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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애시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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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8년 7월 22일 |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 | |
사망 | 미상 |
가족 | 언니 안필녀, 오빠 안세균 배우자 자녀 1명[1] |
서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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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감리회 신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바르셀로나에 입단하여 3년간 뛰었다2.1. 초년기
1920년 11월 일제 경찰의 안경신에 대한 자료에 따르면, 그녀는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 출신이며 나이는 25세였다고 한다. 그러나 1921년에 체포되었을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그녀의 거주지는 평안남도 대동군 김제면이며 나이는 34세였다고 한다. 이렇듯 엇갈리는 기록 중 어느 쪽이 맞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일찍이 감리회 교회에서 신자로 활동했고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를 2년간 수료했다고 한다.2.2. 대한애국부인회 활동
3.1 운동이 전국에서 발발할 때 평양 서문동에서 감리회의 신홍식 등이 주도한 만세 시위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29일간 구류되었다. 이후 1919년 11월 대한애국부인회 결성에 참여해 교통부원을 맡았다. 그녀는 대한애국부인회 본부에서 모집한 군자금을 상하이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가령 강서지회에서 조직한 국민향촌회에서 모집한 군자금을 상하이 임시정부로 이송할 때, 안경신은 그 돈을 가지고 가서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비밀 요원에게 넘겨줬다. 그러다가 1920년 10월 대한애국부인회가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어 임원과 회원들이 대거 체포되었지만, 안경신은 체포를 모면하고 상하이로 망명했다.2.3. 폭탄 의거
상하이로 망명한 안경신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기관인 대한광복군 총영에 가담하여 활동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안경신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한애국부인회 동지들에게 자신의 포부를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고 한다.나는 3․1 운동 때도 참여하였지만 그 때는 큰 효과를 내지 못하였다. 그것은 우리 국민의 단결과 힘이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일제침략자를 놀라게 해서 그들을 섬나라로 철수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곧 무력적인 응징 - 투탄(投彈), 자살(刺殺), 사살(射殺) - 같은 일회적 효과가 크게 주요할 것으로 믿고 있다.
1920년 7월 초,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국의원시찰단이 필리핀, 중국, 일본 등을 시찰 방문할 예정이며 한반도도 그 여정에 포함되어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임시정부는 이를 기회로 삼아 세계 여론에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호소하려 했다. 임시정부는 외교적 노력을 전개하는 한편 국내에 일제의 식민지배 기구들을 공격해 민심을 요동치게 해 대대적인 시위를 촉발시켜 미국과 세계 여론에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임시정부는 광복군 총영에 국내 폭탄 거사 실행 명령을 내렸다.
광복군 총영은 서울, 평양, 신의주 등 세 도시에서 폭탄 거사를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먼저 대원 13명을 선발해서 3개 대로 나누어 밀파했고, 거사용 폭탄으로는 구국모험단이 12개를 제조해서 임득산이 안동의 이륭양행까지 운반한 후 의용단의 각 지단으로 보냈다. 결사대 제1대는 김영철, 김성택, 김최명, 제2대는 장덕진, 박태열, 문일민, 우덕선, 안경신, 제3대는 이학필, 임용일, 김응식 등이었다. 제1대는 서울, 제2대는 평양, 제3대는 선천과 신의주 방면을 맡았다.
안경신이 속한 제2대는 의용단 평양지단의 협조를 받으며 국내로 잠입해 서하면 파출소를 타격한 후 의주, 삭주, 구성군을 지나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자신들을 검문하려는 일본 경찰을 사살하고 8월 1일 평양성 내에 잠입했다. 그들은 의용단원 한준관이 운영하는 포목상점을 연락장소로 삼고 대동군의 박치은의 집에서 몸을 숨겼다. 안경신은 제의 감시를 피해 폭탄을 무사히 가지고 왔다.
이후 의용단이 평양 시내 각처에 〈최급경고문〉을 살포해 관공부서에 일하는 관리들은 퇴직하고 부역배들은 회개하며 국민들은 일제에 맞서 싸울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8월 3일 밤 9시 30분경, 광복단과 의용단 대원들은 3개조로 나누어 거사를 전개했다. 제1조를 맡은 의용단원 김예진과 17세의 숭실중학교 2학년생 김효록이 평남도청에 폭탄을 던졌지만 터지지 않자, 문일민과 우덕선이 다시 폭탄을 던져 폭파시켰다. 그 결과 평남경찰부의 담장이 무너졌고 유리창이 깨졌으며, 일경 2명이 폭사했다.
한편, 제2조를 맡은 장덕진, 박태열, 안경신은 평양경찰서 앞에 도착해서 도화선에 불을 붙였지만 빗물 때문에 불이 붙지 않았다. 제3조를 맡은 의용단원 여행렬과 표영준이 평양부청에 폭탄을 던졌지만 불발했다. 일제는 민심이 요란해질 것을 우려해 언론통제를 가했고, 이 때문에 2주 후인 8월 19일에야 언론을 통해 이 사건이 보도되었다. 이후 박태열과 장덕진은 황해도 해주로 가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폭파하려 했지만 엄중한 경계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서간도로 돌아갔다. 또한 유일하게 피해를 입히는 데 성공한 문일민과 우덕선도 무사히 귀환했다.
당시 임신한 몸이었던[2] 안경신은 대원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어느 참외밭으로 피신해 하룻밤을 지낸 뒤 이튿날 아침 기자림에서 문현철을 만나 폭탄 한 개를 건네받고 거사의 기회를 노렸으나 일제 경찰들의 경비가 심하자 함경남도 이원군 남면 호상리의 최용주의 집에 피신했다.
결사대 제3대는 평북 신의주와 선천방면의 거사를 실행에 옮겼다. 신의주를 맡은 이진무와 정인복은 8월 15일 밤 9시경 신의주역으로 들어가서 인접한 호텔을 겨냥하고 연결계단 쪽으로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계단의 일부만 파괴되고 호텔은 폭파되지 않았다. 선천 방면은 이학필, 김응식, 임용일 등이 담당하였다. 이들은 신성중학교 학생 박치의의 도움을 받아 거사를 단행하였다. 이들은 8월 24일 선천역과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시위를 촉발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일경의 철저한 감시로 인해 거사 일정이 지연되었다. 다시 9월 1일로 거사일로 정했다. 이날 새벽 3시, 박치의는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폭파시켰다. 그는 곧바로 체포되었고 사형판결을 받은 뒤 1921년 9월 30일 평양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2.4. 체포, 그 후
1921년 3월 20일, 안경신은 최용주의 집에서 은신하고 있다가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녀는 3월 25일 평양으로 압송되었고 다음날 12일 전에 출산한 아기를 품에 안고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으로 호송되었다. 안경신은 평양지방법원에서 사형을 구형받았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평남도청 폭탄 사건은 임시정부 특명으로 광복군 사령장의 지휘 하에 결사대장 장덕진이 동지 수명과 더불어 투탄한 것이며, 안경신은 전혀 무관하니 방면하라."는 내용의 투서를 김구, 이탁, 장덕진 등의 명의하에 총독부로 발송하자 형량이 낮춰져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안경신은 “일본은 나의 죄를 입증하지 못하니 나는 무죄다.”라며 1심 판결을 불복하고 평양복심법원에 공소했다. 당시 재판 상황에 대해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방청석에는 남녀노소가 입추의 여지가 없이 모여서서 날카로운 시선은 모두 안경신에게 모였더라. 재판장은 사실 심문을 시작하여 피고는 무슨 불만한 일로 사형선교의 1심판결을 불복하고 공소하였는가 함에 피고는 하지 아니한 일을 하였다니까 불만족이 아니고 무슨 일인인가하고 대답하였다.
하지만 평양복심법원은 안경신에게 징역 10년형을 그대로 선고했다. 이후 1927년에 형기 몇 달을 남겨놓고 가출옥한 그녀는 평양 신양리에 거주하고 있던 오빠 안세균의 집으로 갔다. 그녀는 오빠로부터 어머니는 그녀가 수감된 지 3달이 못되어 돌아가셨고 그녀의 아들은 눈을 뜨지 못하는 장애를 입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또한 그녀의 동지였던 장덕진이 1924년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중국인과 시비가 붙어 중상을 입은 뒤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도 접했다. 그녀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자식은 병신이오니 어느 것이 서럽지 않겠습니까마는 동지 장덕진 씨의 비명을 듣고는 눈물이 앞을 가리어 세상이 모두 원수같이 생각됩니다.
이후 그녀가 어떤 행적을 남겼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으며, 그녀의 후손 또한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2015년 5월 안경신의 언니였던 안필녀의 손자가 자신이 안경신의 방계 후손임을 밝혔다. #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안경신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