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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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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김소래(金笑來)
도호 마루진, 원백(元伯)
별호 몰나(沒那), 불폐(不吠), 연산(蓮山)
출생 1889년 12월 6일
함경도 영흥대도호부 영인면 연동리[1]
(현 함경남도 금야군 연동리)
사망 1933년 3월 24일
북만주 노야령 팔도하자 어복촌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
서훈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원종교 창시2.3. 망명의 나날2.4. 대진회 조직과 독립운동단체 통합 노력2.5. 거듭된 시련2.6. 교세 확장 시도2.7. 통일전선운동과 주의촌 건설2.8. 일제의 만주 침략에 맞서다2.9. 비참한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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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원종교(元倧敎) 교주.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김중건은 1889년 12월 6일 함경도 영흥대도호부 영인면 연동리(현 함경남도 금야군 연동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4살 때 종백부 김교언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그의 집안 내력과 가정 환경은 잘 알려지지 않았고, 단지 부친이 동학도였다는 것만 알려졌을 뿐이다. 이후 경제적으로 힘든 시절을 보낸 김중건은 1905년 17세의 나이에 고향에서 서당을 운영하며 생계를 꾸렸다. 그는 예언서 술서(術書) 등을 폭넓게 섭렵하며 노장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던 1907년, 김중건은 일진회의 친일 기관지 <국민신보>를 비판한 <대한매일신보>의 사설 '대국민신보'를 읽고 개화사상에 관심을 돌렸다. 당초 그는 천주교, 개신교 등을 서구사상이라 여기고 관심을 두지 않았고 계몽 운동도 외세와 동일시하며 신학문을 "왜놈의 글"이라고 간주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대한매일신보의 사설을 읽은 뒤 생각을 바꿨고, 1908년 서당을 개조해 연명학교(鍊明學校)를 열고 청년과 아동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다.

1909년 봄, 김중건은 생부 김교화(金敎和)의 권유에 따라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에 입교했다. 그는 1909년 서울로 올라와 천도교의 교화사업, 교리사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천도교는 일제의 탄압을 받고 위축되었다. 일제는 이완용 암살 미수 사건을 빌미로 1909년 천도교 간부 양한묵, 오상준 등을 구속했으며, 1910년 8월엔 천도교 기관지 <천도교회월보> 간부 4명을 체포하고 기관지 발행을 몇달 간 중지시켰다. 또한 1911년 4월에는 천도교 교주 손병희가 헌병대로 연행되면서 천도교의 독립 운동은 극도로 위축되었다. 이에 김중건은 천도교가 더 이상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기로 결심했다.

2.2. 원종교 창시

1910년 봄, 김중건은 '천기대경(天機大經)'을 저술했다. 그는 이 책에서 동학의 근본사상인 시천주(侍天主)를 부정하고 사람이 곧 하늘의 주인이라는 시인주(侍人主)를 내세웠다. 그리고 난국을 타개할 방책으로 대공화무국(大共和無國)을 주장했다. 대공화무국은 노장사상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으로, 인간은 자연의 소박한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대공화를 거쳐 무국을 실현하는 것이 최고의 이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조선에서 이를 이루려면 자주 독립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보고 독립운동에 적극 나섰다.

김중건은 1910년 9월부터 1912년 4월까지 총 10편의 글을 <천도교월보>에 게재해 자신의 사상을 더욱 구체화시켰다. 그는 천도교의 사상을 재정립한 자신의 철학인 극원철학[2]을 만들어 내고, 이를 통해 사회를 개혁해 나가고자 했다. 1911년 5월, 그는 천도교 영흥교구장으로 임명된 후 자신의 철학을 토대로 한 천도교 교단 개혁에 몰두했다. 먼저 그는 김교운(金敎運), 이두섭(李斗燮), 김택후(金澤厚) 등 영흥 지역의 젊은 천도교 신자 17명과 함께 비밀결사 '21 결의단'을 조직했고, 서울의 '천도교청년강학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천도교 개혁의 필요성과 개혁 방법을 강의했다.

이러한 김중건의 행보에 반감을 품은 천도교 본부는 1912년 1월 그를 교구장에서 해임시키고 뒤이어 출교시켰다.[3] 김중건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 21결의단을 확대시켜 '천도교신인회'라는 개혁운동 단체를 조직하고 함경도 일대의 천도교인들을 포섭했다. 그러나 천도교가 신자들에게 이단인 그를 따르지 말것을 통보해 신자 확보가 용이하지 않자, 그는 1912년 구이봉(九而峰) 산실(山室)에 들어가 <천기대경(天機大經)>과 <대종원부경(大宗元符經)>을 완성하여 극원철학을 종교화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1913년 1월 1일을 기해 건원(建元)을 선포하고 원종교(元倧敎)를 창시했다.

김중건이 창시한 원종교는 봉건적 전제정치제도, 사회경제 구조, 신분제, 가렴주구 등을 부정하고 새 질서, 새 사회 건설에 목표를 두었다. 그의 사상은 무단통치 하의 모든 정치, 사회적 억압을 타파하고 사회를 개조하고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압박, 피압박의 민족전 모순의 불합리한 현상이 제거되어야만 국가 또는 민족 단위의 소공화의 이상사회 건설이 가능하다고 봤으며, 무국의 시대로 가기 위해서는 한국의 자주독립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는 이를 위해 인물 양성이 중요하며 원종주의자들을 육성해 이러한 이념을 널리 전파시킨다면 독립운동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중건은 고향인 연동에서 첫 법회를 열고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전법회(傳法會)라 칭하고 함경도, 평안도, 경성을 돌며 전법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그의 전법 활동은 그리 활발하게 이뤄지지 못했다. 일제가 1911년 '종교취체'를 발표해 종교행위도 치안의 문제로 규정하고 한국 신종교가 정치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여 규제했기 때문이다. 일제의 방해로 더이상 국내에서 활동이 어렵게 되자, 1914년 봄, 원종 신도 윤인중(尹仁中)․김전(金田) 등과 같이 연해주와 맞닿아 있는 북간도 연길현 국자가로 망명했다.

2.3. 망명의 나날

김중건은 북간도로 망명한 뒤 독립군의 정황을 파악하기 위해 윤일중과 김전 등을 연해주 신한촌에 파견했다. 당시 신한촌에는 권업회가 조직되어 한인들의 구국계몽과 민족주의 교육, 실업 장려를 통한 한인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지위 향상에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군자금을 마련하여 각처에 토지를 구매 또는 조차하여 군용지를 마련해 독립군을 양성했으며, 사관학교인 대전학교(大甸學校)를 설립해 중견 사관을 길러내고 있었다. 또한 권업회는 러일전쟁 10주년이 되는 1914년에 제2의 러일전쟁을 기대하며 국내외 항일독립 운동자를 규합하여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윤인중, 김전 등이 신한촌에 도착했을 무렵, 권업회와 대한광복군정부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일본과 손을 잡은 러시아 정부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다. 그리고 김중건이 망명한 북간도 역시 중국 측이 자치기관을 인정하지 않겠다며 간민교육회, 간민회, 기독교우회, 청년친목회 등 독립운동단체들을 해체시키고 독립운동가들을 체포 또는 추방시켰다. 이에 김중건은 훈춘으로 건너가 새풍이란 곳에서 학생들에게 혁명이론을 가르치며 독립운동과 원종 전법의 기회를 엿봤다. 또한 훈춘에서 활동하고 있던 기독교우회 회장 황병길(黃炳吉)과의 연대를 모색했다. 그러나 황병길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협조를 거부했다.[4]

김중건은 1년간 훈춘에서 세력을 규합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자 1915년 훈춘을 떠나 백두산 기슭의 서간도 안도현(安圖縣) 도전동(道田洞)으로 옮겼다. 김중건이 이곳을 근거지로 삼은 것은 한국과 접경지역이어서 원종교를 전파할 적지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이 곳에서 '다복식(多福式) 정책'을 실현하고자 했다. 다복식 정책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자세한 내용은 확인할 수 없지만, 원종의 무국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써 농촌을 중심으로 한 사회개혁운동의 일환이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러나 안도현은 그가 생각한 것과 달리 너무 오지여서 거주민이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종교를 전파하고 다복식 정책을 펼치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에 김중건은 1916년 봄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안도현 북구(北溝)로 옮겼다. 그는 이 곳에서 원종교를 전파하는 데 힘을 쏟았고, 마침내 원종교 본부인 법회총사(法會總司)를 창설해 인재를 모을 수 있었다. 그런데 1915년 일제가 중국과 만몽조약(滿蒙條約)을 체결한 뒤 독립운동의 근거지인 북간도 지역 한인들에 대한 통치권을 주장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중국은 일제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해 한인들에 대한 단속과 취재를 강화했고, 결국 김중건과 원종교도들은 안도현 지사로부터 '불온분자로서 사회치안에 위험한 자'라고 낙인찍혀 기밀 서류를 모두 빼앗기고 경외로 추방되었다.

1916년 여름, 김중건은 원종교도 6,7명을 이끌고 왕가동(王哥洞)을 거쳐 중국 관헌의 간섭이 덜한 장백현 덕수(德水)로 옮겼다. 그러나 이곳은 오지인데다 땅이 척박하여 다복식 정책을 실천해나가기 어려웠다. 이에 김중건은 원종교를 중심으로 한 사회를 형성하고 독자적인 독립운동을 추구하기 위해 독시주의(獨是主義)를 내세웠다. 그는 대외 활동을 전혀 하지 않고 덕수에서 조용히 인재를 길려내며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이 때문에 다른 독립운동단체와 행동을 같이 하지 않았지만 처음으로 원종촌을 건설하고 이상사회 무국의 시대를 쟁취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할 수 있었다. 1919년 봄, 그는 3년만에 다시 안도현을 찾았지만 당국의 감시가 심하자 학교만 세우고 도로 덕수로 돌아갔다.

2.4. 대진회 조직과 독립운동단체 통합 노력

1919년 용정에서 3.13 만세 운동이 일어난 뒤 서간도 일대에 대한독립단, 대한독립군비단, 광복군 총영, 흥업단, 서로군정서 등이 찰성되었고 북간도엔 간도국민회, 대한독립군, 북로군정서 등이 창설되었다. 김중건은 만세운동에 대해서는 자신과 갈등을 빛었던 천도교 교주 손병희가 앞장선 점, 비폭력 수단으로 일본에 맞선 점, 민족대표들이 일본 경찰에 자진 체포된 점 등을 들어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독립운동단체들이 임시정부를 주축으로 통합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소식엔 관심을 보였다. 그는 원종교도 30여 명과 함께 덕수를 떠나 안도현으로 향했다. 그러나 가는 도중에 마적을 만나 1개월간 구금되는 수모를 겪었다.

1920년 5월 구금에서 풀려난 김중건은 화룡현 장인강에 총사(總司) 2백여 명의 청년들을 모아 안도현 흥도자(興道子)에서 대진단(大震團)을 조직했다. 대진단은 발해의 이명으로, '겨례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붙여졌다. 이 단체는 3.1운동의 비폭력 투쟁을 비판하고 무장투쟁을 내세웠다. 김중건은 단원과 군자금을 모으는 한편 단원 2백여 명에게 러시아 보병총을 지급하고 훈련시켰다.

이즈음 홍범도김좌진 등이 지휘하는 독립군이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했다. 이에 일제는 1920년 10월 중국 마적을 사주해 혼춘현 일본 영사관을 고의로 습격하게 한 뒤 이를 빌미로 일본군을 대거 만주로 파병하는 '혼춘사건'을 일으켰다. 독립군은 사전에 이 정보를 입수하고 피해 일제의 마수에 걸리지 않았지만, 일본군은 3~4개월 동안 수많은 한인 마을을 불태우고 재산과 식량을 약탈하고 한인들을 보이는 대로 학살하는 '경신참변'을 자행했다.

그 과정에서 화룡현 장인강에 있던 원종교 총사 집무실이 불타버렸고, 대진단 관련 문서들이 일본군에게 넘어갔다. 김중건은 이를 빌미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천보산(天寶山)에 끌려갔다가 가까스로 탈출했다. 그러나 그의 제자 김정락(金正洛)은 총살당했고 장인강에서 조직된 대진단 본부는 와해되었다. 다만 덕수 등지에 있던 장백현지단은 살아남아 그 일대에 활동하고 있던 흥업단, 광복단, 태극단 등 무장단체와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으며 독립 투쟁을 이어갔다.

경신참변 후, 효율적인 무장투쟁을 위해 남만주 지역 여러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운동이 일기 시작했다. 대진단은 1921년 1월 통합운동에 앞장서 남만주 지역 독립운동단체를 중심으로 한 무장단연합회를 조직했고 대진단 장백지단 본부가 있는 덕수 서곡리에서 회의를 개최했다. 이들은 압록강 연안의 각 단체의 연락 통일과 본격적인 무장 투쟁을 전개할 목적에서 전문 10조의 연합규약을 제정하고 연합회의 임원단을 선임했다. 같은 해 6월, 태극단은 광복단에 병합되었고 대진단은 흥업단에 병합되었다.

흥업단은 1920년 대종교계열의 윤세복, 김혁, 김호 등이 봉천성 무송현에 조직한 단체로, 표면상으로는 산업을 진흥시키며 그 지역 한인들 간의 순수한 친목을 도모한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항일무장투쟁을 행동 목표로 내세우고 혁명 민중 계몽훈련과 독립군 기지 건설에 힘을 기울였다. 대진단이 흥업단과 결합할 수 있었던 것은 흥업단의 종교인 대종교와 대진단의 동죠 원종교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1919년 3월 대종교 신자 50여 명이 만세운동을 벌이다가 당국의 추적을 피해 덕수로 피신하여 김중건과 합세해 독립운동을 전개한 적이 있었고, 김중건은 대진단을 결성하기 전에 50여 명을 선발해 흥업단을 지원하기도 했다.

2.5. 거듭된 시련

김중건은 1921년 1월경 원종교도들을 이끌고 또다시 안도현 도전동으로 향했다. 그는 이곳에서 그동안 미뤗던 다복식 정책을 실현시키고 각지에 흩어져 있는 청년 독립군을 총망라한 교육을 실시해 이들을 흡수하고자 했다. 그러나 김중건이 장백산맥 일대를 두루 돌아다니며 청년들을 모집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유행병이 돌아 많은 원종교도들이 병사하면서 원종교 자체가 위기에 처했다. 이에 김중건은 1921년 가을 북간도 화룡현 삼도구 원화동(元化洞)으로 이동했다. 원화동은 1910년대 함경북도 명천에서 이주한 한인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1920년대에는 삼도구가 번영하면서 교통의 요지로 변했다. 김중건은 이곳에 학교를 세우고 원종교를 전파하기로 했다.

김중건은 총사의 교단조직 체계를 정비하여 의회 역할을 하는 대종원, 종리사, 보성사, 학무사, 공무사 등을 두고 그 아래 내무, 외무, 재무, 학무 등 4개 위원회와 위생원, 대정원 등을 신설했다. 또한 지방법회에는 주무, 학무, 외무, 재무 등을 두었다. 그는 이를 토대로 교육 사업과 지방 법회조직의 육성에 힘을 기울였고, 그 결과 1921~1922년 사이에 내수동(內水洞) 등 5개 지역에 지방 법회를 설치해 총 13개 법회를 수립했다.

또한 김중건은 가능한 한 소규모의 학교라도 세우고자 노력했고, 그결과 26개교가 신설되었다. 그는 학교를 통해 원종교를 전파하고 충실한 교인과 독립운동가를 양성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교재를 편찬하고 노래를 지어 학생들에게 민족의 역사, 어문, 지리, 음악 등을 가르치면서 항일 정신을 일깨웠다. 그리고 학교마다 기숙사를 두어 집단적 생활을 통해 학생들의 조직력을 키우고 황무지를 개간토록 해 교육과 생산노동을 병행했다. 그는 또 원화동에서 대한국민단 간도지방 지단장을 맡아 각지에 연락기관을 설치하고 안도현에 교인들을 파견해 군자금을 모집했다.

그러나 1921년 12월 안도현에 파견된 청년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그의 이같은 활동이 탄로났다. 결국 일본 영사관이 파견한 경찰들의 습격으로 삼도구에 있던 김중건과 교도 김준, 김현묵, 홍참봉 등 10여 명이 검거되었다. 1922년 초, 김중건은 만몽조약에 따라 용정총영사관에서 3년간 중국 재류금지 명령을 받고 고향인 연동으로 강제 추방되었다.

2.6. 교세 확장 시도

1922년 2월 국내로 돌아온 김중건은 국내의 원종 조직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지방법회 8개소를 만들고 연흥의숙(蓮興義塾) 등 5개의 학원을 설립했으며, 당시 널리퍼지던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원산청년회와의 연대를 모색했다. 그러나 원종 총사가 있는 북간도 화룡현 원화동 지역에 유행병이 유행하면서 많은 원종교도들이 병사했고, 공산주의에 감화되어 변절하는 자들이 속출했다. 이에 원종법회 총부는 1923년 6월 원화동을 떠나 연길현 수산향 개척촌 기성리(基成里)로 이전했다. 김중건은 기존 소학교 중심의 교육 정책 대신 적극적인 원종주의자를 양성하기 위한 중학교 설립 계획을 세운 후 국내의 신도들로부터 자금을 마련하고자 했다.

1924년 봄, 김중건은 경리원을 설치해 원종 총사의 경제적 기반을 다지고 교리 강의를 담당할 만종학원 및 건원총학을 설립해 원종교의 사회운동을 확대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당시 간도에 대흉년이 찾아오면서 그의 계획은 바로 시행되지 못했다. 1925년 봄, 김중건은 3년간의 중국 재류금지 기간이 끝나자 원종 총사가 있는 기성리로 간 후 자신의 계획을 실행시켰다. 먼저 원종 조직을 여성 중심의 주의화 운동으로 강화해 나가기로 하고 종우회, 여성종우회 등의 단체를 조직했다. 또한 <새바람> 잡지를 발간해 만주 각지에 배포하여 한인들의 항일의지를 고취시키켰으며, 순회 강연, 연극 활동 등 계몽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녹녹치 않았다. 국내 영흥, 단천 등지의 원종 지회가 일제에 의해 해산되었고, 1925년 6월 중국, 일본간에 체결된 이른바 '삼시협정(三矢協定)'으로 인해 장백, 선화 등지의 지회가 중국 지방 당국으로부터 탄압받았기 때문이다. 김중건은 난관을 극복하고자 새로운 총사를 짓기로 하고 화룡현, 안도현, 장백현 등지에 지방법회를 세워 20여 개소로 늘렸으며 신도를 500여 명으로 확대했다.

그는 이를 기반으로 원종주의자를 양성하기 위한 중학교 설립 계획을 단행해 만종학원과 건원중학교를 설립했다. 당시엔 다른 독립운동 단체들이 세운 학교들이 대거 문을 닫는 상황이었기에, 한인들은 김중건이 세운 원종교계 학교로 모여들었다. 원종교는 종교적 성격을 띤 조직운동이며 친 농업 성향이 강해 농민들의 지지가 높았으며, 김중건의 항일혁명 사상은 용정의 한인 사회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만주 전역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 단체들이 여기에 견제를 걸어오기 시작했다. 1926년 1월 용정에서 조직된 동만청년동맹(東滿靑年同盟)은 원종교 학생들에게 접근해 모스크바 유학을 시켜준다며 공산주의자로 포섭하고자 했다. 김중건은 공산운동에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했고, 이로 인해 동만청년동맹으로부터 온갖 질시와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는 이에 맞서 1926년 여름 만종학원과 건원중학을 합쳐 농대학원(農大學院)을 설립했다. 그는 이 학원에서 그동안 물질을 초월한 인물을 육성하고자 했던 기존의 교육 정책을 버리고 민중집단의 수준을 고등교육으로 끌어올리면서 특별 강좌, 순회 연극 등을 통해 이웃과 함께 하는 신앙공동체의 민중주의를 채택했다. 그는 이를 통해 원종 교인들이 공산주의에 동화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동만청년동맹의 원종 청년들에 대한 포섭 활동이 더욱 조직적으로 전개되면서 1927년경 원종교단 내에 분열이 일어나 상당수 신도들이 공산주의로 돌아섰다. 이에 김중건은 분노해 종우회를 종우총연맹(宗友總聯盟)으로 개편하고 반공 운동을 전개했다.

2.7. 통일전선운동과 주의촌 건설

공산주의자들과의 거듭된 마찰로 교세가 흔들리는 것에 위기감을 느낀 김중건은 1928년 봄 제고문(提告文)을 발표했다. 그는 민족적 단일전선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민족진영과 공산진영과의 통합운동을 전개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그는 신민부 총사령관 김좌진과 대종교 교주 윤세복 등을 만나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하고 통일전선을 구축하고자 했지만 김좌진과 윤세복이 공산주의자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기 때문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김중건은 남북 만주의 각 독립 운동단체를 전부 해체시킨 뒤 새로운 '개인본위합법적 재중단일운동선' 결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통일전선운동은 어떻게 통일시킬 지를 놓고 합의를 이루지 못했고, 독립운동단체들은 각기 분열하고 말았다.

1928년 가을, 김중건은 북만주 영안현 영고탑에 조선민사를 세우고 통합노력을 지속했다. 또한 그는 동경성 하음자(下窨子)에 새로운 운동체를 만들고 척식정책을 통한 농촌주의 실험과 운동 근거지 확립을 위한 주의촌 건설을 계획했다. 김중건은 이를 ABC 운동이라고 칭했다. A는 농주의(儂主義) 이념 아래 조선 혁명을 완수하고 농촌연맹, 자치공작, 공유제도를 실현하는 것이고, B는 첫 단계의 완수를 기반으로 세계 혁명을 완수하는 것이며, C는 무국 세계로 국가라는 경계가 필요없게 되어 국가 간의 분쟁이 없어져 불평이 없는 유토피아가 실현되는 것이다.

1929년 봄, 김중건은 만주 흑룡강성 영안현 와룡항 영산촌 팔도하자(八道河子)에 새로운 원종촌 근거지를 마련했다. 이 곳은 덕성산과 망미산, 호룡산, 달호산이 둘러싼 분지였고 노야령, 분수령에서 시작된 합마하(蛤螞河)가 흐르는 기름진 곳이었다. 그는 이 곳의 토지를 8년 면제로 조차하고 60~70호 정도의 농민을 수용해 주의촌 건설에 착수했다. 당시 중국 정부가 한인들을 탄압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와중에 김중건이 이럴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1927년 11월 정의부가 길림에서 길림성장과의 교섭을 통해 한인들의 중국 귀화를 조건으로 한인구축령을 철회하는 합의를 받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김중건은 팔도하자의 황무지를 개척하고 주의촌을 건설하고 마을의 이름을 어복촌(魚腹村)[5]으로 지었다. 김중건은 자신이 구상한 농촌주의에 따라 공작분유제(工作分有制)를 실시했다. 농사를 포함한 모든 노동은 동대(働隊)를 편성해 공동으로 수행하고, 분배는 배급카드제로 운영되었다. 동대는 부락 단위로 대대, 종대, 분대로 나뉘어지고 각 대에 장을 두었다. 주의촌의 모든 활동은 이와 같은 종대로 이뤄졌으며, 유사시에는 군대 조직으로 편성되었다. 또한 분배는 노동시간에 따라 평가되어 배급카드에 기재된 수치에 따라 이뤄졌는데, 이를 사유재산으로 인정했다. 다만 노무에 있어서는 절대 강제성이 없었다.

또한 김중건은 원종 교단을 '행(行)' 체제로 재정비했다. 즉, 중앙부의 기관이 총무행, 농무행, 의무행, 재무행, 학부행, 공무행, 의무행, 법무행 등 8행으로 구성되었다. 행은 지금의 부(部)와 같고, 각 행의 주관자는 '주역'이란 직책을 맡았다. 그리고 동경성, 하음자, 두은구, 이도하자 등지에 농우동맹 지부를 설치하여 세력을 더욱 다졌으며, 어복학원, 하음자학원 등을 설립했다.

2.8. 일제의 만주 침략에 맞서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김중건은 일본군과 전면적인 무장투쟁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그 준비에 돌입했다. 그는 어복촌에 대일전투 총지휘부격인 진우회(震友會)를 창립하고 진우회 산하에 조선혁명지도처를 창설하고 독립운동 단체의 총궐기를 주장했다. 그리고 ABC 운동의 기본 방침에 따라 세 가지의 새로운 정책을 수립했다.
첫째, 농우동맹 백만 결속운동을 전개한다.
둘째, 만주 대십자(大十字) 정책을 추진한다.
셋째, 동방 약소민족 해방운동 대연맹을 촉성한다.

농우동맹 백만 결속운동은 농우동맹 중앙부, 조선혁명지도처, 진우회, ABC당 등 총력을 집중해 혁명운동자 100만 명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주 대십자 정책은 여순, 대련에서 흑하로 연결된 남만주 철도와 만주리에서 수분하까지 이어지는 중동철도가 서로 교차하는 하얼빈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4개선 주요 역에 비밀조직을 설치하자는 것이었다. 이 비밀조직의 임무는 적의 사정을 살피고 이를 통해 얻어낸 정보를 하얼빈 지점에서 수집한 뒤 중앙부에 보고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작업이 성숙되는 대로 상하이로 가서 중국 국민당과 연합전선을 형성하려 했다.

김중건은 이를 이루기 위해 하얼빈에 이평림을 파견하여 대십자 정책을 추진하가게 했고, 동만주 지역에 조남호를 파견해 '조선혁명지도처 연변사무처'를 설치하고 그 지역의 원종 조직체를 강화해 청년들을 모집하게 했다. 이후 일제가 만주사변을 성사시킨 후 1932년 3월 만주국을 수립하자, 재만 독립운동단체들과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중국 민중들과 함께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김중건은 반공 성향이 강한 길림구국군의 왕덕림 부대와 연합해 항일공동전선을 펼치려고 했다.

그는 길림구국군 부상령관 쿵셴룽(孔憲榮)과 연합에 합의한 뒤 동녕현의 길림구국군 총사령부에 김대용 등 4명을 파견했다. 이들은 소련에서 만주로 건너온 강국모(姜國模) 부대와 손을 잡고 공동전선을 구축했으며, 동녕현 지역의 기독교 단체들의 호응을 얻어 전선에 가담시켰고 동녕현과 불야구 지방의 한인 청년들을 대거 모집했다.

1933년 1월, 원종교도 부대는 최후의 거점인 동녕현에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길림구국군과 함께 격렬히 싸웠다. 그러나 전선은 붕괴되었고 길림구국군은 혼란 속에 만주-소련 국경 밀림지대로 퇴각해버렸다. 원종 부대는 노흑산 방면으로 퇴각했고 일부는 일분군에게 체포되었다. 그러던 1933년 3월 초, 한국독립군의 지청천으로부터 김중건에게 연합하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김중건은 지청천의 제의를 받아들여 평소 비축했던 물자와 장병, 그리고 간부 50여 명을 보냈다.

2.9. 비참한 최후

1933년 3월 20일, 동자구에 주둔하던 이광(李光)이 이끄는 길림구국군 부대가 어복촌에 나타났다. 김중건은 자신들과 함께 일제에 맞서 싸운 길림구국군이 오자 매우 반가워했다. 그러나 불행히 그가 맞이한 부대는 그가 그토록 싫어했던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광 등은 김중건과 어복촌의 원종 교도들을 회유, 협박하면서 자신들에게 협조할 것을 종용했다. 이에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된 김중건은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자 3월 24일, 공산주의자들이 병사들을 이끌고 마을로 들어와 김중건과 간부 5명을 체포해 중국인들이 사는 마을로 끌고 가 감금하고 고문을 가했다. 당시 김중건에게 자백할 것을 요구한 죄목은 다음과 같다.
1. 김소래[6]는 용청총영사관의 기밀금을 받아먹고 민생단을 조직했다.
2. 김소래 외 25명은 민생단 결사대원이다.
3. 어복촌 주민은 모두 민생단원이다.
4. 다수의 혁명 동지를 살해하였다.

민생단은 1930년대 초 일본 관헌의 지도하에 친일파 민족 개량주의자들과 반공분자들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운동을 박멸할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였다. 일제는 투항해온 민족주의자와 친일파, 귀순 변절자들을 이용해 공산주의 무장투쟁 단체의 내부 분열공작을 시도했다. 민생단은 1932년 7월에 사실상 해체되었지만, 만주의 공산당원들은 민생단에게 이를 갈며 1932년 10월부터 민생단 스파이를 적발, 폭로하기 위한 '반민생단 투쟁'을 전개했다. 이로 인해 혁명 대열 내에 상호 의심, 알력, 동지 간의 불신이 심화되어 혼란이 발생했고, 많은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민생단원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단되었다. 김중건은 평소에 공산주의를 적대시했기에 애초에 해산된 민생단원이란 누명을 뒤집어 쓴 것이다.

김중건 등이 끝내 자백을 거부하자, 공산주의자들은 1933년 3월 24일 어복촌 전주민을 모아놓고 총검을 찬 중국 군인들이 에워싼 가운데 김중건과 간부들을 처형했다. 이때 김중건의 나이는 45세였다. 김중건이 살해된 후 어복촌은 불타버렸고 주민들은 강제 해산되었다.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독립군은 김중건을 구출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지만 이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나버렸다. 김중건이 죽은 후 원종교는 소멸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중건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경주 김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김윤경도 이 마을 출신이다.[2] 유교, 도교, 불교에 기독교 이론을 포함하여 종합한 우주론[3] 천도교 측에서는 김중건이 영흥군 교인 주창원과 모의하여 공금을 횡령해서 출교시켰다고 주장한다.[4] 반면 황병길은 대종교 교주 나철과의 연대를 꾀했지만 이 역시 성사되지 않았다.[5]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는 것처럼 농우들도 농촌주의를 떠나 살 수 없고 '주의촌'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6] 김중건의 도호가 소래(笑來)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