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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의 상징인 육각성(다윗의 별, 다윗의 방패). 유대인들은 사후 묘비에도 육각성 표시를 한다. | 유대교 전통 모자 '키파'를 쓴 유대인 남성[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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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대인은 '유대 지역의 사람(Judea·Judaea人)'이라는 뜻을 지니는 민족명이다.2. 설명
한자로는 유태인(猶太人)이라고도 한다. 즉 유대인과 유태인 어느 쪽으로 써도 맞는 표현[2]이지만, 한자문화권이 아닌 나라들은 원어쪽을 존중하기에 보통 '유대인'을 널리 쓰고있는 추세이다.[3] 유대인은 기원전 10세기부터 기원전 6세기까지 존속했던 국가인 유다 왕국의 후손으로 간주되며, 근연민족으로는 이스라엘 왕국의 후손인 사마리아인이 있다.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유대인은 중동의 히브리인에서 기원한 이스라엘 12지파 중 유다 지파, 또는 유다 왕국의 후손들을 가리키므로, 이스라엘 왕국 분열 이전의 고대 히브리인 혹은 고대 이스라엘인(בְּנֵי יִשְׂרָאֵל, Israelites)을 '유대인'이라 통칭하는 것은 학술적으로 틀린 표현이다. 이 이스라엘인은 이스라엘, 곧 야곱을 시조로 하는 민족을 뜻한다. 사실 왕국 분열 이후에도 유다 왕국의 백성들은 스스로를 '이스라엘 자손'으로 여겼기 때문에, 학술적인 면에서 '유대인'은 남왕국도 무너진 뒤, 그 유민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간 이후 아니면 페르시아 시대부터 쓰인다 (Coogan, The Old Testament). 따라서 밑에 유대인으로 등재돼있는 다윗, 솔로몬도 유다 지파 사람일지언정, '유대인'은 아니다. 그러나 실생활에서 이러한 구분 없이 표현이 무분별하게 남발되고 있으며, 나무위키 내의 여러 항목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구수는 약 1500만명 가량으로 추산된다. 2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인구가 1700만명이었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 및 전투로 인해 인구가 크게 줄어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1100만 안팎으로 줄었었다, 이후로 유대인이 많이 남아있던 미국과 소련에 베이비붐이 불면서 유대인들의 인구는 조금씩 회복되었지만 1960년대~70년대에 걸쳐 이들 국가의 베이비붐이 끝나면서 미국과 소련 유대인의 출산율은 인구대체수준을 밑돌게 되었고, 점차적으로 고령화되어서 21세기에는 감소세에 들어서게 되었다. 다만 미국 유대인의 출산율이 1명대 중반에 그치는 것에 반해 이스라엘의 건국 이래로 비교적 높은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2030년대에는 1930년대 수치를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3. 언어 표기
관련 언어 표기 | |||
히브리어 | יְהוּדִי / יְהוּדִים | yehudi / yehudim | 예후디 / 예후딤[4] |
이디시어 | ייִד / ייִדן | yid / yidn | 이드 / 이든 |
라디노어 | ג׳ודיו / ג׳ודיוס | Djudio / Djudios | 주디오 / 주디오스 |
유대타트어[5] | ז׳אוּהאוּר / ז׳אוּהאוּרהאָ | Çuhur / Çuhurho | 주후르 / 주후르호 |
아람어[6] | ܝܺܗܽܘܕ݂ܳܝܳܐ / ܝܺܗܽܘܕ݂ܳܝܶܐ | yəhûḏāyā / yəhûḏāyê | 유다야 / 유다예 |
아랍어 | يَهُودِيّ / يَهُود | yahūdiyy / yahūd | 야후디 / 야후드 |
암하라어 | አይሁዳዊ / አይሁድ | āyihudawī / āyihudi | 아이후다위 / 아이후디 |
페르시아어 | یهودی / یهودیان | yahudi / yahudiyân | 야후디 / 야후디연[7] |
기타 언어 표기 | ||
한국어 | 표준어 | 유대인 |
개신교 성경 | ||
한자어 | 유태인(猶太人) | |
공동번역 성서 | 유다인[8] | |
가톨릭 성경 | ||
과거 가톨릭 표기 | 유데아인 | |
영어 | Jewish people / Jews·Jewry | |
중국어 | 犹太人 | |
일본어 | ユダヤ人 | |
독일어 | Jude(남성형 단수)[9]/ Juden(남성형 복수) Jüdin(여성형 단수) / Jüdinnen(여성형 복수) |
4. 구분 기준
유대인 집단 내에서 스스로를 다른 민족과 구분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준은 다름아닌 유대교 신자 여부이다. 즉 유대 공동체에 살며 시나고그(유대교 교당) 등지에서 모여 정기적으로 안식일과 기타 유대 휴일에 예배를 드리고 유대 율법(보통 코셔가 가장 중요하다.)을 따르면 유대교를 믿는다고 본다. 남자의 경우에는 포경수술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보통의 경우 랍비에게서 유대인 증명서를 받거나 혈연(특히 모계쪽이 유대인인 경우)이 있는 경우 두 가지뿐이다.이스라엘에서는 조부모 중에 한 명만 유대인이면 유대인으로 간주해 이민을 받아주다가 네오나치가 발생해 반유대주의적 폭력을 휘둘러 충격을 받기도 했다.# 또한 이스라엘에서는 유대인 분류 중에서 '힐로니'라고 불리는 비종교적인 유대인 부류가 있다. 하레디(극정통. 인구 7.3%), 다티(종교적. 인구 8.8%), 마소르티(전통적. 24.3%), 힐로니(세속적. 33.1%).
흔히 이스라엘인이라고도 불린다. 이스라엘인은 민족명이기도 하고 현대 이스라엘의 국민(영어로는 Israelis라 하여 민족명 Israelite와 구분한다)을 의미하기도 한다. 민족으로서 모든 유대인은 이스라엘인이지만, 국적으로 따지자면 이스라엘인이 아닌 유대인도 많고 이스라엘인 중에는 아랍인 등 유대인이 아닌 민족도 많이 있다.
유대인들 간에 피부색 같은 특징으로 인한 차별이나 배척이 없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유대교로 개종하는 순간 민족이나 혈통[10] 같은 건 무시하고 '우리는 한 조상을 모시는 가족'이라는 개념으로써 받아들여 준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2천년 이상 지속된 디아스포라를 통해 수많은 나라에 흩어져서 살다보니 어느 국가,집단으로 가도 소수고 거기서 자기들끼리만 뭉친다면 바로 들통나 배척당하고 소멸할 수 있었기에 이들은 속인주의나 속지주의에 비할 만한 속교(敎)주의에 가깝게 혈통을 포기하고 유대교의 전통을 지키며 종교의식과 윤리규범에 따라 살면 유대인이라고 인정해 주는 것. 따라서 유대인의 외모가 로스차일드 가문이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등의 예와 같은 유럽인의 모습으로써 대변되기에 그냥 유럽인 계열의 한 민족으로만 알려졌을 뿐 유대인이라는 민족은 어디까지나 중동의 셈어파 민족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중국의 황인종[11]이나, 흑인[12] 중에서도 유대인이 소수 존재한다. 아래 문단 참고. 즉, 유대인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교육받고 만들어지는 민족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민족 사회임에도 단일민족정책을 펴고 아슈케나짐, 세파르딤, 베타 이스라엘 등 출신 성분에 따라 빈부격차가 심한 편임에도 간신히 국가 유지가 가능해지는 것.한국인들이 제사도 지내고 점도 보고 교회에도 가고 하듯이 유대인들 모두가 근본주의적인 전통을 고수하며 살지는 않고 적당히 다른 종교나 문화도 누리며 평범하게 살거나 혹은 개종하여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많긴 한데, 이들도 편의상 유대인으로 분류하고는 있지만 하레디나 일부 랍비들은 인정 못하는 것 같다. 유대인 하면 키파에 히브리어를 쓰고 이상한 복장에 고리타분한 이미지를 연상시키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평범한 복장에 다른 민족들처럼 살고 히브리어가 아닌 자국어로 대화한다. 사실 랍비는 점잖은 케이스고 하레디는 아예 이스라엘 주류 사회와도 갈등을 벌이는 꼴통들이라...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그 자식은 유대인으로 인정이 된다. 즉 모계 사회이다. 다만, 모계 사회라고 하지만 자식의 성씨는 남편의 것을 물려주며, 여성의 지위가 더 높지도 않다. 유대인 사회가 모계 사회인 이유는 유럽 전역으로 흩어지게 되면서 심한 박해를 받게 되었기에 유대민족의 전통과 종교, 윤리 규범을 눈에 띄지 않게 가르치려면 어머니가 집안에서 가르쳐야 했고, 어머니가 유대인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최소한 절반은 유대인 혈통이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종족의 정체성 유지를 위해 그리 된거지 여성의 권력이 더 강해서 그런 게 아니라는 뜻. 일례로 보수적인 유대인인 하레디를 보면, 유대교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토라는 오직 남성만 공부할 수 있고 여성은 토라 공부를 하는 남편을 물심양면 지원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그걸 영광스럽게 여겨야 한다. 그리고 하레디 사회에서 최고의 사윗감은 토라 공부를 잘하는 똑똑한 남성인데, 사윗감이 똑똑할수록 여성의 집안에서 사위의 집안에 더 많은 돈을 보낸다. 만약 사위가 오래 살아서 거물 랍비가 된다면 그야 말로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가문의 영광으로 여긴다.
아버지가 유대인, 어머니가 타 민족이라면 당연히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커서 유대사회의 심사를 받아 유대인인가 아닌가 판단하게 된다. 보통 랍비를 통해 심사를 받는다. 유대인이 같은 유대인인 누군가에 대해 험담을 할 때의 단골 레퍼토리가 어머니가 유대인이 아니라는 소문이나 (남성의 경우) 비유대인 여성[13]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이다.
5. 유명한 유대인들
5.1. 성서 인물
유다·베냐민 지파와 남유다 왕국 이후의 인물들만 기재해 놓았다. 다른 히브리인 인물들에 대해서는 히브리인 문서 참조.5.2. 현대 인물
자세한 내용은 유대인/현대 인물 문서 참고하십시오.6. 분파
유대인 | ||||
아슈케나짐 | 세파르딤 | 미즈라힘 | 카라임 | 페르시아 유대인 |
부하라 유대인 | 산악 유대인 | 베타 이스라엘 | 카이펑 유대인 | 인도 유대인 |
전 세계 유대인 분파 권역 | |
<colbgcolor=#fff,#191919>아슈케나짐 | |
세파르딤 | |
독자적 분파 | |
미즈라힘 | |
후(後)아슈케나짐 | |
후(後)세파르딤 |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로 유대민족에도 갈라져 서로 구분되는 다수의 분파가 존재한다. 이중 다수의 구성비율 혹은 정통성을 유대인을 대표하는 분파는 아슈케나짐(אשכנזים, 뜻은 '독일 사람들'), 세파르딤(ספרדים, 뜻은 '스페인 사람들'), 미즈라힘(מזרחים, 뜻은 '동방 사람들')의 셋이다. 이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아슈케나짐(아슈케나즈 유대인)은 주로 우크라이나 등 동유럽에 거주하던 유대인들로, 이디시어를 주로 사용하고 유대인 중 유럽인과 가장 유사하며 흔히 유대인들중 기반을 서구권에 두고 전세계적으로 활동하며 영향력이 강한 있는 사람들이다. 세파르딤(세파르드 유대인)은 이베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북아프리카 등지에 퍼져있는 유대인들을 말하고, 라디노어를 주로 사용하였다. 미즈라힘(미즈라흐 유대인)은 중동이나 중앙아시아, 캅카스 일대에 사는 유대인들을 말하고, 유대-아랍어(Judeo-Arabic languages)를 사용한다.
종교 의례로 구분할 때는[16] 크게 아슈케나짐식과 세파르딤식 이 두 개로 분류한다. 또는 그냥 아슈케나짐식 이외의 다른 모든 의례를 다 싸잡아서 세파르딤식 의례라 하기도 한다. 이때 미즈라힘은 비록 세파르딤과 혈연관계가 없지만 세파르딤식 의례를 따르므로 세파르딤으로 분류된다. 이런 이분법적인 분류는 문제가 많아 현대 이스라엘에서는 아랍어를 모어로 썼으면 미즈라힘, 유럽 출신으로 아랍어를 모르면 세파르딤이라 구분한다.
1492년 스페인 왕국에 의한 알함브라 함락후 소위 "알함브라 칙령"이 내려지게 되는데, 이 때 대다수 세파르딤이 북아프리카 및 레반트 지방으로 쫓겨나 미즈라힘과 혼합되었다. 세파르딤 중 핵심 세력 일부는 당시 가장 자유로웠던 네덜란드로, 나중에 영국으로 이주하여 신흥 해양 세력의 자본을 대면서 번영하였다. 영국의 총리를 지낸 벤저민 디즈레일리와 범신론 사상으로 유명한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가 그 후손이다.[17]
이중 아슈케나짐의 기원에 대해서는 팔레스티나에서 살던 민족이 아니라 서아시아에 살면서 유대교를 믿은 유목민 하자르족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이 있었으나, 주류 학계에서 반박된 상태이다. 참고로 하자르족의 직계 후손으로 추정되는 건 아슈케나짐보다는 튀르크멘족과 아스트라한의 타타르족 그리고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에서 리투아니아에 걸쳐 극소수로 존재하는 카라임이다.[18][19] 또한 카라임이 믿는 유대교 교파는 아슈케나짐이나 세파르딤이 믿는 유대교와는 교리 자체가 완전히 다르며, 십자군 시대 이후에야 크림 반도에 정착했다.
이스라엘 매체에서는 아슈케나짐의 조상들은 350명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근세 역사에서 아슈케나짐과 세파르딤 사이의 통혼이나 아슈케나짐과 기독교인 농노, 카자크 사이의 통혼 사례는 차고 넘치는 수준이다. 다만 유사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닌데 오늘날 약 480만여 명 규모의 프랑스계 캐나다인 인구 대다수가 17세기 캐나다 퀘벡으로 강제이주된 여성 800여 명의 후손으로 제한된 유전자 풀을 지녔다고 한다.#
7. 유대인 분류의 정치적 담론
유대인 분류는 정치적으로도 문제가 되고는 하는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과 관련해서이다. 유럽계 유대인이 고대 유대인의 후손이라면 이들도 고대 유대인들처럼 아랍인의 모습과 가까워야 하지만[20] 피가 섞일 대로 섞여 중동인의 피는 희석되어 버렸고 오늘날의 유럽계 유대인은 전형적인 유럽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나마 아주 보수적인 유대인 사회의 유대인들은 아랍인처럼 머리가 까만 등 상당부분 아브라함 계통 종교의 민족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일본에 맥도날드를 들여오고 《유태인의 상술》이란 책을 쓴 후지타 덴에 의하면 유대인들을 쉽게 구별할 수 있는 외모상의 가장 큰 특징은 매부리코라고 하는데[21], 이는 아랍인들에 대한 인상과도 일치한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유대인을 풍자하는 일러스트에서도 코를 과장하는 것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그래서 중동 아랍인들은 이스라엘을 중동에 남은 마지막 유럽인의 식민지 혹은 제2의 십자군 국가[22]라고 폄하하고는 한다. 유럽계 유대인이 이스라엘을 건국한 명분이 바로 자기들 조상의 땅이라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 건국의 명분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밑에 나오다시피 남성 성염색체를 통해 부계혈통을, 그리고 미토콘드리아의 DNA를 통해 모계혈통을 추적할 수 있는 지금, 많은 유대인들이 그 외양이 어떻다 한들 자신들에게 고대 유대인의 피가 어느 정도는 섞여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하는데 바로 '유대 국가'로서 세워진 현대 이스라엘이 유대인의 원래 땅이었던 유대 지역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땅이 아니었던 사마리아나 갈릴래아, 심지어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아랍 베두인 유목민들의 땅인 네게브 사막까지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스라엘 건국 이전이나 이스라엘 초반 중심지나 세력, 실질적 영토는 텔아비브와 하이파 등 가나안 북쪽 해안가와 서부 예루살렘이 사실상 진짜 영토나 다름없었으며, 현재도 이 지방들에 이스라엘계 유대인들이 많다.[23] 예루살렘 서쪽과 네게브 사막 너머 홍해 회랑의 에일라트 등은 1947년 이후에 본격적으로 이스라엘화되었기 때문이다. 6일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 정부가 예루살렘으로 행정수도를 이전한 이래로 무려 5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텔아비브가 여전히 이스라엘의 임시수도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물론 텔아비브와 하이파 등 서북부 지역과 서부 예루살렘도 처음부터 유대인들의 땅은 아니었지만.[24] 갈릴래아의 경우는 이스라엘 건국 전에 이스라엘을 세우게 될 이스라엘계 유대인들이 거주했지만 중심지나 실질적 영토 등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으며 중심지였던 텔아비브와도 거리가 멀었다. 물론 사마리아는 하스몬 왕조 때 유대인들이 잠깐 유다의 다른 주변 지역들과 함께 침략해서 지배한 적이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유대인의 사마리아에 대한 식민지배였고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에게 계속해서 저항했으며 유다의 사마리아 통치도 로마 제국이 유다를 정복한 뒤 유다 치하의 피지배 지역들을 독립시킴으로써 짧게 끝났다.
8. 유대인의 역사
타나크에 따른 민족의 기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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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시대 | |||||
아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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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렉 | 르우 | 스룩 | 나홀 | 데라 | |
족장 시대 | 히브리인 | |||||
12지파 | 이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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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달리 | ||||||
즈불룬 | ||||||
이싸갈 | ||||||
요셉 | 므나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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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냐민(공통) | ||||||
레위(공통) | ||||||
에사오 | 에돔 | |||||
이스마엘 | 아랍인 | |||||
하란 | 롯 | 모압 | 모압 | |||
벤암미 | 암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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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기원 및 분열왕국 시대까지
고대 이스라엘의 구성 민족인 히브리인은 메소포타미아 및 레반트 남부에 살았으나 나중에 가나안 일대로 이주했고, 이집트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집트에 있기도 하였다. 성경에서 말하는 시조는 형제들에 의해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다가 능력을 발휘해 고위직에 오른 요셉이 이후 친지들을 불러들인 것에서 시작된다고 말하는데, 이후 모세에 의해 이탈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적 차이가 있기 때문에 지속적인 구성 변화가 있었으리라고 추측 가능하다. 출애굽기는 유대인의 민족적 기원을 다룬다.이들이 집단 의식을 발전시키는 것과 함께 수가 지나치게 팽창하자 이집트 당국에서도 억제 정책을 펼치게 되고, 이에 대한 돌파구로서 집단 이탈을 제시한 것이 이집트 왕족이지만 스스로의 정체성을 히브리인에서 찾은 인물인 모세.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이 단군 수준의 위인이라면 모세의 위치는 가히 세종대왕과 이순신을 합친 것 쯤은 된다. 이들에게 최초로 집단적 주권의식을 주입시키고 자립의 길을 처음으로 이끈 인물이기 때문. 이들은 모세의 지휘 하에 이집트에서 이탈하여 자신들이 정착할 만한 지역을 탐색하는 것과 동시에 이동 경로에 있는 토착 세력들과 경쟁을 펼치며 약 사십 년 정도 떠돌게 된다. 서사적인 과장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성경에서는 장정만 60만명이라고 했는데 딸려있는 식솔들을 합하면 최소 약 300만명에서 최대 약 500만명이었다고 한다.
여호수아가 모세 사후에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지휘하여 가나안 일대를 침략해 정복했고 기원전 10세기경엔 익히 아는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의 시대로 이스라엘 왕국의 전성기였다.
한편 많은 사람들이 고대의 팔레스타인 지역을 히브리인만이 거주하던 지역으로 오해하는데 팔레스타인은 고대부터 다민족 지역이었다. 성경에만 기록된 것이라 확실성이 부족하지만 히브리인 자체가 이집트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이주민족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주하기 이전에 이미 가나안족, 헷족, 히위족, 브리스족, 기르가스족, 아모리족, 여부스족 등 원주민 일곱 부족이 살았으며, 전쟁을 통해 원주민을 복속시키고 히브리인들이 지배민족으로서 팔레스타인에 자리잡은 내용이 씌여져 있다. 원래부터 히브리인들이 땅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 히브리인의 도래 이전에 이미 선주민이 있었다는 것이다.
구약을 보면 블레셋인과 히브리인들이 싸우는 영토 다툼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이야기로 비유되어 나온다. 구약에는 히브리인들이 몇몇 이민족들을 멸절시키고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들어가긴 했으나, 일부는 그냥 남아있다가 이스라엘이 정착 후에 강성해지자 사역에 동원되고, 일부는 산으로 쫒겨가기도 했다고 기록되어있다.[25] 또 성경의 다른 구절들을 보면 블레셋인, 암몬인, 모압인 등 여러 민족들이 계속해서 히브리인들과 섞여 살고 있었다.당시의 군장국가체제에서 민족개념이라는 것은 지역에 따른 부족개념이었다. 당시의 가나안(Canaan) 지역은 오늘날의 이스라엘, 레바논, 시나이 반도, 요르단 서부를 통칭하는 개념이었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민족들의 이름은 단순한 가나안 민족의 여러 부족개념으로 봐야한다. 한국 고대국가 시대에 부여, 고구려, 예맥, 신라, 백제, 가야 등의 수많은 부족국가들이 혼재했던 개념으로 이해하면 쉬울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언어들은 북서셈어계에 속하는 언어로서 모두다 친연관계에 있었다. 가나안 지역과 페니키아 지역은 서로 많은 지역을 문화적 교집합으로 갖고 있는데, 히브리어와 페니키아어, 모압어는 서로 매우 가깝고, 아프리카아시아어족 가나안어파의 하위 어군으로 상호 방언관계를 이룬다.
자신이 유대인이기도 했던 《블랙 아테나》의 저자, 마틴 버낼 교수는 히브리 민족과 주변민족과의 관계사를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히브리인과 페니키아인이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으며, 진지한 언어학자라면 두 언어를 가나안어의 방언으로 함께 취급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놀라웠다"라고 '블랙 아테나'에서 이야기한다. 즉 언어학적으로 히브리어와 페니키아어는 알파벳의 표기가 다를 뿐, 한 쌍으로 묶인다는 것이다. 세르보크로아티아어의 관계를 연상해보면 된다.
또한 팔레스타인은 지리적인 교통 중심지이다. 그래서 문화적으로도 아주 이른 시기부터 수메르 문화, 이집트문화의 영향을 짙게 받았으며,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그리스), 히타이트, 아시리아, 로마, 이슬람 제국 및 유럽 십자군 등의 지배를 받았다. 오랫동안 지배를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의 혈연적 관계도 있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애초부터 여러 민족들이 어울려 살았을 뿐만 아니라 역내외의 다양한 문화들이 오고가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던 문화적 교통로이기도 했던 다민족-다문화 지역이었던 것이다.
솔로몬 사후 히브리 지역은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으로 분열하여 히브리 민족도 이스라엘 왕국의 사마리아인, 유다 왕국의 유대인으로 나뉘어졌고 결국 이 두 나라는 각각 아시리아와 신 바빌로니아에 패망하였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유대인들은 아람어를 일상언어로 사용하기 시작하고 히브리어는 종교 의례에나 쓰였다. 신 바빌로니아에 유다 왕국이 멸망한 이후 유대인들은 바빌론 유수를 겪게 된다. 이렇게 본래 이스라엘땅을 떠나 해외에 정착하거나 떠도는 유대인 집단 또는 그 망명 자체를 디아스포라라고 한다.
8.2. 헬레니즘 제국~로마 제국 시기
이후 헬레니즘 제국을 거치면서 유대인 인구 상당수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치하의 알렉산드리아로 강제이주당하기도 하고 예루살렘 근교에 남아있던 유대인들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통치를 받다가 마카베오 반란을 일으켜 잠시 하스몬 왕조를 세우기도 한다. 헬레니즘 제국 시대와 하스몬 왕조 시대를 거치면서 도회지 지역의 유대인들이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26] 하스몬 왕조의 패권정책 때문에 모압, 암몬, 에돔, 갈릴래아 인들이 반강제로 유대교로 개종되었고,[27] 적지 않은 그리스계 이주민들도 유대교의 유일신 신앙에 매력을 느끼고 새로 유대교로 개종하는 사례가 증가했다. 유대교 사회는 그리스 문화의 영향에 대해서 혹은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하는 경우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 여러 의견이 갈라졌다. 특히 포에니 전쟁 이후에는 페니키아인들 중에서 과거 자신들이 믿던 바알이나 타니트가 자신들을 보호해주지 못했다는 실망감으로 유대교로 개종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이들은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커뮤니티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였다.로마에 의해 합병되어 서기의 기점(실제 연도는 역산상의 오류로 조금 차이가 있지만)인 예수 그리스도의 시기에는 로마의 식민지 상태였다. 예수를 처형할 때 예수에게 붙은 죄목 역시 명목상의 '로마 제국에 대한 반체제 책동(반역)'이었으며 실질적으로는 로마에 대해 독립을 요구하는 자주세력과 로마에 협력하는 기득권층 사이의 갈등 사이에서 상대에게 타격을 주려는 기득권층의 고발에 의한 것이었음을 고려하면[28] 당시 유대인 사회 내에서 독립에 관하여 사회적 갈등이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상술한 유대교 사회의 문화적 갈등 요인도 없지 않았다.
예수 사후 유대인들은 로마를 상대로 독립전쟁인 유대-로마 전쟁을 벌였지만 실패했다. 제1차 유대-로마 전쟁 때는 예루살렘 성전이 불탔고, 살아남은 유대인 저항군은 마지막 보루였던 마사다 요새에서 저항하다가 로마군이 총공세를 펼치자 함락위기에 몰려 독립군 전원이 자결하였다.[29] 이후 기원후 135년에 유대인이 벌인 두 번째 대규모 반로마 전쟁인 바르 코크바의 난을 진압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유대인들의 독립운동을 막기 위해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서 추방하였다.[30]
기독교가 퍼지기 시작했던 기원후 2~3세기에 이미 로마시내 곳곳엔 유대인들의 집단 거주지인 게토가 존재했다. 초창기 기독교인 사회의 중추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던 이들 혹은 유대교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그리스인들이 중추가 되었으며, 이러한 연유로 기독교 교세가 확장되기 이전에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엄밀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유대인들 외에 유대교에서 개종한 기독교인들도 집단 거주지가 있었다. 초기의 기독교는 유대교의 새로운 한 분파로써 시작했기에 유대인들에 대한 전도부터 시작했으며, 특히 국제어였던 그리스어를 이미 사용하고 있는 유대인 집단이 지중해 권역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동안 팔레스타인을 지배했던 아시리아, 히타이트,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그리고 그뒤를 이은 로마제국까지 다 광대한 영토를 자랑하는 다민족국가들이었다. 또한 유대인들은 기독교가 지중해 문화권의 주요 종교가 되기 이전에는 비유대인에 대한 선교를 하는 경우 역시 적지 않았고 디아스포라 및 개종자들의 증가로 아람어 및 그리스어 사용자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고대의 그리스인이나 페니키아인, 카르타고인들도 그렇게 지중해 전역에 퍼져살았다. 고대의 지중해는 하나의 커다란 경제적 권역을 이루고 있어서 권역내에서 교류가 잦았던 점도 큰 요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후 많은 유대인이 중동이나 유럽으로 퍼졌다.
8.3. 중세에서 근대까지
중세 유대인은 대개 유럽인들과 무슬림들에게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로 차별을 받았다. 제대로 된 일조차 구하지 못했기에 서유럽의 유대인들은 대부분 금융업에 종사했고 이는 고리대금업을 금하는 기독교 사회 안에서는 더욱 배척받고 미움받는 원인이 되었다. 기독교 사회였던 중세 유럽에서 유대인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기에 농사도 지을 수 없었고 조합에 가입할 수 없어 상업도 공업도 제약이 극심했다. 그러다보니 유대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고리대금업밖에 없었다.[31]왼쪽부터 평민, 돈 갚으라고 하는 유대인[32], 짜증내는 기사 |
더욱이 기독교인들은 (주로 배타적인) 유대인들을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증오하고 멸시했다. 성경에서 예수의 사형이 결정될 때 유대인들이 외친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소서"[33]가 가장 유명하다. 십자군 전쟁 때도 지나가는 길에 유대인들이 있으면 그냥 쳐죽이고 재산 빼앗는 일은 예사였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사악한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 또한 이런 증오가 투영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십자군에게 분살당하는 유대인을 그린 중세 삽화 |
스페인 지역에도 로마 시대부터 많은 유대인들이 건너와 살았다. 그러다 8세기경 우마이야 왕조가 기존 서고트 왕국 등 기독교 세력을 몰아내고 이베리아 대부분을 장악했는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기독교 세력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준 이슬람 세력에 호의적으로 다가갔으며 이슬람 세력도 유대인들의 부와 지식을 눈여겨봤기 때문에 이슬람 지배 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이들과 협력하며 여러 특권을 누리며 떵떵거리고 살았다. 이들은 이슬람 세력이 코르도바, 그라나다 등에서 기독교 박해를 벌일 때 이를 방관하거나 간접적으로 돕기도 했으며, 이에 대한 보답으로 이슬람 군주들은 유대인의 이민과 무역 활동을 더욱 장려하게 된다.
하지만 레콩키스타가 진행되고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에서 대부분 쫓겨나면서 유대인들도 보복을 피해 마그레브로 대거 이주해갔으며,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가 1469년 혼인동맹을 맺으면서 개종을 통해 남아있던 이들도 더더욱 궁지에 몰리게 된다. 유대인에 적대적이었던 스페인 왕실과 교회는 유대인 특별 조사기구를 만들고 첩자를 통해 이들의 행동거지를 관찰해 보고하게 했다. 조사 후 12년간 수천명의 유대인이 개종에도 불구하고 처형당했다.
1492년 마지막 이슬람 왕국인 그라나다의 나스르 왕조까지 멸망하면서 유대인들은 더욱 심한 탄압에 시달리게 되었다. 스페인은 알함브라 칙령을 발표하여 당시 스페인에 살던 수십만의 유대인들은 4개월 동안 개종하거나 떠날 것을 강요받았다. 칙령에는 유대인들의 재산권을 인정한다고 적혀 있었지만 단서 조항에 금, 은, 화폐와 국가가 정하는 품목은 금지한다는 내용이 있어 사실상 재산 반출도 금지되었다. 명시된 기간동안 떠나지 않으면 모두 처형되었고 유대인을 숨겨준 사람은 모든 재산을 압류당했다. 추방의 결과로 스페인계 유대인들은 남동유럽, 마그레브 등으로 흩어지거나 타지역 유대인 공동체에 흡수되었지만, 절반 이상은 유대인의 능력을 높이 사던 포르투갈로 이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계속 신앙은 유지하지 못했다.
스페인의 금융업을 장악했던 유대인이 거의 다 떠나거나 처형당하여 스페인 왕실은 방대한 식민지 운영과 재정관리에 난항을 겪었고 결국 1557년 펠리페 2세 때의 디폴트 선언과 이후 스페인 제국의 몰락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친다.
그래도 스페인의 사례와는 다르게 지역에 따라서 나름대로 기독교인들과 공존하며 지내거나 높으신 분들에게 등용되기도 했다. 특히 폴란드가 유대인에게 관대하기로 유명했는데 이는 국가의 상공업 발달을 위해서였다. 아무튼 폴란드가 유대인에게 호의적으로 대해주는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국가다보니 유대인 상당수가 폴란드로 이주했다. 폴란드에서는 유대인들이 직접 농사를 짓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 마름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유대인의 상공업 종사에도 제약이 없었다. 심지어 유대인 농민은 폴란드인 농노보다 지대 부담을 적게 받았을 정도였다. 이 덕에 한 때 전 세계 유대인의 4분의 3이 과거 폴란드-리투아니아에 거주하기도 했다. 이후 폴란드 분할 이후 유대인들이 대거 거주하던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일대가 러시아 제국 영토가 되는데, 러시아 제국에서 포그롬으로 유대인들을 탄압하면서 상당수의 유대인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동유럽에 남은 유대인들은 대부분 홀로코스트에 희생당했다.
현재 재정적인 문제로 이스라엘로 돌아가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지원하는 단체의 상당수가 개신교 계열이다.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분리시킨 신약에서도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할 것과 그들을 향한 신의 사랑과 계획이 있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교리적으로나 성서적으로나 기독교인이 유대인을 적대할 이유가 전혀 없으며 차라리 경제적, 정치적인 이유에서 그 답을 찾는 것이 빠르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고리대금은 당시 유럽 기준으로 매우 영세한 규모였다. 중세 말에서 근세 사이 유럽에서 가장 금융업이 발달했던 지역은 엄연히 이탈리아 북부 도시국가들과 스페인 북서부 카탈루냐 지역으로 해당 지역의 은행들이 현대 금융업의 시초로 유대인들과 상관이 없다. 기록에 의하면 유대인이 기독교인보다 더 너그러웠다고 한다. 기독교인이 사채업으로 배를 불린 이야기는 14세기 이탈리아의 작가인 보카치오가 저술한 책인 데카메론에서도 수시로 언급될 정도며,[34] 경제사학자들은 중세 이탈리아에서 우후죽순으로 설립된 은행들 중 하나인, 1408년에 설립된 산 줄리오 은행을 인류 역사상 최초의 주식회사로 보기도 한다. 물론 정설은 훨씬 뒤에 설립된 네덜란드 정부 산하의 공기업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역사상 최초의 주식회사라는 것이지만, 이런 주장이 나올 정도로 유럽의 기독교 신자들이 이끄는 금융업계가 고도로 발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유대인들이 설립하거나 운영하는 은행은 단 한 곳도 없었고, 유럽 내에서 유대계 자본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은행은 중세도 끝난 18세기에 설립된 로스차일드 은행이었다[35].
물론 십자군 전쟁 때까지만 해도 기독교인끼리 사채는 금지되었다. 이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여서 유대인끼리의 사채는 금지되었다. 그때는 사채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이 강해서 자신과 동질감을 느껴지는 사람들끼리는 사채를 하는 것이 터부시되었다. 그래서 고리대금뿐 아니라 저리대금이라 할지라도,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유대인이나 이슬람인 등 이교도들에게 꿀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 중에 유대인이 위에 기술된 이유들까지 더해져서 기독교인들의 머리 속에 악덕 사채업자로 각인된 것이다. 십자군이 돈이 부족하면 유대인한테 빌리든지 뺏든지 했던 것도 이의 연장선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 이는 이 당시 기독교인들끼리, 또 유대인들끼리 내부의 소속감이 얼마나 컸으며, 반대로 외부에 대한 배타성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시사해준다. 근데 뭐 당시 기준으로 말하자면 중세 유럽에선 '기독교'란 한국에서 '검은 머리'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표현이었다. 극소수 유대인이나 기타 종교인이 있는 거고 기독교는 그냥 '일반 국민 기본값'이다.
마이모니데스 |
18세기와 19세기가 되자 서유럽에서도 유대교와 유대인에 대한 탄압은 감소하며 동시에 유대인들의 사회적 지위가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18세기 들어서 유대인들도 지역사회에 활발하게 융화되어 참여하기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지금도 여러 음모론에 단골로 등장하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금융 재벌이 된 것도 19세기 초반이며, 19세기 후반 영국에서는 성공회로 개종한 유대인 정치인인 벤자민 디즈레일리가 수상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딱히 따로 말하지 않아도 당시 전 분야에 걸쳤던 유럽계 유대인들의 눈부신 활약은 충분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반유대주의는 살아남아 결국 홀로코스트가 일어났고, 6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죽었다고 추산된다.
8.4. 홀로코스트
나치 독일 당시 유대인이 옷에 달아야 했던 노란 별. |
20세기 초중반에 걸친 러시아 제국의 포그롬과 포그롬의 연장선상인[36]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는 600만 명이 넘는 유대인을 학살하여, 인간이 어디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아이러니한 건 나치는 유대인이 수전노에 고리대금업자라는 이미지로 선전했는데 나치 집권 후 아인슈타인[37]처럼 통찰력 있는 사람을 제외한[38] 나머지 유대인들은 다 수용소로 끌려갔다.
20세기 초 영국은 시온주의의 대두를 지켜보고 유대인들에게 영국령 우간다 땅을 내줄 테니 거기서 나라 만들라고 제안한 바가 있었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영국령 우간다 계획 참고. 비슷한 시기 소련에서도 유대인 자치주를 만들어 유대인 이민을 유치하려고 했다.
홀로코스트가 유대인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이유는, 이 경험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유대인"이라는 공통된 아이덴티티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위 문서에서도 설명되었듯이, 수백 수천 년간 세계를 떠돌면서 유대인들은 다양한 분파로 나뉘어 있었고, 그 다양한 분파의 일원들은 서로를 닭 소 보듯이 하며 동질감을 느끼지 않았다. 아예 본인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별로 의미를 두지 않았던 사람들도 많았다. 카를 마르크스, 펠릭스 멘델스존, 벤저민 디즈레일리, 슈테판 츠바이크, 바뤼흐 스피노자 등 유럽에서 활약했던 유대인들의 면면을 살펴봐도 혈통 외에 이 사람들의 공통점을 찾기는 어렵다. 단순히 업적의 차이가 아니라, 철학적인 지향점이나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굉장히 판이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애시당초 홀로코스트는 제국주의에서 없어선 안 될 방해파와 장애물 숙청, 제거의 목적이 있는 한 현상이고 이에 총통의 정신나간 사상이 결합되어 유대인이 목표가 된 것이다.[39]
정치적인 면에서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테오도르 헤르츨 같은 이들은 시온주의 운동을 통해 유대인 국가의 건설을 주장했지만, 유럽 사회에서 성공한 많은 수의 사람들은 "우리가 왜?"라는 심드렁한 태도를 보였다. 본인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하면 유대인이라는 핸디캡을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18세기 말부터 시작된 유대인 계몽주의 운동인 하스칼라(השכלה)[40]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모제스 멘델스존[41]의 후손들은 은행업, 면직산업, 음악가로서 성공한 삶을 살았으며 모제스 멘델스존의 아들 대부터는 아예 전부 기독교로 개종했다. 실제로 19세기 독일에서는 유대인의 공직, 교직, 군입대가 허용되는 등 유대인 차별 정책이 하나둘 철폐되었고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는 고위직 장교와 고위직 공무원까지 허용되는 등 유대인이 진정으로 독일 국민의 일원으로 대우를 받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유대교 전통이 약해지고 유대교를 배교하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들도 늘어났으며 유대인이면서 독일어만 쓸 줄 알고 이디시어는 하나도 모르는 사람들도 상당하는 등 유대인들 역시 여기에 발맞춰 독일 사회의 일원으로 착실히 편입되어 가고 있던 중이었다. 거기다가 같은 유대인임에도 가난한 동유럽에서 온 유대인들을 깔보는 인종차별적인 태도는 덤이었다.[42]
하지만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돌프 히틀러가 등장해서 종교 개종, 사회적 성공의 여부와 상관 없이 모조리 잡아 죽이겠다고 날뛰었으니 유대인들 입장에선 큰 충격이었다.[43] 따라서 홀로코스트는 "우리가 남이가" 내지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식의 공통된 유대인 아이덴티티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렇게 형성된 아이덴티티가 바로 오늘날 이스라엘을 통해서 발현된 것이다.
즉, 유럽에서 근대 국민국가가 탄생한 이후부터 홀로코스트 이전까지의 시기, 유럽의 유대인들 상당수는 자신들이 유대인인 동시에 거주 국가의 국민이라고 인식했다. 물론 그 시대에도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없던 것은 절대 아니지만 그래도 개인의 노력을 통한 성공으로 그런 차별을 뛰어넘어 자신의 입지를 갖출 수 있으며, 그 길이 유태인의 독립국가를 세우자는 시온주의적 노선보다 더 쉽고 합리적, 효율적으로 유대인의 입지를 얻을 수 있는 길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다수였던 것이다. 하지만 히틀러와 나치의 만행으로 인하여 이러한 노력들은 무위로 돌아가 버렸다. 근대 국가 내에서 비주류 집단이 아무리 순응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해도 주류 집단이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타적인 태도로 폭력을 휘두르겠다고 작정해버리면 비주류 집단으로써는 이것을 막을 방법이 전혀 없음이 확인된 것이다. 이 때문에 유럽의 유대인들에게 '유대인 스스로의 안전을 보장하는 방법은 유대인에 의한 민족 국가를 만드는 것 뿐'이며, 자신들의 나라가 없는 상태에서 누리는 안전과 번영이란 그 나라의 주류가 '인정해 주는' 동안만 누릴 수 있는 불안한 것'이라는 관념이 형성되었다. 이것이 19세기~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별 인기 없던 시오니즘 운동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 후 탄생한 현대 국가 이스라엘의 대외정책(대 중동 정책)에 비타협적인 배타주의의 경향이 강하게 두드러지게 하는 일종의 역사적 트라우마가 된 것이다.
전간기 시절 반유대주의의 기승으로 유럽에 있던 유대인들은 남거나 도망치거나 했는데, 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나치의 유대인 추방 정책이 홀로코스트로 선회하게 되면서 남아있는 대부분이 홀로코스트로 살해당했다. 1939년 전 소련에 거주하거나 독소불가침조약으로 획득한 지역에 거주한 유대인 300만 중 절반 가량은 소련군을 따라 도피했지만 나머지는 대부분 독일군과 그 부역자들에게 살해되었다. 미주 지역으로 도망친 유대인들은 주로 미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위주로 도망쳤다. 심지어는 중국으로 도망친 유대인도 있는데 중국으로 도망친 유대인들 중 상당수는 하얼빈이나 신장 위구르 자치구로 이주 후 상하이를 거쳐 미국 등으로 망명했다. 일본 제국은 상하이로 도망친 유대인 2만여 명을 상하이 게토[44]에 가두었는데, 이 유대인들은 동유럽의 게토와 달리 대부분이 살아남았지만 역시 열악한 생활조건으로 고통을 겪었다.
8.5. 현대 이스라엘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2년째인 1947년, 마르세유에서 배를 타고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독일 유대인 생존자들. |
유럽계 유대인들이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들 특유의 생명력으로 나름대로 상업과 금융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등, 좀 불편한 환경이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유럽 사회에 붙어 살던 중, 아돌프 히틀러가 등장해 600만[45]의 유럽계 유대인을 학살하였다. 게다가 아랍 세계도 근대 이후 민족주의가 고조되면서 홀로코스트같은 산업화된 학살만 벌어지지 않았다 뿐이지 아랍계 유대인에 대한 포그롬을 자주 일으켰다.[예시] 결국 유럽과 아랍 세계의 유대인들은 자신의 나라를 열망하게 되고 1948년, 고대 유대인의 땅이었던 팔레스타인에서 현대 이스라엘을 건국하게 된다.
그러나 아랍 세계 한복판에 이민족의 국가가 들어서는 것을 좌시할 생각이 없던 아랍 국가들은 제1차 중동전쟁을 일으켰고, 여기서 이스라엘이 승리하면서 팔레스타인 정착에 성공하자 아랍인들의 원수가 되어버렸다. 덕분에 주변 아랍국가들뿐만 아니라 이슬람권 전체에서 이스라엘에 비협조적이 되었고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에서 고립받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국가들(특히 독일[47])만큼은 이스라엘과의 수교 관계를 맺으며 이스라엘을 지지하고는 있으나 프랑스의 경우 외교 정책에서 종종 이스라엘보다 아랍 국가들의 편을 들기도 하고(대표적으로 프랑스는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과의 평화협상을 중재할 때 사실상 아랍국가 쪽으로 유리하게 협상을 중재하는 경우가 있다) 독일이나 다른 유럽권 국가들도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간 분쟁에 비판적, 적대적인 태도를 어느 정도 취하면서 미국과 달리 좀 아니꼽게 보기도 한다. 자세한 사항은 이스라엘 문서를 참고하기 바람.
흔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에서의 이스라엘측이 일으키는 사건들을 두고 이해할 수 없다는 편견이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도 결국 다른 민족과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사람들이며[48], 게다가 이 분쟁은 이스라엘의 국권은 물론이요, 유대인 자신의 목숨줄도 걸린 문제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아랍 세계와 4차례에 걸쳐 국운을 건 전쟁을 벌였으며, 특히 1차 전쟁과 4차 전쟁에서는 나라가 아예 망할 뻔했다.
또란 이스라엘 유대인의 구성도 고려해야 한다. 편견과 달리 이스라엘 유대인은 아슈케나짐이 대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유대인의 과반은 세파르딤과 미즈라힘들이다. 그들은 아랍 세계에서 추방되면서 학살, 투옥, 약탈 등 온갖 험한 꼴을 당했기 때문에 아랍인에게 적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팔레스타인 아랍인과 지속적으로 유혈투쟁을 일으키면서 소수의 화해파와 진보파를 제외하면 이젠 정말 적대감 외에는 남은 게 없는 상황이다. 아무튼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인종차별을 하는 일도 많고, 이것은 유대인에 대한 혐오가 다시 커지고 있는 이유 중 하나다. 특히, 근본주의자들인 하레디들이 제일 답이 없다. 자세한 것은 하레디 참조.
8.6. 현대의 유대인
유대인은 수천년간에 걸쳐 동서양 인도유럽어족 등 혼혈화가 상당히 진행됐기 때문에 혈통보다는 그 안에 있는 영혼 또는 정신을 바탕으로한 신에 대한 믿음을 중요시하게 되어 인종이나 혈통은 큰 의미가 없어졌으며, 좁은 의미에서는 풍습과 유대교 신앙 여부로 유대인의 여부를 가리는 게 더 의미 있을 수도 있다.[49] 하지만 혈통 역시 중요한 게 현실이라서, 모계가 유대인이면 자식도 (유대교를 믿느냐와는 무관하게) 유대인으로 치는 게 일반적인 현실이다. 엄연히 유대인 가족의 자녀인데 유대교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유대인이 아니라 무슨 앵글로색슨인이나 중국인이라고 할 순 없으니 말이다. 실제로 유대인(Jewish)라고 분류되는 현대인들의 상당수는 유대교도가 아니라 단지 부모가 유대인이라서 당연히 유대인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약 1500만 명의 유대인이 분포한다.[[이스라엘| ]][[틀:국기| ]][[틀:국기| ]] | 9,656,000명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7,600,000명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453,000명 |
[[캐나다| ]][[틀:국기| ]][[틀:국기| ]] | 391,000명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290,000명 |
[[아르헨티나| ]][[틀:국기| ]][[틀:국기| ]] | 180,000명 |
[[러시아| ]][[틀:국기| ]][[틀:국기| ]] | 172,000명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116,000명 |
[[호주| ]][[틀:국기| ]][[틀:국기| ]] | 113,000명 |
[[브라질| ]][[틀:국기| ]][[틀:국기| ]] | 93,000명 |
[[남아프리카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 69,000명 |
[[우크라이나| ]][[틀:국기| ]][[틀:국기| ]] | 50,000명 |
[[헝가리| ]][[틀:국기| ]][[틀:국기| ]] | 47,000명 |
[[멕시코| ]][[틀:국기| ]][[틀:국기| ]] | 40,00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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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1. 미국 유대인
자세한 내용은 미국 유대인 문서 참고하십시오.전 세계적으로 합산해봤자 1,400만 명밖에 안 되는 이 작은 민족이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미국에 사는 유대인인 유대계 미국인들 때문이다. 미국 인구의 약 1.5%를 차지하는 유대인들은 경제, 학문, 문화, 예술, 언론, 스포츠[50] 등 미국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일찍이 영화산업을 가치있게 눈여겨본 이유가 과거엔 늘 핍박을 피해 도망가고 이주하다 보니 언제 갑자기 또 무슨 탄압을 당하면 집과 물건 등 유형 재산을 버려두고 바로 튀어야 할지 모르므로 무형적인 가치에 대해 관심이 컸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물건 같은 것 보다도 무형적인 가치를 더 중요시하는 유대인의 성향은 학문, 예술, 인간과 세계에 대한 호기심, 창의적인 아이디어 등 정신적인 면을 탐구하는 유대인들이 그토록 많은 것과도 연결된다.
그리고 헐리우드 영화사들 뿐 아니라 주요 기업, 금융기관, 언론사들의 설립자들이 전부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 독일 등에서 이주한 동유럽/중유럽계 유대인이고[51] 미국의 모든 분야에서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사실 유대계 미국인의 대다수는 동유럽과 독일에서 온 아슈케나즈 유대인이다. 또한, 일부 세파르드 유대인과 미즈라흐 유대인들도 존재한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유럽의 반유대주의 때문에 중유럽과 동유럽에 살던 많은 아슈케나즈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했고 그 과정에서 기존의 정착민들에 의해 차별을 받았지만 이들은 유대인 마피아들을 조직해서 뒷세계에서도 살아남고, 특유의 경제력을 통해 연방법원에 기소를 하여 인종의 구분을 언어의 경계로 성문화 하였다. 1980년대 동유럽 공산권 붕괴 이후에도 많은 아슈케나즈 유대인들이 소련에서 미국이나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소련을 제외한 동유럽 국가들의 유대인들은 나치의 홀로코스트로 몰살당했기 때문에 그 전에 탈출하지 않고 남아있던 이들 중에 살아남은 유대인이 극소수라서 1970년대 이후에 미국이나 이스라엘로 이주한 유대인들은 대다수가 소련에서 온 유대인들이다. 공산권 붕괴 이전에는 공산권 국가들은 자국민의 이주를 쉽게 허가하지 않았지만 1970년대 말에도 소련은 일부 유대인들의 이주를 허가해 상당수의 소련 유대인들이 1970년대 말에 미국이나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구글 공동 창업자 세르게이 브린은 1979년 미국으로 이주했고 유대인인 레프 트로츠키의 손녀는 스탈린 시대에 살아남아 1979년 미국으로 이주했다가 미국에서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유대계 미국인의 상당수가 미국 민주당을 지지하는 정치 성향을 가지고 있다. 미국 유대인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1940년대 이전에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의 후손들은 민주당 지지 성향이 압도적으로 강하지만, 1970년대 이후 동유럽에서 이주한 보다 소수의 유대계 미국인들은 공화당 지지 성향도 강한 편이다.
이처럼 유대인은 모든 분야에서 큰 성과를 내며 잘 나가다보니 비유대계 백인들, 특히 원래 미국 백인의 주류 민족이었던 WASP 계층의 질시와 견제와 증오를 받기도 하고 각종 음모론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물론 그래도 유대인들의 엄청난 부와 명예, 권력 때문에 함부로 욕을 못하는 것 뿐. 극단적 사례는 역시 유대인 배후자본설. 하지만 많은 유대인들은 그런 무시무시한 음모론과는 별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다. 후술하겠지만 유대인 중 자본가, 기업가, 영화업계, 학문, 예술, 전문직에 종사하는 상류층 지식인들이 많지만, 과거에 오랫동안 박해받아온 피해자로서의 아픈 역사가 있기 때문인지 정치성향은 소외 계층 배려를 지지하는 진보 성향이 많다. 유대인이 세계를 지배하니 이런 소리 때문에 피해를 받은 적이 많아서 유대인 음모론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유대인 음모론을 활용한 나치의 홀로코스트가 유명하고 영국이나 프랑스, 미국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있었다. 다른 나라들도 주요 계층이 유대인 음모론과 비슷한 논리로 유대인들이 얻은 권력과 돈을 빼앗았지만 특히 프랑스가 나폴레옹, 조제프 푸셰 등 유명인들로 많이 알려졌다.
반유대주의는 꽤 최근까지의 역사이며 실제로 WASP 주류 민족의 실력자들이 유대인에게 가졌던 생각과 그들에게 했던 행동을 보면 배후자본설 등은 아무리 좋게 봐도 중세 때부터 받던 박해의 연장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중세 때부터 지긋지긋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진 것들을 어이없는 이유로 빼앗기며 미움과 박해를 당했다.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경우, 민주당과 버락 오바마를 찍은 유대인은 80% 이상이었다. 이게 굉장히 독특한 현상인것이, 미국 유대인은 미국 전체 인구의 1.5%밖에 안되는 소수 인구이지만 전체 GDP의 20%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부자, 엘리트 집단인데도 부자에 대한 증세, 강한 정부, 빈부격차 완화같은 정책을 내놓는 민주당을 지지하기 때문이다.[52][53] 이렇게 급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흔한 것은 아니지만 미국의 유대인 랍비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에 대한 군사행동을 비난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만 이스라엘 내 유대인 기득권은 이와 정반대이며 이스라엘 내 비호전적인 유대인들은 탄압받기도 한다. 팔레스타인과 공존을 추구하는 샬롬 악타브(히브리어로 안녕 평화여라는 뜻)같은 단체들은 민족주의 유대인 민병대들에게 허구한 날 두들겨 맞는다. 게다가 이 민족주의 유대인들을 민족주의 정치인들이 득세하는 정부가 제대로 단속할 생각도 안 하고 똑같이 양심적인 유대인들을 탄압하고 불이익주는 판국이다. 그리고 2016년 미국 대선에서 유대인 명문가의 자손인 재러드 쿠슈너를 사위로 삼은 도널드 트럼프가 친 이스라엘 정책을 펴면서 많은 유대인 상류층들이 공화당 지지로 돌아서서 트럼프 당선에 공헌했다.
물론 뉴욕 같은 데 가면 진짜로 검은 옷 입고 수염은 허리에 닿고 안식일에는 불도 안 켜는 골수 유대인들이 있긴 하지만[54], 어디까지나 일부고 대부분은 평범하고 튀지 않게 살고 있으며 히브리어를 모르는 사람들도 태반이다. 말이 유대인이지 유대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고 기독교 풍습을 따라 크리스마스에 트리를 세우기도 한다. 유대인들 중에서도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종교가 아예 없는 사람도 적지 않다. 카를 마르크스의 부친도 개신교로 개종한 유대인 집안 출신이었고, 영화배우인 해리슨 포드도 꽤 진한 유대계 혈통이긴 하지만 개신교로 개종한 집안에서 자란 탓에 본인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에 크게 개의치 않으며 살았다. 반면 인디아나 존스에 같이 나왔던 케이트 캡쇼는 유대인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와 결혼하면서 유대교로 개종, 혈통은 유대계가 아니지만 유대인이다. 물론, 마르크스의 경우 프로이센 왕국의 강한 유대인 탄압으로 인해 반강제적으로 개신교로 개종한 사람도 많았다는 점을 유념해야 하긴 하다. 이렇게 혈통만 유대인이고 나머지는 평범한 백인인건 유럽 시절 아슈케나짐부터 있어왔는데, 미국 이민 이후로 더 강해진 편. 다만 미국같은 경우엔 메리 크리스마스가 기독교 상징이라고 하여 해피 홀리데이라는 말로 대신하는 인삿말이 퍼지고 있는데 이 말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기여했다는 말도 있다. 사실 극소수 인구임에도 유대인들의 명절인 욤 키푸르(속죄일)는 여러 주에선 국경일인 것도 유대인들의 힘이 그만큼 크기 때문.[55]
대부분의 대중매체에서는 돈 밝히는 구두쇠이거나, 학문이나 예술에 몰두하는 범생이 내지 천재로 묘사된다. 전자야 인종차별에 가까운 편견이지만 후자는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깝다. 예를들어 미국의 명문대학과 대학원에서 유대인 비율은 인구대비 압도적이다. 현재 미국 유명대학 재학 유대인 비율은 하버드 대학교 30%, 예일 대학교 28%, 프린스턴 대학교 24%로 엄청나다. 사실 명문대일수록 인종적/민족적 비율도 어느정도 조정하려 하기 때문에 유대인이 너무 많이 입학하는 걸 경계하는 기류가 예전부터 있어와서 사실 미국의 대입 제도는 유대인에게 오히려 불리한 점이 많다. 특히 20세기 전반기까지만 해도 명문대학들에서 너무 유대인들만 많이 합격하기 때문에 당시 WASP 출신이 주류였던 대학교 이사진에선 어떻게 해야 유대인의 입학을 줄일 수 있을까 고민을 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 그토록 명문대에 많이 입학하는 것은, 고교에서 탁월한 성적을 거둔 학생들이 워낙 유대인 투성인데다가, 대학교에서도 유독 유대인들의 성적과 아웃풋이 워낙 좋기 때문에 각 명문대학교의 입장에서도 자기 대학교의 아웃풋을 위해서는 학업적으로 우수한데다가 성공할 확률이 높은 유대인을 많이 안 받을래야 안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56]
기업, 학문, 전문직종들 뿐 아니라 유대계가 꽉 잡고 있는 할리우드 영화를 비롯해서 각종 문화 예술(음악, 문학, 시나리오 작가 등등 심지어 유명하거나 기발한 스탠드업 코미디언들도 상당수가 유대인이다.) 쪽에도 수많은 유대인들이 업적을 주도해오고 있다.
미국에서 유대인들은 주로 대도시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다. 지역으로 보면 북동부와 캘리포니아, 플로리다에 많이 거주한다. 뉴욕주의 경우 유대계 미국인 인구[57]가 1,757,270명에 달한다. 보스턴-뉴욕-필라델피아-워싱턴 D.C.로 이어지는 메갈로폴리스에 300만명 가량의 유대인이 거주한다. 뉴욕시의 경우 여느나라 대도시가 그렇듯 흑인 백인 가릴것 없이 출산율이 낮은편인데, 정통파 유대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의 출산율은 독보적으로 높다고 한다. 이는 유럽의 정통파 유대인 거주지역도 마찬가지다.
사실 유대인이 물고기가 물만난 듯이 주로 활약해온 건 유럽에 비해선 민족 차별이 덜 했던 미국에서이지만, 유럽에서도 각 분야에서 천재로 불리거나 업적을 낸 사람들의 상당수가 알고 보면 유대인인 경우가 허다하다. 학문쪽만 봐도 엄청나서, 전세계 인구의 0.2%에 불과한 유대인들이지만 역대 노벨상 수상자 중 유대인의 비율은 무려 25% 정도나 된다. 그것도 평화상과 문학상을 제외한 과학/학문 분야의 노벨상만 따지면 30%가 훌쩍 넘는다.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에서도 역대 수상자들의 상당수가 유대인들이다.
8.6.2. 이스라엘 유대인과 미국 유대인의 문화적 차이
이스라엘에 있는 유대인들은 유럽과 미국의 유대인들과 문화적으로 꽤 큰 차이가 있다. 대다수의 유럽계 유대인들은 다른 유럽인들과 문화적으로는 그냥 동질감이 있는 편이라서 서구화된 한국인들은 딱히 대하는데 어려움이 없는데 이스라엘계 유대인들은 이야기가 좀 다르다고 한다. 대표적인 게 거침없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회사에서 회의할 때 말단 사원이 거침없이 질문을 하고 솔직한 코멘트를 말하는 등 서양의 문화라고 해도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거침없다. 게다가 발성도 우렁차게 하는 것을 좋아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할 때 굉장히 거칠고 크게 말한다. 이정도면 성격이 직설적이고 우렁차게 말하는 거 좋아하는 아랍인과 비슷하다.[58] 유대계 미국인과 유럽인들도 이스라엘인들의 이 거침없음이라면 학을 뗀다.8.6.3. 현대 유럽의 유대인
아직 세계 유대인의 10%(140만 가량)는 유럽에 거주한다. 유럽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나라는 50만 가량이 거주하는 프랑스이며 파리시에만 27만명의 유대인이 있다고 한다.# 그 다음은 영국으로 30만명이 있고, 뒤이어 러시아 연방, 독일 순이다. 그 외의 국가는 10만명 미만이 거주한다.9. 편견과 음모론
자세한 내용은 유대인/편견 및 음모론 문서 참고하십시오.10. 창작물에서
유대인 캐릭터 문서 참조.11. 관련 민족
[1] 유대인 남성들만 쓰며, 흘러내리지 않게 핀으로 고정해서 쓴다. 하레디들은 키파위에 모자를 쓰기도 한다. 이스라엘에서는 '통곡의 벽'이나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추모관 같은 성소를 방문하는 남성들은 이 전통모자인 키파를 반드시 써야 한다. '야물케'라고도 한다.[2] 한자의 뜻으로 전해진 단어가 아닌 그냥 음역이다. 그러므로 유대인이 더 정확하다.[3] 미국, 영국, 독일, 호주 등 이미 일상 생활에서도 한자표기가 굳어버린 나라들에겐 아직도 쓰지만, 그밖의 국가들, 이를테면 네덜란드인을 화란인, 프랑스인을 불란서인이라고 요즘엔 거의 하지 않는다.[4] 유다 왕국의 히브리어 표현인 예후다(יְהוּדָה / Yehudah)에서 유래하며 한국어식으로 하면 예후다인에 해당한다.[5]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해 캅카스 지역에 분포하는 산악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구어이다. 이란어군에 속한다.[6] 히브리 문자 표기는 יְהוּדָיָא / יְהוּדָיֵא[7] 아랍어 어원이다. 전통적으로는 조후드(جهود / johud)가 사용됐는데 이는 튀르키예어로 '유대인'을 의미하는 속어였던 츠프트(Çıfıt)의 어원이다.[8] 표준어는 유대인과 유태인이지만 고령층 중심으로는 유태인이 더 흔히 쓰인다. 이스라엘 민족의 12지파 중 '유다' 지파에서 유래한 이름이어서 한국 가톨릭의 성경에서는 '유다'인이라 표기한다.[9] 정관사 der가 붙으면 유대인 자체를 지칭한다.[10] 아예 기준이 안 되는건 아니지만 혈통을 공식 기준으로 삼아 버리면 사마리아인이나 심지어 팔레스타인인도 모두 유대인에 속하게 된다.[11] 카이펑 유대인 문서 참고. 중국계인 Von Zon 이병이 이스라엘 방위군에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이 보도된 바도 있다. 관련 기사.[12] 베타 이스라엘 문서 참고.[13] 이디시어로 "Shiksa" 식사 .[14] 유대인의 상징인 육각성의 명칭이 이 사람으로부터 유래되었다.[15] 베냐민 지파 출신이자 이방인의 사도.[16] 베타 유대인 등의 소수종파들을 제외하면[17] 스피노자의 부모가 포르투갈에서 네덜란드로 이주한 세파르딤이었다. 다만 스피노자는 그 특유의 범신론 사상이 문제가 되어 유대교 커뮤니티에서 파문당했다.[18] 대표적인 인물로는 소련의 전권대사였던 아돌프 이오페(Адольф Иоффе)가 있다.[19] 크림차크 유대인과는 다르다. 이 쪽은 정통 유대교에 가깝다. 실제로 홀로코스트 당시 대부분의 카라임은 비유대인으로 간주되어 살아남았지만 크림차크 유대인은 유대인으로 간주되어 75%가 학살당하고 오늘날에는 1천명이 조금 넘게 남아있다.[20] 다만 레반트 일대나 북아프리카 일대에 주거하고 있는 아랍인들은 남유럽인들과 비슷하게 생긴 편이기는 했고, 그래서 중남미에서는 어차피 외형상으로 그리스인이나 이탈리아인, 스페인인, 포르투갈인과 비슷하고 아랍계 이주민들이 사회주류로 진입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냥 서양인 취급하고 있다.[21] 대표적인 예시가 마크 저커버그.[22] 정작 이스라엘인들은 기독교를 싫어하는 성향이 강하다. 물론 서양권 국가들의 이스라엘 지원을 비판하는 의미에서 말하는 거겠지만.[23] 더군다나 1937년에는 현재 텔아비브, 하이파 등을 비롯한 가나안 북부에 세우려고 했었다. 하지만 1947년 계획이 변경되면서 남부의 네게브 사막까지 가져가게 된 것.[24] 애초에 유대인들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모세의 인도로 탈출하여 타민족들이 원래부터 살고 있던 가나안을 정복한 것이다.[25] 사사기 1장 27절~36절[26] 신약성경의 각 기록에 의하면 레반트(레바논, 시리아), 갈라티아, 에페소스, 테살로니카 등에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집단에게 전도하는 기록이 자주 나오는데, 헬레니즘 시대를 거치며 이스라엘 본토에서는 아람어가 유대인 디아스포라 사회에서는 코이네 그리스어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아람어는 중동에서 주요 교역 언어였으며 코이네 그리스어는 지중해 동부의 주요 공용어이기도 했다.[27] 헤롯 대왕도 본래 에돔인이었다가 이때 유대교로 개종한 가문이고, 예수와 12사도들이 갈릴래아인인 것으로 볼때 그들도 사실 이 때 강제 개종된 가문의 후손이 아닌가 하는 주장도 있다.[28] 그리고 예수는 그 추종세력을 정치적으로 이끌기를 바라던 독립파의 기대와는 정 반대로 뜬구름 잡는(?) 회개와 구원 이야기만을 주야장천 주장했으므로 고발 당시 독립파의 옹호도 얻지 못했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29] 마사다가 방어가 잘되는 지역에 위치했던지라 로마군은 함락시킬 때까지 고생했다.[30] 이 바르 코크바의 난에 가담한 유대인들의 수는 40만 명이나 되었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로마가 투입한 병력도 12만 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로마군에 의해 58만 명의 유대인들이 죽었고, 1035개의 마을들이 파괴되었으며, 많은 유대인 포로들이 로마군에게 끌려가 노예로 팔려나가는 등 바르 코크바의 난은 참혹한 실패로 끝났다. 더 자세한 사항은 옆의 링크를 참조할 것.#[31] 반면 이슬람의 교리상 돈벌이를 종교적으로 금기하는 중동 지역의 유대인들은 고리대금업보다는 주로 의료업에 종사하였다.[32] 중세 유럽에서 유대인들은 저렇게 뾰족한 모자를 유대인이라는 징표로 쓰고 다녀야 했다.[33]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마태복음 27장 24~26절. 개역개정판)[34] 인류 역사상 최초의 은행인 성전기사단도 은행업과 더불어, 사채꾼 노릇을 너무나도 악랄하게 한지라서, 열받은 교황령과 프랑스 왕실에 의해 14세기 초에 파문을 당하고 깔끔하게 토벌당했다. 가톨릭 교회의 지원 하에 세워진 기사단의 횡포가 일개 사채업자들을 쌈싸먹을 정도로, 폐단이 범국가적으로 심하게 발생한 것이다. 실상은 유대인 사채업자에 의한 횡포는 이탈리아 일부 지역에서나 발생한 거고, 그나마도 후술할 내용처럼 기독교 신자들이 운영하는 은행들을 상대로는 게임이 안되는 데다, 자칫 자신들이 박해당할 빌미를 줄 위험때문에라도 대놓고 갑질하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35] 그래서 '고리대금업자=유대인'이라는 편견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유대계 자본이 제도권 금융 시장에 진출할 방도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사채업을 한 것이고, 당연히 이런 식으로는 기독교계 자본이 운영하는 제1금융권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36] 러시아 제국은 사회적 소수자인 유대인들을 사회적 희생양으로 삼았는데 심지어 러시아 혁명 때에는 시온 의정서를 날조하여 '혁명 세력의 배후에 세계지배를 노리는 유대인들이 있다'라고 퍼뜨렸다. 그 시온 의정서를 유럽에 퍼뜨린 이들도 러시아 출신의 반혁명 망명자들이었다. 히틀러에게 시온 의정서 등을 전수한 인물도 러시아 출신의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였다. 또한 나치가 선전한 피의 중상 또한 러시아 제국에서 먼저 퍼져서 포그롬이 발생한 바 있다.[37] 이 아인슈타인도 나치 정부가 그의 연구 서적을 불태우는 만행을 피하지 못했으며, 게슈타포의 추적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벨기에 왕실의 호위 아래 미국으로 망명했다.[38] 설마 나치가 그 정도로 악랄할까, 설마 나치가 전쟁을 벌일까, 설마 나치가 폴란드와 프랑스를 각각 한 달 만에 처바르고 점령할까(...)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상황을 낙관하다 변고를 당한 사람도 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안네 프랑크 가족이다.[39] 아이러니하게도 히틀러의 고향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오히려 히틀러의 모국이 맞나 싶을정도로 지금 기준으로 봐도 유대인에게 관용적인 국가였다. 지배층인 합스부르크 왕가가 다민족 통치를 오랫동안 해왔기에 유대인에 대해서는 딱히 별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전하여 공화국이 되어 합스부르크 왕가는 퇴위당하고 영토도 상실하여 오스트리아는 약소국화 되어서 후에 히틀러가 너무나 쉽게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오스트리아에서도 유대인들이 탄압당했다.[40] 히브리어로 지혜라는 뜻으로, 유대 문화의 부활을 추구하는 동시에, 유대인의 주류사회로의 융화를 추구하는 지적 운동이었다.[41] 유명한 음악가 펠릭스 멘델스존의 조부였다.[42] 1920년대 독일의 유대계 신문을 보면 "요즘 폴란드나 리투아니아 등지에서 검은 모자쓰고 수염기른 애들이 자꾸 건너 오는데 걔네들 때문에 쪽팔려서 못 살겠다"라는 투의 기사들을 어렵잖게 찾을 수 있다.[43] 물론 나치들도 사람인지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람을 살려주거나 뒷돈을 받고 눈감아주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히틀러의 상관이자 상부에 히틀러의 철십자 훈장 수훈을 추천했던 후고 구트만 중위의 경우 가족들과 함께 재산까지 챙겨서 미국으로 떠날 수 있게 해줬다. 피아니스트도 이를 다룬 영화다.[44] 공식 명칭은 무국적난민한정지구(無國籍難民限定地區)이다.[45] 반유대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알고 있는 600만의 수치를 두고 심각하게 부풀려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수십만 단위 이하로 내려간다는 홀로코스트 부인론은 그들이나 내놓는 주장이며 아우슈비츠에서만 100만 이상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아우슈비츠 등 절멸수용소의 능력으로는 수백만은 불가능하다며 썰을 풀기도 하는데, 애초에 절멸 수용소 외에도 동유럽과 러시아 거주 유대인에 대한 일방적 총격사살, 학살용 차량(가스바겐) 운용, 게토 몰아넣고 방치하기, 게토 자체에 대한 포격 등 유대인을 죽인 방법은 다양했다.[예시] 1941년 이라크 왕국에서 발생한 파르후드, 1945년 이집트 왕국에서 발생한 이집트 포그롬, 1947년 시리아에서 발생한 알레포 포그롬 등.[47] 사실 이것도 그럴 것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시대 독일이 저지른 유대인 학살 홀로코스트 때문이니...[48] 즉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를 겪은 민족인만큼 좀 더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이다.[49] 그래서 한 사람의 국적과 혈통을 구분지을 때 대게 '한국계 미국인', '중국계 미국인'처럼 혈통과 국적 순으로 표기하지만, 유대인 같은 경우에는 거꾸로 '독일계 유대인', '러시아계 유대인'처럼 국적과 혈통순으로 표기한다. 이는 그 만큼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유대인들 사이에 수많은 민족들의 피가 섞이면서 거쳤기 때문에 저런 방식으로 거꾸로 표기한 것이다.[50] NBA를 돈다발로 만든 데이비드 스턴 전 총재도 유대인이며 그를 이을 부총재 또한 유대인이듯이 거의 모든 산업, 스포츠 쪽 행정이나 투자에서도 유대인들 힘이 거세다. NBA 스폰서 중인 유태계 자본인 시먼스 은행 같은 기업때문에 이란이나 아랍권에선 NBA 중계가 난항을 겪고 있기도 하다. 워너 브라더스나 파라마운트 픽처스 등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들 다수가 유대인이 설립한 회사다. 과거에는 유대인이 아니었다가 유대인 관리로 들어간 월트 디즈니 컴퍼니, 그 반대인 소니 픽쳐스도 있다.[51] 월스트리트 저널이나 뉴욕 타임스 같은 언론사도 전부 유대인의 세력범위에 있다.[52] 다만 주의해야할 점은, 미국은 기본적으로 개인주의, 시장주의, 능력주의가 디폴트로 강하게 깔려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민주당 내에서도 소위 좌파라고 할 만한 부류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오바마 정부나 바이든 정부 때 추진된 정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게 진보인가 ?' 싶을 정도로 시장주의적이다. 물론 문화/사회적으로는 제법 진보적.[53] 물론 모든 유대인이 그런 건 아니다. 카지노 재벌인 애덜슨은 2012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들 지지를 위해 9,200만 달러를 지출했다. 공화당이 전폭적인 친-이스라엘, 반-이란 노선을 걷고 있는 게 애덜슨을 필두로한 부유한 유대인의 선거자금을 노린 것이라는 평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애덜슨은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도 친해서 그가 창간한 이스라엘 제1일간지인 "이스라엘 하욤"은 친-네타냐후 논조로 유명하다. 참고로 "이스라엘 하욤"은 무가지이다. 말 그대로 이스라엘과 미국 양국에서 돈 뿌리고 다니는 갑부. 신을 이용한 민족주의 혹은 집단주의의 발달이 빨라서 자신들의 지배층을 포함한 지배자들과 맞서던 유대인들이 지배층 출신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좌파를 지지하는 경향도 있다. 유대인들은 옛날부터 인간은 비교할 수도 없이 위대한 신 앞에서는 지배층이든 피지배층이든 다 똑같다고 주장했다.[54] 이런 유대인들은 당연히 교조적이다. 2008년 대선 당시 정통파 유대인 중 오바마를 찍은 비율은 13% 정도였다.[55] 유대인들의 설날인 로쉬 하샤나 역시 뉴욕에선 공휴일로 지켜지고 있다. 우리 달력으로 10월 3일에서 4일.[56] 다만 최근에는 명문대 입학생 중 유대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전보단 낮아졌다고 한다. 요즘은 과거보다 흑인, 동아시아인, 인도인 등 보다 다양한 인종/민족들이 고루 명문대에 입학하는 추세이다. 하지만 아시아인 학생들은 흑인에 비교할 때 성적에 비해서 합격률이 훨씬 낮다는 불만이 아시아계 학생, 학부모들 사이에서 팽배한 실정이다.[57] 넓은 범위의 유대인으로 유대교를 실천하면서 믿지는 않지만 부모가 유대인인 경우 등도 포함, 미국 전체에 약 6,800,000명[58] 실제로 아랍인과 이스라엘 유대인도 은근히 성격에서 죽이 맞는 부분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