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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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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구연영_1.jpg
출생 1865년 6월 20일
한성부
사망 1907년 8월 24일[1] (향년 42세)
경기도 이천군 읍면 장터
본관 능성 구씨
춘경(春景)
직업 유학자, 선교사
가족 구철조(부)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1022호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종교 유교 (성리학)기독교 (개신교, 감리회)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의병장2.3. 개신교 개종2.4. 전도 활동과 민족 운동2.5.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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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유학자, 개신교 선교사.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2.1. 초년기

1865년 6월 20일 한성부에서 구철조(具哲祖)의 3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집안은 전통 양반 가문인 능성 구씨로, 선조 대대로 경기도 광주 지역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부친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상경하여 구연영을 낳았다. 구연영이 초년기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명문가 출신인만큼 한문을 공부하고 과거 급제를 통해 입신 출세를 도모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18세 이전에 변미례와 결혼하여 슬하에 4형제를 두었는데, 맏이 정서(1883년생), 둘째 성서(1884년생), 셋째 완서(1898년생), 그리고 넷째 종서(1902년생)가 있다.

구연영이 장성하여 무슨 활동을 했는지는 기록이 부족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후에 그와 의병 운동을 함께 하는 주요 인물들이 서울과 이천 출신이었던 것으로 짐작하건대 서울과 이천을 오가며 인맥을 다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설에는 구연영이 경기도 광주군 도척면 궁평리에 정착하여 10여 년간 가업에 종사해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고 하지만, 이를 입증할 기록은 없다.

2.2. 의병장

구연영이 30세가 되던 1895년 6월 을미사변이 일어났고 11월 15일에는 단발령이 공포되었다. 이에 유생들이 각지에서 얼아나 '위정척사'를 외치며 의병을 조직, 무장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때 경기도 이천에서도 김하락이 의병을 일으켰는데, 여기에 조성학, 김태원, 신룡희, 그리고 구연영이 가담했다. 김하락의 진중일기에 따르면, 구연영은 양근, 지평에서 군사 300여 명을 모았고, 이외에도 주변에서 의병이 속속 도착하면서 이천에 집결한 의병군의 숫자가 900여 명이었다고 한다.

1896년 1월 17일 일본군 수비대 100여 명이 이천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수한 이천수창의소는 의병들이 정규 훈련을 받지 못한 민병대임을 감안해 복병 전술로서 대항할 것을 결정하고 광현을 중심으로 야산에 매복하여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기로 했다. 이후 1월 18일, 의천 의병과 일본군이 맞붙으면서 광현 전투가 벌어졌다.

진중일기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일본군 180명 중 불과 2~3명만 살아돌아갔다고 한다. 이후 2월 12일, 일본군 200여 명이 4개 대로 나뉘어 이천을 기습했다. 구연영은 이현 동구를 지키며 이틀간 분전했지만 우세한 화력을 갖춘 일본군 수비대에 밀려 패퇴했다. 그는 원주로 피신해 그곳에서 다시 새롭게 의병을 모집하여 20여 일만에 이천에 귀환했다. 그 후 각지에서 의병이 집결해 다시 2천여 명의 부대를 편성했고 박준영이 대장을 맡았으며 구연영은 중군장을 맡았다.

의병대는 진지를 광주 남한산성으로 옮겼고 구연영은 성 중앙부 수비를 맡았다. 이천 의병이 남한산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접한 안성 방면 의병, 춘천 방면 의병들이 합세하면서 세력을 확장하자, 조정은 서울 친위대와 강화도 주둔군을 남한산성에 파견해 성을 탈환하려고 20여 일간 공방전을 치렀지만 의병대에게 번번이 패퇴했다. 이에 관군은 이간책을 써 동문을 맡고 있던 김귀성을 포섭한 뒤 김귀성을 통해 박준영까지 꾀어냈다. 관군은 박준영, 김귀성에게 각각 수원 유수와 광주 유수 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했고, 두 사람은 이에 응해 내부에서 호응하기로 했다.

이후 구연영이 순찰을 돌다 김귀성의 담당 구역 안에서 관군과 연락을 취한 봉서를 습득해 김귀성을 체포했지만, 박준영이 몰래 김귀성을 풀어줘 도망가게 했다. 또한 박준영은 1896년 3월 22일 밤 군사들에게 술과 고기를 잔뜩 줘서 잠들게 한 후 새벽녘에 서문과 북문을 열어 관군의 입성을 열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의병들은 관군에게 쫓기면서 배신자 박준영 부자를 죽인 뒤 남한산성에서 도주했다. 이렇게 남한산성을 허무하게 내준 의병대는 김하락을 중심으로 구연영, 신용희, 김태원에 의해 재집결했다. 하지만 김하락 등은 광주, 이천 지방에서의 의병 활동이 더이상 불가능하다는 걸 인지하고 김하락의 고향인 경상도로 옮겨 그곳에서 모병한 후 다시 북상하기로 했다.

의병대는 여주, 홍원, 백운, 제천, 단양, 풍기, 순흥, 영천, 유동, 예천, 안동, 의성을 거쳐 의흥 압곡사에 진을 쳤다. 여기에 안동 의병과 관서 의병의 협조하에 연합 작전을 펴 경북 일대를 주요 활동지로 삼았다. 5월 14일, 대구에 있던 관군 100여 명이 의홍으로 진격해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김하락은 화현에 잠복했다가 접전을 벌였다. 이때 구연영은 안덕 후방을 맡아 아군을 후원했다. 이 전투는 비봉산으로 옮겨져 10여 일에 걸쳐 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의병대는 화력과 보급의 부족으로 계속 후퇴해 지동점에까지 밀렸다. 결국 구연영은 전세가 불리하다는 걸 깨닫고 자신을 따르던 경기도 출신 의병 30여 명을 거느리고 퇴각했다.

2.3. 개신교 개종

구연영은 광주로 돌아간 뒤 의병 활동을 접고 고향에 칩거했다. 그러다가 6개월이 지난 1897년 2월, 그는 서울 남대문 안 상동교회의 스크랜턴 선교사를 찾아갔다. 원용한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구연영은 누구의 전도도 받지 않고 스스로 찾아와 기독교인이 되었고, 교인이 된 후에 먼저 집안에서 양반, 상인의 신분적 구별을 철폐해 자신이 기독교인이 되었음을 분명히 밝혔다고 한다.

당시 기독교는 법적으로 공인되어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었지만, 양반들은 기독교를 "서양 오랑캐의 이교"라고 여기고 배척했다. 일례로 영남 유림계 거두인 간재 전우3.1 운동 때 독립청원서에 서명해달라는 제안을 받자 "예수교를 배척하고 공자교를 받들지 않는 한 서명할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런데 구연영은 전통 양반 가문의 후예로 '위정척사'를 기치로 내걸며 의병 운동을 벌이다가 6개월간의 공백 끝에 기독교로 개종한 것이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구연영의 '개인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는 기록이 없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민족 운동 성취를 위한 방법으로 기독교를 택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그는 자신과 함께 의병 활동을 했던 안옥희, 장춘명, 한창섭, 전무호 등 여러 인사들을 설득해 기독교로 개종하게 했다. 또한 구연영은 자신보다 열 살 아래인 전덕기 목사를 찾아가 엡웟청년회 조직에 함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엡웟청년회는 한국에서 '청년'이라는 이름이 붙은 최초의 단체로서 '청년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이 단체는 감리교의 신앙 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구한말의 상황에도 관심을 보이며 충군애국과 국권 회복을 위한 정치, 사회단체로서의 역할도 아울러 수행했다. 그는 이 단체에서 열렬히 활동했고 <신학월보>에 엡웟청년학원 설립을 위한 모금 운동을 전개했다.

2.4. 전도 활동과 민족 운동

구연영은 기독교로 개종한 뒤 집안으로부터 추방당했다. 이에 그는 선교사에게 월급을 받고 일하는 권서인(勸書人)이 되어 노루목에 정착하고 살면서 전도 활동을 전개했다.

1901년 서원보 선교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구연영은 노루목 지방 관리가 청년들 사이에 유행하던 노름을 금하지 않고 오히려 방조하자 거세게 항의했다고 한다. 이에 관리는 앙심을 품고 있다가 마을 공동우물 귀신에게 바치는 고사를 지낼 때 교인들이 참석하지 않을 것을 알고 마을 사람들을 선동해 교인들이 우물물을 마시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교인들은 이에 항의했지만, 관리는 마을 주민들의 공통된 의사에 따를 뿐이라며 회피했다. 이에 서울에서 선교사가 내려와 지방 관리를 힐책하면서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

구연영은 이렇듯 신앙 생활을 충실히 수행했고, 1902년 미국 감리회 조선 매년회에서 권사(勸師) 직분을 받게 되었다. 권사란 본처 전도사와 함께 당시 한국인에게 주어진 교회 지도자 직분으로, 본처 전도사가 목회자라면 권사는 평신도로서 지역 교회를 관리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이후 구연영은 이천 읍내로 이주하여 이천 구역 24개 교회를 돌보는 책임을 맡았고, 아들 정서도 권사가 되어 부자가 함께 이천, 광주 지역 교회를 돌봤다. 또한 한국인 목회자 양성을 위한 집중 신학 교육과정인 신학회에 참석하여 목회자 수업을 받았고, 1905년 이천 구역 담임 전도사가 되었다.

구연영은 이천 구역 초대 담임 전도사로서 이천읍을 중심으로 광주, 장호원, 여주, 음죽, 용인, 안성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19개 교회 1,302명의 교인을 지도했다. 그러면서도 민족 운동을 지속하기로 결심해 구국회를 조직했다. 그가 조직한 구국회가 정확하게 어떤 모습으로 이뤄졌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자료가 없지만, <독립지혈사>에 따르면 구국회는 信, 望. 愛를 강령으로 삼았다고 한다. 즉, 구국회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믿음, 소망,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이를 위해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 외에 조국과 동포를 사랑하고 정의로 단결하여 모르는 사람을 깨우치는 걸 목표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발표되자, 구연영은 이천, 광주, 여주, 장호원 등지를 순회하면서 군중 집회를 통한 구국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그는 일본의 침략행위를 규탄하고 조약 체결을 철회할 것을 촉구했으며, 국권 수호를 위해 국민들의 단결을 호소하고 시장 철시를 통한 비폭력 저항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특히 일진회의 매국 활동에 대한 규탄은 그가 주도한 군중집회의 주요 화두로 떠올랐다. 대한매일 신보 1907년 8월 23일자 기사에는 구연영의 구국회 활동에 대한 내용이 실렸다.

구연영은 을사조약에 반발하여 일어난 을사의병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일진회 규탄 강연을 자주 벌였다. 이에 일제는 그를 처단하기로 결정한다.

2.5. 최후

1907년, 일본군 헌병대는 이천에서 일어난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광주, 이천으로 진격하여 의병대를 격파하고 이천에 주둔했다. 이때 구연영의 밑에서 서사로 일하고 있던 이용주(李龍周)가 구연영을 밀고했다. 결국 구연영은 아들 구정서와 함께 일본군에게 체포되었고 1907년 8월 24일 이천 장터 미루나무에 묶인 채 아들과 함께 총살당했다. 이때 구연영의 나이 43세, 아들 구정서의 나이 25세였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29일자 기사에는 이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후 구연영은 1963년 3월 1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고, 아들 구정서 역시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그의 유해는 당초 경기도 광주시 도척면 궁평리에 안장되었다가, 2002년 11월 1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1] 음력 7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