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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살 1세 | 가지 1세 | 파이살 2세 | ||
<rowcolor=#ffffff> 이라크 대통령 |
이라크 왕국 제2대 국왕 가지 1세 غَازِيّ إبْنِ فَيْصَل | |
<colbgcolor=#CE1126><colcolor=#fff,#fff> 이름 | 가지 이븐 파이살 غَازِيّ إبْنِ فَيْصَل |
출생 | 1912년 3월 21일 |
오스만 제국 메카 | |
사망 | 1939년 4월 4일 (향년 27세) |
이라크 왕국 바그다드 | |
재위 기간 | 이라크 국왕 |
1933년 9월 8일 ~ 1939년 4월 4일 (6년) | |
전임자 | 파이살 1세 |
후임자 | 파이살 2세 |
부모 | 아버지 : 파이살 1세 어머니 : 후자이마 빈 나세르 |
자녀 | 파이살 2세 |
종교 | 이슬람 수니파 |
가문 | 하심 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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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라크 왕국의 제2대 국왕. 1933년부터 1939년까지 재위하였으며 적극적인 반영정책을 주도하였다. 결점이 좀 있긴 하지만 이라크 왕국의 역대 국왕중에서 그나마 제일 군왕답게 통치한 인물이었고 역사학자 한나 바타투는 그를 이라크 왕국의 마지막 희망이었다고 평가한다.2. 생애
2.1. 초기 이력
1912년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인 헤자즈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후세인 1세로 아랍의 왕으로 만들어주겠다는 영국의 제안을 믿고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여했으나 영국인들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가지 1세는 젊어서부터 반영감정을 품게 되었다. 그는 영국 헤로 스쿨에서 1년간 유학했으며 이어 샌드허스트에서 더 짧은 시간동안 유학했고 영국 유학 기간 동안 더욱 심한 반영주의자에 의심많고 포악한 인물이 되었다. 이후 귀국하여 이라크 사관학교를 졸업했는데 성적은 대단치 않았으나 승마와 기계 조작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1932년 부왕인 파이살 1세가 유럽을 방문하는 와중에 영국인들의 사주를 받은 아시리아인들이 대대적인 폭동을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파이살 1세가 자주적인 이라크를 건설하려는 것에 불만을 품은 영국이 왕정을 약화시키기 위한 술책의 일환으로 벌인 것이었다. 가지 1세는 이라크 정계와 지식인 사회에서 확장되는 반영운동에 동조하여 영국의 목표는 이라크를 파멸시키거나 노예화하기 위해 이라크 정부를 약화시키는 것에 있다고 판단하고 아시리아인 폭도들에게 공습을 감행하여 폭동을 진압하여 영국의 음모를 분쇄한 민족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2.2. 이라크 국왕(1933~1939)
1933년 파이살 1세가 서거하자 가지 1세가 이라크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반문맹으로 학식이 높지 않고 군대가 민간정치권보다 우월하다고 여긴 가지 1세는 군주로서 적합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국민적 인기는 대단하였다. 가지 1세는 정치보다는 아시리아 폭동 진압의 영광을 누리는 데 집중하여 국민들을 자주 만나며 인기를 과시했고 군복을 입고 공개석상에 나타나 반영파 장교들을 규합하였다. 이때부터 이라크 정계는 군부와 국민의 지지를 받는 가지 1세와 영국의 지지를 받는 엘리트 정치인 및 지방부족들의 대결장이 되었다.1934년에서 1935년에 걸쳐 친영파의 사주로 가지 1세에 반대하는 부족들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가지 1세는 이를 모두 진압하였다. 1936년, 가지 1세는 아시리아 폭동을 진압할 때 활약한 바크르 시드키 장군이 일으킨 친위 쿠데타를 지원하여 친영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1937년 가지 1세는 자신의 특기인 기계 조작 능력을 활용하여 알 주아워 궁전에 라디오 카스르 알 주아워 방송국을 설립, 군 장교들과 함께 방송에 출연하여 아랍 이념과 반영주의를 중동 전역에 선전하였다. 그의 방송은 시리아, 요르단, 팔레스타인, 쿠웨이트 등 방송이 닿는 모든 아랍 지역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고 가지 1세는 아랍 최고의 명사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또한 가지 1세는 쿠웨이트와의 합병을 추진, 쿠웨이트 입법위원회 위원 14명 중 10명으로부터 이라크와의 합병에 동의한다는 의사를 받아내었다. 이는 가지 1세의 인기와 쿠웨이트의 반영주의가 결합되어 가능했던 일이었다. 여기에 가지 1세가 팔레스타인에 대한 직접 지원을 추진하자 영국은 가지 1세를 크게 경계하여 이라크 주재 영국대사 모리스 패터슨을 통해 알 주아워 방송국 폐쇄를 요청했지만 가지 1세는 패터슨의 면담을 거부했다. 이에 분노한 영국은 공공연히 가지 1세의 제거를 논하기 시작했다.
2.3. 의문의 죽음
"영국인들의 숙원이 이루어졌다."
1939년 4월 5일 가디언지
1939년 4월 5일 가디언지
그러던 중 1937년, 친위 쿠데타를 주도한 바크르 장군이 암살당하자 추방되었던 친영파들이 대거 귀국하였다. 전 수상 누리 사이드의 아들 사바 사이드를 비롯한 친영파 정치인들은 가지 1세를 제거하자고 주장했는데 섭정위원회 설치, 가지 1세의 삼촌 제이드의 옹립 등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영국은 가지의 사촌인 친영파 압둘 일라흐를 즉위시킬 것을 주장했다.
1939년 4월 3일 심야, 참모 두명과 함께 운전을 하던 가지 1세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가지 1세는 황급히 후송되었으나 끝내 4월 4일 아침에 불과 27세[1]에 숨지고 말았다. 허나 전신주를 들이받아 교통사고가 일어났다는 공식 발표와 달리 가지 1세의 차량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으며 가지 1세가 과속을 했다는 그 어떠한 증거도 없었고 가지 1세의 죽음을 초래한 머리 부상은 자동차 사고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왕의 시신을 부검한 사에브 사카트 박사도 가지 1세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사망증명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내무장관 나지 사카트는 친영파의 압력으로 사건을 종결해야 했고 다시 권력을 잡은 친영파는 사건 재수사를 철저히 금지했으며 사건을 파헤치려는 사법부를 탄압했다.
가지 1세가 사망하면서 4살밖에 되지 않은 파이살 2세가 이라크의 국왕으로 즉위했으며[2] 이라크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가지 1세의 장례식 행렬에 바그다드 시민들은 누리 알 사이드를 향해 "당신은 가지 왕이 흘린 피의 대가를 치를 것이다!"라고 울부짖으며 왕의 복수를 외쳤고 1941년 라시드 알리 알 가일라니 반란 등 반영 소요가 계속 일어나게 된다. 결국 이라크 왕국은 왕국의 구심점 노릇을 할 수 있던 가지 1세가 조기에 사망하면서 사실상 붕괴되었고 이라크 왕국은 1958년 쿠데타로 붕괴된다.
3. 매체에서
Hearts of Iron IV에서 이라크의 지도자로 등장한다.[3] 원래는 고증에 맞는 초상화도 없는 해괴한 얼굴이었으나 나중에 패치되어서 고증에 맞는 초상화를 가지고 시작한다. 그리고 해방 국가인 시리아의 비동맹주의 지도자로도 등장하는데[4], (프랑스로)시리아를 해방하면 기본 이념이 민주주의라 치트 쓰거나 괴뢰국되지 않으면 안나온다.4. 참고문헌
- 사담 후세인 평전, 사이드 아부리쉬, 도서출판자전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