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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제국 30대 샤한샤 𐭥𐭮𐭲𐭧𐭬 |비스탐 | ||
제호 | 한국어 | 비스탐 |
중기 페르시아어 | 𐭥𐭮𐭲𐭧𐭬 | |
영어 | Vistahm | |
존호 | 샤한샤 | |
생몰 년도 | ? ~ 601년 | |
재위 기간 | 595년 ~ 60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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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산 왕조의 제30대 샤한샤.2. 생애
사산 제국의 파르티아 7대 씨족 중 하나인 이스파부단에 속한 대귀족으로, 아버지는 샤푸르이고, 형제로 빈두이가 있었다. 이스파부단 가문은 사산 제국의 남서부 일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의 누이는 호르미즈드 4세와 결혼하여 호스로 2세를 낳았다. 그러나 호르미즈드 4세는 농민과 소지주들의 권익을 지켜주기 위해 대귀족들을 숙청하였고, 그 과정에서 그의 아버지 샤푸르가 처형되었다. 그렇지만 호르미즈드는 이스파부단의 새 지도자로 샤푸르의 아들 비스탐을 임명했고, '사산인의 친척이자 동지'로 인정받을 정도로 높은 지위를 계속 유지하도록 하였다.590년 바흐람 추빈이 호르미즈드 4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토벌군을 연이어 격파하면서 크테시폰으로 쳐들어오자, 비스탐은 빈두이와 함께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호르미즈드를 체포한 뒤 두 눈을 바늘로 찔려 실명시키고 감옥에 가둔 뒤 호스로 2세를 옹립했다. 그 후 호르미즈드는 피살되었는데, 호스로 2세가 두 형제에게 아버지를 죽이라고 시켰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하지만 바흐람 추빈은 "그대를 폭군을 축출하는 데 큰 기여를 한 영웅으로서 후한 대접을 해줄 테니 그만 돌아가라"는 호스로 2세의 요청을 무시하고 계속 크테시폰으로 진격하였고, 그는 도저히 저항할 수 없다 판단하고 빈두이와 함께 호스로 일가를 모시고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했다.
591년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바흐람 추빈을 축출하고 호스로 2세를 복위시키는 데 성공한 뒤, 그는 빈두이와 함께 권세를 누렸다. 빈두이는 호스로 2세 정권의 최고 관료가 되어고, 비스탐은 타바리스탄과 호라산을 아우르는 동방의 스파베드(spahbed) 직위를 받았다. 그러나 호스로는 두 형제가 이대로 권세를 누리게 내버려둔다면 왕권을 저해하게 될 거라고 판단했다. 595년, 그는 두 사람을 소환한 뒤 먼저 도착한 빈두이를 처단하고, 뒤이어 아버지를 살해하는 데 관여한 귀족들을 처형했다.
비스탐은 소환장을 받고 크테시폰으로 이동하던 중 소식을 접하자 길렌으로 도주한 뒤, 그곳에서 세력을 끌어모아 반란을 일으키고 샤한샤를 자칭했으며, 동전을 독자적으로 주조했다. 이때 바흐람 추빈의 잔당이 이 반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바흐람의 누이 고르디야는 바스타함과 결혼하였고, 바흐람의 장남 샤푸르 역시 반란에 가담했다. 비스탐은 596년 레이 주변의 개방지를 통과한 후 메디아로 진격하려 했다. 그러나 호스로는 신속하게 토벌군을 파견했고, 레이 인근의 평원에서 반란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비스탐은 길렌의 산악지대로 패주한 뒤 토벌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여 번번이 격퇴하면서 세력을 끌어모았다. 600년경, 그는 알보르츠 산맥의 가장자리에서 4개의 속주를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 호스로는 아르메니아 장군인 스바트 바그라투니를 파견하여 이들을 토벌하게 했고, 바그라투니는 비스탐을 격파하여 산골짜기로 몰아냈다. 비스탐은 동방의 두 통치자를 설득하여 이란 내륙으로 쳐들어오도록 유도했지만, 그 중 한 명이 호스로에게 투항하고 나머지는 부하들에게 살해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601년, 스바트는 쿠미스 인근에서 비스탐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고, 비스탐은 사로잡힌 후 호스로의 재촉으로 처형되었다. 하지만 반란군은 추격군을 격퇴한 뒤 길렌 산맥에서 계속 농성하였고, 스바트는 602년 또 다시 원정을 단행하여 이들을 토벌했다. 이리하여 호스로는 사산 왕조의 유일무이한 지배자로서 입지를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