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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제국 42대 샤한샤 پیروز سوم |페로즈 3세 | ||
당 건릉[1] 61 외국사절 석상 중 페로즈 3세 석상. | ||
제호 | 한국어 | 페로즈 3세 |
중기 페르시아어 | 𐭯𐭩𐭫𐭥𐭰 | |
한문 | 卑路斯 | |
영어 | Peroz III | |
존호 | 샤한샤 | |
생몰 년도 | 636년~679년 | |
재위 기간 | 651년~67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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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산 왕조의 비정통 샤한샤. 이슬람 제국에게 하루아침에 무너진 사산 왕조를 재건하기 위해 당나라로 망명하여 중국의 힘을 빌리려 한 독특한 이력을 지녔다.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비로사(卑路斯)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2. 생애
636년, 사산 왕조의 수도 크테시폰에서 샤한샤 야즈데게르드 3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한 해에 까디시야 전투가 발발, 제국의 주력군이 날아가고 크테시폰이 함락당하는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에 갓난아이 시절부터 아버지의 몽진을 따라다니며 성장했다. 651년, 야즈데게르드 3세가 투르크족과 힘을 합치기 위해 북상하다가 메르브에서 메르브 총독의 사주를 받은 방앗간 주인에게 시해당하자 일가친척과 적지 않은 충성파들을 데리고 파미르 산맥을 넘어 도주하여 토하라 야브구국[2]으로 들어갔다. 군주 이쉬바라 야브구는 페로즈 3세를 맞아들였다. 651년에 그가 토하라 야브구국에 들어갔는데 그 다음 해에 토하리스탄이 이슬람 제국에게 함락당하기 때문에 그는 토하라 야브구와 함께 동쪽으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페로즈 3세는 토하라 야브구국에 머물면서 당나라에 끊임없어 페르시아 수복을 위한 지원을 타진했다. 그리고 마침내 661년, 그의 편지가 당나라 조정에 닿았다. 구당서와 신당서 공통으로, 용삭 초년에 파사국[3]의 왕자 비로사가 대식[4]이 자주 파사를 침범하여 소요를 일으키니 병사를 일으켜 구원해달라고 요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마침 당나라는 서역으로의 확장을 염두에 두고 일대의 행정 구역을 미리 편성해두려 하였기 때문에, 농주 남유현령 왕명원을 서역 사절로 보내 주현을 설치하도록 하면서 질릉성[5]과 그 일대에 파사도독부를 설치하고 페로즈 3세를 도독으로 삼았다. 질릉성은 정말 이란의 코앞에 있는 요충지로, 수여하는 의도가 명백한 땅이었다. 이리하여 사산 왕조의 샤한샤가 당나라 도독이 되었다. 그는 파사도독으로 진수하면서 아들 나르세를 장안에 볼모로 보내두고 꾸준히 당나라 조정에 사신과 세금을 보냈다. 또 이란에서 함께 피난 온 이들과 당나라 현지의 페르시아인 및 소그드인들을 규합하여 정착촌을 만들고 이를 관리하면서 실질적으로 사산 왕조 망명 정부를 꾸리는 데 성공한다. 사산 제국 멸망 이후 660~670년대에도 야즈데게르드 3세의 이름으로 발행된 페르시아 화폐가 발견되는데, 망명 정부로 기능한 파사도독부에서 페로즈 3세가 발행한 화폐로 추정된다.
하지만 파사도독부는 너무 변방에 설치되어 있었고, 사실 설치되었을 때부터 실질적으로 이슬람 제국에 점령된 땅에다 설치된 상태였기 때문에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부담을 느낀 것인지, 페로즈 3세는 함형 연간, 즉 670년에서 673년 사이에 도독부를 떠나 장안으로 가서 입조했다. 당고종은 그에게 재물을 주고 우무위장군으로 삼았다. 677년에 장안 예천방에 페르시아 사원을 세워달라는 상소를 올려, 파사사가 건립되는 데 기여했다.[6] 이후 구당서에는 의봉 3년(678년)에 페로즈 3세를 ,신당서에는 조로 원년(679년)에 일찍이 볼모로 와 있던 나르세를 파사왕으로 삼고 이부시랑배행검을 안무대식사로 삼아 그에게 군대를 주어 임지까지 호송하게 했다고 기록하는데 신당서 기록을 정설로 본다. 실질적인 파사왕이 페로즈 3세였는데 679년에 나르세가 새 파사왕으로 임명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즈음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나르세가 남긴 기록에는,
페로즈 3세는 고종에게 다른 것이 아닌 간소한 장례만을 요구했다. 이때 이란인들은 중국 황제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황제는 페로즈의 떨리는 손을 그의 손에 잡았다. 피페로즈는 눈길을 서쪽으로 돌리며 "나는 조국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고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 이어 동쪽을 바라보며 "나는 나의 새로운 조국인 중국에 감사한다."고 말했고, 자신의 가족과 참석한 모든 이란인들에게 시선을 돌리며 "황제를 모시는 데 너희들의 노력과 재능을 쏟아부어라. 우리는 이란인이지만 이제 우리의 (두 번째) 조국은 중국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장례를 치를 때 아름다운 말 한 마리를 들여 그의 관을 33번 달려 돌게 한 후 매장했는데, 이것은 그가 평생 33번의 승전을 거둔 것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라고 구체적으로 페로즈 3세의 임종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사산 왕조의 마지막 황태자는 당나라의 신하로서 생을 마쳤다.[1] 당고종, 측천무후의 쌍릉을 중심으로 여러 황족들과 고관들이 묻힌 묘역.[2] 돌궐 제국이 토하리스탄을 점령한 후, 당대 돌궐 가한이던 통엽호가한은 아들 타르두쉬 샤드를 야브구로 삼아 토하라를 통치하게 했다. 이후 서돌궐이 약해지자 당나라가 토하라 야브구국을 복종시켰으며 이 시점에는 돌궐 제국 통엽호가한의 손자 이쉬바라 야브구가 재위 중이었다.[3] 페르시아의 한문 음차.[4] 아라비아를 의미한다. 시기 상 이슬람 제국.[5] 현대의 아프가니스탄 자란즈.[6] 파사사는 사산 왕조의 국교 조로아스터교를 모시는 사원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나 후기 사산 왕조와 기독교회와의 연관성을 들어 경교 사원이라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