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의친왕의 9남에 대한 내용은 이해룡 문서 참고하십시오.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명 | 이휘선(李彙璿) |
자 / 호 | 군실(君實) / 추정(秋汀) |
출생 | 1877년 6월 22일 |
평안도 숙천도호부 평리방 사산리[1][2] (現 평안남도 숙천군 사산리) | |
사망 | 1917년 6월 13일 (향년 39세) |
중화민국 길림성 의란도 목릉현 (現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무링시) | |
본관 | 진주 이씨 (晉州 李氏) |
종교 | 개신교 (감리회) |
묘소 | 러시아 우수리스크 백인 공동묘지 |
서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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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외동딸 이정희(李正熙)는 이응준 초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과 혼인하였다.
2. 생애
2.1. 초년기
1877년 6월 22일 평안도 숙천도호부 평리방 사산리(現 평안남도 숙천군 사산리)에서 이응호(李膺灝)[3]의 4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이휘선(李彙璿)이며, 이갑은 일본 유학시절 군인을 지망할 때 개명한 이름이다. 형으로 이휘롱(李彙瓏)과 이휘림(李彙琳)이 있었으며, 동생으로 이휘용(李彙瑢)이 있었다.사산리의 유지였던 부친은 유학을 중시하는 유림이었고, 어머니는 숙천군에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입교해 첫 신자가 되었던 사람이다. 이갑의 둘째 형 이휘림[4]은 고향에서 교회를 직접 설립했다. 이렇듯 이갑은 유교와 기독교가 혼재한 집안에서 유복하게 성장했다.
부친은 이갑의 영민함을 평소 흐뭇해했고 이갑이 11세 되던 때인 1888년(고종 25) 나이를 15세라고 속이고는 식년시 진사시에 응시하게 했는데, 이갑은 이 시험에 3등 194위로 입격했다.[5] 그러나 이 무렵 평안도 관찰사(종2품)로 부임한 민영휘는 이갑의 부친이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이를 탐내다가, 이갑이 나이를 속여 진사시에 입격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서 이를 빌미 삼아 이갑의 부친 이응호를 평안도 감영으로 소환했다. 이후 그에게 온갖 악형을 가하고 40경(약 20만평)에 이르는 농토를 빼앗았다. 이후 이갑의 부친은 화병으로 사망했고 유복했던 가문은 한순간에 몰락하고 말았다.
2.2. 복수를 꿈꾸다
부친의 죽음과 집안의 몰락으로 민영휘에게 원한을 품은 이갑은 수년간 방황하다가, 이후 상경하여 감리교 선교사가 설립한 상동교회 내의 상동청년회에 가담해 청년운동에 전념했다. 그리고 1896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만민공동회의 간부로 활동했다. 1898년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그는 그해 10월에 자비로 일본 유학길에 올라 일본 세이조 학교에 입학해 1901년 12월 4일에 졸업한 후 1902년 4월 13일 일본 근위사단 보병 제1연대에 배속되어 후보생으로서 군무를 익혔다. 그리고 그해 12월 1일에 일본육군사관학교 15기생으로 입학했다. 병과는 보병.[6]1903년 11월 30일 일본 육사를 졸업해 일본근위사단 보병 제일연대 견습사관이 된 이갑은 일본육사 동기인 유동열 등과 함께 러일전쟁에 종군하여 평양, 만주 등지에서 전투에 참가했다. 이후 육군보병 참위로 임명되었고, 8월 2일에 국내로 돌아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학도대로 보임되었다. 이어 9월 29일에는 육군무관학교의 예비과정인 육군유년학교 학도대로 이속되어 초등 군인교육을 담당했다.
1905년 4월 4일, 이갑은 전범개정(典範改正)위원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7월에 6품 조경단수개시별단(肇慶壇修改時別單)에 올랐고, 동월에 일본 시찰을 떠나 8월 1일 일본 육군무관학교 학도대에 임명되었으며, 일본훈장 서보장(瑞寶章)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9월에 한국으로 돌아와 군부에 복귀, 10월 10일에 육군 보병 정위(正尉)로 임명됨과 동시에 육군무관학교 학도대(學徒隊) 중대장에 보임되었다. 12월 5일에는 군부 부관(軍部 副官)에 임명되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이갑은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민영휘에게 복수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1905년 어느 날, 이갑은 육혈포(六穴砲)를 품고 단신으로 민영휘의 집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옛날 부친으로부터 빼앗아간 40경 토지와 그간 10여 년간 추수하여 먹은 돈을 전부 토해내라며 그러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할 거라고 협박했다. 결국 민영휘는 토지를 헌납하고 3만원의 돈까지 지불해야 했다. 또한 그는 민영휘에게 "이제부터는 돈을 교육사업에 쓸 것"을 약속받았다고 한다. 이 일화가 실제 있었던 일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민영휘가 이 시기에 휘문의숙(현 휘문고등학교), 풍문여의숙(현 풍문여자고등학교)를 설립한 것은 사실이다.
2.3. 독립운동
1906년 1월 23일 정3품 풍양비각수립시별단(豐壤碑閣豎立時別單)에 올랐으며, 6월 12일 육군보병 참령(參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내심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유린하는 것에 반감을 품고 상동청년회에서 애국지사들과 소통하며 국권회복의 기회를 엿봤다. 그리고 1906년 일본 유학생 단체인 태극학회가 설립되고 <태극학보>가 발간되자, 이를 축하하며 50원을 기부하기도 했다.1906년 10월 26일 박은식, 정운복, 김윤오, 김붕준, 유동열, 김달하 등 평안도, 황해도 출신 인물들과 함께 서우학회를 창립해 구국교육운동을 이끌었다. 그리고 1908년 초, 서우학회는 이동휘, 이종호(독립운동가) 등 함경도 출신 인물들이 설립한 한북흥학회와 통합하여 서북학회를 출범시켰다. 그리고 이갑은 민영휘에게서 돌려받은 재산으로 서북학회 조직을 확산시키고 오성학교를 건립했으며, 협성학교 건축 비용을 대기도 했다. 한편, 그는 안창호가 주도하여 결성한 신민회에 다른 군인 출신 애국지사들과 함께 참여했다.
그러던 1907년 6월 7일 이갑이 군부 교육국에 교무과장에 보임되었을 무렵, 헤이그 특사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일제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고, 그는 군대 내에서 어담 등 군인 출신 인물들과 함께 황제 폐위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결국 7월 21일 면직당했고, 군인으로서 정치의 일에 관여했다는 죄목으로 징계 및 구금되었다. 일제는 이어 1907년 8월 1일 정미 7조약을 강제로 체결시켜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켰다.
1907년 8월 25일에 풀려난 뒤 1907년 9월 3일 군부에 다시 복귀했다. 일제는 이갑 등 일본에서 군사 교육을 받은 조선 장교들을 회유하려 했다. 그러나 이갑은 군부를 박차고 나왔고 유동열, 김희선, 노백린 등과 함께 군대를 부활시키기로 결의했다. 그는 국내에서 국권회복운동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만주에 독립군 양성 기지 건설 작업에 착수했다.
1908년 3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스티븐스 저격사건이 발발했다. 이 소식을 접한 재외 동포 사회는 전명운, 장인환 의사를 돕고자 하는 의연금 모금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이갑과 유동열, 양기탁 등이 <양의사합전(兩義士合傳)>을 비밀리에 유포하면서 의연금을 모집한 뒤 두 의사에게 의연금을 송부했다. 이렇게 해서 모인 돈은 국내, 일본, 미국, 하와이, 멕시코, 중국, 상하이 등지에서 총 8568원 11전에 달했다.
2.4. 러시아로 망명하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사건이 발생하자, 일제는 신민회 인사들을 배후 인물로 지목하고 체포하기 시작했다. 이갑과 안창호를 비롯한 신민회 동지들은 용산 헌병대로 끌려가 엄중한 취조를 당했다. 이갑은 혹독한 취조와 국문을 받고 3개월 만인 12월경에 무혐의로 풀려났다. 이후 1910년 4월, 이갑은 신민회 인사들과 함께 국내를 탈출하여 칭다오(靑島)에서 모여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한 뒤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이후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발표되자, 이갑은 해삼위 회담(海蔘衛會談)에 참여해 "의연히 농지개척에 주력하여 생활 안정을 얻는 기반 위에서 독립운동의 투사를 양성하는 것이 한민족의 미래 운동에 유리하다"고 주장했지만 만주에서 속히 군인을 양성하자는 반대 의견에 부딪혔다.해삼위회담을 끝낸 이갑은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서 러시아 외교관 및 정치가들과 교류하며 국제정세를 살피고 적극적인 언론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발행 부수가 많았던 <노바야 보렘아(신시대)> 신문사를 찾아가 한국민의 불행한 처지를 호소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청년 양성소를 만들어 청년교육에 착수하게 해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후원자가 되어주었던 전 러시아 한국공사 이범진이 1911년 1월 13일에 나라를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밧줄로 목을 맨 후 머리에다 권총 3발을 쏴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며칠 동안 끼니를 잇지 못할 정도로 상실감에 빠졌다.
이후 그는 러시아어를 하루바삐 익혀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데다 이범진이 사망한 후 생활 형편이 곤궁해져 곤경을 겪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그는 러시아 공부를 하던 중 연필을 깎다가 손가락 끝을 칼에 베인 뒤 손가락이 마비되는 증상을 느꼈다. 마비 증상은 손가락에서 손목, 팔로 번지더니 급기야 반신 불구의 상태에 빠졌다. 1911년 7, 8월 경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방문한 안창호는 이갑을 만나보고 그의 병세가 심각함을 감지하고 미국으로 간 뒤 적금 300불을 송부하며 신한민보 주필로 초청하니 미국에 와달라는 초대장을 보냈다.
그는 이 돈을 받고 미국으로 가기로 결심했지만, 혼자서는 거동조차 불가능했기에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 총회에서 활동하던 서초·최광의 보필을 받으며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유럽에 도착한 후 독일에서 뉴욕행 여객선을 탔다. 하지만 이갑은 머나먼 장정을 견디는 게 매우 힘겨웠고, 뉴욕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인사불성 상태가 되었다. 1912년 4월 30일 이갑과 서초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당시 검사원 감독인 베커와 면담한 결과 이갑은 상륙 허가를 받지 못하고 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결국 이갑 일행은 오랜 여행의 보람도 없이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기 위해 유럽으로 가는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유럽에 도착한 그는 베를린과 파리 등지에 들러 명의를 찾아 근육마비를 고쳐보려 했지만 별다른 차도를 보지 못하고 시베리아로 돌아가야 했다. 이갑은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 본부가 있는 치타로 왔다. 그는 그곳에서 시베리아 지방총회 제2대 총회장으로 임명되었고, <대한인정교보> 발행을 지도하고 북밀산에 설립된 무관학교 사업을 지도했다. 그러나 병세가 갈수록 악화되자, 그는 좀더 따뜻한 곳에서 요양을 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그는 이곳에서도 이동휘와 함께 광복군 정부를 구상해 분열된 동포 사회를 하나로 결속시켜 제2의 러일전쟁이 발발할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얼마 머물지 못하고 1912년 12월 13일 중화민국 길림성 동남로도(東南路道) 목릉현(穆棱縣)[7]으로 향했다.
목릉현에서 안중근의 유족들과 만난 그는 그들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국내의 가족들에게 자신의 경황을 알렸다. 이갑의 부인은 딸 이정희와 함께 목릉행을 결심했고, 김양과 장춘을 경유하여 하얼빈에서 동청철도(東淸鐵道)를 타고 가는 몇달간의 여정 끝에 마침내 이갑과 상봉했다. 재러한인 동포사회는 1913년 12월 25일 이갑을 위한 의연금 모집 발기회를 결성하고 의연금을 모집했다. 이 활동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지속되며 이갑의 생활이 나아지는 데 큰 힘이 되어줬다. 그 결과 이갑의 병세는 호전되어 일어나 앉기도 하고 운동도 할 정도가 되었다.
병세가 호전되자 청년 학생들을 모아 군사교육을 하려 했지만, 얼마 후 병세가 다시 악화되면서 무위에 그쳤다. 게다가 일제가 목릉현에까지 감시망을 펼치기 시작하자, 그는 1914년 2월 7일에 우수리스크로 이주해야 했다. 그곳에는 이동녕과 이상설이 자리잡고 있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일제와 러시아가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독립운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뒤 수년간 조용히 지내던 중 이상설이 1917년 3월 2일에 사망하자, 이갑은 크게 낙담하고 자신도 곧 죽을 것을 예감했다.
그 해 6월 13일 오전 1시 30분, 그는 사망했다. 향년 41세. 그의 유해는 우수리스크의 백인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이갑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3. 대중매체에서
- 1979년작 KBS-TV <일요사극 맥> '벼랑 위의 파수병(2부작)'에선 배우 김병기가 연기했다.
[1] 구한 말 숙천도호부 평리방 사산리 → 1896년 숙천군 평리면 사산리 → 1914년 부군면 통폐합, 평원군 서해면 사산리 → 1952년 군면리 대폐합, 숙천군 사산리.[2] 진주 이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이찬희도 이 마을 출신이다.[3] 이명 이응오(李膺五).[4] 후에 이윤옥으로 개명했다.[5] 사마방목 상에 실제로 1874년(고종 11) 갑술(甲戌)생, 전력 동몽교관(童蒙敎官:종9품)으로 기재되어 있다.#[6] 이 때 같은 15기로 입학한 조선인들은 유동열, 김기원, 남기창, 박영철, 박두영, 전영헌, 김응선으로 이갑 본인까지 합하여 총 8명이었고, 이들은 흔히 8형제배(8兄弟輩)라고 불렸다.[7]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무링시(穆棱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