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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메소포타미아 신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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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 수메르어 · 아카드어 · 아람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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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로니아 𒆍𒀭𒊏𒆠 𐤁𐤁𐤋 Bābili / Bāḇel | |||||
바빌론 제10왕조(신바빌로니아)의 최대 판도 | |||||
기원전 626년 ~ 기원전 539년 | |||||
위치 | 서아시아 | ||||
수도 | 바빌론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
국가원수 | 왕 | ||||
민족 | 칼데아인 | ||||
언어 | 아카드어 아람어 | ||||
종교 | 메소포타미아 종교, 마르두크 신앙 | ||||
주요 사건 | 기원전 626년 건국 기원전 612년 니네베 함락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 공성전 기원전 539년 멸망 | ||||
성립 이전 | 신아시리아 | ||||
멸망 이후 | 아케메네스 왕조 | ||||
현재 국가 | [[이라크| ]][[틀:국기| ]][[틀:국기| ]] [[시리아| ]][[틀:국기| ]][[틀:국기| ]] [[레바논| ]][[틀:국기| ]][[틀:국기| ]] [[요르단| ]][[틀:국기| ]][[틀:국기| ]] [[이스라엘| ]][[틀:국기| ]][[틀:국기| ]] [[팔레스타인| ]][[틀:국기| ]][[틀:국기| ]] [[사우디아라비아| ]][[틀:국기| ]][[틀:국기| ]] [[쿠웨이트| ]][[틀:국기| ]][[틀:국기| ]] [[튀르키예| ]][[틀:국기| ]][[틀:국기| ]] [[키프로스| ]][[틀:국기| ]][[틀:국기| ]] [[이란|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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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빌론을 중심으로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지배한 국가. 이전의 고바빌로니아와 구분하기 위해 칼데아 제국이라고도 한다.본래의 국명은 고바빌로니아를 계승하여 그냥 '바빌리'(바빌로니아)였지만 구분의 편의를 위해 학계에서는 신바빌로니아로 통칭한다. 현재의 이라크 남부 및 쿠웨이트 등에 있었던 셈족계 민족 칼데아인이 세운 나라라서 '칼데아'(Chaldea)나 '칼데아 바빌로니아'라고도 한다. 칼데아는 고전 그리스어 '칼다이아'(Χαλδαία)에서 유래했는데, 칼데아인 스스로는 아카드어로 '칼두'(Kaldu), 아람어로 '칼도'(Kaldo, ܟܠܕܘ)라고 불렀다. 《개역 성경》에 나오는 《구약성경》의 '갈대아'는 칼다이아를 음역한 것이며,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카시딤'(Kashdim, כשדים)으로 지칭하고 있다.
2. 역사
2.1. 배경
원래 바빌론은 기원전 1894년에 셈족의 한 계통인 아모리인이 세운 도시로, 초기에는 북쪽의 고아시리아, 남쪽의 이신, 라르사 등 주변의 대국들에 밀려 그다지 두각을 드러내는 국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함무라비 대왕 재위 이래 국력이 급격하게 발전하면서 고바빌로니아 제국를 세워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통일하는 업적을 남겼다. 고바빌로니아 제국, 즉 바빌론 제1왕조 자체는 함무라비가 죽고 난 이후에도 약 150여 년 동안 존속했으나 그 국력은 함무라비가 세상을 떠난 이래 급격하게 쪼그라들어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전의 조그만 소국 상태로 되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기원전 1595년에는 히타이트의 무르실리 1세에 의해 바빌론 제1왕조가 멸망당하면서 외래인들의 지배가 시작되었으며, 히타이트 이후에는 카시트인들이 침략해 들어와 약 500여 년 가까이 바빌론 지방을 다스렸다(카시트 왕조 또는 바빌론 제3왕조). 바빌론에 원래 거주하고 있었던 아모리인들과 아카드인들은 카시트인들을 쫒아내는 데에 성공한 후 조그마한 성읍을 세웠으나, 이전의 고바빌로니아 제국 시절과는 비교도 하기 힘들 정도로 그 세가 줄어들어 있었다.당시 바빌론의 민족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옛날부터 오랫동안 살아온 토착민족들인 수메르인, 아카드인, 아모리인들로 구성된 한 그룹과, 상대적으로 최근 들어 바빌론에 도착한 외래 민족인 레반트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레반트인들 중 한 분파가 바로 칼데아인들이었는데, 이들은 바빌론에 말뚝을 박고 시간이 흐르자 점차 바빌론식 이름을 쓰거나 문화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점차 바빌론화되어 갔다. 기원전 730년경에 이르자 이 칼데아인 부족들은 바빌론의 왕을 다수 배출하기도 하면서 바빌론 그 자체가 되어버렸으며, 자신을 토착 바빌론인들이라고 여기면서 완전히 동화되어 버렸다. 그러나 기원전 9세기에서 기원전 8세기까지 약한 왕들이 연달아 즉위하면서(바빌론 제8왕조) 바빌론의 세력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이 틈을 노린 북쪽의 신아시리아 제국이 기원전 729년에 결국 바빌론을 함락해 버렸다. 아시리아의 왕들은 자신의 칭호에 '바빌론의 왕'을 추가하면서 여러 차례 바빌론을 완전히 아시리아 내에 통합하려고 했으나 바빌론에서는 끊임없이 반란이 일어나 아시리아인들을 괴롭혔고, 결국 아시리아인들의 바빌론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바빌론 제9왕조).
2.2. 건국
신아시리아 제국의 수도인 니네베의 함락 | 나보폴라사르 |
새로운 바빌론 왕국을 세운 나보폴라사르는 인근 지방들에 대한 정복 활동을 펼치며 아시리아 군대와 끊임없이 충돌했다. 아시리아는 기원전 623년에 대대적인 총공세에 나섰고, 아시리아의 공격은 초기에는 성공적이어서 신바빌로니아는 거의 멸망할 위기까지 놓였으나 아시리아 본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아시리아 군대가 본국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아시리아에서 내홍이 일어나 더 이상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통치권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신바빌로니아는 빠른 속도로 인근 지방들을 정복해나갔다. 나보폴라사르 왕은 아시리아의 옛 영토들을 야금야금 먹어치워가면서 신바빌로니아의 영토를 급속도로 넓혔고, 반면 아시리아는 인근의 이집트의 지원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몰락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한때 강대했던 신아시리아 제국이 쇠락하면서 반란을 일으킨 것은 신바빌로니아뿐만이 아니었다. 아시리아의 오랜 적이었던 메디아인들이 아시리아에 공격을 퍼부으면서 아라파 일대를 정복했으며, 메디아인들의 왕인 키악사레스는 기원전 614년 경에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 인근까지 진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시리아의 옛 수도이자 종교적 중심지였던 아수르가 함락되어 잔혹하게 약탈당했고, 키악사레스는 이 아수르를 막 약탈하던 도중 함께 아시리아를 공략하고 있었던 나보폴라사르 왕과 조우했다. 아시리아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있었던 키악사레스는 아수르에서 나보폴라사르와 반아시리아 동맹을 맺고 함께 니네베로 향했다. 신바빌로니아-메디아 연합군은 6월부터 8월까지 약 2개월 동안 니네베 공성전을 펼쳤고, 결국 니네베를 떨어뜨리는 데에 성공했다. 아시리아의 왕이었던 신 샤리 이슈쿤은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고,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인 아슈르-우발리트 3세가 하란 지역에서 신바빌로니아-메디아 연합군에게 패배하면서 아시리아는 완전히 멸망했다. 당시 아시리아의 동맹이었던 이집트는 아시리아 멸망 이후에도 바빌로니아 군대와 전투를 계속했다. 그러나 기원전 605년에 카르카므쉬 지방에서 나보폴라사르의 아들인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게 대패하면서 결국 물러나게 되었다.
2.3. 네부카드네자르 2세
네부카드네자르 2세 | 전성기 바빌론의 모습 |
굉장한 정복 군주였던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맹렬한 정복 활동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가장 유명한 정복 활동은 지중해에 접한 레반트 지방에 대한 정복이었다. 이 정복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다 왕국이 멸망하여 유대인들은 조국을 상실한 채 끌려와 바빌로니아의 폭압적인 통치를 받았다.[1] 인류가 신에 닿기 위해 지었다는 바벨탑 또한 이 시기에 건설되었다고 하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바벨탑과 관련한 《성경》의 내용이 바빌론 유수 시기의 유대인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라 추측하는 쪽의 입장이다.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였던 바빌론의 거대한 지구라트에 압도된 유대인들이 이 경험을 바탕으로 소위 바벨탑 이야기를 창작했다는 것.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과는 별개로 당시 신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은 당시 세계 교역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막대한 부와 군사력을 바탕으로 인근 지역들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정복 군주일 뿐만 아니라 건축광이기도 했다. 상기한 바빌론의 공중정원 외에도 에테멘앙키 등 바빌론의 거대한 지구라트들, 이슈타르의 문 등을 포함한 바빌론의 거대한 성벽, 행진의 거리 등 수많은 건축물들을 지었다. 특히 이 행진의 거리는 푸른 벽돌과 황금으로 장식하여 굉장히 화려했다고 한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수도인 바빌론에 가장 큰 신경을 많이 쏟았지만 바빌론뿐만 아니라 신바빌로니아 왕국 내의 대다수 도시들에 관심이 많았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 재위기에 최소한 13개에 달하는 도시들이 완전한 리모델링을 걸쳐 아름다운 도시로 탈바꿈했다고 한다. 이처럼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건축과 문화, 영토 확장 등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당대의 바빌론은 세계의 수도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영광을 자랑할 수 있었다.
2.4. 쇠퇴
그러나 이렇게 번영하던 신바빌로니아도 네부카드네자르 2세 사후 쇠퇴하기 시작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 사후 왕위에 오른 아멜-마르두크는 겨우 2년 밖에 재위하지 못했다. 당시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궁정 신하이자 동부의 총독이었던 네르갈-샤레제르는 아멜-마르두크를 살해하고 자신이 직접 왕위에 올랐다. 네르갈-샤레제르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딸과 결혼해서 왕족 일가에 편입된 상태였고, 따르는 세력도 많았기에 아멜-마르두크를 쫒아내고 왕위를 찬탈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네르갈-샤레제르는 찬탈 당시 이미 고령의 나이였기에 즉위 이후 오래 살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네르갈-샤레제르는 바빌론의 몇몇 건물들을 개보수하고 소아시아 남부 킬리키아 지방에 원정을 떠나는 등의 활동들을 하다가 기원전 556년 경에 붕어했다. 네르갈-샤레제르가 붕어한 이후 그의 어린 아들인 라바쉬-마르두크가 왕위에 올랐으나 그가 9개월 만에 암살당하면서 심지어 제 아버지보다도 짧은 기간을 재위한 비운의 왕이 되어버렸다.라바쉬-마르두크를 내쫒고 새로운 왕에 즉위한 사람은 유력한 재상이자 장군이었던 나보니두스였다. 나보니두스 왕은 즉위 직후 수도 바빌론의 건물들을 개축하여 이름을 새기고 킬리키아 원정을 재개하는 등 전통에 따라 왕권을 강화했으며,[2] 이같은 노력들 덕분에 신바빌로니아는 왕들이 자주 교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 자체는 크게 흔들리지 않으며 나름대로 평화를 구가할 수 있었다. 전통적인 바빌론의 귀족 가문이 아니라 아시리아에서 온 가문 출신이었던 나보니두스 왕은 자신이 믿던 남신 난나의 위상을 격상시켰다. 심지어 바빌론의 전통적인 최고 신인 마르두크보다도 난나를 더 중시했고, 거의 국교 수준으로 난나 신앙을 장려했다. 이같은 종교 정책은 당연히 기존의 대신 마르두크를 모시는 사제들의 극렬한 반발에 직면했다. 하지만 나보니두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난나 신앙을 끝까지 밀어붙였으며 나중에는 오히려 신전에 대한 왕의 통제권을 강화해버리는 등 사제들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들을 계속 펼쳤다. 나보니두스는 레반트로 10년 동안 원정을 떠났고, 그동안 수도에는 아들인 벨사자르를 남겨두어 대신 통치하도록 했다.
2.5. 멸망
오피스 전투[3] | 바빌론에 입성하는 페르시아 군대 |
10월 12일에는 페르시아 군대가 유프라테스 강의 물길을 돌리면서까지 수도 바빌론을 공략했고, 덕분에 키루스 2세는 아무 저항 없이 바빌론에 입성할 수 있었다. 나보니두스 왕은 키루스 대왕에게 항복했고, 키루스 2세는 바빌론의 성벽과 마르두크 성벽에 구티인 병사들을 세웠다. 다만 마르두크에게 바치는 종교 의식이나 기본적인 생업 활동들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하여 바빌론 사람들의 저항을 최소화했다. 키루스 2세는 고대 바빌로니아 왕들의 적법한 계승자를 자처했으며, 자신이 불경한 나보니두스에 대한 마르두크 신의 징벌이라고 주장하면서 바빌로니아를 포용하려고 했다. 이같은 포용 정책이 어떤 효과를 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어찌 되었든 바빌로니아는 이 이래로 아케메네스 조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신바빌로니아 제국이 멸망한 이래 다시는 메소포타미아 토착민족 출신의 왕조가 바빌론에 세워지지 못했다. 참고로 이때 바빌론에 잡혀 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참고로 《성경》에 따르면 최후의 왕 벨사자르(벨사살)는 페르시아군이 침공해오는 것도 모르고 성대한 만찬을 흥청망청 즐기다 그 만찬이 끝남과 동시에 나라가 망한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성경》 외에 헤로도토스의 《역사》에도 그날 밤, 바빌론 사람들이 아주 성대하게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고 나오고,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인인 크세노폰의 기록 역시 이와 거의 같다. 20세기에 들어 출토된 소위 《나보니두스 연대기》에 따르면 바빌론이 제대로 된 시가전 한 번 없이 함락당했다고 한다.
물론 공식적인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의 아들인 벨사자르는 부왕에 버금가는 왕권을 행사하고 있었던 공동 통치자 혹은 대리 섭정 같은 존재였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그의 저작 《아피온 반박문》에서 인용한 기원전 3세기의 바빌론 사제 베로수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 함락이 있기 전 나보니두스는 키루스 2세에 맞서 출정했으나 오피스 전투에서 패배하고 제국 남쪽의 보르시파란 곳으로 달아났으며 바빌론이 함락당한 후 키루스 2세에게 항복했다고 한다. 예전에 벨사자르는 가공의 인물로 치부되었으나 쐐기 문자 점토판 유물들이 계속 출토가 되면서 그가 실존했음이 밝혀졌다. 요약하자면 그가 바빌론이 함락될 당시에 그 도시에서 나보니두스에 비견되는 왕권을 휘두르고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나보니두스는 재위 초기부터 남쪽 아라비아 지역에 관심을 가져 '데마'라는 지역을 정복했다. 이후 나보니두스는 바빌론으로 영구 복귀하기보단 데마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따라서 왕이 부재하게 된 바빌론 시는 애초 원정 당시 왕권을 대리했던 벨사자르가 계속해서 대리 통치했다는 것이다. 기록에도 분명 데마 원정 직전, 맏아들에게 대리 통치를 맡기고 신바빌로니아 제국 각지의 군대에게 그를 따르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이렇게 신바빌로니아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 사후 30년도 못 가서 아주 허망하게 멸망하고 마는데, 이후 나보니두스의 또다른 아들이라 주장하는 자칭 '네부카드네자르 3세'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페르시아의 샤한샤(왕중왕, 즉 황제) 다리우스 1세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신바빌로니아를 계승한 국가는 두 번 다시 등장하지 않았으며, 바빌론은 계속 페르시아 제국의 행정 수도이자 최대도시로 남아 있다가 기원전 4세기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를 정복한 알렉산드로스 3세가 다시 바빌론을 마케도니아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3세가 사망하고 그 후 셀레우코스 제국을 세운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가 바빌론의 인근에 '셀레우키아'라는 도시를 건설하면서 바빌론은 쇠락했다. 이후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바빌론 문서 참고.
신바빌로니아 제국은 멸망했으나 칼데아인들의 정체성은 살아남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시리아인 문서 참고. 참고로 고바빌로니아를 세운 아모리인과 신바빌로니아를 세운 칼데아인은 서부 셈계 민족에서 나왔다는 점만 빼면 다른 정체성을 가진 민족이었다. 그러나 아모리인들은 칼데아인을 지배할 때 어느 정도의 자치를 주었고, 칼데아 지역에 대해서는 딱히 강압적으로 통치하지도 않았기에 칼데아인들 입장에서는 고바빌로니아 제국에 딱히 완전한 반감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기원전 12세기에 아모리인들은 사라지고 칼데아인들만 남아 있었으나 칼데아인들도 문화적으로 일부는 고바빌로니아에 동화된 모습도 있었거나 바빌로니아인으로 정체성이 동화되었다. 그러다 보니 바빌로니아의 후손 및 후손이라 자칭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문화 역시 고바빌로니아를 계승했기에 칼데아인들이 세운 바빌로니아를 '신바빌로니아'라고 불렀다.
3.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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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폴라사르 | 네부카드네자르 2세 | 아멜-마르두크 | |
제4대 | 제5대 | 제6대 | |
네르갈-샤레제르 | 라바쉬-마르두크 | 나보니두스 | |
니토크리스 | |||
벨사자르 | }}}}}}}}}}}}}}} |
역대 | 이름 | 아카드어 발음 | 재위 시기 |
초대 | 나보폴라사르 (Nabopolassar) | 나부-압라-우추르 | 기원전 626년~기원전 605년 |
제2대 | 네부카드네자르 2세 (Nebuchadnezzar II) | 나부-쿠두리-우추르 | 기원전 604년~기원전 562년 |
제3대 | 아멜 마르두크[4] (Amel-Marduk) | 아밀-마르두크 | 기원전 562년~기원전 560년 |
제4대 | 네르갈-샤레제르 | 네르갈-샤르-우추르 | 기원전 560년~기원전 556년 |
제5대 | 라바쉬-마르두크 (Labashi-Marduk) | 라바시-마르두크 | 기원전 556년 |
제6대 | 나보니두스 (Nabonidus) | 나부-나이드 | 기원전 556년~기원전 539년 |
니토크리스 (Nitocris) | [5] | ||
벨사자르 (Belshazzar) | 벨-샤르-우추르 | [6] |
4. 종교
마르두크 | 신상을 모시고 행진하는 바빌론 사람들 |
신바빌로니아 만신전의 신들과 그 내용은 기존의 전통적인 메소포타미아 신화와는 약간 차이가 있다. 신바빌로니아 종교에서 마르두크는 세계의 창조신이었다. 신화에 따르면 태초에는 단물의 신인 아프수와 짠물의 신인 티아마트가 있었다. 이 둘은 엔키를 포함한 다양한 신들을 낳았다. 엔키와 여러 신들은 점차 부모인 아프수와 티아마트의 말들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했고, 이에 분노한 아프수는 제 자식들을 모두 죽여버리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이를 원치 않았던 티아마트는 몰래 엔키에게 아프수의 계획을 알려주었고, 엔키는 미리 선수를 치고 제 아버지인 아프수를 죽여버렸다. 자식들이 죽는 것은 바라지 않았지만 제 남편인 아프수가 죽는 것은 더더욱 바라지 않았던 티아마트는 격분했다. 티아마트는 군대를 일으켜 엔키를 포함한 신들을 공격했고, 신들은 힘에 밀리면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이 상황에서 나타난 것이 엔키의 아들 마르두크였다.
마르두크는 다른 신들을 설득해서 스스로 '신들의 왕'에 즉위했고, 신들을 이끌며 티아마트 여신의 군대를 깨부순 다음 그녀에게 강력한 화살을 날려 티아마트의 몸뚱아리를 두 조각으로 쪼개버렸다. 혼돈의 대표자였던 티아마트가 사라진 이후 마르두크는 세계를 창조했고, 세계와 함께 인류를 만들어 새로운 세상에 살게 했다. 기록에 의하면 마르두크가 인간을 만든 이유는 이들이 신들을 도와서 혼돈의 세력들이 다시 세상에 기어들어오는 것을 막고 자신들을 숭배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내용이야 어찌되었든 바빌로니아인들은 이 《에누마 엘리시》 신화를 믿었고 바빌론 중심의 거대한 지구라트에 마르두크의 신상을 세우고 숭배했다. 이 지구라트는 에테멘앙키라고 부르며 《성경》 속 바벨탑의 원형이 되었다.
신바빌로니아인들은 신상 그 자체가 신이라고 믿었다. 돌로 깎아 만든 신상이 단순히 천상계에 있는 신의 모습을 표현한 사물이 아니라 인간계에 강림한 신 그 자체로 믿었던 것이다. 때문에 바빌론의 사제들은 마치 실제로 신을 대하는 것처럼 신상을 매일 닦고 또 닦았으며, 매년 호화로운 의식을 바치면서 마르두크를 포함한 여러 신들을 섬겼다. 이처럼 당시 바빌론 사람들은 신상 그 자체가 신과 동일하다고 믿었기에 신이 저 멀리 하늘에서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가까이 옆에 있는 신전에서 머무르며 자신들을 직접 보살펴주는 존재로 인식했다. 바빌론인들은 매년 새해마다 신전에 안치되어 있었던 신상을 끌고 나와 신상들이 신선한 공기들을 마실 수 있도록 하고 여러 경치들을 관람할 수 있게 해주는 등 거의 신상을 살아있는 것처럼 대접했다. 이렇게 종교가 사람들의 삶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기에 신전의 권위가 굉장히 강했다. 또한 신전에는 노예가 아닌 수많은 자유 노동자들이 거주하면서 천을 짜거나 중요한 의식을 진행했는데, 이들은 신바빌로니아의 경제를 책임지는 도시 노동자층의 핵심이었다고 한다.
5. 문화
신바빌로니아의 점토판[7] | 바빌론의 '행진의 거리'를 이루던 벽돌들 |
문화나 조각 등에 있어서는 이전 수메르나 고바빌로니아 시대에 비해서 정교한 면에서는 약간 퇴보한 면이 있었다. 무력을 숭배했던 신아시리아 제국의 영향을 받아 이전에 비해서 섬세한 정도가 떨어진 것이다. 스스로의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만들었던 인장들의 조각들이 이전 수메르나 아카드 제국 시대에 비해서 훨씬 투박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그 주제 역시 사냥이나 대규모 전투처럼 전통적인 아시리아 주제와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참고로 당시 수메르의 전통 인장은 독특하게도 겉면에 양각을 한 원통 모양이었고, 이 원통을 점토판 위에 굴려서 인장에 새겨진 문양을 그대로 찍어내는 방법을 썼다. 다만 신바빌로니아 시대 이후로 점차 이런 방식의 인장은 사라졌고 우리가 흔히 아는 도장 형식의 인장들이 많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신아시리아 제국의 폭압적인 통치를 받던 메소포타미아 일대가 다시 신바빌로니아 덕분에 해방된 이후, 신바빌로니아는 옛 수메르-아카드의 문화를 다시 부활시키는 데에 많은 신경을 썼다. 일상 언어로는 주로 아람어를 사용했으나 여전히 이전에 썼던 아카드어가 공식적인 행정 언어로 많이 사용되었다. 신바빌로니아인들의 옛 수메르-아카드 문화에 대한 동경은 거의 종교적인 수준이었다. 특히 옛 시절에 메소포타미아를 한 차례 통치한 적이 있었던 아카드 제국과 고바빌로니아 제국에 대한 동경이 강했다. 예를 들어 건물 공사 도중 옛 아카드의 사르곤 대왕의 석상이 발견되자 이를 기리기 위해 그 자리에 새로운 신전을 지어 바치기도 했고,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나람신 대왕의 석상을 찾기 위해서 몇 차례나 발굴 작업을 하도록 인부들을 독촉하기도 할 정도였다. 신바빌로니아인들은 공주들을 달의 남신인 난나의 여사제로 만드는 사르곤 시절의 전통을 부활시키기도 했다.
노예제는 당연히 존재했으며 노예는 신바빌로니아에서 필수적인 계급들 중 하나였다. 다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만큼 대우가 안 좋지는 않았다. 물론 노예는 노예인 만큼 좋은 대우를 받고 산 것은 아니었고 주인에게 언제 무슨 짓을 당할지 몰랐다는 점은 같지만, 지쳐 쓰러져 죽을 때까지 부려먹힌 로마 제국의 노예와는 달리 신바빌로니아 사회에서 노예는 꽤나 귀중한 인적 자원으로 취급받았다. 대부분의 노예들은 몸값이 일반 노동자의 몇 년 임금에 달할 정도로 그 값이 비쌌기에 함부로 죽을 때까지 마구 쓰고 버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노예들은 정복 활동을 통해서 외부 도시들에서 잡혀온 전쟁 포로들로, 여성들의 경우에는 집에서 하녀로 일하면서 주인댁의 아이들을 봐주거나 빨래를 하는 등 기타 잡일들을 했고 남성들은 농사를 짓거나 주인의 비서로 일하면서 능력이 좋으면 주인 대신 무역에 종사하거나 세리로 일했다. 주인들에게는 노예를 입히고 먹일 의무가 있었기에 노예를 두는 것은 엄청나게 돈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때문에 일부 노예주들은 노예들을 전문적으로 훈련시킨 다음 다른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빌려주거나 가치를 높여 비싸게 팔아먹기도 했다. 노예들은 돈을 모아 제 주인에게 '자기 자신을 빌리는' 형식으로 부분적인 자유를 살 수 있었으나, 완벽하게 해방된 것은 아니었다. 노예가 완전히 해방되기 위해서는 주인의 허락이 있어야만 했다.
바빌론 왕궁 3D 복원도 | 바빌론을 흐르는 유프라테스강 |
특히 푸른 유약을 발라 구워 만든 벽돌 건축물들이 굉장히 유명한데, 이 푸른 유약 벽돌들을 굽는 것이 워낙 어려웠기에 푸른 벽돌은 오직 가장 중요하거나 신성한 건물들에만 따로 썼다. 가장 대표적으로 바빌론에 입성하는 외부인들에게 바빌론의 첫인상을 심어주었던 이슈타르의 문과 주변 성벽들을 푸른 벽돌들로 쌓았으며, 왕궁과 지구라트의 꼭대기에 위치한 신전 등을 푸른 벽돌로 지었다. 푸른 벽돌들 사이 사이에는 황색 유약을 발라 만든 금빛 벽돌들을 이용해서 용과 사자 등이 새겨진 조각들을 넣어 화려하게 장식했다. 참고로 이 이슈타르의 문을 이루던 벽돌들은 독일의 고고학자들이 바빌론 유적에서 통째로 들어내서 페르가몬 박물관에서 재조립했고, 현재는 페르가몬 박물관에서 꽤나 축소된 크기로 전시되어 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은 바빌론 유적에 이슈타르의 문을 다시 복원해서 지어놓았으나 페르가몬의 원본과 비교하면 꽤나 조잡해 보일 정도로 복원의 수준이 형편없다.
보통 신바빌로니아 건축이라고 하면 궁전이나 신전, 성벽처럼 공공 건물 등만이 남아 있으며 일반 평민들이 살았던 가옥들에 대한 연구는 그만큼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진흙 따위로 지었던 일반 가옥들이 워낙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모두 풍화되어 사라졌기 때문이다. 고고학자들이 따로 연구해본 바에 따르면 신바빌로니아 시대의 일반적인 가옥의 형태는 중앙에 중정이 있고 그 주위를 건물들이 사각형 형태로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중정을 둘러싸고 있는 벽들 각각의 면에는 중앙에 문이 하나씩 달려 있었고 이 문을 통과하면 여러 크고 작은 방들로 통했다. 대부분의 집들은 입구가 남동쪽이나 북서쪽, 이 둘 중 하나에 나 있었고 가장 큰 방인 거실은 보통 남동쪽에 있는 구조였다. 가옥들의 외벽에 장식 따위는 하지 않았으며 무더운 햇빛을 피하기 위해서 창문 같은 것은 내지 않았다. 높은 지위의 귀족이나 관리들은 대규모 저택을 짓고 살았으나, 일반적인 평민들은 가옥의 담장마저 공유할 정도로 빽빽하게 모여 살았다. 가옥들의 재료는 햇빛에 말린 진흙 벽돌이었으며, 지붕에는 목재 서까래를 얹은 후에 짚과 진흙을 섞어 지붕을 올렸다. 이슈타르 문에 쓰였던 것처럼 구운 유약 벽돌은 비쌌기에 물이 직접적으로 흘러가는 곳이나 돈이 많은 집안들만이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6. 경제
아시리아를 쫒아내고 새롭게 신바빌로니아가 들어서자 몇백 년 만에 바빌론과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부가 밖으로 빨려 나가지 않고 서서히 쌓여나가기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들 중 하나였던 메소포타미아 일대가 하나로 통합되면서 경제력은 껑충 뛰어올랐고, 네부카드네자르 2세 시대의 신바빌로니아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다.메소포타미아 일대의 토양은 세계적으로도 비옥한 편이었으나 정작 강수량은 이 토질을 뒷받침해줄 만큼 넉넉하지 못했다. 때문에 농부들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의 물줄기에서 물을 끌고 들어와 밭까지 관개해야만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강들은 범람하는 경우가 잦았고, 주기적으로 범람해서 계산과 예측이 쉬웠던 나일 강과는 달리 범람 주기도 불규칙하고 범람하는 양도 천차만별이어서 이를 계산하는 것이 당시로서는 굉장히 힘들었다. 때문에 메소포타미아의 군주들은 아예 웬만한 범람들은 버틸 수 있게 거대한 운하와 댐들을 세워야만 했으며 꾸준하게 이를 관리해야 해야 평민들과 농부들의 불만을 억누를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황하 등을 치수하는 데에 목숨을 걸었던 중국의 역대 왕조들과도 비슷한 면이 있는 셈.
신바빌로니아 경제의 중심은 신전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신바빌로니아 시대의 가장 자세한 경제 관련 기록 역시 신전에서 발행한 것이다. 신전에 소속된 사람들은 자유롭지 못했고 '시라쿠'라고 불렸으며 보통 스스로 경작할 수 있는 양보다 지나치게 많은 할당량으로 인해 고통받았다. 때문에 신바빌로니아 후기에 이르자 점차 시라쿠들의 생산력은 갈수록 줄어들었고, 결국 신전들은 일반 농부들을 따로 고용해서 신전의 땅을 경작하게 한 다음 신전에서 쓸 옷이나 식량 등으로 그 대가를 받는 제도를 썼다. 다만 이 농부들도 시라쿠들보다 상황이 나았던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농부들은 각종 사고들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수많은 세금들을 홀로 부담해야 했다. 심지어 수많은 농부들이 일을 때려쳤다거나 아예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가면서까지 신전에 세금을 바쳤다는 기록이 꽤나 많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농부들도 딱히 나은 형편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라누'라고 부르는 독특한 형태의 사업 구조가 존재하기도 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돈 많은 자본가가 실제로 일을 하는 실무자에게 돈을 빌려주면 이 실무자가 자본가의 돈을 이용해서 사업을 하는 구조였다. 사업에서 얻어낸 이익은 둘이서 공평하게 나누어 가졌다. 이같은 제도는 물론 현대에는 펀드나 주식 등 굉장히 흔한 제도이지만, 당시는 몇천 년 전 고대임을 감안해야만 한다. 당시로서는 남에게 돈을 빌려주고 대신 사업을 한다는 구조가 굉장히 혁신적인 생각이었고, 이를 통해서 돈이 많은 사람들이 능력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대리해서 사업을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자본이 돌기 시작했으며 여러 산업들이 동시에 발전했다.
7. 성경 속 묘사
유대인들에게는 2,500년 이상이나 지속된 디아스포라를 촉발시킨 장본국이기에 셀레우코스 제국(마카베오 전쟁), 로마 제국(유대-로마 전쟁), 나치 독일(홀로코스트)과 더불어 불구대천의 원수로 취급하는 국가이다. 《구약성경》에 바빌론 유수, 네부카드네자르 2세 왕의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신바빌로니아인들은 유대인들의 나라인 유다 왕국을 멸망시키고 주민의 상당수를 수도인 바빌론으로 끌고 가 포로 생활을 시켰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감정은 결코 좋을 리 없었다. 또한 당시 신바빌로니아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번영한 나라였던 반면, 유대인들의 나라인 유다 왕국은 변방일 뿐이었는데[8], 이런 유대인들의 눈에 호화찬란한 영화를 누리고 있던 신바빌로니아는 그야말로 쾌락이 가득했던 별천지였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유대인들이 바빌론을 악의 도시, 탐욕과 쾌락에 빠진 도시로 《성경》에 기록했을 거라는 주장도 있다.
《성경》 <다니엘서>의 내용에 따르면, 금속으로 비유할 때 신바빌로니아의 영화는 황금이고 이후에 나타나는 페르시아 제국,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헬레니즘 제국, 로마 제국은 각각 은, 구리, 강철로 모두 신바빌로니아의 위대함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단순히 금속의 희귀성이 제국의 크기나 군사력과 대응된다기보다 각각의 금속의 성질이 그렇듯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순서대로 이전의 제국보다는 강하지만 그 본질적인 가치는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문화적인 면에서 본다면, 실제로 로마 제국으로 갈수록 독자적인 문화보다는 기존 문화의 계승이 더 크게 나타난다. 헬레니즘은 그리스 문화에 기존 동방 문화가 결합된 것으로 긴 말할 필요가 없으며, 로마의 경우 건축술은 에트루리아의 것을, 예술은 그리스의 것을 모방하여 정교화했다.
그리고 <다니엘서> 등의 내용을 보면 포로로 끌려온 유대인을 비롯한 다른 나라 민족의 인재들도 능력이 있으면 신바빌로니아의 주요 공직에 임명되기도 한 모양이다.
<요한의 묵시록>에서는 아주 나쁜 의미로 바빌론을 언급하고 있는데, 14장의 3번째 부제가 '바빌론의 패망'이다. 물론 이 바빌론은 문자적 바빌론 그 자체가 아니라 해석이 분분한 다른 어떤 것을 지칭하는 상징적 의미이다.
8. 여담
- 문명 5에서는 과학빨로 승부하는 문명으로 등장한다. 지도자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9]
[1] 이 시기에 대한 기록이 '인류 최대의 베스트셀러'라고 불리는 《성경》의 <다니엘서> 등에 등장한다.[2] 이 과정에서 메소포타미아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유물들을 발굴, 딸인 에니갈디-난나(Ennigaldi-Nanna) 공주가 설립한 박물관에 전시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나보니두스는 최초의 고고학자, 에니갈디-난나는 최초의 큐레이터로 여겨지기도 한다.[3] 키루스 대왕과 나보니두스가 격돌한 전투로, 신바빌로니아 군대가 대패하면서 신바빌로니아의 운명을 종결지었다.[4] <열왕기>와 <예레미야>에는 '에윌므로닥'으로 나온다.[5]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의 아내인데,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는 그녀도 왕이었다고 나온다.[6]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의 아들인데, 다니엘서에서는 그도 왕이었다고 나온다. 나보니두스가 아라비아 반도 지역에 관심을 가지고 개척에 나설 때 아들인 벨사자르에게 왕위를 위임하고 대리 통치를 맡긴 것으로 여겨진다.[7] 참고로 신바빌로니아 시대 예루살렘에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한다.[8] 북이스라엘 위에 시돈이라는 상업도시가 있었는데 이 시돈의 공주가 북이스라엘의 왕보다 위세가 있었다.[9] 문명 1부터 문명 4까지 바빌로니아의 지도자는 고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