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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출생 | 1897년 2월 2일 |
경기도 교동군 서면 동장리 금정동 (現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동산리 금정굴마을) | |
사망 | 1973년 9월 26일 (향년 76세) |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본관 | 안동 권씨[1] |
부모 | 아버지 권태신, 어머니 안동 김씨 |
형제자매 | 남동생 권영호 |
배우자 | 김시현 |
서훈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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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97년 2월 2일 경기도 교동군 서면 동장리 금정동(현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동산리 금정굴마을)에서 아버지 권태신(權泰信)[2]과 어머니 안동 김씨 김의성(金義城)의 딸 사이의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4살 때 개성군 북부면 예빈리(현 황해북도 개성시 만월동)로 이주했고, 호수돈여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1914년 상경하여, 이화학당 보육과는 1918년에 졸업했다. 이후 개성 호수돈여학교 부설 유치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다가 1919년 2월 28일 오화영 목사를 통해 기미독립선언서가 개성에 당도했지만 개성의 기독교계 인사들이 독립선언서 배포를 서로 미루며 북부예배당 지하의 석탄광에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그녀는 직접 북부예배당 지하 석탄광에 가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나왔다.
이후 그녀는 전도부인 어윤희와 의논한 뒤 독립선언서를 여성들이 배포할 것을 결의했다. 독립선언서 배포에는 전도부인 신관빈, 심명철 등도 함께했다. 그들은 개성시의 만월정, 북본정, 동본정 일대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했고, 호수돈여학교 학생들을 설득해 3월 3일 학생 35명과 함께 독립가와 독립만세를 부르며 개성에서 첫 시위를 벌였다. 이에 군중이 사방에서 합세하면서 순식간에 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 일로 체포된 권애라는 1919년 5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8호 감방에 수감되었다. 이 방에는 개성의 시위를 함께 주도한 어윤희, 신관빈, 심명철과 천안 시위를 주도한 이화학당 후배 유관순, 수원 기생시위를 주도한 김향화 등이 같이 있었다. 권애라는 감방에서 김향화에게 '개성난봉가', '평양 수심가' 등의 노래를 배웠고, 이를 바탕으로 감옥에서 고통받는 동료들에게 노래를 불러줘 힘을 불어넣어줬다.
1919년 10월 가석방된 권애라는 수표교예배당, 정동예배당, 중앙기독교청년회 등의 강연 무대에 올랐다. ‘반도의 희망’, ‘잘 살읍시다’ 등의 제목으로 애국사상과 남녀평등을 주장하고 부녀가 해방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강연을 했다. 강연 내용이 배일적이라는 이유로 1920년 7월 9일 종로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강연회라는 공론의 장에서 사회적 발언과 행동을 거침없이 했다. 한번은 조선 여자고학생상조회 주최의 강연회에서 참관 온 경관이 강연을 저지하자, 감옥 생활의 소회를 담아 개사한 개성난봉가를 불렀다고 한다.
1920년 말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일본을 거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권애라는 대한애국부인회와 고려공산청년회에서 활동했다. 이후 쑤저우의 감리회 미션스쿨인 경해여숙에 재학했다. 이후 1921년 10월 ‘고려공산청년회중앙총국’에서 발행한 위임장을 발부받아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조선대표로 참석했다. 당시 그녀는 고려공산당 상해파로 활동하여 국내 신문에 여운형 등 공산당 운동의 일원으로 소개되고, 일본특별고등경찰의 감시대상으로 보고된다. 이때 권애라는 의열단 단원 김시현과 결혼하는데, 이때 레닌이 주례를 섰다.[3]
중국을 거쳐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뒤에는 김시현이 의열단 사건으로 체포되어 5년여 간 옥고를 치를 때, 권애라는 대한민국청년외교단 총무이자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고문이었던 이병철과 살림을 차린 현모양처로 보도되기도 했다.
1929년에는 중국 쑤저우 경해여숙대학(景海女塾大學)에서 수학하면서 상해(上海)를 중심으로 여성지위 향상과 조국광복운동에 활약하였고, 이후 동삼성에서 지하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942년 4월에는 길림성 시가둔 영신농장(永新農場)에서 아들 김봉년(金奉年)과 함께 일제 관동군 특무대에 피체되어 1년 이상 비밀감옥에서 고문을 받은 뒤 장춘고등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15 광복 직후 장춘형무소에서 석방되었다.
출옥 후 조국으로 귀환한 그녀는 서울에서 좌우합작위원회 위원이 된 김시현과 함께 했고, 김시현이 1950년 2대 국회의원으로 출마할 때 선거의 찬조연설을 했다. 김시현이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의 배후라는 혐의를 받고 감옥에 있을 때 옥바라지를 했으며, 김시현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967년 안동에서 야당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하고, 3.1 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의 모임인 '3·1여성동지회'의 결성에 참여했다. 그러나 생활고와 병마로 고생하다가 1973년 9월 26일 서울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권애라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5년에 그녀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