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7 14:55:49

김향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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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향화.jpg
<colbgcolor=#0047a0><colcolor=#fff> 본명 김순이(金順伊)
출생 1897년 7월 16일
한성부
사망 1950년 (향년 53세)
서울특별시
서훈 대통령표창 추서

1. 개요2. 생애3. 그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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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기생 출신 독립운동가. 200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918년에 편찬된 '조선미인보감'에 따르면, 본명은 김순이(金順伊)다. 1897년 한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나이에 결혼했으나 18세에 이혼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기생이 되어 수원 권번(기생조합)에 소속되었다고 한다.

'조선미인보감'에 따르면 그녀는 갸름한 얼굴에 주근깨가 운치를 더하고, 맵시 동동한 중등 키에, 성품은 순하고 귀염성이 있으며, 검무, 승무, 가사, 시조, 경성잡가, 서관소리, 양금치기 등 각종 기예에 능했다. 또한 탁음이 섞인 듯한 애원성(哀怨聲)의 목청은 사람의 마음을 구슬프게 한다고.

1919년, 당시 22세의 김향화는 수원지역 요릿집에서 가장 즐겨찾는 일등 예기(藝妓)가 되었다. 그녀는 당시 수원군 수원면 남수리(현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수동)의 수원기생조합 취체역을 맡고 있었으며, 수원 유지 및 지식인들과 두루 친분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던 1919년 3월 29일, 김향화 등 기생 33명은 위생검사(건강검진이 아닌 위생검사였습니다.)을 받기 위해 당시 자혜의원으로 사용되던 화성행궁의 봉수당으로 가고 있었다. 이때 그녀는 동료들을 설득해 독립만세 운동을 벌였다. 이에 대해 일본 경찰조선총독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29일에 이르러 기생 약 30명이 자혜의원 앞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밤에는 상인, 노동자 및 무뢰한 등이 시내 각소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내지인(일본인) 상점에 투석하고 창문을 파괴하는 등 폭행이 심해져 수원 경찰서원과 보병 및 소방 조원이 협력하여 경계 중이다.
1919년 3월 '조선소요사건' 경기 수원지역 보고서

일본 경찰은 김향화를 만세운동 주동자로 체포했고, 그녀는 2개월 간 고문을 받다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으로 넘겨져 공판에 회부된 뒤 그해 5월 27일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일설에 따르면, 그녀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유관순과 같은 감방에 수감되었다고 한다.

이후 1919년 10월 27일에 가출옥되어 수원으로 돌아왔으며, 서울로 옮겨 살다가 1950년에 사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매장된 장소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으며, 후손 역시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수원시는 이동근 학예사가 연구해 발굴한 수원기생의 만세운동 자료를 바탕으로 2008년 국가보훈처에 김향화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을 했고, 정부는 2009년 김향화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3. 그외 정보


1919년 1월 고종 황제가 승하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무렵, 수원 일대의 술집은 문을 닫았고 기생이고 광대고 죄다 일손을 놓았다. 즉위한지 근 반세기, 망국의 황제일망정 격변을 함께 한 군주는 민중들에게 심후한 그림자를 드리우게 마련이었다. 덕수궁 앞은 상복 입은 조선인들의 통곡으로 뒤덮였다. "우리도 올라가자! 황제폐하께 마지막 인사라도 드리자." 김향화를 비롯한 20여명의 기생들은 상복 입고 나무비녀 꽂고 경부선 열차에 올라타 덕수궁 앞에서 호곡했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 파고다 공원에서 대한독립만세의 울음같은 만세소리가 폭발했고 그 폭음은 삼천리 방방골골로 퍼지기 시작했다. 3월 19일 한 신문에는 한반도 남쪽의 유서깊은 도시에서 일어난 한 만세 시위 기사가 실렸다. 진주의 기생 6명이 ‘우리가 죽어도 나라가 독립되면 한이 없다’고 시위를 벌인 것이다. 가장 대우받지 못했던 이들이 가장 용감하게 일어서는 이 나라의 희한한 역사 한 자락이 또 펼쳐진 것이다. 수원 기생들도 이 기사를 보았을 것이다.

3월29일은 수원 권번 소속 기생들의 검진일이었다. 기생 33명은 함께 길을 나섰다. (하필이면 여기도 33명) 병원 가는 길에 기생들을 단속하고 못살게 굴던 수원경찰서가 있었다. 우는 애도 순사 온다면 그치고 조선인들에 대한 태형(매질)이 합법이던 시절, 김향화와 33인의 기생들은 일본 경찰들의 입을 쩍 벌어지게 하는 행동을 벌인다. 그 정문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은 것이다. 장구에 맞춰 소리를 부르던, 술 사내들 속을 녹이던 그 음성들은 칼날처럼 경찰서를 겨누며 수원 하늘을 쩌렁쩌렁 울렸다.

3월25일부터 수원 인근이 조용하지 않았었지만 기생들이 이러고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일제 경찰은 곧 잔인한 진압에 들어갔다. 10대의 소녀도 포함된 기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짓밟히고 끌려가자 지켜보던 시민들도 울컥했다. 기생들의 독립만세를 들으며 얼마나 부끄러웠으랴. 얼마나 그 얼굴이 뜨거웠으랴. 시위는 과격해졌고 돌이 날고 총성이 울리고 사람들이 쓰러졌다. 이에 자극받은 일본인들 역시 잔학을
더했으니 4월의 제암리 학살로 그 절정을 맞게 된다.

김향화는 징역 6개월을 선고받지만 그녀가 감옥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는 짐작이 어렵지 않다. 징역 선고 기사 후 그녀의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진다. 본명이 순이였던 김향화가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 혹은 감옥에서 시들었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단지 고은 시인이 그의 '기생 독립단'이라는 시 속에서 그녀를 보존하고 있을 뿐.

"기생 김향화가 앞장서 외쳤지요…. 기생들 꽃값 받아 영치금 넣었지요. 면회 가서 언니 언니 하고 위로했지요. 그럴 때마다 아름다운 김향화 가로되 아무리 곤고할지라도 조선사람 불효자식한테는 술을 따라도 왜놈에게는 술 주지 말고 권주가 부르지 말아라. 언니 언니 걱정 말아요. 우리도 춘삼월 독립군이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