경하기도 했다.

1905년 일본 고베로 간 그는 어을빈(魚乙賓)이라는 제약회사에 채용되어 제약법을 공부하면서 2년간 근무하였다. 이곳에서 미국으로 건너 갈 기회를 잡아보려고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결국 2년간의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혼란한 국내 정세를 틈타 밀입국한 박영효와 접촉하여 그의 연락책으로 활동하면서 1년간 8도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국내 정세를 살폈다. 이때 김종한 등이 설립한 광학사(廣學社)에 입사하여 식자기술을 배우며 인쇄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1907년 1월 고향엔 경상북도 대구군으로 돌아온 그는 대구군 하수서면에 거주하면서 당시 김광제서상돈이 각각 사장, 부사장으로 있던 광문사(廣文社)의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이때 이 회사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1907년 말 그는 동향 사람인 염봉근(廉奉根)과 함께 재차 미국으로 건너갈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방해로 인천항에서 고베를 경유하지는 못하고, 중국 상하이를 경유하여 캐나다 밴쿠버에 상륙하였고 그해 11월 15일 마침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한인 민족운동 단체인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본격적으로 민족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08년에는 전명운장인환에 의해 스티븐스 저격사건이 발생한다. 미국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된 두 사람을 돕기위해 송종익은 재판후원회를 결성하고 재무로 임명된다. 당시 해당 사건은 살인 사건으로 간주되었고, 송종익은 이 사건이 단순 증오에 의한 살인사건이 아닌 애국지사가 벌인 민족운동으로 재판을 전개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1912년, 도산 안창호홍언 등과 함께 흥사단을 창립한다. 송종익은 안창호와 함께 시작 멤버였으며, 8도의 대표를 정하고 25인의 발기인이 모여 창립총회가 열렸을 때에도 참석한다.

한편으로는 안창호와 함께 북미실업주식회사를 세워 중국 지방에서 활동하는 독립군의 군자금을 모으기도 한다. 이외에 여러가지 단체와 협회를 통해 군자금을 모으려 하였으나 아쉽게도 목표치에는 미치지 못했다. 1919년에는 안창호가 임시정부와 관련한 일로 중국으로 가게 되자 흥사단의 실질적인 사무를 맡고 임시정부에 필요한 자금도 모으고 송금했다.

이후에는 미국의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고 미주 한인사회의 대표를 맡는 등 미주 한인들을 위해 노력한다. 1945년에 광복이 오자 귀국하여 국내에 흥사단을 부흥시키고 새롭게 설립된 국가의 재건을 도와주고 미국으로 돌아간다.

1956년 1월 7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서 별세하였다.

사후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본래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안젤루스 로즈데일 공동묘지(Angelus-Rosedale Cemetery)에 안장되었다가, 1996년 10월 23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3. 참고 자료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112~113p


[1] 도산 안창호가 친히 지어준 호라고 한다.[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