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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
하란의 독특한 주거 형태인 원추형 흙집
1. 개요
튀르키예어, 영어 Harran아랍어 حران
튀르키예 동남부 샨르우르파에 위치한 도시. 우르파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40km 떨어져 있으며, 시리아와의 접경 지대로서 인구 8천 명의 작은 도시이다. 지금은 평범한 곳이지만 과거엔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주요 교통로상에 위치하여 번영했으며[1] 유적이 즐비하게 남아 있다.
고대 로마가 대패한 카르헤 전투가 일어난 곳이다. 칸나이 전투와 아라우시오 전투에 이은 3번째 패배이다.
2. 역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정착했던 곳으로 전해질 만큼 매우 오래전부터 도시가 있었으며 이곳에서 발견된 기원전 3000년경의 기록에도 상업, 종교적 중심지였다고 적혀있다. 또한 창세기에 따르면 기원전 2000년경, 아브라함이 신의 계시를 받고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하란에서 머물렀으며 그의 부친인 테라가 이곳에서 사망하였다. 이후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사악의 아들인 야곱은 지금도 도시 서쪽에 남아있는 야곱의 샘에서 아내 라헬을 만났고 형으로부터 장자의 권리를 훔친 후 20년간 숨어 지낸 곳도 하란이다. 하란에서 지내는 동안 야곱 (이스라엘) 후에 이스라엘 12지파의 시조인 열두 아들을 낳고 키웠다.
이처럼 하란은 구약성경에 빈번히 등장하는 도시로서 셈족 (아랍, 유대)과 아브라함계 종교 (유대, 기독교, 이슬람)의 성지이다. 이스탄불의 톱카프 궁전에 소장된 모세의 지팡이와 아브라함의 유품도 본래 하란에 있던 것을 오스만 제국이 옮긴 것이다. 아브하람 ~ 야곱의 시대 이후 하란은 인근의 우르파(에데사)와 함께 미탄니와 히타이트, 그리고 아시리아에 걸쳐 중심지로서 번영하였다. 한편,
이후 페르시아, 헬레니즘 시대를 지나 하란은 로마와 파르티아 간의 국경 도시로서 '카르헤' (Carrhae)로 불리게 되었다. 기원전 53년, 로마의 집정관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의 장군 수레나스에게 압도적인 병력 차에도 대패한 카르헤 전투가 일어난 바로 그곳이다. 패전 이후 크라수스는 하란 성으로 피신하였다가 병사들의 위협으로 파르티아와 협상에 나섰는데, 그중에 살해되었다. 이후 로마는 백 년 넘게 파르티아에 수세적인 전략으로 일관하였다. 217년, 파르티아 원정에 나선 로마 황제 카라칼라가 카르헤에서 암살되었고 296년에 로마군은 2차 카르헤 전투에서 이번엔 사산 왕조 군대에 패배하였다.
3세기 이후, 기독교가 해당 지역에 전파되었지만 카르헤는 여전히 메소포타미아 신화 기반 다신교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이 때문에 로마 제국 후기, 카르헤의 이명은 '이교도의 도시'라는 뜻의 헬레노폴리스[4]였다.
7세기 중반, 카르헤는 이슬람 도시로 변모하며 다시 하란으로 불리게 되었다. 우마이야 왕조 말기인 750년에 하란에는 '천국의 사원'이라 불리는 마스지드(모스크)와 마드라사(학교)가 지어졌는데, 이슬람 신학과 법학 외에도 의학, 철학, 과학, 천문학 등이 연구되었다. 따라서 일각에선 모로코의 알 카라위인, 이집트의 알 아즈하르에 앞선 첫 번째 이슬람 대학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9세기 아바스 왕조의 권학 분위기 속에서 하란은 일찍이 학문적 중심이던 인근의 에데사, 니시비스와 함께 그리스 학문을 이슬람 세계에 전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편, 하란은 기독교 외에도 다신교, 사비아교(모세 숭배)[5], 만다야교 등의 여러 종교가 혼재했는데 동로마 제국과 이슬람 제국 시대를 거치며 쇠퇴하였다. 특히 압바스 왕조의 칼리파 알 마문은 다신교도들에게 아브라함계 종교 (유대/이슬람/가독교) 중 하나로 개종하도록 강제하기도 했다. 아바스 왕조의 쇠퇴 이후 하란은 함단 왕조를 거쳐 990년 ~ 1081년간 메소포타미아 서북부를 지배한 누마이르 왕조의 수도였다. 누마이르 조는 파티마 왕조에 복속된[6] 시아파 국가였는데, 1033년에 시아 무슬림의 봉기로 사비아교 신전이 파괴되었다.[7]
십자군 전쟁시기에 하란은 십자군/이슬람 세력의 경계였다. 특히 십자군 국가들 중 에데사 백국은 수도에서 불과 40km 떨어진 하란을 점령하려 하였고 1104년, 안티오키아 공국과 연합하여 도시를 공격하였다. 하지만 1만이 넘는 십자군은 셀주크-아르투크 왕조 연합군에게 대패하였고 이로써 십자군의 동진이 좌절됨과 동시에 이슬람 세력의 반격이 시작되었다.[8]
12세기, 아이유브 왕조에 의해 요새화 되었던 하란은 1259년, 몽골군에게 함락된 후 대대적으로 파괴되었다. 이때에 카르헤 교구 산하 기독교 공동체도 소멸하였다. 이후 하란은 오스만 제국기인 18세기까지 폐허로 남아있었으며, 현재도 작은 도시에 불과하다. 카르헤 교구는 명목상으로나마 가톨릭 교회에 명의교구로 남아있다. 한편 1260년 즈음 하란 부근에서 태어난 이븐 타이미야는 한발리파의 거두로서 후에 와하비즘의 시조격으로 추앙받게 된다.
[1] 도시명인 하란도 '교차로'를 의미한다.[2] 해당 구절은 지극히 기독교 성서적인 관점임을 감안하자. 실제 고고학적 기록상으로는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달의 신인 난나 신앙이 지배적이었다. 이미 기원전 20세기부터 주변 세력과 외교적 관계를 맺을 때 난나의 셈어식 표현인 씬(𒂗𒍪)을 걸고 하는 표현이 관용구로 정착되었을 정도. 하란 지역의 달의 신 신앙은 헬레니즘-로마-기독교 전파 시대를 거쳐 이슬람 정복기까지 이어진다.[3] 다만 오래가진 못하여 기원전 609년, 칼데아-메디아 연합군에게 함락되며 아시리아는 멸망하였고 하란도 파괴되었으나 파괴의 주체인 신바빌로니아 (칼데아) 시기에 재건되었다.[4] 헬라인이라는 민족명은 이 무렵부터 다신교도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헬라인이 원래 의미인 그리스인이라는 뜻을 되찾는 것은 그리스 독립전쟁 시기 쯤이었다.[5] 사실 사비아교가 정확히 어떤 종교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슬람 학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하란과 바그다드 인근 사비아인들은 10세기까지 두무지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식을 매년 치렀다고 하기에, 사비아교가 메소포타미아 다신교였다는 설도 있지만, 다른 기록에 따르면 하늘의 행성들을 유일신의 대리자들로 숭배하였다고 하기에 신플라톤주의나 영지주의 계열 종교였다는 설도 있다. 해당 시기의 만다야교 역시 탄압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사비아교로 자칭했기 때문에 정체 파악에 더 난항이 있다.[6] 1037 ~ 1060년[7] 신전은 이후 누마이르 왕조의 궁전으로 그쳤고 장기 왕조의 누레딘에 의하여 요새로 개조되었다.[8] 그리고 안티오키아 공국의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보에몽 1세는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에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