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6 17:49:31

호스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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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제국 25대 샤한샤
호스로 1세
خسرو | 𐭧𐭥𐭮𐭫𐭥𐭣𐭩
파일:호스로 1세.jpg
제호 한국어 호스로 1세
중기 페르시아어 𐭧𐭥𐭮𐭫𐭥𐭣𐭩
영어 Khosrow I
존호 샤한샤
별명 아누시르반(Anushirvan: 불사의 영혼을 가진 자)
생몰 년도 512년에서 514년 사이 ~ 579년
재위 기간 531년 ~ 579년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샤한샤 호스로
2.2.1. '영원한 평화'와 정적 처단2.2.2. 개혁
2.2.2.1. 세제 개혁과 농민 육성2.2.2.2. 군사 개혁
2.2.3. 종교 정책2.2.4. 교류 증진과 문화 진흥2.2.5. 전쟁
3.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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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산 왕조의 제25대 샤한샤. 사산 왕조 역사상 최고의 샤한샤로 평가받는 명군이다. 무려 48년간 제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여, 아랍 등 외부에서 페르시아의 군주를 '쿠스라우'로 칭하게 될 정도였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호스로(Khosrow)는 신 페르시아 언어로 쓰인 명칭으로, 그의 시대에 사용된 중기 페르시아어로는 '후스로(Husraw)'이다. 이 명칭은 'Avestan Haosrauuah(좋은 명성을 가진 자)'에서 파생된 것이다. 후술할 대업적을 이뤘기 때문에, 후대 학자들, 특히 페르시아 출신 학자들은 존경의 의미로 '아누시르반(Anushirvan: 불사의 영혼을 가진 자)'이라는 별칭을 붙였다.

512년에서 514년 사이에 카바드 1세에프탈 왕의 딸 네완도트(Newandokht) 사이의 3남으로 출생했다. 큰형은 카우스(Kawus), 둘째형은 자마습(Zamasp), 바로 밑 동생은 크세르크세스(Xerxes)이다. 어릴 때부터 무척 총명해서 부친의 편애를 받았다고 하며, 524년경부터 군대에 들어가 부친의 원정에 함께 했다. 부친이 마즈다크교 신자들을 탄압하고 마즈다크를 처형할 때, 호스로가 직접 처형을 감독했다. 샤나메에 따르면, 호스로는 마즈다크의 추종자들을 정원에 유인한 뒤 머리부터 산채로 파묻어서 발만 나오게 해서 질식사시켰다. 그 후 카바드가 마즈다크를 정원으로 안내해서 그 광경을 목도하게 한 후, 교수대로 끌고 가서 발부터 묶어서 대롱대롱 매달리게 한 뒤 부하들에게 화살을 퍼부어서 죽이게 했다고 한다.

520년, 카바드 1세는 호스로의 제위 승계를 확실히 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누스 1세에게 호스로를 입양하라고 제안했다. 유스티누스 1세와 그를 보좌하는 조카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 제안을 처음에는 긍정적으로 검토했지만, 호스로가 나중에 로마 황제를 노릴 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협상을 중단했다. 당시 협상을 도맡았던 마흐부드는 함께 갔던 사산 왕조군 사령관 시야후시가 협상을 의도적으로 망쳤다고 비난했고, 시야후시는 얼마 안가서 아후라 마즈다가 아닌 다른 신을 섬긴 것과 아내를 매장한 혐의로 처형되었다. 카바드 1세가 폐위된 후 '망각의 요새'에 갇혀 있을 때 극적으로 탈출할 수 있게 도와줘서 복위의 발판을 마련해준 인물이었지만, 카바드는 그의 처형을 묵인하였다.

528년, 사산 왕조와 동로마 제국간의 전쟁이 재개되었다. 사산 왕조군은 동로마군을 국경 지대에서 격파한 뒤 다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벨리사리우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은 다라 전투에서 사산 왕조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뒤이어 사탈라 전투에서도 동로마군이 승리했지만, 카바드는 포기하지 않고 531년 다시 군대를 소집하여 친히 시리아로 진격했다. 사산 왕조군은 칼리니쿰 전투에서 벨리사리우스를 상대로 승리했지만, 도시들을 공략하지는 못 했다. 그러던 531년 9월 13일, 아미다 동쪽의 마티로폴리스를 포위하고 공성전을 이끌던 카바드는 병에 걸려 죽었다.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카바드는 죽기 직전에 호스로에게 유리한 승계 게획을 마련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호스로는 카바드 1세의 뒤를 이어 샤한샤로 등극했다.

2.2. 샤한샤 호스로

2.2.1. '영원한 평화'와 정적 처단

호스로는 즉위 직후 동로마 제국과 평화 협정을 맺길 희망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역시 막대한 재정과 인력을 소모하는 사산 왕조와의 전쟁을 종식하길 희망했기에, 양자의 합의는 쉽게 이뤄졌다. 동로마 제국은 11,000 파운드 상당의 금을 사산 왕조에 보내기로 했고, 동로마 제국에 속한 메소포타미아 속주는 다라 요새에서 콘스탄티나 시로 철수했다. 또한 두 통치자는 서로를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고, 킵카스에서 유목민족의 침략을 공동 대응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호스로가 동로마 제국이 사산 왕조에 귀속된 아르메니아에서 점령한 두 요새의 반환을 요구하며 라치아의 두 요새를 반환하길 거부하는 바람에 합의가 깨졌다. 이에 532년 여름 동로마 사절 헤르모게네스와 루피누스가 크테시폰에 찾아와서 호스로를 설득하였고, 양국은 점령한 요새들을 교환하고 일전에 사산 왕조에 반기를 들었다가 축출된 이베리아 반군이 동로마 제국에 머물거나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용하기로 했다. 또한 양자는 앞으로 영원히 평화를 유지하기로 하였다.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종식한 뒤, 호스로는 맏형 카우스를 상대해야 했다. 카우스는 마즈다크교에 강한 애착을 품었고, 자기가 아닌 셋째 동생을 후계자로 세운 부친에게 반감을 품었다. 부친이 사망한 뒤 반란을 꾀했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된 뒤 궁정으로 끌려갔다. 호스로는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을 불러들인 뒤, 카우스에게 그 앞에서 모든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카우스는 차라리 죽겠다며 마즈다크교에 대한 신념을 바꾸지 않았고, 결국 일가 친척과 함께 참수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호스로는 카우스와 같은 형제를 죽이도록 만든 운명을 저주했다고 한다.

한편, 호스로의 삼촌 바위(Bawi)는 귀족들과 함께 호스로를 폐위한 뒤 호스로의 형제 자마습의 아들 카바드를 샤한샤로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호스로는 즉히 자마습과 카바드, 그리고 바위 등 귀족들을 모조리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카바드 1세로부터 국정을 총괄하는 직임을 수행했던 아데르고운바데스는 어린 카바드를 가엽게 여겨 명령을 어기고 비밀리에 키웠다. 그러나 541년 그의 아들 바흐람이 이 사실을 고발하였고, 호스로는 분노하여 아데르고운바데스를 처형했다. 어린 카바드 역시 처형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를 사칭하는 인물이 동로마 제국에 망명했다. 이리하여 호스로는 모든 경쟁자를 제거하고 왕권을 확립했다.

2.2.2. 개혁

2.2.2.1. 세제 개혁과 농민 육성
사산 제국은 상당히 안정적인 은화 가치를 확보하였으나, 단 한 번도 완전한 화폐 유통을 이루지 못했고, 백성들은 자연 생산물의 물물교환을 기반으로 삶을 꾸렸다. 군인들은 돈으로 급료를 받기 보다는 토지나 현물을 지급받았다. 이로 인해 현지에서 토지나 현물을 지급하는 귀족들이 군대를 확고하게 장악할 수 있었다. 또한 왕실의 세금 징수관은 연간 수확량에 비례하여 농산물을 추징하고, 세금을 현물로 부과하였다. 또한 인두세가 대부분의 가정에 별도로 부과되었는데, 그 중 일부는 현물로 교환했지만 대부분은 화폐로 매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러한 시스템은 비효율적이었다. 상황에 따라 변동이 잦았고, 재무 계획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왕실의 직할지에도 부패한 세리들이 실제 수확량을 숨기고 중앙에 적게 보고하고 자신은 많이 거둔 후 차액을 챙기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은 이러한 무분별하고 비원칙적인 세금 징수에 고통받았다. 여기에 반복되는 기근과 에프탈과 아랍 부족의 거듭된 침략으로, 토지는 황폐해지고 세수입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외적을 막기 위해서는 세금을 어떻게든 많이 거둬들여야 했으나, 현실적으로 제약이 많이 따랐다. 게다가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은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며 면세 혜택을 누렸고, 귀족들도 세금 납부를 불성실하게 하였다. 백성들은 이런 현실에 분노하였고, 신분제 폐지와 모든 재산의 공유를 외치는 마즈다크교가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제국 전역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호스로 1세의 부친 카바드 1세는 이 종교집단을 적절히 활용하여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킨 뒤, 샤한샤의 권위까지 위협하는 이들을 탄압하였다. 그러면서도 체계적인 조세 제도를 수립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대대적인 토지 조사를 단행했다. 행정 제도가 완벽하게 갖추어지지 못한 데다 워낙 광할한 제국인 터라 조사는 장기간 이어졌고, 호스로 1세 대에 이르러서야 완료되었다. 호스로는 부친의 노력 덕분에 전국의 토지 현황을 면밀히 확인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세금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먼저 토지 조사를 기초로 하여 토지세를 부과하였다. 농지의 크기와 재배되는 작물에 종류에 따라 고정된 통화 세율이 농지에 부과되었다. 아랍 역사가 알 타바리에 따르면, 곡물의 모든 자립(जरीब: 토지를 측량하는 측쇄)에 1 드람(drahm: 사산 왕조의 은화 화폐 단위), 포도나무의 모든 자립에 8드람,클로버의 모든 자립에 7드람, 페르시아 대추야자 4개 또는 6개당 1드람 이었다고 한다. 세금은 드람 통화로 계산되었지만, 적어도 일부는 드람으로 표시된 농산물의 현재 가치에 따라 계산된 현물로 계속 부과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고정된 통화세율이 효율적으로 적용될 경우, 군주는 수입과 예산 지출을 예상할 수 있었다. 가뭄 같은 자연재해나 전쟁으로 인한 수확량의 변동은 무시되었기 때문에 농민들에게 불리할 수도 있지만, 그동안 워낙 변동이 심했고 허구헌날 턱도없는 세금을 내야 했던 농민들은 이제 정해진 세금만 내면 되니 환영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방 판사 역할을 하는 무바단(mūbadān)이 농민들의 처지를 수시로 살피고, 필요할 경우 세금을 환불하거나 면제해줬다고 한다. 호스로는 인두세에도 손을 댔다. 그동안 부유하든 가난하든 관계없이 일정한 인두세를 지불해야 했지만, 이제는 누진세가 적용되어서 부유한 사람일수록 인두세를 더 내도록 하였다. 또한 20세 미만의 어린 아이와 50세 이상의 노인은 인두세를 내지 않아도 됐다.

호스로는 세금 개혁으로 확보한 재정을 농업 회복 정책에 투입했다. 거듭된 전란과 사회 혼란으로 유랑 생활을 하던 농민들에게 황무지를 나눠줘서 농사를 다시 할 수 있게 해줬으며, 자연재해로 피해를 입은 농장을 지원하는 사회체계를 구축하였다. 또한 대토지를 소유한 귀족들을 지속적으로 압박하여 토지를 잘게 분할해 자작농을 육성하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또한 데흐건(dehgan)이라는 관료 계층을 새로 만들어 세금을 걷는 권한 자체를 중앙 정부로 가져왔다. 이제 귀족들은 실제로 걷은 세금의 양을 속일 수 없었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부를 몰래 축적할 수도 없었다. 그 결과 제국의 연 수익은 이전의 2배 이상으로 뛰어올랐고, 항상 위태로웠던 국고는 충분해졌다.
2.2.2.2. 군사 개혁
호스로 이전, 사산 왕조의 군대는 대귀족들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귀족들은 전쟁이 발발하여 샤한샤의 부름을 받으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군대와 장비를 제공했다. 특히 파르티아 기병대는 사산 왕조군의 핵심이었고, 이들을 동원할 수 있는 파르티아의 귀족들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이로 인해 샤한샤들은 어떤 정책을 추진할 때 귀족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고, 그들의 비위에 거슬렸다가 목숨이 위태로워지고 심지어 살해된 경우가 허다했다.

호스로 1세의 부친 카바드 1세는 이 강대한 귀족들을 억제하기 위해 군사 개혁을 실시했다. 그는 제국을 북쪽의 코카서스, 중앙과 남서쪽의 페르시아 만, 서쪽의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동쪽의 중앙아시아로 이뤄진 4개의 방위 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마다 군 사령관을 두었다. 그리고 병사들이 장비를 구입할 수 있도록 여러 곳에 군용품점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소규모 토지를 소유한 데흐건 게급을 중용하여 기병대를 지휘하게 해, 파르티아 기병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자 하였다.

호스로는 아버지의 개혁을 물려받아 사산 왕조군을 당대 최강의 군대로 육성하였다. 우선 4개 군단의 지휘관으로 귀족들을 임명하여 그들의 불만을 달랬지만, 자신의 근거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군단만을 지휘할 수 있도록 해,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하는 걸 미연에 방지하였다. 또한 아랍, 백훈족 등 유목민족들에게서 기병대를 수시로 용병으로 데려와서 샤한샤의 직할부대로 삼아서, 귀족에 대한 의존도를 크게 줄였다. 이러한 개혁은 큰 성과를 거두었고, 이제 샤한샤는 귀족의 눈치를 덜 보면서 강력한 군대를 전쟁에 지속적으로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

호스로는 새로운 사회 계층인 데흐건 계급을 단순히 군대에서만 활용하지 않았다. 그는 부패한 귀족과 마기(조로아스터교 사제 계급) 보다는 이들이 믿을 만하다고 판단하고, 관료로 발탁했다. 데흐건들은 하급 귀족 취급받던 자신들을 우대해준 샤한샤에게 깊은 충성심을 지녔고, 샤한샤의 명령을 성실히 따랐다. 그 결과, 호스로는 제국 전역에 데흐건 출신의 관료들을 배치하여 통제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2.2.3. 종교 정책

호스로는 신실한 조로아스터교 신자였고, 부친이 재위하던 시기에 마즈다크교 박해에 앞장서기도 했다. 하지만 샤한샤에 오른 뒤, 그는 기독교, 유대인 등 소수 종교를 심하게 박해하지 않았다. 동로마 제국과 전쟁이 한창일 때 기독교인들이 적과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을 종종 받았지만, 호스로는 총대주교 아바 1세를 처형하라는 요구를 무시하고 잠시 추방했다가 상황이 진정될 때 다시 불러들었다.

심지어 518년경 조로아스터교의 종교 행사 때 조로아스터교를 명백히 부인했던 캅카스의 사령관 그레고리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이는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은 물론이고 황실 인사들마저 불만을 품게 만들었다. 그들은 마기 계급의 혈통인 자가 배교하였으니 당장 처형하라고 요구했다. 호스로는 압박에 못이겨 그레고리를 투옥했지만, 나중에 풀어줄 요량이었다. 그러나 그레고리의 외삼촌 미흐란이 "우리 혈통에 불명예를 가져온 죄"로 처형하라고 요구하자, 어쩔 수 없이 처형하게 하였다. 그렇지만 이 일이 기독교에 대한 박해로 확대되지 않도록 했다.

이렇듯 타종교 신자들에게는 비교적 부드럽게 대했지만, 조로아스터교의 정통성을 해치는 자, 이른바 이단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처벌했다. 그는 의례와 원칙을 위반한 자들은 국가의 근간을 훼손하는, 배교를 능가하는 죄악이라고 여겼다. 조로아스터교의 전통에 맞지 않는 행위를 하는 귀족 집단이 고발되자, 그는 신속하게 잡아들인 뒤 가차없이 처형했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마니교, 마즈다크교는 조로아스터교를 내부에서 흔드는 이단으로 간주되어 가차없이 박해당했다. 그러면서 조로아스터교의 신화를 재정립하여 이란의 정체성과 민족성을 확립하도록 했다.

2.2.4. 교류 증진과 문화 진흥

호스로는 각종 기반 시설에 대한 투자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조로아스터교 내에 가난한 이를 구제하는 기구를 만들었고, 사산 왕조의 주요 전선에 강력한 요새를 건설했으며, 길을 닦아서 군대가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게 했고, 실크로드를 통한 동양-서양간의 교역을 활성화시켰다. 로마 제국과 인도, 중국을 연결하는 중간 지점에 있는 사산 제국은 이 교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얻었다. 한편, 그는 동로마 제국에서 망명해온 철학자들을 대거 받아들였다. 당시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529년 아카데미아를 폐쇄하고 그리스 철학을 억압했다. 이에 많은 철학자들이 사산 왕조로 망명했는데, 그는 이들을 융숭하게 대접하였고 철학을 깊이 연구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철학자들과 토론할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우리 선조들의 전통을 받들지만, 진리의 발견에 관심을 갖고 로마인의 관습과 행위 역시 연구했다. 그들 중에서 단순히 호감이 가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칭찬할 만해 보이는 것들을 받아들였다. 우리는 다른 종교나 종족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그 누구도 거부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조상의 선한 풍속과 법도와 이방인의 법도를 살피고, 그중 선한 것을 택하고 악한 것을 피하기를 거절하지 않는다. 선조에 대한 애정은 우리로 하여금 좋지 않은 관습을 받들도록 이끌지 않는다."

호스로는 인도 궁정에 막대한 선물을 보내면서, 자신의 궁정에서 가르칠 철학자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그리스어, 산스크리트어, 아람어(Syriac)로 작성된 고대 문헌들을 중세 페르시아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손수 지휘했다. 그 결과 그리스어, 이란어, 아르메니아어 등 다양한 언어를 학습하는 풍토가 사산 제국에 정착되었고, 학자들은 군주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 철학자들은 그런 그를 '플라톤의 철인왕'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그렇게 해서 축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국립 대학과 병원을 신설했으며, 군데샤푸르의 도서관을 크게 확장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 도서관은 259개의 방에 전문 서적이 빼곡히 채워져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지식량을 자랑했다고 한다. 훗날 사산 왕조를 멸망시킨 이슬람 제국의 아랍인들은 이 도서관을 그대로 들어 옮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서적들을 싹 쓸어갔고, 유럽이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온갖 이민족 왕국들이 난립하는 혼란기에 신음하고 있을 동안 이 서적들을 근간으로 철학, 자연과학, 의학, 수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발전시키며 황금기를 누렸다. 또한 인도에서 의학 지식을 수입하는 과정에서 체스백개먼을 비롯한 각종 보드게임도 사산 제국으로 흘러들어왔다. 이 보드 게임들은 자연스럽게 교역로를 타고 로마 제국으로 전래되어, 오늘날까지도 서양에서 누구나 즐기는 놀이가 되었다.

2.2.5. 전쟁

539년, 사산 왕조의 속국인 라흠 왕국과 동로마 제국의 속국인 가산 왕국이 팔미라 남쪽 영토의 소유권을 놓고 대립했다. 호스로는 이것을 핑계삼아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이려 했다.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대규모 병력이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에 투입된 상황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걸 원치 않았고, 가산 왕국과 라흠 왕국간의 분쟁을 무마시킴으로써 전쟁이 일어날 여지를 차단했다. 이후 호스로는 유스티니아누스가 라흠 왕국의 통치자 알 문디르 3세 이븐 알루만에게 뇌물을 주려 했으며, 일부 백훈족이 이란으로 침입하도록 부추겼다고 비난했다. 여기에 가산 왕국의 통치자 알 하리트 이븐 자발라가 라흠 왕국의 영토를 침입하여 상당량의 재물을 약탈하고 돌아가자, 호스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절을 보내 그들의 공격 중에 살해된 사산인들을 보상해주고, 훔친 재산을 라흠 왕국에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의 요청은 간단히 무시당했다.

그러던 540년, 동고트 왕국의 군주 비티게스가 파견한 사절이 크테시폰에 찾아와서 동로마 제국을 공격해달라고 요청했다. 사산 왕조가 공격한다면, 벨리사리우스가 동방 전선으로 갈 테고, 고트 왕국은 재정비할 시간을 벌고 사산 왕조와 함께 동로마 제국의 자원을 분할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것이었다. 호스로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그해 5월 '영원한 평화'를 깨뜨리고 동로마 제국의 영토로 쳐들어갔다. 그의 군대는 시리아로 진입하여 수라와 안티오키아를 단숨에 함락하고 약탈을 자행한 뒤, 아파메아로 진출했다. 이후 칼키스로 진군하여 급히 투입된 동로마군을 간단히 물리쳤다. 그 후 지중해 해안에서 목욕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고, 아파메아 시에서 전차 경주를 벌일 때 유스티니아누스의 지지를 받은 청색당이 녹색당에게 패배하도록 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연이어 사절을 보내 평화를 호소했고, 호스로는 매년 50센테나리아의 공물을 받고 5센테나리아를 추가로 받는 대가로 본국으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그리고 점령했던 도시들로부터 조공을 거둬들인 뒤 위풍당당하게 귀환했다.

541년 봄, 호스로는 라흠 왕국으로부터 자기들 영토에서 로마인들을 몰아내달라는 요청을 받고 군대를 파견했다. 그의 군대는 페르타 요새를 함락하였고, 라흠 왕국 전체를 보호령으로 삼았다. 얼마 후 메소포타미아에 도착한 벨리사리우스는 황제의 지시에 따라 사산 왕조와의 전쟁을 재개했다. 그는 일전의 패배로 전의를 상실한 군대를 재건한 뒤, 사산 왕조군을 격퇴하고 니시비스 시를 포위했다. 하지만 니시비스 시를 함락하는 건 실패하고, 그 주변을 파괴한 뒤 사로잡은 사산 인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다. 호스로는 라흠 왕국에서 귀환한 뒤 시리아로 진격했다. 당시 벨리사리우스에게는 6천 가량의 병력만 있는 반면에, 호스로에게는 5만이 넘는 대군이 있었다. 하지만 사절이 벨리사리우스의 진영에 다녀온 뒤 "저들의 전의가 대단하니 섣불리 싸워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데다, 때마침 동로마 제국 각지에서 페스트가 창궐했기 때문에 원정을 중단하고 귀환길에 올랐다.

이후 호스로 1세는 유스티니아누스에게 평화 협정을 맺자고 제안했지만, 유스티니아누스는 단호히 거부하고 전쟁을 이어갔다. 사산 왕조는 아르메니아에서 동로마군을 격파했지만, 라흠 왕국에서는 기독교 계열 이베리아인들이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고 사산 왕조군을 상대로 선전했다. 양측은 페트라를 뺏고 뺏기는 혈투를 벌였고, 시리아에서도 격전이 이어졌다. 결국 호스로는 더 이상 전쟁을 벌이는 건 무익하다고 판단하고, 561년 동로마 제국이 공물을 바치는 대신 빼앗아간 영토를 돌려주는 조건으로 평화협약을 체결했다.

565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오른 유스티누스 2세는 아르메니아 총독이 아르메니아 수도 드빈에 봉화 사원을 건설하고 기독교인들을 탄압했다는 것을 빌미로 삼아 공물 지불을 중단하였다. 호스로는 세보크(Sebokht)라는 이름의 기독교인 외교관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 마음을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유스티누스 2세는 단호히 거부하고, 아르메니아인과 연합하여 호스로에 맞설 의사를 보였다. 급기야 571년, 아르메니아의 기독교 신자들이 대거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동로마 제국이 자신들을 보호해주길 희망하며 원군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자 호스로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아르메니아의 반란을 철저하게 진압한 뒤 572년부터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개시했다.

573년, 아다르마한이 이끄는 사산 왕조군이 시리아로 쳐들어가 그해 11월 티그리스 강변의 요새 다라를 점령했고, 시리아 전역을 약탈하고 수많은 포로를 끌고 갔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페르시아군은 이 시기 29만 2천명에 달하는 포로를 잡아갔다고 한다. 에페수스의 요한네스가 저술한 <교회사>에 따르면, 호스로 1세는 투르크의 칸과 동맹을 맺을 때 이 포로들 중 2천명의 처녀들을 선발해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처녀들은 끌려가던 중 큰 강에 이르자 목욕을 하고 싶다며 호위 병사들을 멀리가게 하고는 신앙과 정조를 모두 잃느니 차라리 죽겠다며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접한 유스티누스 2세는 미쳐버렸고, 티베리우스 2세가 황제를 대신하여 국정을 이끌었다.

576년, 사산 왕조군은 동로마 제국이 소유한 서아르메니아를 침공하였다. 처음에는 성과를 거두어 소아시아 중동부까지 침입했지만, 곧 반격을 받아 큰 타격을 입고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으로 달아났다. 이후 티베리우스 황제가 급파한 유스티니아누스 장군이 이끄는 동로마군은 페르시아 영토 깊숙이 진군했다. 그러나 577년 유스티니아누스는 적의 매복에 걸려 대패해 유프라테스 강을 도하해 본진으로 퇴각했다. 이 소식을 접한 티베리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를 경질하고 마우리키우스를 새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또한 티베리우스는 이민족 신병 1만 5천명을 동방으로 파견해 페르시아의 침공에 맞설 전력을 갖춰나갔다.

578년, 호스로는 재차 서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여러 도시를 공략했으며, 라흠 왕국과 아랍 부족군이 연합한 별동대를 시리아로 보내 레사이나와 콘스탄티나 주변 지역을 약탈하였다. 여기에 탐호스로는 테오도시오폴리스를 공격하는 것처럼 위장하여 마우리키우스를 속인 뒤, 마티로폴리스와 아미다의 시골 지역을 약탈했다. 그러나 마우리키우스는 곧 반격에 착수하여 사산 왕조군을 몰아내고 빼앗긴 영토를 되찾았으며, 뒤이어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메소포타미아 일대에 타격을 입혔다. 호스로는 동로마 제국이 에전과는 달리 만만치 않다는 걸 인지하고 평화 협약을 맺으려 했지만 579년 사망하였고, 아들 호르미즈드 4세는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이어갔다.

호스로는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치르는 한편, 다른 방면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동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신봉하는 아비시니아인들에게 아라비아 침공을 장려했다. 이에 따라 그들은 아라비아에 지속적으로 침투하였고 526년까지 예멘 주변 지역을 장악하였다. 호스로는 이대로 가면 동로마 제국과 이들이 손을 잡고 자신을 협공할 것을 우려했다. 이에 562년, 바흐리스 장군을 아라비아로 파견했다. 바흐리스는 아비시니아를 격파하고 예멘 일대를 제국의 영토로 삼았다. 한편, 호스로는 오랜 세월 사산 왕조를 고달프게 만들었던 에프탈을 향한 대대적인 복수를 감행했다. 호스로는 에프탈과 사이가 나빴던 튀르크와 연합하여 협공을 가하였고, 560년 골자르룬 전투에서 에프탈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에프탈은 순식간에 멸망했고, 그들의 영토는 사산 제국과 투르크에 의해 분할되었다. 그러나 튀르크인들은 얼마 안가서 에프탈에 이어 사산 왕조를 심히 위협하는 유목민족이 된다.

호스로의 치세에서 활약한 사산 왕조군 장군들은 다음과 같다.
  • 아라티우스 (Aratius)
  • 탐 호스로 (Tam Khosrau)
  • 바라즈 브주르 (Varaz Vzur)
  • 아다르 마한 (Adar Mahan)
  • 주라크(Zuraq): 카바드 1세에 이어 호스로 1세를 섬겨온 노장. 일명 아자레테스(Azarethes). 대장군. 544년 에데사 공략전을 이끔
  • 카르다리간 (Kardarigan)" '검은 매' 라는 뜻. 호스로 1세 후기 ~ 호르미즈드 4세 시기의 장군. 동명의 아들은 호스로 2세를 섬겼다. 훗날 아들 카르다리간은 아르다시르 3세를 보호하다가 샬바라즈 파로칸에게 살해되었다.
  • 미흐로에 (Mihroe) 555년 사망.
  • 바흐리즈 (Vahriz) 오만 총독을 지낸 해군제독.

3. 사후

파일:099 Sassanid Persian Empire of Khosrow Parviz 600 Map.jpg
호스로 1세 치하의 사산 제국 영토

호스로 1세는 48년간의 긴 치세 동안 수많은 업적을 세웠고, 사산 왕조는 그의 지도하에 최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579년 호스로 1세가 사망한 후, 그가 일군 업적은 점차 허물어졌다. 호스로 1세에 의해 억눌러 있던 대귀족들은 후임 샤한샤들이 자신들을 제어하기 버거워하는 틈을 타 빠르게 권력을 되찾았고, 자기들끼리 권력 투쟁을 벌였다. 여기에 외세는 점점 약해지는 제국에 맹공을 퍼부었다. 훗날 호스로 2세가 혼란을 수습한 뒤 포카스의 폭정으로 허물어져가는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아르메니아, 시리아, 소아시아 대부분, 이집트 등 동방의 대다수 영역을 탈취했지만, 점령지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데다 이라클리오스의 반격에 속수무책으로 밀리다가 결국 피살되면서 모든 게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이후 사산 왕조는 급격히 쇠락하다 이슬람의 폭풍에 삼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