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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2년 |
평안남도 맹산군 심심산골 함종리 | |
사망 | 1932년 3월 21일 (향년 40세) |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 |
본관 | 연안 차씨 |
가족 | 아버지 차시헌, 어머니 서시은 오빠 차이석 |
학력 | 이화학당 (졸업) |
서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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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독립유공자 차이석은 그녀의 오빠이다.
2. 생애
1892년경 평안남도 맹산군 심심산골 함종리에서 부친 차시헌(車始軒)과 모친 서시은(徐始恩)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이화학당을 졸업한 뒤 일본으로 유학가서 고베 가사여자전문학교에 입학해 3년간 공부한 뒤 1911년에 대구 신명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1915년까지 재직했다. <신명백년사>에 따르면, 신명여학교 교장 부르엔 여사는 1911년 5월경 차보석과 함께 1주일간 기도를 드리고 목욕재계를 한 뒤 7절로 된 교가를 지었다고 한다. 두 사람이 지은 교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1. 하나님 사랑 크고 넓으사 우리의 소원 이루시는 중
대구 동산신명학교 교실을 굉장하게 지었네.
2. 천국에 기초된 신명학교 믿음과 구원의 반석터 위에
주님의 보혈로 굳게 세웠네 신명학교 만세라
3. 택함을 입은 우리학도들 주님의 사랑 모본하여서
화평과 인내로서 사괴어 신명학교 만세라
4. 우리의 학교 높은 명의로 빛나고 명명하게 전파할 일
실심과 열심히 공부함으로 공부함이니 신명학교 만세라
5. 주 은혜 날개 밑 보호 아래서 천문과 지리 모든 학문을
주님을 위해서 배우세 신명학교 만세라
6. 광할한 천지 죄악 세상에 사망의 길로 가는 동포들
우리 손으로 구원합세다 신명학교 만세라
7.만만세 억만세 신명학교 권능의 주님 재림하실 때
천국 일꾼을 조성하시오 신명학교 만세라
(후렴) 만세만세 신명여학교 세상 빛과 주께 영화니
천지가 진하고 하해 닳도록 신명학교 만세라
대구 동산신명학교 교실을 굉장하게 지었네.
2. 천국에 기초된 신명학교 믿음과 구원의 반석터 위에
주님의 보혈로 굳게 세웠네 신명학교 만세라
3. 택함을 입은 우리학도들 주님의 사랑 모본하여서
화평과 인내로서 사괴어 신명학교 만세라
4. 우리의 학교 높은 명의로 빛나고 명명하게 전파할 일
실심과 열심히 공부함으로 공부함이니 신명학교 만세라
5. 주 은혜 날개 밑 보호 아래서 천문과 지리 모든 학문을
주님을 위해서 배우세 신명학교 만세라
6. 광할한 천지 죄악 세상에 사망의 길로 가는 동포들
우리 손으로 구원합세다 신명학교 만세라
7.만만세 억만세 신명학교 권능의 주님 재림하실 때
천국 일꾼을 조성하시오 신명학교 만세라
(후렴) 만세만세 신명여학교 세상 빛과 주께 영화니
천지가 진하고 하해 닳도록 신명학교 만세라
이 교가는 1914년에 4절로 개작될 대까지 불렀으며, 1920년에 제작된 중등음악 교과서 <창가집>에 수록되었다. 한편, 신명백년사에 따르면 차보석은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 소식을 듣고 교실에 들어와 교단을 치면서 통곡했으며, 이를 본 이복심 외 7~8명의 학생들도 함께 엎드려 통곡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한일병합 1년 후에야 신명여학교 교사로 부임했기 때문에, 이것이 사실인지는 의심스럽다.
1915년 대구 신명여학교를 떠나 평양으로 가서 오빠 차이석과 함께 교육 사업을 펼치다가 1919년 3.1 운동 직후 오빠와 함께 상하이로 망명했다. 두 사람은 상하이에서 흥사단에 가입했고, 차보석은 1921년에 재상해유일학생회(在上海留日學生會)에 가담했다. 그녀는 1922년 미국으로 이주했고, 1925년 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 샌프란시스코지부 단장을 역임했으며, 1926년에서 1928년까지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을 맡았다. 이후 1929년에는 대한여자애국단 서기, 재무 등을 역임했다. 1929년 7월 대한여자애국단 총단 명의로 미주 화교 대일외교후원회에 중국혁명동정금 65달러를 후원하면서 한, 중간 혁명사업을 함께 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한편, 그녀는 1925년부터 1928년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어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재미 한인 자제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노력했고 1931년에는 국어학교 재무 일을 도맡았다. 또한 1931년에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에 입회하여 1932년 삼일절 기념식 준비위원을 역임했다. 그리고 1925년부터 1932년까지 독립운동 자금을 여러차례 지원했다. 그러나 그녀는 1932년 3월 21일 중병을 이기지 못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차보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