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15 20:25:29

이라크/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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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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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공화국이라크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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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역사(تاریخ تمدن بین النهری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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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라가쉬라가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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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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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에쉬누나데르에칼라툼둘 - 카틀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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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이신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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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이신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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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라르사우루크라르사U시랜드
U라르사라르사엘람 제국L시랜드
G라르사시랜드
L라가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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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트 인 / 미탄니 제국 히타이트 중기 아시리아 제국
Y히타이트 제국E미탄니미탄니 제국이집트히타이트 제국히타이트히타이트바다 민족이신아시리아 제국
H미탄니미탄니히타이트아시리아 제국아시리아 제국아시리아아시리아 제국아시리아
E아시리아아시리아M
N고 아시리아 왕국시리아
M카시트 왕조
바빌로니아
카시트 왕조
A
S카시트 왕조
B카시트 왕조카시트 왕조엘람 제국이신
왕조
I이신
K시랜드 왕조
U
L
H엘람 (암흑기)중세 엘람(안자니트 왕조)
중기 아시리아 제국 BC 1000 - 900 신 아시리아 제국(~ BC 607)
Y아시리아 제국아시리아 제국아시리아 제국운키 / 비트 아구시아시리아 제국아시리아 제아시리아Y아시리아 제국아시리아 제국아시리아 제국아시리아아시리아 제국 - 아슈르바니팔
H카르케미쉬우라르투
D나이리아시리아아시
리아
R비트 바히니
E아시리아나시비나 /
비트 아디니
N
A아시리아
S아나토아나토
M라카 / 힌다누 / 수부아나토
B이신
왕조
이신
왕조
카시트 왕조바빌로니아
엘람 / 토착 왕조
제국바빌로니아칼데아 왕조칼데아B
I제국
K
U바빌로니아
L
H엘람 (중간기)신 엘람 (안자니트 왕조)
오리엔트 제국 헬레니즘 로마 제국 vs 이란 제국 이슬람 제국 중세
신아시리아 제국신 바빌로니아 - 칼데아 제국아케메네스 왕조페르시아 제국헬레니즘 - 마케도니아 제국셀레우코스 왕조아르메니아로마 제국 - 동로마 제국사산 왕조 - 이란 제국동로마 제국정통 칼리프 - 라쉬둔 왕조우마이야 칼리프 제국압바시야 칼리프 제국함단 왕조셀주크 제국
파르티아 제국사산 왕조
페르시아
이란 제국
사산 왕조부와이흐 왕조
| N: 북부 니네베 | B: 중부 바빌론 | I: 중남부 이신 |
| U: 남부 수메르(우르·우루크·라가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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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이라크역사에 대해 다룬다.

메소포타미아는 까마득하지 그지없는 기원전 20세기경 머나먼 고대 바빌로니아 시절부터 현재까지 근 4000년간 확고하게 셈 계열 민족이 절대다수를 차지했던 지방이다.[1]

이는 디아도코이 왕조, 이란계 제국, 투르크계 제국등 타 민족의 기나긴 지배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문헌으로 확인할 수가 있다.[2] 메소포타미아 지방이 페르시아-헬레니즘 문화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맞으나 단방향이 아니라 영향받은 만큼 페르시아-헬레니즘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페르시아 문명 탄생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은 로마 문명 탄생에서 그리스 문명의 영향력 그리고 한국 문명 탄생에서 중국 문명의 영향과 비견할 수준이고, 그리스 문명의 독자성과 개성은 부정할 수가 없으나 그 맹아는 이집트-시리아-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영향을 깊숙하게 받아서 싹을 틔웠다.

교과서나 백과사전에서 헬레니즘 문명이란 그리스 문명과 중동 토착문명의 융합이라고 하는 것처럼 기존 토착문명의 연장 선상이지 완전히 문명 교체 현상이 일어난 게 아니다. 중동의 아랍화와 이슬람 문명권의 경우는 유목민이거나 자체 농업 기반이 매우 빈약하지만 교역로에 의존해서 간신히 이루어진 소규모 상업 도시인인 아랍인의 자체적인 문화적인 역량이 근린 문화에 비해서 낮아서 언어나 종교적인 분야를 제외하고는 중동 토착문명에서 거의 일방적인 영향을 받아들이고 지배지들의 문명을 서로 융합시켜 탄생한 문명이다.

이슬람 발흥 이전의 아랍 문명을 따져봐도 위에 쓴 페르시아 문명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영향을 받은 것 못지 않게 셈어권 중동 문명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유사점이 많았던 문화다. 언어 변화의 경우 메소포타미아-시리아 인들의 아람어와 아랍어는 같은 어파이다.[3] 이슬람도 따지고 보면 기독교-유대교와 같은신을 믿고 경전과 교리도 공유하는 부분이 많은 같은 종교의 다른 분파라고 볼 수가 있다.

이 지역의 종교는 전 세계에 종교적으로 엄청나게 영향을 주었는데 유대인들이 원래 살던 곳이 메소포타미아 지방이고 에덴 동산도 이라크 일대로 추정되어 지고 있으며 아브라함 일족이 메소포타미아를 떠나게 되고 이집트에서 머물다가 가니안에 정착한 뒤로도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등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장악한 강국들의 지배를 여러 번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4]

2. 근대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메소포타미아 위임통치령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후손 가문인 하심 가문오스만 제국 시대에도 메카의 지배계급이었다. 이들 중 후세인 빈 알리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6년에 아랍 독립에 대한 영국의 지원을 약속받고 오스만 제국에 대한 아랍의 반란를 선언하였다. 아랍 반란 직후 그는 통일 아랍왕국의 왕임을 선언했지만 연합국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영국은 1차 대전 후 시리아, 이라크, 팔레스타인을 프랑스와 함께 위임통치하기로 명시한 베르사유 조약을 맺었다. 후세인 빈 알리가 이에 항의해서 조약의 비준을 거부한 후 연합국의 지원이 중단되었다. 영국은 후세인의 차남 압둘라를 1921년 요르단 왕국의 초대 국왕으로 만들었고, 이라크는 1922년 후세인의 셋째 아들인 파이살을 국왕 파이살 1세[5]로 하고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는 형식적인 왕국으로 독립시켜 주었다.

3. 현대

이라크는 1932년 정식으로 이라크 왕국으로 독립한다. 1933년에 파이살 1세가 사망하고 그의 뒤를 이은 아들 가지 1세는 6년 만에 사망, 손자 파이살 2세가 4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다. 그런데 그때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다. 마침 영국의 내정간섭에 지친 이라크의 민족주의자들은 정변을 일으켰고, 추축국에 가입하고 영국과 전쟁을 벌였으나, 결과는 1달 만에 패배(...). [6] 영국은 그 후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키며 이라크를 실질적으로 지배하였고, 이라크는 1948년에 와서 주권을 되찾는다.

1958년, 이라크와 요르단은 연합하여 아랍 연합 공화국처럼 아랍 연방이라는 국가를 만든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반란의 위기에 직면한 요르단후세인 1세 국왕이 이라크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그런데 이를 기회로 이집트의 나세르가 주창한 '아랍 민족주의' 에 영향을 받은 압둘 카림 카심(1914~1963) 장군 중심의 자유장교위원회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이 무너지면서 이후 이라크는 왕정이 폐지되고 카심 장군을 총리로 하는 공화국 정부가 들어섰다. 카심 총리는 여성 차별을 금지하고 일부다처제를 금지하는 개혁정책을 취하는 여러 노력을 했다.

그러나 카심 총리의 공화국 정권도 1963년 바트당 쿠데타로 무너지고 카심 총리는 공개 총살형에 처했다. 68년 이후부터는 계속 바트당 독재가 계속된다. 1979년에 사담 후세인이 정권을 장악하고 그 뒤로 후세인에 의한 철권통치가 이루어진다.

후세인의 군복 모습 때문에 오해하기 쉬운데 후세인은 군 출신도 아닌 데다 쿠데타도 아닌 합법적인 권력 이양을 통해 대통령에 취임했다. 심지어 사담 후세인은 군 입대조차 하지 않았다. 후세인은 바트당의 말단으로 출발해서 자기 능력으로 내각 요직까지 오른 뒤, IPC국영화 과정에서 부통령에 취임하고 문맹퇴치 운동과 문화재 보호 사업 등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서 바크르 대통령을 제치고 이라크의 최고 인기 정치인이 된다. 1970년대 후반 바크르 대통령이 뒤늦게 후세인을 통제하려 했지만 이미 민심과 당심, 군부 지지까지 얻어버린 후세인을 이기지 못하고 물러난 것.

대외적으론 바크르 대통령이 심장 발작을 일으키고 나서 건강을 이유로 합법적 절차로 정권을 이양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분위기가 바크르 대통령 주변 요직은 후세인 쪽 파벌들이 장악하여 대통령의 입지가 매우 약해진 상태였고 훗날 나오는 여러 증언들에서는 사담 후세인이 매형인 아드난 카이랄라 장군,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바트당의 인텔리인 아드난 함다니, 이복동생 바르찬 후세인, 타리크 알 아지즈, 사촌 알리 알 마지드 장군 등의 정권 핵심층과 엘리트들을 포섭하여 바크르 대통령을 퇴임하도록 강한 압력을 넣었다고도 한다.[7]

사실 후세인 집권 초기만 해도 이라크는 미국과는 단교 상태(1967년)였고 소련에서 지원을 받고있는 아랍 내 대표적 친소 국가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란에서 시아파 원리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상황이 변했다. 혁명 전 이란의 샤 왕조 붕괴를 위해 암약하던 사우디아라비아가 혁명과 함께 손을 떼는 것과 동시에 바톤 터치하듯 이라크가 이란에 대한 무력 행동을 시작한 것이다.

4. 이란-이라크 전쟁

1980년, 이라크의 침공으로 시작된 이란-이라크 전쟁은 결국 양국의 피폐만을 가져왔다. 이라크는 1984년, 미국과의 국교 회복과 함께[8] 이후 4년 동안 297억 달러에 이르는 거액의 군사원조를 받았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5. 걸프전

1988년, 승리는커녕 쪽박만 깨진 형태로 이란과의 전쟁이 종결되자 후세인은 약이 올랐다. 결국 국내의 불만도 잠재우고 삥뜯기도 겸하여 90년에 쿠웨이트를 침공했다가 미국과 서방 세계는 물론이고 인근 아랍 국가까지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완전히 밑천까지 거덜내는데 이것이 바로 걸프전이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아버지 조지 H. W. 부시.

걸프전 이후 UN은 안보리결의 687, 688을 통해 후세인 정권의 손발 묶기에 나섰다. 특히 안보리결의 688은 시아파나 쿠르드족 보호를 명목으로 다수의 비행금지구역(북위 36도선 이북과 33도선 이남)을 설정, 이를 기회로 조지 부시는 이라크인들에게 후세인 정권을 전복하라고 선동하는 발언을 자주 했고 실제로 시아파나 쿠르드족 지역에서 봉기가 빈발했다. 하지만 막상 봉기가 일어나자 미국 정부는 이를 외면했고 서방 국가들도 나 몰라라 했다. 주변 아랍 국가들도 구경만 하는 판이었다. 정작 비행금지구역만 설정했을 뿐 지상군 이동에 대한 제한은 전혀 없는 반쪽짜리 규제였던 것이다.[9] 그렇게 봉기는 압살되고 애꿎은 희생자만 양산되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서 후일 일어나는 혼란의 불씨만을 남긴 채 후세인 정권은 의연히, 계속 유지되었다.[10][11]

UN과 미국은 경제제재를 통해 후세인 정권의 고사를 기도했지만 후세인의 위세는 흔들림이 없었다. 군대는 살찌고 아이들은 굶주리는 판이었다. 돌이켜보면 역사상 경제난으로 물러난 독재자가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다. 물론 몇몇 혁명들의 원인은 굶주림 때문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어떤 사이비 교단급으로 통치를 누가 봐도 답이 안 나올 정도로 엉망으로 하는 데다가 분위기가 제대로 무르익었을 때의 이야기고 대부분은 정해진 조건 안에서는 통치를 그럭저럭 하는지라 도리어 체제가 공고해지는 독재자가 더 많았다.

6. 이라크전

이라크는 국제사회에 국내 기아 문제를 어필하여 UN으로부터 석유 식량 프로그램(Oil-for-food program)이라는, 군수품을 제외한 생필품과 석유를 거래하는 유예를 얻었다. 이라크인의 생활고에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눈 먼 돈 폭발로 UN 내에서는 뇌물, 부정 의혹이 끊이지 않았고 이때문에 서방 각국은 서로를 질시와 의심의 눈으로 바라본다.

이 와중에 이라크가 핵 개발을 기도한다는 의혹이 국제사회에서 터져나왔다. 풍문 정도의 애매한 의혹이었지만 UN 사찰단은 이라크 영내에서 방해 받았고 의혹은 부풀려져 갔다. 미군은 제재를 목적으로 몇 번이고 공습을 감행했지만 효과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결국 9.11 테러가 발생하자 조지 W. 부시(조지 부시의 아들이자 미국 대통령)는 "이라크가 대량살상병기를 만들고 있다" 고 주장하며 이라크를 위험주자로 지목하고는 싸울 의지도 별로 없는 나라를 조져버린다. 후세인이 1차 걸프전 때도 대량 살상무기에 화학무기, 생물무기를 가지가지 만들면서 쫓아냈던 UN 시찰단을 무역 봉쇄에 경제 제재라는 명백한 손실을 감내하면서까지 전쟁 발발 때까지도 계속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 의혹을 크게 살 만 했다. 이는 이슬람 문화권의 자존심에 관한 문화적인 차이(집 안에 다른 남자를 들이지 않는다든가)에 기인한 것이라는 설명도 있는데, 이라크도 국제 외교무대에서 말도 안되는 국룰을 우기는 아마추어는 아닐 것이고, 끝까지 사찰을 거부한 이유는 아직도 미스테리이다. 결국 전쟁 직전에서야 후세인은 사실상 사찰을 조건부 허용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는데, 대놓고 허용이 아니라는 마지막 자존심을 챙기려는 모습을 보이는 바람에 전쟁을 막을 수 없었다. 그 정도 애매한 것으로는 미국도 전쟁 중지의 명분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

여튼 어떠한 물적 증거 없이 정황적인 이유 하나만으로 이라크전이 일어나게 된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폭격이야 테러에 대한 응징과 차후의 안보를 위해서라고 정당화가 될 수 있다고 쳐도 이라크 침공으로 전쟁을 확대한 것에 대해 깔끔한 근거를 들 수는 없을 것이다. 후세인이 구린내를 슬슬 풍기고는 있었다지만 결국엔 누명이었던 것으로 밝혀졌으니 수도인 바그다드가 이슬람이 형성된 이후 세 번째로 비 이슬람 세력에게 점령당하는 수모를 당했다.[12] 처음에 이라크인들은 미군이 들어오자 성조기를 휘두르고 '예스 부시' 를 외치면서 열광했으며 전국의 후세인 동상과 초상화를 때려부수고 신발로 때리며 분풀이를 했지만 이라크 주둔 미군이 계속 '오인 공격으로 인한 부차적 피해' 를 내고 점령지의 문화와 상태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일방적인 행동을 일삼았으며 점령정책을 아주 개판으로 처리하는 바람에 대혼란이 와서 미국 하면 이를 갈게 됐다.
우리는 미국에게 그렇게 쉽게 점령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이라크 쪽에서 말하자 조지 W. 부시는
이라크 사람들이 점령당하는 게 불쾌하다고 느끼는 것 같은데 저도 점령당하는 것은 싫습니다.

라며 공개석상에서 이야기했다.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에 벌인 짓을 보면 신발이 아니라 총알세례를 받아도 모자란 지경.

이 때문인지 이라크 국내에서는 미국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의견이 썩 좋지만은 않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함으로써 좋아진 점은 언론의 자유밖에 없다" 라는 말이 나올 정도. 후세인의 통치 자체는 어떤 사이비 교단보다 조금 나은 수준일 뿐 대체로 막장이었지만 해방자랍시고 들어온 미국과 그들이 이라크에 구현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오히려 대혼란만 야기하자 그 반동으로 후세인이 차라리 나았다는 소리가 나오는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같은 바트당 독재 국가인 시리아나 리비아카다피가 결국엔 어떤 꼴을 났는지를 보면 후세인이 있었어봐야 결국 반정부 시위가 터졌을 것이다.

그 뒷수습이 매우 애매하게 된 덕택에 지금 이라크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지옥의 경지로 빠져들었다. 특히 이라크군 자체는 금방 무너졌는데 이후 미국이 주도하는 이라크 연합국 과도 행정처(Coalition Provisional Authority, CAP)에서 수니파=바트장 잔당[13]이라는 괴이한 공식을 들이대는 삽질을 해대는 통에 직장에서 죄다 쫓겨나고 영향력이 축소되어 장기적으로는 시아파들 손에 도륙나게 생긴 수니파 주민들이 "이대로 몰락할 수 없다. 그럼 우리는 다 죽는다" 고 총칼을 들고 일어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여기에 CAP의 온갖 삽질[14]이 겹쳐 반쯤 내전이 되어가는 상황 덕분에 미군만 죽어라 고생 중.

게다가 아프가니스탄의 상황도 갈수록 악화되어 가고 있고... 덕분에 미군이 개발하려고 했던 무기들은 이라크 때문에 드는 비용 덕분에 전부 개발취소 크리[EX:]. 이 내전에 준하는 상황은 2004년에서 2005년 사이 절정이었고[16] 2008년까지 계속됐으나 결국 수적으로도 압도적이고 미국의 지지를 받는 시아파[17]가 최종 승자라는 것이 분명해지면서 2009년 경 대부분의 소요 사태가 종결됐다.

2010년 9월 1일 미군은 공식적으로 이라크전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2011년에는 전 병력이 철수하였다. 이라크에는 이행정부(Iraqi Transitional Government)를 거쳐 정식 정부[18]가 출범했고 군사, 경찰권도 정식 정부가 집행 중이다. 적어도 점령 기간에 비하자면 놀랄 정도로 사회적 안정도 회복했다. 하지만 전쟁 중에 파괴된 전기, 수도 등의 기간 시설 복구는 여전히 미흡하고[19] 미군 점령 기간 동안 뿌려진 사회적 지뢰들은 여전히 현 정부를 위협하고 있다. 정치가 이렇다보니 경제도 마찬가지여서 실업율도 제법 높고 다시 이런 요인들이 정치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여전히 좀체 상황이 좋아지지 않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에 비해 이라크는 조금 낫다는 주장도 있다. 최소 정부가 자리 잡는 데 성공했고 국내 안정에도 성공해 지금은 아니겠지만 언젠가는 어떻게든 정상 국가로서 돌아가지도 않겠느냐는 희망적인 견해도 지배적이다. 다만 그게 언제가 될 지 모른다는 게 문제.

하여튼 미군이 철수한 지 며칠 안 가 2011년 12월 수니파 부통령인 알 하셰미가 구속조치당하고 그가 쿠르드인 지역으로 달아나면서 그의 소환을 둘러싸고 갈등이 빚어지는 등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조선일보는 미군이 철수해서 그런 것이라고 미군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미군이 있어도 이런 종파 갈등은 빚어졌고 테러는 벌어졌었다. 정작 미군은 떠나고 싶어 안달이었으니. 게다가 새로 창설된 이라크 정부는 사태해결은커녕 무능하고 부패하기 그지없어 각종 문제를 해결도 못하고 그저 악화만 시키고 있는 형편이다.

7. 이라크 내전

이라크 내전 항목 참고.

8. IS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2014 ~ 2018

9. 2018년 이후

이라크 내전이 2017년 연말 이라크는 사담 후세인 축출 이후 10여 년간의 춘추전국시대가 어느 정도 마무리에 들어섰다.

2018년부터 이라크는 국내 정치 및 사회를 정리하는 쪽으로 정책 가닥을 잡았다.

2018년 이전인 2015년 및 그 이후에도 작은 시위가 몇 번 있었지만, 2019년 10월 2일, 바그다드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들이 나타나고 있다. 시민들은 부패한 정권들에게 치안 안정 및 새로운 개혁, 민생 문제 해결 등 항의를 계속하고 있으며 정부의 강경 진압으로 수천 명의 사상자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 #

결국 2019년 11월 1일, 이라크의 총리는 결국 사퇴를 밝혔다. # 한편 이라크 시위의 주요 장소 중 하나인 타흐리르 광장이 있는데, 이 광장은 예멘, 이집트, 시리아에도 있으며, 이집트 혁명, 예멘 혁명, 시리아 민주화운동 등 시위도 이들의 광장에서 각자 나타났다.

바스라에서도 반정부시위 100명 부상당했다.# 또한, 반정부시위대에 보안부대가 발포하면서 하루에만 최소 7명이 사망하는 등 사망자가 300명을 넘어섰다.# 그리고 반정부시위에서 1명이 사망한데 이어# 바그다드에서 있던 반정부시위에서 5명이 사망했다.#

반정부시위가 2달 동안 이어지면서 압둘-마흐디 총리는 사임하겠다고 밝혔다.#

이라크 남부의 유전지대인 나시리야에서 반정부 시위대가 유전 시설을 점거해 이틀째 원유 생산이 중단됐다고 이라크 언론들이 보도했다.#

2020년 1월 8일에 이라크 내의 미군 기지 두 곳에 대한 이란의 미사일 공격 후 바그다드에서 반정부 시위대가 이란을 비난하는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 반정부 시위가 다시 격화되면서 최소 10명이 숨지고 140명 가까이 부상당했다.#

이라크 민관 합동기구인 고등인권위원회는 2019년 10월 1일부터 넉 달 간 바그다드와 남부 지역 주요도시에서 벌어진 반정부 시위 과정에서 543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1] 다만 그 때에도 이 동네에선 수메르, 구티, 아모리, 카시, 칼두 등 지배종족이 끊임없이 바뀌었고, 상당수는 아랍인과 마찬가지로 외부에서 굴러온 이방인이었다. 공용어도 크게 수메르어, 아카드어, 아람어 순으로 바뀌었다. 아랍인의 침공이 굵직한 사건이긴 하지만 여기는 원래 격변이 잦은 곳이라 특별히 따로 취급해야 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그 와중에도 아수르인은 문명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그 땅에 주욱 살아오고 있다.[2]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시절에는 중앙집권능력이 부족해서 수도와 그 인근지역인 이란 남부 파르스 지방 외엔 그다지 지배력이 좋지 못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지역에서 토착 정치 세력의 유지한 채 복속만 시키면서 어느 정도 자치를 보장해주고 공물을 받아내는 선에서 그쳤고, 디아도코이 시기에도 비슷하게 그리스인들이 집중 거주하는 일부 헬레니즘 도시와 그 근교를 제외하면 기존 토착민의 반 자치형식으로 지배했다. 파르티아도 마찬가지였다. 사산 왕조의 경우에는 이전 왕조들과는 달리 확실한 중앙집권적인 제국이였지만, 이란인과 비이란인의 황제라는 그들 황제의 칭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로아스터를 믿고 인도유럽어족의 이란어파계 언어를 쓰는 이란계 민족과 다른 기독교의 종파 중 하나인 네스토리우스교를 믿고 셈함어족 셈어파계의 아람어를 쓰는 아수리스탄(사산조령 메소포타미아 지방. 아시리아인들의 땅이라는 뜻)인들은 종교의 차이와 사산족의 기독교 탄압으로 더더욱 정체성 면에서 거리가 멀어졌다. 후대의 투르크인들의 지배기에도 주로 투르크인들의 정착이 중앙아시아, 이란, 터키지방에 몰렸기에 투르크화의 물결을 피할 수가 있었다.[3] 인도유럽어족 게르만어파 할때 나오는것처럼 어족보다 어파가 더 세부분류이고 훨씬 더 언어적 친연성이 가깝다.[4] 성경만 봐도 메소포타미아 문화에 대한 흔적들을 볼 수 있다.[5]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알렉 기네스가 분한 파이살 왕자가 바로 이 사람이다.[6] 사실 영국은 유럽 전선에 신경 써야 했기 때문에 이라크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나, 이라크를 침공한 이유는 바로 이라크의 석유나치 독일을 비롯한 추축국에 값싸게 공급될 수 있기 때문. 이때 영국은 비시 프랑스시리아이란 제국까지 같이 조져버렸다.[7] 이 부분은 영국 드라마 하우스 오브 사담에서 재연하고 있는 부분이다.[8] 이때 미국의 교섭역이 도널드 럼즈펠드. 이후 오프라 윈프리가 자신의 텔레비전 토크쇼에서 이 국교 회복 교섭 당시 후세인이 럼즈펠드를 반갑게 맞이하며 포옹하는 모습을 틀어줘서 전미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은 적이 있다(...)[9] 이라크군이 비행금지구역을 침범하면 생각났다는 듯 찔끔찔끔 토마호크 공격을 해댔으나 봉기와는 무관한 정치적 쇼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나마도 마이클 무어 같은 사람들에게 제국주의적 전쟁놀음, 침략행위라는 욕을 먹어서 여의치 않았다.[10] 현재 이라크 시아파의 친이란 행보는 이때의 미국의 태도에 대한 배신감과 무관하지 않다. 차라리 원칙대로 시아파 주민들을 보호하고 이를 명분 삼아 후세인 정권을 엎어버렸다면 이란-이라크간 관계도 최악이고 미국 자신도 나름 전성기였던 시절이라 오히려 이라크를 쉽게 안정화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11] 다만 미국 입장에서도 이라크를 완전히 쓰러뜨릴 수는 없었던 것이 베트남전트라우마에서 채 벗어나지 못해서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상황이었고 쿠웨이트의 회복까지는 주변국들의 합의가 이뤄진 상태였지만 이라크의 전복은 그렇지 않았으며 거기다 끝물이긴 했지만 그때까지도 소련이 유럽에서 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1개 군단을 차출해온 만큼 시간을 오래 끌어서 좋은 점은 하나도 없었다.[12] 첫 번째 점령자는 중세의 세계 깡패이던 몽골이고 두 번째는 영국에게.[13] 애시당초 바트당 세력은 수니파 내에서도 소수였고 민중의 신뢰를 철저하게 잃어버린 상태로 그 때문에 이라크군이 그렇게 쉽게 붕괴된 것이다. 반대로 시리아는 알라위파와 콥트 기독교인들이 철저한 아사드 지지 세력이기 때문에 저항에 투입되는 전력의 규모가 커서 개입하기가 그만큼 어렵다.[14] 이라크군 죄다 (무기 환수 없이) 내쫓아 무장세력 만들기, 박살난 병원은 그대로 두고 애꿎은 처방전만 만지작거리기, 이라크 기업의 모든 예금과 부채를 무효로 하기 등등. 라지브 찬드라세카란의 책 <그린존> 참고.[EX:] RAH-66 코만치, 줌왈트급 구축함[16] 2005년 이후 미군을 제외한 타국군의 철수가 시작되면서 게릴라의 공격 대상은 미군으로 좁혀졌으나 미군을 공격하면 그 몇 배의 보복이 돌아오기 때문에 2006년부터 소프트 타겟에 대한 무차별 테러로 바뀐다. 결국 06년부터 민간인 사상자가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게 된다.[17] 허나 미국도 시아파를 두고 고민해야 했는데 시아파 성직자 알 사드르를 비롯한 이들은 반미 투쟁을 계속 벌였다. 미국으로선 이들을 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게 수백 만이 넘는 지지자들이 알 사드르를 지지하고 알 사드르는 아버지가 후세인에 맞서다가 살해당한 인물이라 반후세인파 인물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초반에는 상금을 걸었다가 되려 거리 곳곳에 알 사드르에 대한 상금을 취소하지 않으면 미군의 목 하나하나에 상금을 걸겠다는 시아파 성직자들의 분노 어린 반응에 결국 미국이 물러나 현상금을 취소했을 정도.[18] 내각제 정부로 각료가 43명이다.[19] 수도 바그다드에서조차 하루에 6시간만 전기가 들어올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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