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8-27 16:22:17

바흐람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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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제국 17대 샤한샤
𐭥𐭫𐭧𐭫𐭠𐭭 |바흐람 5세
파일:바흐람 5세.jpg
제호 한국어 바흐람 5세
중기 페르시아어 𐭥𐭫𐭧𐭫𐭠𐭭
영어 Bahram V
존호 샤한샤
생몰 년도 ?~438년
재위 기간 420년~438년

1. 개요2. 생애3. 전설

[clearfix]

1. 개요

사산 왕조의 제17대 샤한샤.

2. 생애

야즈데게르드 1세유대인 황후 슈산두흐트(Šōšanduxt)의 아들이다. 그는 알 히라의 라흠 왕국 궁정에서 자라면서 활쏘기, 승마술을 익혔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크테시폰이 아닌 라흠 왕국에서 자란 것은 부친과의 불화로 그곳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420년, 야즈데게르드 1세가 히르카니아에서 피살되었다. 아르메니아 왕 샤푸르는 부친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크테시폰으로 달려가서 샤푸르 4세를 칭했지만, 신하들의 배신으로 살해되었다. 이후 귀족들은 바흐람 4세의 아들 호스로를 샤한샤로 세웠다.

바흐람은 이 소식을 접하고 라흠 왕에게 지원을 요청해 아랍군을 받아냈다. 이후 크테시폰으로 진격하여 호스로를 축출하고 샤한샤가 되었다. 그는 부친처럼 귀족들을 억압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여 그들의 지지를 받았고, 인도 공주와 결혼하여 신드의 데발 항구를 지참금으로 받았다. 그는 신드 해안지역에 여러 부족을 재정착시키는 정책을 추진하여, 잠재력이 높은 이 지역을 발전시킴으로써 경제를 활설화하고자 하였다. 또한 아버지 대부터 행정을 총괄하던 미르 나르세에게 행정 업무를 전담하였다.

파일:attachment/bahram_v.jpg
바흐람 5세가 자신의 별명(바흐람 구르)의 유래가 된 야생 나귀들을 사냥하는 장면. 1430년 티무르 제국 시대 작품으로, 바흐람 구르는 화려한 궁정 생활과 일화들을 남겨 오랫동안 이란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았다.

바흐람 5세는 축제 행사에서 세금과 공공 부채를 상환하고 음악가를 더 높은 지위로 승진하였으며, 수천 명의 인도 음악가를 이란으로 데려와 신하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특히 사냥에 유독 탐닉해, "사냥꾼"이라는 의미가 담긴 구르(gor)라는 별칭이 붙었다. 그는 이러한 조치로 사산 왕조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샤한샤 중 한 명이 되었다.

421년, 미르 나르세와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의 권고에 따라 기독교인들에 대한 조직적인 박해를 하였다. 기독교인들은 로마 영토로 도망쳤고, 누나 아일리아 풀케리아의 영향을 받아 신심이 깊었던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그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황제는 아르다부리우스 장군을 아르메니아로 파견했다. 이란의 나르세스 장군은 아르다부리우스와 맞붙었으나 패배한 뒤 본국으로 퇴각했다. 나르세스는 방비되지 않은 로마 속주인 메소포타미아를 공격하려 했지만, 아르다부리우스는 이를 예견하여 그곳에서 나르세스를 가로막았다. 아르다부리우스는 나르세스를 격퇴한 뒤 그가 숨은 니스비스 요새를 포위 공격했다. 하지만 바흐람 5세가 친정한 대군이 다가오자 후퇴했다. 바흐람 5세는 테오도시오폴리스를 포위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422년, 양측은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모든 것을 전쟁 전의 상황으로 되돌렸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할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아랍 망명자들을 거부하기로 했다. 또한 로마인들은 캅카스의 사산 도시인 데르벤트의 고갯길을 보호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기로 하였다. 이후 사산 왕조와 로마 제국은 유목민들의 캅카스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협력하였다. 로마와 평화 협약을 맺은 뒤, 그의 관심은 동쪽의 백훈족에게 쏠렸다. 당시 백훈족은 사산 왕조의 동방 영토를 끈질기게 침공하여 부유한 도시인 마르를 정복하고 서쪽으로 레이까지 이르렀다. 그는 더 이상의 침략을 막기 위해 백훈족에게 공물을 바쳐야 했다. 하지만 이제 그들에게 전력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고, 그는 더 이상 공물 지급을 하지 않고 대대적인 반격에 착수했다.

바흐람은 국내에 나르세를 남겨둬서 섭정으로 삼고, 자신은 니사에서 마르브를 경유하여 쿠스메한으로 진군해, 그곳에서 백훈족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백훈족의 왕을 죽이고 그의 아내를 사로잡았다. 뒤이어 트란스옥시아나로 진격하여 백훈족을 다시 한번 격파했다. 427년, 백훈족은 패배를 인정하고 그동안 점령한 영토에서 철수하였고, 바흐람은 옥수스 강변에 기둥을 세워서 이 강이 제국의 동쪽 국경임을 만방에 알렸다.

파일:Persian_Armenia.gif
합병 이후의 아르메니아

그의 큰아버지였던 바흐람 4세는 아르사쿠니 가문의 브람샤푸흐를 동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혔다. 브람샤푸흐 이후 즉위한 아르탁세스 4세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은 바흐람 5세에게 아르샤쿠니 가문을 몰아내고 한때 독립했던 아르메니아를 이참에 사산 왕조에 병합하자는 탄원을 올렸고, 그는 이를 받아들여 428년 아르메니아를 속주로 삼고 마르즈반을 세웠다. 최초의 마르즈반은 네스토리우스파 시리아인인 바르 키소였다.

바흐람 5세는 438년에 사망했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기록마다 다르다. 샤나메에 따르면, 그는 잠을 자던 중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기록에 따르면, 그는 늪이나 구덩이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후대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그가 자연사했다고 본다. 사후 아들 야즈데게르드 2세가 뒤를 이어 샤한샤가 되었다.

3. 전설

전설에 따르면, 바흐람 5세가 중국을 공략하는 인도의 왕을 지원한 적이 있었는데, 인도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마크란 지역과 신드를 페르시아에게 양도하였다. 그리고 인도의 위대한 왕에 의해 음악가의 자손들이 페르시아로 보내졌으며 이것은 페르시아인들에게 화제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아시아 당나귀를 사냥하는 도중에 사랑을 만났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피르다우시의 《샤나메》에선 바흐람 5세가 호스로와 왕위를 놓고 경쟁할 때 사자 두 마리 사이에 왕관과 왕복을 놓고 그걸 탈취하는 사람이 샤한샤가 되기로 하였는데, 호스로는 포기했지만 그는 기어이 사자를 해치우고 왕관과 왕복을 확보하여 샤한샤가 되었다고 기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