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03:52:40

장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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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송(秋松)
출생 1892년 6월 25일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나무리
사망 1920년?
본관 결성 장씨
서훈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동아일보 기자2.3. 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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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기자. 한국 언론사 최초의 순직기자이기도 하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장덕준은 1892년 6월 25일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나무리에서 부친 장붕도(張鵬道)와 모친 김현묘(金賢妙)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에겐 이복형 장덕주(張德胄)와 남동생 장덕수, 장덕진(張德震), 여동생 장덕선(張德善)이 있었다. 장덕준은 어릴 때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1907년 재령 기독소학교를 입학해 1909년 졸업한 뒤 재령 명신중학교에 입학해 1911년 졸업했으며, 1911년 재령 명신중학교 교원이 되었으나 1913년 해임되었고, 1914년 평양일일신문 조선문 주간을 맡았지만 1915년에 또다시 해임되었다.

이후 1915년 봄 일본으로 건너간 장덕준은 일본 대학을 들어가려 했지만 그러지 못하고 세이소쿠 예비학교에서 몇년간 재학했다. 그는 1915년 7월 재동경조선인유학생 학우회가 발행한 <학지광(學之光)> 제6호에 '추송(秋松)’이라는 필명으로 <오인(吾人)의 이상>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그 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인이 안된 소이는 독립자존을 중시하는 사상과 영원 보편한 내적 생명, 내적 생활을 유한 점에 잇는 것이로다. 추악한 생활의 현살태를 탈리할 길은 진요구를 따라 진실한 정신과 충실한 노력으로써 일을 수행함에 재하노니, 내 생명의 부활과 정신 생활의 재건으로 유일 최고의 이상을 싣고 몸을 받쳐 노력함에 있는 것이로다.

장덕준은 이 글에서 진실한 정신과 충실한 노력으로 내 생명의 부활과 정신 생활의 재건을 위해 몸을 바쳐 노력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한편, 그는 유학 생활을 하며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에 가입해 활동했으며, 1918년 1월 12일 제12회 정기총회에서 부간사에 선임되었다. 당시 일제 정보기관은 그를 '갑호(甲號)' 감시 대상으로 지정했다. 갑호란 요시찰인 분류기준의 하나로, "배일 사상의 신념이 강하고 그것을 고취하며 폭발물을 소유하고 조폭한 배일 언동을 하며 그런 자들과 서로 연락을 취하고 있는 자"로 규정되었다.

1917년 11월 중순, 장덕준은 민병세 등과 함께 배일사상을 고취시킬 목적으로 장도빈이 서울에서 발행한 <조선연표> 100부를 들여와서 학생들에게 나눠줬다. 또 그는 1917년 11월 17일 송계백, 이종근 등과 함께 학우회가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한 웅변회에서 유학생의 사명과 그 현상이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조선인현황>에 기록된 그의 연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 청년이 이상으로 하는 바는 첫째 실력을 양성할 것, 둘째 일본의 정치가, 실업가 또는 학생 등의 동정에 기대어 자치를 얻을 것, 셋째 다시 나아가 조선 국권의 회복을 얻을 것이지만, 둘째 셋째 이 이상은 금일의 경우 용이하게 실현될 수 없는 일이므로 먼저 우리 학생들은 첫째 희망, 즉 실력 양성에 노력하여 훗날 대성(大成)을 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동물이 고유의 감정과 동물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인간도 역시 고유의 국민성을 갖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장덕준은 노동운동 역시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는 1917년 1월 23일 조선인 노동자와 고학생들이 친목 도모를 위해 조직한 노동동지회 초대 회장을 맡았고, 1919년 노동동사회 회장도 역임했다. 두 단체는 1920년 1월 25일 조선고학생동우회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그는 폐결핵을 심하게 앓아서 여러 차례 요양을 해야 했다. 1919년 봄에도 폐결핵 때문에 요양을 하느라 2.8 독립선언3.1 운동에 참가하지 못했다.

2.2. 동아일보 기자

1919년 7월경, 장덕준은 귀국을 결심했다. 그와 함께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김준연(金俊淵)은 1960년 4월 1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서울서 3.1 운동이 전개되었었다. 그 후 수개월이 지나서 장덕준씨가 내 숙사로 나를 찾아왔다. 그리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니, 금후에는 대중을 고무 계몽하여야 할 것이 아닌가? 그리하는 데는 신문을 경영하는 것이 첩경이 될 것이다. 그런 즉 그대가 금반 하기 방항시에 귀국하거던 그 범에 유의하여서 자금면이며 기술면에 필요한 준비를 하도록 하여보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도 그 필요성을 인정하고 그리하기를 약속하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그에 필요한 준비공작을 하지 못하고 동경으로 돌아왔더니, 장덕준씨가 또 찾아와서 말하기를 "지금 동경에 매일신보 관계자(이상협 씨) 등이 와있어서, 그 분들과 신문 제작에 관한 의론을 하여 보았다. 그러나 지금 남은 문제는 조선 총독부에서 신문발행 허가를 얻는 것과 자금모집에 관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 장씨는 또 내게 와서 이야기하기를 "총독비서관 수옥영부씨에 대한 요시노 사쿠조씨의 소개장을 얻어가지고 가니 신문 허가 문제는 해결될 것 같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장덕준 씨는 신문을 낼 목적으로 귀국하였었다.

김준연은 또한 1960년 4월 1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동경에 있는 우리 유학생들 중에는 장씨가 일본인과 교섭하려고 하는 태도에까지도 불만을 느끼지마는 장씨는 자기 소신에 매진해서 경성에 돌아간 즉시 총독부 측과 교섭하여 동아일보의 발행을 보게 되었든 것이다."라며, 장덕준이 신문 창간을 위해 일본 유력인사들의 힘을 빌리는 것에 대해 유학생들 사이에 비판의 시각이 있었음을 밝혔다.

장덕준은 귀국 후 1919년 7월에 동아일보 창간에 관여하고 논설반원과 통신부장, 조사부장을 겸직했다. 하지만 그는 일본 유학때부터 요시찰 대상으로 간주되어서 일제의 감시를 받아야 했고, 폐결핵 역시 기자가 된 후에도 여전히 그를 괴롭혔다. 장덕준은 때때로 기침과 함께 피를 뱉곤 했으며, 특히 1920년 5월 사장 박영효 사직 문제로 열린 사원회의에서 격분하여 "왜 우리 청년들을 이해하지 못하느냐"며 절규하다 피를 토하기도 했다. 결국 장덕준은 1920년 봄 병세가 몹시 심해져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그의 동지였던 유광렬의 증언에 따르면, 장덕준은 그의 건강을 걱정하는 동료들에게 입버릇처럼 "사는 동안 감격에 싸이어 살면 고만이여요. 인생에게 영원이 있습니까. 사는 동안 조선 사람을 위하야 힘껏 일하다가 죽지요", "사람은 오래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루를 살다 죽어도 정의를 위하여 살고 정의를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유광렬은 장덕준이 정열적으로 호탕했지만, 폐병 때문에 감정이 예민했고 괄괄했다고 묘사했다.

한편 동아일보 창간기자 출신인 이서구는 1972년 11월 11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논설반원들끼리의 사설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다 논쟁이 고조되면 장덕준이 책상을 치고 의자를 던지기도 했고, 걸상을 때려부셨을 때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또 책상을 집어던지며 "그따위 소리를 하고도 나라를 위한다는 놈이라 할 수 있느냐"고 욕설을 내뱉기도 했다고 한다. 1920년 5월 8~9일 권덕규가 쓴 "가명인 두상에 일봉"이라는 논설 때문에 유학자들이 거세게 반발하자, 이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장덕준과 편집국장 이상협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유광렬은 이런 장덕준에 대해 "성질이 감격하기 쉽게 인정이 많았다"고 했고, 송진우는 "열정의 재인"이라고 표현했다.

장덕준은 이렇듯 병환과 일제의 감시에 시달리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직무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동아일보 초대 논설반으로서 1920년 4월 2일부터 4월 13일까지 10차례에 걸쳐 1면에 <조선 소요에 대한 일본 여론을 비평함>이라는 제목으로 논설을 집필했다. 이 시리즈는 당시 '조선 소요'로 불리던 3.1 운동에 대한 일본의 대표적 여론을 소개하고 비평한 것이다. 장덕준은 당시 3.1 운동에 대한 일본의 여론을 자치론, 일시동인론, 연방론, 동화론 등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하고 자치론에 대해 "신진학자와 정당정치가 등이 주장하는 것인즉 앞으로 여론의 중심을 이룰 듯하다"며 힘을 실어줬다. 하지만 그는 자치론은 관료와 군벌이 반대하고, 동화론은 민간여론과 조선인이 반대하기 때문에 두 여론을 아우르기 위한 정책이 일시동인론이라고 설명했으며, 연방론에 대해서는 출현하려면 아직 멀었다고 밝혔다.

또한 장덕준은 자치론을 주장하는 대표적 시사평론가인 교토제국대학 법대교수 스에히로 시게오가 월간지 <태양> 1919년 7월호에 게재한 '조선자치론'을 4월 2일부터 4월 7일까지 4차례에 걸쳐 소개하고 이에 대해 비평했다. 또 4월 8일부터 4월 13일까지 6차례에 걸쳐 일시동인론을 주장하는 교토제국대학 법대교수 오가와 코우타로우의 이론을 설명했고, 오가와 교수가 아사히 신문에 게재한 '조선통치론'을 소개하고 이를 비판하는 논설을 게재했다. 장덕준은 오가와 교수에 대해 정부 여당 쪽인 신정회 소속 전 대의사이며 정치평론가로 저명한 어용학자라고 소개했다.

스에히로 시게오는 한국에서 3.1 운동이 일어난 원인은 군인이 지배하면서 물질적 진보를 크게 이룬 반면, 참정권을 주지 않고 언어 저작, 인행,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등 정신적 자유를 박탈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3.1 운동의 원인은 총독의 무단정치와 일본인이 조선인을 열등민족으로 대우하는 등 일본 통치의 결함과 조선인에 대한 비문명적 태도를 첫째이며, 제1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민족자결주의가 고양되는 등 세계 사조가 변화된 것이 둘째라고 분석했다. 그는 동화 정책을 시행하는 건 절대 불가하며, 조선에 자치를 허락하는 것이 일본 장래에 안전을 확보하는 양책이며, 향후 조선인이 독립을 요구하며 독립할 능력이 충분하게 된 경우에는 독립을 인정하는 것이 피차 국운의 발전 신장을 도모하며 극동 영원의 평화를 유지하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장덕준은 "과연 공정한 비평가", "척안(隻眼)이 유한 논평가"라며 적극 찬성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조선인이 소요를 야기한 원인은 과연 자유와 권리를 요구함이며, 문화, 습관, 언어를 무시하고 동화를 강구하는 것은 인류 진보를 방해하는 것이니, 이는 곧 인류의 적이다. 스에히로 시게오가 제시한 것처럼 양 민족 간의 관계를 개선하는 방침을 타협에 구함은 이치에 가까운 생각이고, 자치를 허용하면 다수가 만족할 것이라는 생각도 무리는 아니다.

반면 오가와 고우타로우는 조선인의 독립사상은 천도교도, 기독교도, 불교도, 유생, 기타 학생 등 소수 식자계급의 지도교화에 의해 보급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조선의 독립을 허용한다면 일본의 지위는 위험한 상태를 맞게 되고, 조선인의 복리 증진은 어렵게 되기 때문에 조선의 독립을 승인할 수 없다고 봤다. 그는 또 조선에 독립사상이 확산되는 요인으로 소수 식자계급의 지도교화라는 내부 요인 외에 조선인이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의심하고 민족자결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등이 승리할 것을 확신하는 외부요인도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선전하고, 민족자결주의의 오신을 교정하는 것으로 외부 원인을 배제하고 일신동인주의, 민본주의 가미, 민도에 적응하는 정치주의 등으로 총독정치의 결함을 개선해 덕정을 펴는 것으로 내부 원인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장덕준은 "독립운동에 대한 대항책을 완곡한 언사로 논하였다 할지라도 위압을 근본정신으로 하는 철두철미 위압책일 뿐"이라며, 오가와 고우타로우를 '제국주의론자'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3.1 운동은 조선인이 10여 년간 당하던 위압의 고통과 번민을 참기 어려워 시세의 변화를 갈망하던 상황에서 세계의 사조와 시세가 변함에 이에 순응하여 죽음으로써 자유를 구하고자 자기 양심의 절규를 유일한 무기로 삼아 궐기한 것이다. 또 조선에 다수의 무식자가 있기는 하지만 무식한 민족이라고 반드시 애국사상이 없고 독립정신이 없다고 할 수는 없으며, 민족을 사랑하고 종족을 사랑하는 정신은 인류의 통유성이며 독특한 문화와 역사가 있는 민족에게는 반드시 민족성이 있고 애국정신도 있다. 따라서 어찌 조선인이라고 애국사상이 없고 독립정신이 없겠느냐. 조선인의 독립사상과 애국정신은 조선인의 혈액과 뇌수에서 발생하는 것이기에 뿌리가 깊고 강한데도, 일본인은 조선인의 사상을 멸시하고 항상 소수의 선동가에게 선동되는 것으로 생각해 조선 선각자와 유식계급을 무한히 압박하고 박해하지만 결코 조선혼과 독립사상을 추호도 타격할 수 없을 것이다.

장덕준은 또 한일합병의 이유가 일본의 국방상 필요하며 조선인의 복리 증진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무력이 아닌 방법으로 국가를 조지갛고 국민을 구성할 때 가장 중요한 조건은 국민적 이익의 일치와 국민적 이상의 공통이다. 따라서 이것이 아닌 일본의 국방상 필요에 의해 합병했다면 한일 합병의 생명은 영구정이지도, 절대적이지도 않다. 자연히 조선 민족이 불평을 하면 무력으로 압박할 것이기 때문에 합병의 또다른 이유인 조선인 복리 증진도 불가능할 것이다.

장덕준은 일시동인주의에 대해서도 반대를 표명했다.
일시동인주의는 평등주의를 의미함인데 강자와 약자를 평등 처지에서 자유경쟁시키는 것은 오히려 불공평한지라. 실력부동한 조선인과 일본인에 대해 이를 시행함은 조선인에게는 참기 어려운 고통일 것이니, 일시동인주의가 조선인의 행복을 증진할 보증을 되지 못할 것이다.

장덕준은 10차례에 걸친 논설을 게재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조선인은 외형 외세만 주의하며 의뢰할 것이 아니라 자력을 배양함에 노력할 것이나 하여간 일본인의 조선에 대한 여론을 보더라도 조선인의 앞길은 별로 비관할 필요가 없을 듯하니 동포는 자중자애하야 면려할 지어다.

즉, 그는 지금 당장 자치 또는 독립을 주장하지 말고 참고 지내면서 실력을 기르도록 노력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이후 1920년 8월 미국 의원단이 상하이를 방문하자, 동아일보는 그해 여름 장덕준 김동성을 베이징으로 특파해 의원단 동정을 보도하는 동시에 이들에게 조선의 사정을 상세히 전달하게 했다. 당시 한국 독립운동세력은 미국 의원단의 동아시아 방문이 조선의 독립을 위한 국제 여론을 형성할 호기로 여겼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국의원시찰단 환영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안창호가 주비위원장을 맡았다. 또한 국내에서도 기독교와 천도교 주도로 <독립원조청원서>를 제출하고 시위운동 등을 일으킬 여러 가지 비밀계획이 세워졌다.

장덕준은 <동란의 북경에서>라는 기사를 동아일보에 보냈고, 동아일보는 이를 통해 1920년 8월 8일부터 8월 27일까지 8회에 걸쳐 중국 상황을 보도했다. 그는 월 28일 만주에 있는 펑톈 총영사관을 방문하여 베이징에 가는 사유를 말하고 "장쭤린의 독군서를 방문하겠으니 소개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그는 우페이푸장쭤린과 잇달아 인터뷰했고, 베이징에서 미 의원단을 취재했다.

1920년 8월 16일, 장덕준은 안창호, 여운형, 황진남과 함께 미 하원 외교위원장 포터를 찾아갔다. 포터는 자신의 방문이 공식이 아니고 사적인 것이며 따라서 한국 일에 극히 찬조할 것이나 이것은 공식적인 것이 아니라 사적인 답’이라며 신중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한국 헌법과 일본인의 불법행위에 대한 자료를 요구하는 등 한국 상황에 관심을 표명했다. 장덕준은 8월 18일 낮 12시 30분부터 오후 2시까지 미 의원단장 스몰을 인터뷰하고 ‘서울에 도착하게 되면 한국 사람의 환영회에도 출석하여 주기를 희망한다’는 뜻을 전했다. 동아일보는 이 기사를 8월 24일자 3면에 크게 보도했다. 1면에는 논설주간 장덕수의 <미국 의원단을 환영하노라>는 논설을 싣고, 이 논설을 영문으로도 나란히 게재했다.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스몰은 장덕준에게 “이번에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일부러 우리 일행을 만나기 위하여 이곳 베이징까지 온 안창호 씨도 우리는 매우 반가히 만나보았습니다.”라고 전했다. 미국 의원단 일행이 베이징을 떠나 만주를 경유하여 서울로 오는 중간 기착지인 펑톈부터의 취재는 김동성(金東成) 특파원이 맡았다. 그러나 일본 철도당국은 김동성이 의원단과 같은 열차에 타지 못하게 하고 매일신보의 백대진(白大鎭)만 같은 차를 타도록 허용했다. 백대진은 취재보다는 한국인의 반일감정이 허황하다는 역선전에 열중했다. 한편 동아일보 편집감독 양기탁 등은 의원단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려 했다가 체포되었다. 이에 일제는 동아일보를 정간시켰고, 장덕준은 유광렬과 함께 고향집에 다녀오는 등 휴식을 취했다.

2.3. 실종

그러던 1920년 10월, 일본군이 간도 참변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장덕준은 이를 취재하기 위해 현장으로 가려 했다. 때마침 서울에 와있던 어머니 김현묘와 주위 동료들이 말렸지만, 그는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비록 가서 역시 학살되는 한이 있더라도 동포가 대량학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 보도기관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 하루를 살다가 죽어도 정의를 위하여 살다가 죽어야 한다. 이번 길에 죽고 못돌아오더라도 달게 받겠다."

장덕준은 1920년 11월 6일 용정에 도착한 뒤 동아일보사에 "발간 피덩이만 가지고 나의 동포를 해하는 자가 누구이냐?고 쫓아와보니 우리가 상상하던 바와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고 첫 소식을 보내왔다. 그러나 1920년 11월 10일, 회령수비대장 와타나베는 동아일보사에게 장덕준이 실종되었다는 전보를 보냈다. 동아일보는 1921년 2월 22일자 1면 기사 <추송 장덕준 형을 사하노라>를 통해 장덕준 실종 사실을 처음 보도했다. 조선총독부의 명령으로 정단되었다가 3개월 후에야 풀렸기에 이때가서야 보도된 것이다.

일본 외무성 자료 <불령단 관계 잡건>에 따르면, 재간도 총영사대리영사 사카이 요사키치는 1921년 1월 4일 외무대신 백작 우치다 코우사이에게 장덕준 실종에 대해 영국 선교사 측이 수색해달라고 요구했음을 알리면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장덕준은) 여운형 일파의 기독교도이자 배일파의 유력한 인물이다. 그의 행동을 주의깊게 살펴봤다. (...) 장덕준은 기독교도로서 또 언론계에서도 상당히 유력한 관계로 이 사건은 의외의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남 헌병대장 스즈키 타케오미는 1920년 4월 13일 조선헌병대살여관 마에다 노보루에게 장덕준의 행방을 조사한 결과를 보고했다. 이 보고서는 <선인 장덕준의 행동 및 행위 수사에 관한 보고서>라는 제목으로 <불령단 관계 잡건>에 실렸다. 보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덕준은 1920년 120월 하순 청진에 도착해 경성, 나남, 회령 지방을 거쳐 10월 30일 경성군 경성읍에 사는 박태원과 함께 경성군 상산봉으로부터 간도로 건너갔다. 장암동 지방에 있는 일본군 토벌 상황을 시찰하기로 하고, 11월 1일 용정촌에 도착해 조선인이 운영하는 삼성여관에 투숙하면서 각지를 둘러보고, 조선인 거류민회에 여러 차례 나가 강연 등을 했다. 11월 6일 장덕준은 파견헌병대장 와타나베 대위를 방문해 토벌 상황의 시찰과 훈춘 방면에 이르기까지 보호편의의 제공을 부탁하여 와타나베 헌병대장이 이를 승낙했다. 이날 헌병 일행의 마차를 타고 6일 오후 6시 용정촌을 출발해 밤 10시경 국자가에 도착했다. 이날 밤 사람들의 권유로 국자가에 있는 동양여관에 투숙했다.

장덕준은 다음날 7일 홀연히 여관을 나와 국자가에서 지인 김인섭과 만나 음식점에 들어가 음주를 하고 잠시 뒤 나와 다시 요정 송월루에 올라가 숙박하고 나온 사실이 있다. 그 후 장덕준의 행동에 대해 국자가 지방에게 상세히 조사를 했는데, 8일 밤 국자가 우시장 여인숙 관동여관에 투숙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장덕준으로 사료되는 조선인이 1명 나갔다는데 과연 장덕준인지 여부를 판정할 자료가 불충분하다.

이는 실종 당시 장덕준의 행적에 관한 가장 상세한 조사 기록으로, 당시 일본이 장덕준 실종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음을 의미한다. 한편 장덕준의 동료였던 김동화는 "토벌대 사령부가 11월 6일 한밤중에 헌병을 파견해 잠자던 장덕준을 깨워 내일 와룡동에서 토벌전이 있으니 오늘 밤 마차로 국자가에 가서 토벌대와 동행하라고 하면서 군마, 군복, 방한외투, 방한화 등을 그에게 주었고, 장덕준은 그들을 따라 얼어붙은 해란강을 건너 모이산 쪽으로 떠난 뒤 실종되었다."고 증언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역시 같은 주장을 했지만, 일본 쪽 조사결과에는 이런 내용이 발견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간한 <독립신문>은 1921년 10월 28일자 기사에 '장덕준씨 조난 상보'를 싣고 장덕준이 암살당한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는 1930년 4월 1일 창간 10주년을 맞아 추도회를 열고, 창간기념호 9면에 "본사원 장덕준군은 조선에서 언론보도를 위하여 생명을 희생한 효시다."라며 장덕준의 죽음을 공식화했다. 이리하여 장덕준은 한국 언론 사상 최초의 순직기자가 되었다. 다만 장덕준이 일본군에게 살해당했는지의 여부는 현재까지도 불확실하며, 그의 최후는 현재까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장덕준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한국기자협회는 1971년에 ‘기자협회 기장(記章)’을 제정하였는데, 메달의 뒷면에는 장덕준 기자의 얼굴을 새겨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