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5-14 13:21:40

바흐람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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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제국 5대 샤한샤
𐭥𐭫𐭧𐭫𐭠𐭭 | 바흐람 2세
파일:바흐람 2세.jpg
제호 한국어 바흐람 2세
중기 페르시아어 𐭥𐭫𐭧𐭫𐭠𐭭
영어 Bahram II
존호 샤한샤
생몰 년도 ?~293년
재위 기간 274년~293년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사산 왕조의 제5대 샤한샤.

2. 생애

바흐람 1세의 아들로, 274년 9월 부친이 사망한 뒤 10대의 나이로 샤한샤가 되었다. 그는 즉위 직후부터 반란에 시달렸다. 당초 아르메니아의 국왕으로 봉해졌던 나르세스 1세는 바흐람 1세가 죽자 자신이야말로 샤한샤가 되어야 한다며 동전을 독자적으로 주조하며 사실상 독립선언을 하였다. 여기에 쿠샨 지방의 총독 호르미즈드는 "쿠샨의 샤한샤"라는 동전을 주조하며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었으며, 샤카스탄에서도 호르미즈드라는 이름의 또다른 인물이 반란을 일으켰고, 후제스탄 지방에서도 조로아스터교의 고위 사제가 이끄는 반란이 일어났다.

바흐람 2세는 반란자들을 제지할 여력이 없었기에, 당분간은 내버려두기로 했다. 그 대신, 황실의 또다른 유력자인 카라케네의 샤푸르의 딸과 결혼하여 기반을 다졌다. 샤푸르는 하르그베드라는 칭호를 받고 샤한샤 다음가는 지위를 얻었다. 또한 부친 옹립에 기여했던 조로아스터고 수삭 사제 카르티르(Kerdīr)를 대귀족의 반열에 오르게 하였고, 이스타훌의 아나히타 사원의 관리자 겸 주감으로 삼았다. 275년 아우렐리아누스샤푸르 1세에 의해 포로 신세로 전락한 뒤 페르시아에서 사망한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복수를 하고자 대군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에게 죽을 위기에 몰린 비서 에로스가 사형 집행서를 위조하여 여러 고위 관료들의 이름을 적은 뒤 이 문서를 관료들에게 보여줬고, 이에 넘어간 노타리우스 무카포르 등 관료들은 그해 9월 트라키아의 카이노프루리움[1]에서 아우렐리아누스를 암살했다. 그 덕분에 바흐람 2세는 로마 제국의 침공을 모면할 수 있었다.

280년대 초, 바흐람 2세는 후제스탄과 사카스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친히 대군을 이끌고 제국의 동방 영토로 향했다. 수년간의 격전 끝에, 반란은 어느 정도 진압되었고, 샤한샤는 아들 바흐람 3세를 사카스탄의 총독으로 삼았다. 그런데 페르시아군이 동방 전선에 쏠려 있던 283년, 카루스 황제가 이끄는 로마군이 서쪽 변경에 도착하여 선전포고했다. 바흐람 2세는 평화 협상을 제의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왕중왕이 보낸 사절단이 로마군 진영에 도착하여 황제를 만나보고 싶다고 하자, 병사들은 풀밭 위에 앉아 있던 한 군인에게 안내했다. 그 군인은 말라 비틀어진 베이컨과 딱딱한 콩으로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남루한 보라색 외투만이 그가 황제라는 걸 알려줬다.

카루스는 대머리를 감추기 위해 쓰고 있던 모자를 벗으면서 페르시아 왕이 로마 제국의 우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페르시아는 이 대머리처럼 아무것도 남는 게 없을 거라고 말했다. 사절단은 공포로 몸을 떨며 물러갔고, 카루스는 곧바로 자신의 위협을 실천에 옮겼다. 그가 이끄는 로마군은 메소포타미아를 파괴하고 셀레우키아와 크테시폰을 함락시켰다. 카루스는 여세를 몰아 티그리스 강까지 진군했고 곧 강을 건너 페르시아를 정복하기로 했다. 당시 페르시아는 내분으로 인해 국력이 피폐해졌고 군대의 대부분은 인도 접경 지대에 붙들려 있어서 로마군의 침략에 대항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후 카루스가 벼락을 맞아 사망하였고, 로마군이 곧 철수하면서 그는 다시 한 번 위기를 모면했다.

284년, 바흐람 2세는 메소포타미아를 탈환한 뒤 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때 아르메니아에서 할거하는 나르세스를 견제하기 위해, 서아르메니아는 친 로마 성향의 티라다테스 3세가 통치하도록 허용했고, 나머지는 동부 아르메니아를 다스리게 하였다. 한편, 바흐람 3세는 조지아 일대를 공략하고, 이란 7대 가문 중 하나인 미흐란 가문 출신의 7살 소년 미리안 3세를 그곳의 총독으로 임명했으며, 자신의 아들 중 한 명인 미르바노즈를 섭정으로 세웠다. 또한 조로아스터교를 적극 지지했으며, 기독교, 유대교, 마니교, 불교 등 소수 종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대교의 기독교 사료들은 이 시기 동안 박해를 받았다고 기술하지 않았고 오지 마니교에서만 탄압받은 사실이 확인된 걸 보면, 그는 마니교를 탄압한 것 외에는 다른 종교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93년 사망하였고, 아들 바흐람 3세가 황위에 올랐다. 그러나 4개월 만에 오랫동안 칼을 갈아왔던 나르세스 1세에게 찬탈당했다.


[1] 지금의 터키 촐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