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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6년 5월 7일[1] | ||
중화민국 길림성 액목현 (現 지린성 자오허시) | |||
사망 | 2024년 11월 17일[2] (향년 98세) | ||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 중앙보훈병원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47a0><colcolor=#fff> 본관 | 해주 오씨[3] | |
조부모 | 조부 - 오인수(吳寅秀, 1867 ~ 1935) 조모 - 이남천(李南天)[4] | ||
부모 | 부친 - 오광선(吳光鮮, 1896 ~ 1967) 모친 - 정현숙(鄭賢淑, 1900 ~ 1992) | ||
형제자매 | 언니 - 오희영(吳熙英, 1924 ~ 1969) 남동생 - 오영걸 | ||
자녀 | 슬하 1남 2녀 아들 김흥태 | ||
학력 | 중경 청화중학교 (졸업) 진명여자고등학교 (졸업) | ||
종교 | 무교 | ||
서훈 |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 ||
군사 경력 | |||
복무 |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 ||
1939년 ~ 1941년 (2년) | |||
한국광복군 | |||
1941년 ~ 1945년 (4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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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로 3대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6년 만주에서 태어나 1930~1940년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9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대원, 1941년 한국광복군 제5지대 대원,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동하였으며, 해당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2024년 기준 유일하게 생존한 여성 독립운동가였으나, 순국선열의 날인 11월 17일 오후 향년 98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2. 생애
2.1. 유년기~청소년기
1926년 5월 7일 중국 만주 길림성 액목현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던 오광선과 정현숙(이명 정정산)의 차녀로 태어났다. 본적은 경기도 용인군(현 용인시) 원삼면 죽릉리 어현동 822번지이다.관련자료어렸을 때부터 의병장이었던 할아버지 오인수에게 정신적인 교육을 받으며 자랐으며, 태어난 곳인 액목현도 신흥무관학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1917년 만주로 망명해 1918년 신흥무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이가 아버지 오광선 장군이었다. 또한 어머니 정현숙 여사는 만주 생활 동안 억척같은 황무지를 개간하고 가축을 사육하면서 독립군에게 식량을 조달했다. 어머니가 억척스럽게 모은 살림은 모두 독립운동을 위해 쓰였다. 이처럼 3대에 걸친 독립운동은 태생부터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오희옥의 회상영상에 따르면 중국인 아이들이 언니와 자신을 ‘망국노’, ‘고구려 노예’ 따위로 부르면서 놀렸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가난과 배고픔보다도 서글펐던 것이 나라 잃은 서러움이었다. 그 소리가 듣기 싫었지만 그럴수록 광복에 대한 열망이 커져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어린 시절, 지청천 장군 가족 등 여러 독립운동가들 가족과 한 마을에서 함께 살았다. 오희옥의 가족은 일본군의 감시망을 피해 계속 이동하며 생활했다. 만주에서도 초등학교를 옮겨 다녔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 등 일본의 중국 침략이 거세지면서 백범 김구, 성재 이시영, 청사 조성환 등 임시정부 요인 및 다른 독립군 가족과 함께 만주를 떠나 베이징, 난징, 류저우 등에 머물렀다.[5]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기간 중에 아버지 오광선 장군이 베이징에서 비밀 임무 수행 중 일경에 체포된 후 어렵게 어머니 혼자서 고달프고 힘든 노동으로 삼 남매를 키우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당시 오광선 장군에게 지령을 내린 김구는 홀로 삼 남매를 키우게 된 정현숙 여사와 가족들을 안쓰러워하고 미안해하며 종종 집으로 찾아와 가족들을 챙겨주는 등 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고 한다.
1939년 4월, 13세의 나이로 언니 오희영(1924~1969, 애족장)과 류저우(柳州)에서 한국광복군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에 입대했다. 오희옥은 일본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거나 전단을 배포해 한인 사병들을 포섭해 탈출을 유도하는 초모(招募) 공작 활동, 가두선전 등을 하였다. 그리고 최전방으로부터 전해 들은 일본군의 만행을 중국인들에게 알리기도 하였으며, 한국 청년들과 중국 청년들이 연합하여 반일 사상을 고취하는 연극·무용 등을 해서 돈을 벌었다. 당시 공연에서 오희옥은 러시아 사마귀춤과 탭댄스를 선보였고, ‘푸른 하늘 은하수’ 노래가 나오는 공연에 등장하여 뱃사공 역할을 맡았다. 그렇게 번 돈은 한국과 중국의 청년들이 나눠서 각자 군자금으로 사용하였다. 비록 선전 활동에 그치기는 했지만, 피난처에서 이뤄진 위문 공연 등의 활동은 임시정의 조직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었고, 무엇보다도 한중 양국의 항일 통일전선의 필요성을 환기시킴은 적지 않은 성과였다.
청년공작대 활동은 뒷날 한국광복군으로 연결되었다. 오희옥은 1941년 1월 1일 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되어 임시정부 요인과 최전방에서 독립군으로 복무하는 조선 청년들을 연결하는 비밀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성인에 비해 일본군의 의심을 덜 받는 10대 소녀였던 오 지사는 광복군에게 쪽지나 편지 등 밀서를 직접 전달하거나 일본군을 대상으로 첩보활동을 하는 등 군사정보수집에 힘썼다. 자칫 실패하면 일본군에게 발각되어 목숨을 잃을 수 있기 때문에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두려움과 어려움이 닥친 순간도 많았지만, 본인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강한 신념과 조국 광복에 대한 열망으로 매번 두려움을 떨쳐내고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콧노래를 부르면서 그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고 한다. 이후 1944년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2.2. 학창시절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한 탓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지만, 5학년과 6학년 때는 검정고시에 합격하였으나 돈이 없어 못 다니다 2년 뒤 지인의 도움으로 충칭의 청화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교내에서 수영, 음악, 서예 등 예체능에 두각을 나타내어 어렵지만 재미있는 학창생활을 보냈다.열넷 살 쯤부터 붓글씨를 쓰는데 하루는 김구 선생님이 오셔서 큰 글씨를 쓸 때는 팔을 들고 써야 한다고 훈시를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月湖(호수에 비친 달)란 호를 김구 선생님께서 지어주셨다. 또힌 이시영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 가족에게 우리 글과 역사를 배우는 등 보살핌을 받았다.
중학교 3학년 시절 중국인 학생들과 함께 중·고생 체육대회에서 수영에 출전하여 3등 동상을 수상하였는데, 이 내용이 중국 신문에 게재된 것을 제일 먼저 본 김구가 많은 임정 요인들 앞에서 칭찬을 해 주셨다고 한다. 이렇듯 오희옥의 재능은 임시정부 요인들과 그 가족들에게 나라 잃은 힘겨운 시절에 작은 기쁨과 위안이었다. 중국 충칭에 있는 청화중학교를 다니고 1942~43년경 졸업했다.
2.3. 광복 이후
광복 이후 중국 정부에서 주는 배급을 받으며 신안촌에서 생활했으나, 워낙 궁핍하여 어머니와 함께 병아리를 파는 등 고생을 많이 하였다.만 20세인 1946년 1월 임시정부 각료들과 귀국길에 올랐다. 충칭에서 비행기를 타고 상하이로 간 뒤 기선을 타고 부산항에 도착, 최종적으로 1946년 7월 부산에서 인천으로 귀환했다. 고향 땅을 밟기까지 6개월이 걸렸다. 당시 귀환하자마자 태극기를 보고는 일제의 탄압 속에 태극기를 숨겨야 했던 과거가 떠오르면서, 나라를 되찾았다는 사실에 아주 기뻤다고 한다. 그런 한편으로는 일본의 항복으로 광복군이 계획했던 일들을 실행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직접 나라를 되찾고 싶었던 아쉬움도 들었다고 회상했다.
대학에 입학할 나이지만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1947년 서울 종로구의 진명여고(현재는 양천구 목동)에 4학년으로 편입하였다. 1949년에 진명여고를 졸업했다(36회 졸업).
1950년 한국전쟁으로 서울에서 부친의 고향인 용인 원삼면으로 피난가는 중 북한군에게 검열을 당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수원지역 초등교사 시험에 합격하면서 용인 원삼초등학교에서 교편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청룡분교(현재 폐교)로 발령받아 8년간 근무하였다. 결혼과 함께 서울 서대문구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하여 인왕초, 홍제초, 홍은초, 은평초, 수색초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오희옥은 교직 생활을 하며 학생들과 현충원 참배를 하는 등 학생들에게 독립 정신 및 나라사랑 정신을 열정적으로 전했다. 38년 교직 생활을 끝으로 1991년 8월 31일 고은초등학교에서 정년퇴직했다. 퇴직 때 대한민국 목련장 수여받았다.
2.4. 교사 정년퇴임 이후
정년퇴직 이후에는 독립운동사에 관심이 있는 학자 및 시민들과 교류하고 각종 보훈 행사에 참여하여 많은 이에게 독립운동의 역사와 가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알렸다. 특히 해마다 광복절이면 경축행사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숨겨진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조명하고, 여성들의 권익 신장과 인권 신장을 위해 앞장서는 활동도 많이 하였다.또한 2003년 70대 후반에 서예활동을 시작하면서 경기도 및 전국 서예 대회에서 여러 차례 수상하였다. 병상에 눕기 전에도 ‘올바른 방법으로 남북이 통일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붓글씨로 ‘南北 統一’을 쓰셨다. 그밖에도 하루 30분 이상 EBS 중국어 강좌를 학습하는 등의 열정을 보였다.
투병 전까지는 수원의 보훈복지타운에 거주하였다. 생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고향인 용인으로 돌아가 살고 싶다는 뜻을 밝혔던 오 지사를 위해 용인시와 지역 기업이 힘을 모아 거주지 마련을 위한 공사를 시작(2017.7.)했다. 이제 오희옥 지사는 여생을 고향에서 편히 지낼 수 있게 되었다.
2.5. 투병 생활 중
2017년부터 특히 보훈 행사 참여가 많았고, 2018년 3월 중순까지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다가 3월 17일 급성 우뇌경색으로 쓰러져 서울중앙보훈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투병생활 중에도 서예작품을 통해 나라 사랑을 표현하는 등 활동을 보였다. 보훈병원에서도 붓글씨전을 개최하기도 했다.약 6년 반의 투병 끝에 순국선열의 날인 지난 2024년 11월 17일 오후 향년 9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빈소는 서울 중앙보훈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었다. 11월 20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사회장으로 영결식이 거행되었고 충혼당에 안장되었다. 만주벌을 호령하던 아버지와 오랫동안 헤어져 살아야 했던 오희옥은 사후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언니 오희영 지사 곁에 영면하게 되었다.오희옥의 별세로 여성 애국지사들은 이제 모두 고인이 되었다.
3. 가족관계
오희옥의 가족은 3대에 걸친 독립운동 가문이었다. 오 지사에게 독립운동은 삶 그 자체였고, 가족사였다.- 할아버지 오인수(吳寅秀, 1867~1935)
한말 의병장 출신으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3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용인과 안성 등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친일파 송종헌[6]이 경찰을 데리고 와 잠복, 급습하여 그를 체포하였다. 서대문형무소에서 6년간 복역하고 망국의 통한에 장남 오광선을 데리고 중국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 아버지 오광선(吳光鮮, 1896~1967)
용인 처인구 원삼면 죽릉리에서 의병장 오인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의병 활동을 한 부친의 체포 광경을 본 후, 평생 독립운으로 살 것을 다짐했다. 소학교를 나온 뒤 한약방에서 일하며 공부히다 1917년 만주로 망명해 1918년 신흥무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후 서로군정서 제1대대 중대장과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지내며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또한 1920년 청산리 전투 등 수많은 전투에 참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리고 각종 항일무장투쟁에 참전하였다가 1936년에 김구의 비밀지령을 받고 베이징에서 첩보활동 중 밀정의 밀고로 인해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다른 독립군 청년들을 먼저 보내고 가장 늦게 탈출하다가 일본 경찰이 쏜 총에 옆구리를 맞았다. 신의주형무소에 3년간 복역하였다. 이후 광복군에 복귀하여 장군으로 활약하였고,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1967년에 별세했다.
- 어머니 정현숙(鄭賢淑, 1900.03.13. ~ 1992.08.03.)
어머니 정현숙(일명 정정산) 여사[7]는 10대 초반 오광선과 결혼하여 1919년 남편과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에서 농사를 지어 독립군의 밥을 해주었고, 독립군 뒷바라지와 비밀 연락 임무를 수행하며 ‘만주의 어머니’라 불렸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하고 여성들을 독립운동에 참여시키고자 결성된 여성독립운동단체인 한국혁명여성동맹(1940.06. 창립)에서 활동하였다.
- 언니 오희영(吳熙英, 1924~1969)
오희옥의 두 살 터울 언니이며, 10대 초 오희옥과 함께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하는 등 광복군 활동을 함께했다. 그의 남편 신송식도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하였으며, 임시정부에서 김구를 보좌하였다.
4. 다른 독립운동가와의 관계
- 엄기선(嚴基善, 1929~2002)
1929년 1월 21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엄항섭(嚴恒燮)과 연미당(延薇堂)의 맏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영월(寧越)이다. 아버지 엄항섭의 고향은 경기도 여주군 산북면 주록리인 관계로 경기도 여주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엄항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전부장을 역임하였고, 김구(金九)의 최측근으로 활동하였다. 어머니 연미당도 상하이에서 한인여자청년동맹, 류저우(柳州)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대원, 충칭(重慶)에서 애국부인회 조직부장과 한국독립당 당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엄기선은 1938년 12월경부터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의 전신인 한국광복진선청년전지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戰地工作隊)의 공작대열에 오희옥(吳姬玉) 등과 함께 참가하였다. 이들은 일본군 내의 한국인 병사에 대한 초모공작의 일환으로 연극이나 무용 등을 통하여 적국의 정보를 수집 보고하는 한편 대원들의 사기를 앙양시켰으며, 중국 국민들에게 조국의 독립을 위해 분투하고 있는 한국인들의 의지를 널리 알렸다. 1993년에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5. 대중매체
- 2017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올드 랭 사인 버전으로 애국가를 독창했다. 유튜브 링크
92세이던 2017년 8월 15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72주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선율에 애국가 가사를 얹어 불렀다. 올드 랭 사인은 졸업식에서 자주 들리는 ‘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내 친구여’로 시작하는 노래로, 이는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들이 부르던 옛 애국가였다. 오 지사의 담담한 노래는 당시 경축식에 참석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 2015년 KBS 아침마당에서 인터뷰를 하였다.유튜브
- 2021년 KBS 허스토리에서 오희옥 지사의 독립운동을 설명해준다.유튜브
- 국가보훈처(현 국가보훈부)의 소개 영상이다.유튜브
- 아리랑TV의 소개 영상이다.유튜브
- KTV 교양의 소개 영상이다.유튜브
6. 여담
최후의 여성 애국지사였다. 오희옥은 여성 애국지사 중 마지막 생존자였으나, 2024년 11월 17일 사망함으로써 생존 중인 여성 애국지사는 더 이상 없게 되었다.
김구를 비롯하여 임정 요인들이 오희옥을 부를 때 “쥐” 혹은 “주”라고 불렀다. 중국 발음으로 ‘즈위’를 빨리 발음해서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2003년 9월 23일 77세 때, 광복군 동지였던 황갑수(1921~2009)와 함께 백두산을 올랐다. 광복군 동지들, 고령에 백두산 정상에 오르다. 왼쪽부터 오상근 광복군(79세), 황갑수 광복군(83세), 오희옥 광복군(77세) 2003년 9월 23일. ⓒ 황명하 전 광복회호주지회장
어머니와 저는 등록을 하지 않았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다. 하지만 “정부가 독립유공자 발굴에 적극적으로 나서줬어야 했다”는 게 오 지사 생각이다. 그러면서 “그나마 저는 나은 편이에요. 저희 어머니는 돌아가신 후에야 공로를 인정받았어요. 살아계실 때 입버릇처럼 ‘나는 표창 한번 못 받아보고 죽냐’고 하셨는데 그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죠.”라며 안타까워 했다. 또한 여성으로서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다고 말했다. 여성독립운동가는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명 받지 못한 데다, 남성을 돕는 역할 정도로 인식되는 경향이 짙다는 것이다. “일제 만행을 알리려고 손가락을 잘라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국제연맹조사단에 전달했던 남자현 지사처럼 훌륭한 여성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저희 어머니만 해도 일본 경찰에 끌려가는 독립운동가를 치마폭으로 감싸안아 보호했을 정도로 용맹스러워 ‘여장군’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는데, 돌아가신 후에야 겨우 인정을 받았으니까요.” 라며 회상했다. 『한국일보』 - [광복 72돌] 오희옥 지사 “3대에 걸쳐 목숨 건 독립운동, 내 고된 삶에 90점 주고파”
만주 길림성에서 서거한 조부 오인수 장군은 시신을 찾지 못했고 서훈도 받지 못했다.
서대문형무소 11옥사 21번 방에 이윤철 지사와 함께 관련 정보와 족적이 게시되어 있다.
2021년부터 4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학생들의 위문편지를 모아 입원 중인 오희옥을 찾아온 교사가 있다. 용인 기흥구에 있는 성지고등학교 강연수 교사이다.『오마이뉴스』 - 고등학생 96명이 쓴 엽서 들고 오희옥 지사 찾아온 교사…성지고 강연수 교사, 독립운동 역사 알리는 활동 해 와…오 지사 병문안만 4년째
경기 용인시가 오희옥 애국지사의 기념관을 조성한다고 밝혔다. 11월 19일 용인시에 따르면, 오희옥 애국지사의 뜨거운 나라사랑 정신과 뜻을 기리기 위해 원삼면 반도체클러스터 일반산업단지 역사공원 내 다목적 전시관(2,000㎡)에 ‘오희옥 지사 독립항쟁 기념관’을 만들기로 했다. 2025년 실시설계 등의 절차를 거쳐 2027년 완공하는 게 목표다. 시는 오 지사 가옥을 기념관으로 옮기는 방안 등을 유족과 협의 중이라고 한다.『한국일보』 - 용인시, 3대가 독립운동 투신 오희옥 지사 기념관 건립한다
- 위 내용은 오희옥 지사의 유가족 인터뷰 및 관련 자료 검토를 거쳐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관의 2024년 제2차 국외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적지 탐방 단원의 ‘독립운동가 위키 정보 수정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