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성암(惺菴) 장윤덕(張胤德, 1872년 7월 6일 ~ 1907년 9월 16일)은 대한제국 시기의 의병장으로, 경상북도 예천 출신이다. 을사늑약 이후 국권 회복을 위해 항일 투쟁을 벌였으며, 1907년 의병대장으로 활동하다가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순국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장윤덕 장군은 1872년 7월 6일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노상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단양(丹陽), 자(字)는 원숙(元淑), 호(號)는 성암(惺菴)이다. 어려서부터 강직한 성품과 뛰어난 학문적 재능으로 ‘소년 재사(才士)’라 불렸다.그는 예천군에서 수서기(首書記)로 근무하며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청렴한 행정을 펼쳤다. 그러나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수서기직을 사임하고, 본격적인 항일 활동에 나섰다.
2.2. 항일 투쟁
2.2.1. 의병 활동
1907년 4월, 장윤덕 장군은 서울로 올라가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오적을 처단하려 했으나 배신자의 밀고로 실패하고 귀향하였다. 이후 **의병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907년 7월, 격문을 돌려 3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의병대를 편성하였다.
* 이후 이강년 의병장과 연합하여 문경, 풍기, 봉화, 용궁, 예천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 1907년 7월 9일, 일본 경찰대와 전투하여 일본군 3명과 한인 순사를 사살하였다.
* 1907년 8월 27일, 풍기 일경 분파소를 습격하여 적을 격퇴하였다.
* 1907년 9월 3일, 봉화와 문경 지역에서 일본군을 공격하고 친일파를 처단하였다.
2.2.2. 갈벌 전투
1907년 9월 10일, 장윤덕 장군은 이강년, 민긍호, 신태식 등과 함께 문경 갈벌 전투를 치렀다.* 의병 1,000여 명이 갈벌(갈평) 계곡에 매복하여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였다.
* 전투 결과: 일본군과 경찰대 대거 전멸, 의병 측 대승
* 전투 결과: 일본군과 경찰대 대거 전멸, 의병 측 대승
전투에서 승리한 후, 이강년 장군은 충북으로, 민긍호 장군은 강원도로, 장윤덕 장군은 예천으로 이동하였다.
2.3. 체포와 순국
1907년 9월 12일, 장윤덕 장군은 예천을 공격하여 일본군 우편소와 일본인 가옥을 파괴한 후, 상주를 거쳐 **대구 점령 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9월 16일**, 대구수비대와 교전하던 중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그는 일본군에게 **심한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혀를 깨물어 함구(緘口)로 저항하였으며, 결국 **1907년 9월 16일**, 상주 함창면 구향리 언덕에서 총살형을 당하며 순국하였다. 향년 35세.
3. 사후 평가 및 유산
3.1. 독립유공자로 인정
* 1965년 10월 30일, 경북대학교 교정에 순국 기념비 건립* 1967년 11월 1일, 예천 보문면 수계동에 묘비 제막식 거행
* 1968년 3월 1일, 대한민국 정부에서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2012년 7월, 경상북도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
3.2. 기념 시설
현재 경북대학교 교정에는 ‘장윤덕 의사 순국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국가보훈부에서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그의 묘소는 경북 예천군 보문면 수계동 보문산에 위치해 있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묘비명이 각인되어 있다.4. 가족과 후손
장윤덕 장군의 부인 김함녕 여사는 남편이 순국한 후 두 아들(시환, 인환)을 데리고 일본군의 박해를 피해 피신하였다. 장남 시환은 일본으로 끌려가 6년간 인질 생활을 하다가 탈출하여 고국으로 돌아왔다.5. 관련 문화재
* 경북대학교 교정의 순국기념비 (국가보훈부 지정 현충시설)* 예천 보문산 묘소 (박정희 대통령 친필 묘비)
* 1965년 기념비 제막식, 1967년 묘비 제막식
6. 참고 문헌
* 의병대장 장윤덕 공적자료* 건국훈장 독립장 서훈 기록
* 경상북도 독립운동가 선정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