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9 20:33:34

영국령 우간다 계획

1. 개요2. 전개 과정3. 실현되었다면?4. 비슷한 계획들5. 매체6. 같이 보기

1. 개요

British Uganda Programme/Uganda Scheme

20세기영국유대인들에게 제안한 아프리카 유대인 국가 수립 계획.

2. 전개 과정

발단은 러시아반유대주의에서 시작되었다. 러시아에서는 시온 의정서 사건으로 반유대주의가 극에 달하고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이 이어졌다. 견디다 못한 유대인들은 러시아 제국을 빠져나와 유럽 각국과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당시 러시아 제국을 탈출한 유대인 중 약 7%에 해당하는 14만여 명이 영국으로 난민이 되어 몰려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시 영국 식민지 장관 조지프 체임벌린이 시오니즘의 지도자였던 테오도르 헤르츨에게 영국으로 몰려드는 동유럽 출신 유대인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영국령 동아프리카 마우 고원의 약 13,000제곱킬로미터의 땅을 줄 테니 그곳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1] 당시 러시아 제국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유대인 상당수가 남아공 식민지로 재이민하던 상황이었기에[2] 영국 입장에서 완전 터무니없는 제안을 한 것도 아니었다.

테오도르 헤르츨은 1903년 바젤에서 열린 제6차 시오니즘 총회에 이 문제를 안건으로 올렸고 회의에서는 이 안건을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비록 1897년 바젤에서 열린 제1차 시오니즘 총회에서 유대인 국가를 팔레스타인에 건설하기로 결정을 내렸고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진행 중이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굳이 영국의 제안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느냐는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팔레스타인이 본질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통치 아래에 있고 이미 그곳에는 유대인들보다 수적으로 훨씬 많은 아랍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외부에서 이주해오는 유대인들과 충돌할 위험성도 컸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재건하는 게 요원하다는 현실론도 만만치 않았다. 그 과정에서 러시아 유대인 대표가 강력하게 반발하며 퇴장하는 일도 있었지만 결국 투표 결과 총원 295명 중 177명의 찬성으로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1904년, 시오니즘 총회는 세 명의 대표를 영국이 제안한 마우 고원으로 보내서 현지 사정을 파악하게 했다. 마우 고원은 적도 바로 아래 지점이긴 했지만 해발고도가 높은 편이라 유럽인들이 거주하기에는 온화한 기후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사자 같은 맹수들이 많고 현지 원주민인 마사이족 등이 유대인들의 이주를 반길 것인가에 대해 대표들은 의구심을 가졌다.

결국 내부 논의를 거쳐 1905년 시오니즘 총회는 이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그러나 헤르츨에게 체임벌린을 소개시켜주면서 우간다 계획 떡밥을 연 이즈레일 장윌 같은 인물들은 '유대인 국가 세우는 게 중요하지, 그 나라의 위치가 꼭 팔레스타인일 필요는 없다'고 격하게 반발하면서 아시아아프리카 어디든 적당한 곳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자고 주장하며 '유대 영토주의 협회'를 조직하고 세계 각지에 유대인 국가 수립을 모색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윈스턴 처칠홀로코스트를 피해 망명한 유대인들의 피난처로 영국령 우간다를 다시 제시했지만 시오니즘 총회는 "팔레스타인 유대인 이주 제한 철폐가 중하지 우간다가 대수냐!"라면서 거부했다.

3. 실현되었다면?

이스라엘아프리카에 존재했을 것이다. 현재의 이스라엘보다 더 크고 강력한 국가가 되었을 가능성과 반대로 국제사회의 무관심 속에 현지인들과 싸우면서 현재의 이스라엘보다 더 상황이 나빠졌을 거라는 관측이 엇갈린다.

우선 낙관론으로는 유대 자본의 적극적인 지원과 미국의 원조 하에 우간다에 만들어진 유대인 국가가 현대 무기를 갖추고 소수의 인력으로도 다수의 아프리카인들과 맞설 수 있는 역량을 갖추면서 아프리카 지역의 중심부로 급부상했을 것으로 평가한다. 또한 아프리카 지역에 터전을 잡은 신생 유대인 국가가 아프리카 내부 분쟁에 개입하는 등 대륙의 경찰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즉, 현재 이스라엘보다 더 강력히 주변부에 수시로 기계화된 군대를 파병하여 질서를 잡았으리라는 것이다.

반대로 비관론으로는 서방의 무관심 속에 유대인들이 우간다 지역에서 제대로 된 지배 체제를 확립하지 못하거나 또는, 무력으로 주변국을 평정한 막장 패권국가가 되었으리라는 것이다. 중동과 달리 아프리카 국가들의 무장 수준이 형편없기에 유대인의 지배 체제는 일단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아프리카에 세워진 유대인 국가의 경우에는 국민소득이야 주변국들에 비할 바가 아니겠지만, 현재의 이스라엘처럼 외부 원조를 적극 받지도 못하고 그저 아파르트헤이트 시기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수준의 국가를 유지하면서 불안정한 지위에 놓였으리라는 주장이다.

어느 쪽이든 핵심이 되는 것은 석유이다. 미국이 이스라엘을 적극 지원했던 이유는 석유의 주 생산지인 중동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3] 이스라엘이 우간다에 있었다면 미국은 석유 확보를 위해 핵심 산유국들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지속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반미감정, 반서구감정도 지금보다는 훨씬 누그러져[4] 이슬람 극단주의가 발을 붙이지 못해 현재의 광신적인 이슬람 국가가 아니라 이란의 팔레비 왕조처럼 어느정도 세속화된 나라들이 다수였을 수도 있다. 물론 반대로,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보수파들과 세속주의를 주장하는 진보파들간의 치열한 내분이 벌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중동 국가에 이슬람 극단주의가 퍼지게 된 큰 이유 중 하나가 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 왕실에서 지원하는 와하브파인데, 사우디아라비아는 건국부터가 와하브파의 교리를 근거로 했기에 이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입장이다. 확실한 것은 지금보다는 극단주의의 세가 훨씬 덜 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 계획이 실현되었다면 아프리카 대륙 내부의 국제관계는 자연스럽게 아프리카에 건국된 유대인 국가에 가까운 지역을 중심으로 부유한 지역과 빈곤한 지역이 갈리는 형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아니면 로디지아에서 벌어진 것과 같은 지배층 이주민과 피지배층 토착민 간 내란이 발발했을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테러와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빈라덴이 밝힌 911테러의 목적은 1982년에 이스라엘이 레바논의 베이루트를 폭격한 사건(레바논 내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시가 재선에 실패하고 네오콘도 정권을 잡지 못하며,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도 없었으니 미국은 90년대의 호황을 2000년대에도 쭉 이어나갔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중동을 덜 신경쓰게 되니 중국과 러시아 견제에 집중하게 되어,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이나 조지아 전쟁도 일어나지 않고 중국도 미국의 패권에 대한 도전을 한참 뒤로 미뤘을지도 모른다.

4. 비슷한 계획들

묘하게도 이 계획은 나치 독일에게도 영감을 줬는지 유대인들을 마다가스카르 섬으로 옮기는 계획이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추진되었지만, 강력한 영국 해군의 포위망을 뚫고 마다가스카르 섬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계획은 폐기되었다.

기묘하게도 일본 제국도 유대인들을 만주로 이주시키는 이른바 '복어계획'이란 것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부유한 유대인들을 만주로 이주시켜 만주 개발을 촉진시키려던 것이 이 계획의 원래 목표였다. 그러나 부유한 유대인은 안 오고 빈곤한 유대인들만[5] 이주해오는 바람에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현재의 팔레스타인 지역 일대 대신 키프로스(사이프러스) 섬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려고 했다는 설도 있다. 유대인 국가로서 세우기 좋은 지역 중 하나로 제안된 적이 있었다. 실제로 유대인들도 옛날에 거주하기도 했었고, 키프로스에서 기독교를 전파했을때 이곳의 유대인들도 도와줬으며, 로마에 맞서 싸우기도 했던데다가(나중에 대다수가 쫓겨났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영국이 유대인들을 강제수용하기도 했었던 곳이기도 했었다. 유전적으로도 유대인과 이스라엘인들은 드루즈인들과 더불어 키프로스 섬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비슷하기도 했다. 이스라엘을 세운 유대인들 역시 키프로스 섬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유대인들의 국가를 세우게 되었다. 한편 키프로스도 터키계와 그리스계의 갈등과 분쟁이 심한 곳이라 여기서 이스라엘을 세웠다고 하더라도 여기도 팔레스타인 지역처럼 분쟁에 휩싸였을 가능성도 있다. 반대로 유대계대로 평범하게 살았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이렇게 되었다면 이스라엘-요르단, 이스라엘-사우디아라비아/바레인 간 수교가 앞당겨졌을 가능성이 높다. 굳이 사이프러스 섬에 있는 이스라엘을 적대할 이유가 사라지므로. 반면 튀르키예-이스라엘 관계는 현실과 달리 험악할 가능성이 높다.[6]

시나이 반도 역시 유대인 국가 건설지역으로서 제안된 적이 있었으나 이집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물론 이스라엘이 세워진 이후 여러차례의 중동전쟁으로 이스라엘의 침략을 받거나 시나이 반도가 이스라엘의 영토가 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1982년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관계 개선을 하면서 시나이 반도는 이집트에게 돌려주었고 대다수의 유대인 정착촌들도 폐지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여기에 이스라엘인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7] 하지만 시나이 반도 역시 분쟁 지역 중 하나이며 여기에 세웠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 아랍 분쟁은 피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8]

1차 대전 중이던 1917년에는 자신을 러시아 유대인 출신 의사라 밝힌 로트슈테인이라는 사람이 영국 측에 유대인들이 영국군과 함께 오스만에 맞서 싸우는 대가로 걸프 연안의 알-하사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게 보장해줄 것을 제안했는데,[9] 이렇게 되었다면 아라비아 지역에 이스라엘이 세워졌을 것이다. 이미 해당 지역은 사우드 가문의 사우디아라비아에 수중에 들어간 상황에서 다른 걸프 아랍인 세력들과 협상한 것도 있기에 거절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영국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는 팔레스타인 유대인국가 건설의 지지의사를 밝힌다.

소련에서는 스탈린에 의해 유대인 자치주가 만들어졌다. 한때 유대인 인구가 3만에 이르렀지만 전통적인 인구밀집지역인 유럽 러시아우크라이나와는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있었고, 기후조건도 영 좋지 않아 지역개발에 난항을 격었고, 스탈린 사후에 대부분 유대인들이 빠져나갔다. 현재는 거의 러시아인들만 살고있고, 유대인은 인구의 1%에 불과해서 말로만 유대인 자치주가 되었기 때문에 러시아 내에서도 존재의의가 없다며 유대인 자치주를 폐지하자는 목소리가 많다. 그래도 해당지역에서는 지역발전과 개발을 위해서라도 유대인 이주를 독려하기는 하지만 유대인이라도 러시아에 살거면 모스크바나 샹트페테르부르크같은 인프라가 발전되거나 소치같은 따듯한 지역에서 사는것을 원하지 암만 평화롭다고는 해봐야 변변한 천연자원도 없고 춥기는 추운 변방 한적한 동네로 가서 정착할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에 난항이 많다.

미국에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세웠던 '알래스카 유대인 정착촌 계획'이 있었는데 실제로 루스벨트 대통령은 2차대전 당시 나치에게 핍박받던 유대인들을 위해 알래스카에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미 의회 상임위원회에까지 올라갔으나 결국 부결되었다.[10]

위의 계획들 대다수가 열강의 주도 하 유대인 국가를 수립시키려는 계획이었고, 시오니즘 총회에서나 유대인들도 자체적으로 꾸준한 논의를 했다. 제안된 방안으로는 상술한 키프로스, 시나이 반도, 아라비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 등지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자는 계획이 있었다.

5. 매체

꽤나 흥미로운 대체역사물의 소재가 될 것 같지만 본격적으로 다룬 대체역사물은 아직 없다.

6. 같이 보기



[1] 일명 '우간다 계획'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것과 달리 정작 해당 지역은 우간다가 아니라 케냐에 있다. 물론 해당 지역이 우간다 보호령에서 케냐로 이관된 지 얼마 안 되었을 시점이었다.[2] 1880년대 약 4,000여 명이던 남아공 유대인 인구는 이에 힘입어 1920년대 4만여 명으로 증가하기 이른다. 남아공으로 이주한 유대인 절대다수가 리투아니아에서 영국으로, 다시 영국에서 남아공으로 이민한 케이스였다.[3] 정확하게는 소련이 중동전쟁에서 아랍 국가들을 지원했기에 반대급부로 이스라엘을 지원한 것이다.[4] 석유를 둘러싼 미국과 소련의 갈등은 계속되었겠지만, 그것은 이권을 위한 강대국들의 싸움일 뿐이므로 이스라엘의 존재와 중동전쟁에서의 참패가 아랍인들에게 새긴 자존심의 상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오히려 유고슬라비아가 그랬던 것처럼 두 강대국 사이를 줄타기하며 각종 국익을 얻었을 확률이 높다.[5] 대체로 일본 제국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은 백군을 따라온 러시아계 유대인들이 대다수였는데, 이들은 부유한 편이 아니라 빈농 유대인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6] 터키는 이슬람 국가지만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는 양호하다.[7] 최근 시나이 반도에 독립된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우자고 주장한 적도 있다. 시나이 반도 동북부 일부를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게 주고 가자와 시나이 동북부를 합쳐서 팔레스타인으로 독립하자는 주장. 서안지구를 더할 때도 있다. 사실 팔레스타인과 이집트도 같은 아랍계이고 중동 전쟁 당시 팔레스타인 남서부의 가자지구는 이집트와 통합되어 임시정부 또는 자치정부로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집트나 이집트 시나이 반도와 같이 묶여서 나올 때도 있었다.[8] 당장 팔레스타인 내에서의 분쟁도 이스라엘이 통제 못하는데 시나이 반도는 통제하기 힘들었을 확률이 높다.[9] 유대인들의 고향이 메소포타미아 남부인 칼데아 지역이며, 걸프 해 연안과 가까운 곳이기도 했다. 에덴동산의 위치가 그쪽 근방이라는 설도 있다.[10] 이 계획에 영감을 받아 집필된 대체역사소설이 마이클 셰이본의 유대인 경찰연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