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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 티그리냐인 · 티그레인 · 아파르족 |
에리트레아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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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트레아국 ሃገረ ኤርትራ [1] | دولة إرتريا [2] State of Eritrea | ||
<rowcolor=#FFBD26> 국기 | 국장 | |
انتصار للجماهير / ዓወት ንሓፋሽ! 대중에게 승리가 있으리 | ||
<colcolor=#fff> 면적 | 117,600km2 | |
인구 | 381만 7651명(2024년)[3] | 세계 129위 | |
수도 | 아스마라 | |
최대도시 | 아스마라, 케렌, 마사와 | |
접경국 | [[수단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에티오피아| ]][[틀:국기| ]][[틀:국기| ]] [[지부티| ]][[틀:국기| ]][[틀:국기| ]] | |
국가 | 에리트레아, 에리트레아, 에리트레아 티그리냐어 : ኤርትራ ኤርትራ ኤርትራ | |
공용어 | 티그리냐어, 아랍어, 영어, 토착어[4][5] | |
정부 형태 | 일당제, 대통령 중심제, 공화국, 전체주의 | |
민주주의 지수 | 1.97점, 권위주의 (2023년) (167개국 중 152위)[6] | |
통화 | 에리트레아 낙파 | |
대통령 |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Isaias Afwerki, ኢሳይያስ ኣፈወርቂ) | |
국회의장 | ||
민족구성 | 티그리냐인, 티그레인, 아파르족, 사호족, 쿠나마족 | |
종교 | 그리스도교 62% (에리트레아 테와히도 정교회 57%, 기타 그리스도교 5%), 이슬람교 36%, 기타 종교 0.5% | |
UN 가입 연도 | 1993년 5월 28일 | |
남북수교현황 | 대한민국 : 1993년 5월 24일 북한 : 1993년 5월 25일 | |
교민 수 | 0명 | |
여행경보 | 여행자제 : 출국권고 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 | |
출국권고 : 에티오피아·수단·지부티 국경 25Km 이내 |
위치 |
[clearfix]
1. 개요
에리트레아[7]는 동아프리카 홍해의 연안국으로 수도는 아스마라(Asmara)다.전체 종족 구성에서 티그리냐인(티그라이인)이 55%로 압도적인 우위를 고수하고 있으며 30%에 이르는 티그레인을 포함한 기타 민족도 포함되어 있다. 티그리냐인은 이웃한 에티오피아에서는 2004년 기준으로 인구의 약 5%를 차지한다.
2. 상징
2.1. 국가
가창판(티그리냐어)
가창판(아랍어)
기악판
가사는 다음과 같다.
티그리냐어 | 로마자 표기 | 한국어 해석 |
ኤርትራ ኤርትራ ኤርትራ፡ በዓል ደማ እናልቀሰ ተደምሲሱ፡ መስዋእታ ብሓርነት ተደቢሱ። መዋእል ነኺሳ ኣብ ዕላማ፡ ትምርቲ ጽንዓት ኰይኑ ስማ፡ ኤርትራ'ዛ ሓበን ዉጹዓት፡ ኣመስኪራ ሓቂ ክምትዕውት። ኤርትራ ኤርትራ፡ ኣብ ዓለም ጨቢጣቶ ግቡእ ክብራ። ናጽነት ዘምጽኦ ልዑል ኒሕ፡ ንህንጻ ንልምዓት ክንሰርሕ፡ ስልጣን ከነልብሳ ግርማ፡ ሕድሪ'ለና ግምጃ ክንስልማ። ኤርትራ ኤርትራ፡ ኣብ ዓለም ጨቢጣቶ ግቡእ ክብራ። | Ertra, Ertra, Ertra, Bäal däma'nalkäsä tedemsisu, mäswa'əta bəḥarnät tädäbisu. mäwa’əl näȟisa ab ‘əlama, tə’əmərti ṣən‘at kʷäynu səma, Ertra’za ḥabän wəṣu‘at, amäskira ḥaḳi kämtəʿəwăt. Ertra, Ertra, ab‘aläm č’äbiṭato gəbu’ə kəbra. naṣənät zämṣə'o ləʿul niḥ, nəhənṣa nəlməʿat kənsärəḥ, səlṭane känälbəsa gərma, ḥədri'lona gəmja kənsəlma Ertra, Ertra, ab‘aläm č’äbiṭato gəbu’ə kəbra. | 에리트레아, 에리트레아, 에리트레아. 적이 울부짖으며 파괴되었던, 자유로 검증된 그녀의 희생. 그녀의 원칙에 영원히 충실하며, 그녀의 이름은 강인함의 상징이 되었도다. 에리트레아, 억압받는 자들의 자랑, 진실이 승리함을 증명하는 국가. 에리트레아, 에리트레아. 세계에서 그녀의 정당한 자리를 차지한 나라. 자유를 가져온 최고의 헌신, 우리를 재건하고 발전시키리라, 우리는 그녀를 진보로 명예롭게 하고, 우리의 유산으로 그녀에 왕관을 씌우리라. 에리트레아, 에리트레아. 세계에서 그녀의 정당한 자리를 차지한 나라. |
2.2. 국기
자세한 내용은 에리트레아/국기 문서 참고하십시오.2.3. 국장
자세한 내용은 에리트레아/국장 문서 참고하십시오.3. 역사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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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숨 왕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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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디트 | ||
중세 | 자그웨 왕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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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 이탈리아령 에티오피아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오가덴 군정 | ||
에티오피아 제국 | ||
데그르 | ||
에티오피아 인민 민주 공화국 | ||
에티오피아 연방 민주 공화국 에리트레아국 | }}}}}}}}}}}} |
에리트레아는 4세기에서 6세기 동안 번영한 고대 악숨 왕국의 주요 항구가 있던 지역이다. 950년경에는 초기 에티오피아 제국과 연합을 이룬 자치국이었다가 16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7세기부터 19세기에 에리트레아의 통치권을 놓고 에티오피아 제국, 오스만 제국, 티그라이 왕국, 이집트, 이탈리아 사이에서 각축전이 벌어졌다. 최종적으로 1890년에 에리트레아는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되었다. 당시 수도 아스마라 주민의 절반이 이탈리아인이었다.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기지로 사용되었던 에리트레아는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6개 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가 1941년부터는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에리트레아 독립 전쟁 |
그러다가 에리트레아는 1952년경에 에티오피아 제국의 1개 주로 병합되었다. 1962년 11월 14일 에티오피아가 에리트레아를 합병하자 이슬람 중심의 에리트레아 해방전선(ELF)과 그리스도교도 중심의 에리트레아 인민해방전선(EPLF, Eritrean People's Liberation Front) 등은 독립전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ELF의 조직원들이 1977∼1978년, 1985년에 대거 에리트레아 해방전선-인민해방군(ELF-PLF)이나 EPLF에 합류함으로써 ELF의 군사조직은 와해되었으며 1980년대 후반에는 ELF-PLF도 EPLF로 거의 흡수되었다. 한편 분리주의 저항 단체들은 수단과 중국, 소말리아,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 튀니지, 리비아 등 각국의 군사, 재정적 지원을 받으면서 에티오피아군과의 전쟁을 이어갔다.
1980년 AKM 소총과 56식 소총을 들고 에티오피아군과 교전하는 에리트레아 인민해방전선(EPLF) 게릴라 병사들 |
1974년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폐위와 1991년 멩기스투 정권이 붕괴되고 에티오피아 반란 연합세력이 아디스아바바를 점령하는 등의 혼란을 틈타 EPLF는 1991년 5월 수도 아스마라를 탈환한 뒤 에리트레아 독립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1993년 5월 24일 독립을 선포했다. 4년 이내에 새 헌법을 제정해야 하는 국회는 1993년 6월 초대 대통령으로 EPLF의 사무총장인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를 선출했다. EPLF는 1994년 유일 합법정당인 민주정의인민전선(PFDJ, People's Front for Democracy and Justice)으로 개편되었다.
에리트레아가 독립하면서 에티오피아는 내륙국이 되었고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는 항구 사용을 두고 갈등을 겪었다. 결국 항구 이용 문제와 바드메 소유권을 두고 에티오피아와 1998년 ~ 2000년까지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의 지도 하에 본격적인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전쟁을 치렀는데 이 전쟁에서 에리트레아는 에티오피아를 상대로 선전했지만 결국 스케일에서 밀려 전쟁 전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수준에서 전쟁을 끝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에리트레아와 완전히 적대관계가 된 에티오피아는 2000년대에서 2010년대 초중반까지 바다를 접한 다른 아프리카 이웃국가들인 지부티와 케냐로부터 항구를 빌려 쓰다가 2018년 평화조약을 맺고 바드메를 돌려주는 대신 마사와, 아사브 등 에리트레아 항구에 대한 사용권을 에리트레아 정부로부터 다시 허용받았으며[8] 양국의 관계는 많이 호전되었다. 다만 에티오피아와 전쟁을 치른 역사적 배경 때문에 에리트레아 국민들의 에티오피아에 대한 감정은 한국과 일본, 영국과 프랑스, 독일과 체코, 폴란드와 독일처럼 좋지 않은 편이다.
에티오피아 전쟁 당시 이스라엘과 미국,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에티오피아에게 밀리면서 안 그래도 열세였던 공군 전투기 다수를 상실하면서 패색이 짙었으나 반대로 우크라이나와 리비아의 지지 및 에티오피아 내부 여론의 반발을 잘 활용하여[9] 외교적으로 영토를 잃지 않고 유엔의 중재로 2000년 12월 종전했다. 이후 유엔 평화유지군은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의 국경지대에 폭 25km의 임시안전지대(TSZ)를 설치하고 양측을 감시하고 있다.
에티오피아와의 국경 분쟁이 벌어진 후 2003년 3월 국경위원회(EEBC, Eritrea - Ethiopia Boundary Commission)가 양국간 국경의 소도시인 바드메(Badme)를 에리트레아 영토라고 결정하자 에티오피아는 수용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하면서 양국간 국경 획정 작업이 중단되었으며 양국 간의 대화는 끝나고 말았다. 2005년 10월에도 국경에 분쟁이 해결되지 않고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에티오피아는 TSZ에서 유엔 평화유지군의 공중 정찰을 금지시켰고 또다시 국경지역에는 군사적 긴장 상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문제는 이러한 군사적 긴장 상태 때문에 에리트레아는 에티오피아와의 국경 분쟁으로 재정 수입은 감소하고 군사비 지출이 급증하여 오랜 시간 동안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는 점이다. 수단 공화국 국경지대의 난민 10만 명과 에티오피아 추방 난민 7만 5천 명은 에리트레아에 큰 부담이 된다. 그러나 미국은 2004년 4월에 에리트레아의 인권 상황이 악화되었고 다당제를 실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프리카 성장촉진법(AGOA, Africa Growth Opportunity Act) 수혜 대상국에서 에리트레아를 제외시켰고 현재까지도 에리트레아인들은 하루하루를 독재와 가난에 시달리면서 힘겹게 살아간다.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대통령은 아프리카 각국의 분쟁에까지 개입해 테러단체와 반군 세력들까지 지원하는데 실제로 소말리아에서 알샤바브 연계 테러를 지원한 혐의로 UN에서 에리트레아에 대해 제재를 가하고 있다.
2018년 9월 30일에 에리트레아는 유엔 제재를 해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
2023년 2월 10일에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에리트레아 대통령은 티그라이 전쟁 당시 에리트레아군이 약탈, 강간, 학살 등의 인권 침해를 저지르거나 본인이 티그라이 전쟁에 개입했다는 보도를 전부 에티오피아의 평화 과정을 방해하려는 허위 정보 캠페인이라고 일축했다. #
4. 인권 탄압
행복한 독립 축하 행사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에리트레아는 세계에서 가장 억압적이고 비밀스럽고 접근하기 어려운 국가 중 하나입니다.
국제앰네스티 에리트레아 조사관 클레어 베스턴(Claire Beston)이 2013년 5월 9일에 남긴 말 #[10]
국제앰네스티 에리트레아 조사관 클레어 베스턴(Claire Beston)이 2013년 5월 9일에 남긴 말 #[10]
개인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 살 권리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에리트레아 사람들이 그들의 자유를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기꺼이 죽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역사를 통틀어 전체주의 정권처럼 그들의 미래를 훔치고 모든 움직임을 통제하는 어둡고 억압적인 정권 아래서 계속 살기보다는 차라리 죽기를 택할 것입니다.
메브레(Mebre)라는 가명을 쓴 에리트레아인이 2017년 5월에 남긴 말[11] #
메브레(Mebre)라는 가명을 쓴 에리트레아인이 2017년 5월에 남긴 말[11] #
에리트레아는 1993년 에티오피아에서 독립한 후 인민해방전선 의장으로서 고국의 독립을 이끌던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12]가 에리트레아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래 [age(1993-05-24)]년째 집권하고 있는데 대통령이자 여당 대표, 국회의장직을 겸직해 사실상 황제나 다름없는 권한을 가지고 자신이 해방시킨 동포들에게 북한에 준하는 수준의 잔혹한 학정을 저지르고 있다. # 독립 이후 현재까지 지속되는 에티오피아와의 분쟁으로 수만 명의 에리트레아인이 사망했고[13] '자의적인 체포와 구금'은 독립 직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로 인해 에리트레아는 북한, 아프가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14], 시리아 등과 함께 현존하는 최악의 독재국가 중 하나로 여겨지는 것을 넘어 옛날 그 시절 루마니아, 알바니아 등과 함께 북한의 수준에 가장 근접한 독재국가로까지 꼽힐 정도다.[15] 오죽하면 국내외를 막론하고 에리트레아의 가장 널리 알려진 별명이 무려 아프리카의 북한이다.[16]
즉, 에리트레아는 철권 억압 통치를 통해 에리트레아 국내의 내전 발발을 억누르는 데 성공했을지 몰라도 억압적인 통치로 그 이상 발전을 할 수가 없는 문제를 안고 있는데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는 민주주의를 실현할 생각도 없으며 알자지라 기자에게 "에리트레아에는 민주주의라 불리는 상품이 없다"는 인터뷰를 했고[17] 심지어 자신은 언론 탄압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무엇보다 에리트레아는 세계 최악의 언론 탄압국으로 꼽힌다. 이미 1996년 언론법에 미디어가 "국가적 목표"를 홍보해야 한다고 명기했으며, 2001년 9월 17일에 에티오피아와의 국경 전쟁을 비판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며 PFDJ에 공개 서한을 쓴 'G-15'[18] 15명 중 11명[19], 언론인 10명, 수백 명의 민간인들(여성 포함)을 재판은커녕 아무런 혐의도 적용하지 않고 구금한 지 바로 2일 뒤인 2001년 9월 19일에 '국가의 통합과 이익'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모든 민영 언론사를 폐쇄하고 다수의 언론인을 체포하며 정부 정책과 대통령을 찬양하며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국영 언론만 남겨놨다. 2022년 기준으로도 16명의 언론인이 수감 중이라고 하며 수많은 언론인들이 외국으로 탈출했다.
에리트레아에는 외국의 특파원들은 단 하나도 없으며[20] 대신 특파원들은 인근 국가인 에티오피아로 파견하여 취재하고 있다고 한다. 다만 2018년 에티오피아와의 국경을 개방하며 일부 해외 언론인들의 출입이 허용되었다. # 모든 기사는 에리트레아의 유일한 국영 언론사이자 군부가 실권을 가진 Denden Media가 보도하는데 내용은 주로 대통령의 행적을 찬양하는 것으로 구성되며 만약 정부에 비판적인 기사를 쓰려면 투옥과 고문을 각오해야 하고 미디어 간행물을 공개하기 전에는 미리 정부에 제출해 승인을 받아야 한다. 당국으로부터 면허를 받지 않은 언론인은 활동할 수 없으며 허락되지 않은 외국 간행물을 인쇄, 유포하면 처벌을 받게 된다. 그나마 2013년에 반체제 단체가 아스마라에서 지하 신문인 Echoes of Forto를 만들어 배포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에리트레아는 북한, 투르크메니스탄과 함께 언론자유지수 최하위권을 항상 놓치지 않는 나라이기도 하다. 언론자유지수는 100점 만점으로 평가하며 점수가 낮을수록 언론통제가 극심하다는 의미인데 2022년 기준으로 13.92점을 받으며 최하점을 기록한 북한을 간신히 제치고 19.62점(180개국 중 179위)를 기록했다. 게다가 에리트레아가 언론자유지수 최하위를 기록한 횟수는 2024년 기준으로 총 11회로, 북한(10회)보다 1회 많다.[21] 북한은 외지인들이 '북한은 지하에서도 반체제 인사가 없을 것이다'라고 착각하게 만들 정도로 반체제 인사가 존재한다는 소식은 말할 것도 없고 사건사고 소식조차 극히 예외적인 경우가 아닌 이상 전혀 보도하지 않을 정도로 언론통제가 극심한 나라인데 그런 북한과 언론 통제가 동급으로 간주될 정도면 에리트레아의 언론 통제가 얼마나 극악한지 알 수 있다. 다만 2023년에는 27.86점을 기록하여 180개국 중 174위로 순위가 약간 오르긴 했다.[22] 그러다가 2024년에는 16.64점을 기록하여 180개국 중 180위로 세계 꼴찌를 차지하였다.[23] 이 때문에 에리트레아는 "아프리카 최대의 기자 감옥"이라고 불린다.
종교의 자유도 없으며 그리스도교를 탄압하는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들 중에서도 상황이 매우 심각한 것으로 악명이 자자하다. 증언에 의하면 한 여자가 복음을 설파했다고 수감자들과 함께 마이 세르와 군사 기지의 화물용 컨테이너에 구금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컨테이너에는 화장실이 구비되어 있지 않은 것은 물론 낮에는 찌도록 덥고 밤에는 얼어붙을만큼 춥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종교를 포기할 것을 강요하는 구타가 이뤄졌다고 한다. 기사
에리트레아는 가톨릭·루터회·에리트레아 테와히도 정교회, 이슬람 수니파만 믿는 것을 허용하며 다른 그리스도교 교파나 교단[24]을 불법화했다. 같은 그리스도교이며 종파만 다른 것임에도 무조건 불법이며 에리트레아 정부는 한 남성이 허용되지 않은 종파에 전도했다면서 구금한 후 고문하고 굶겼을 뿐 아니라 짐승처럼 묶어 쓰레기를 먹도록 강요하기까지 했다. 피해자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은 나를 고문하기 위해 밖으로 끌고나가 벌거벗긴 채, 낮에는 뜨거운 태양 아래 두었고 밤에는 추위에 떨게 내버려뒀다'고 한다. 출처 물론 에리트레아의 국영 언론은 이들을 'CIA로부터 돈을 받고 활동한다'고 모함하고 있다.
2023년 5월에는 그리스도교인 청년 103명이 SNS에 올릴 찬양과 예배 영상을 녹화하기 위해 아스마라에 모였다가 모두 체포되어 마이 세르와 교도소에 구금되어 수십 년짜리 징역형에 처해질 위기에 놓였으며 동시기 기준으로 에리트레아에서 구금된 그리스도교도는 500명[25]에 달한다고 한다. # 에리트레아 정교회 테와히도 교회 주교 아부네 안토니오스는 2007년 에리트레아 정부에게 해임된 후 가택 연금을 당했으며, 2019년에는 해당 교회에서 이단으로 파문되었고, 2022년 2월 9일 향년 9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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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트레아 고문 피해자들이 UN 인권위 조사관들에게 그려보인 고문 장면 1. (출처: UN 인권위 에리트레아 보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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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트레아 고문 피해자들이 UN 인권위 조사관들에게 그려보인 고문 장면 2. (출처: UN 인권위 에리트레아 보고서.) |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는 국가가 허용하지 않은 종파를 믿는 그리스도교인의 다수를 체포하고 사막에 위치한 선박용 철제 컨테이너 감옥에 가두어 비인간적인 대우를 일삼고 심지어 최소 1만 명에서 2만 명에 달하는 정치범이 재판도 없이 구금시설 약 200~300여 곳에 구금되었다고 하는데[26] 이들 중에는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의 독재에 반대하는 서한에 서명하거나 그의 사임을 촉구했던 관리들이나 장관들, 언론인들이 상당수라고 한다. 2013년 국제앰네스티는 정부가 최소 1만명의 정치범과 아페웨르키 대통령의 선거 연기, 헌법 불이행 정책에 반대하는 단체인 G-15를 투옥했다고 보고했으며, 휴먼라이츠워치도 에리트레아 정부가 집중적인 강제 징집 캠페인의 일환으로 수천 명의 징병 기피자들의 친척들을 처벌했다고 보고했다.
사막 지역에 밀집된 수용소에 감방된 정치범들은 감방도 화장실도 없어 불결한 것은 물론이고 너무 많은 사람이 들어차 움직이기는커녕 잠도 옆으로만 잘 수 밖에 없으며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지하 감방에 수감된 죄수들도 상당하다. 게다가 속옷만 입은 채 구금된 죄수들은 화장실도 하루에 한두번만 이용할 수 있고 이런 상황 속에서 감옥에서는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다. 식사는 하루에 빵 2개가 전부에 물을 마시는 것조차 심각하게 제한되어 있다. 감옥에 수감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기소와 재판 없이 갑자기 체포, 구금되었는데 이렇게 강제 구금된 사람들은 공식적으로는 '실종'된 것으로 처리된다.
위아(Wi'a) 군사 캠프 지하 감방에 수감되었던 사람은 국제앰네스티에 "(지하 감방에) 누울 수는 없었습니다. 누워 있으면 피부가 바닥에 달라붙기 때문에 서 있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바닥이 엄청 뜨겁습니다."라고 설명했으며 바렌투 구금센터에 수감된 또 다른 사람은 "방은 가로 2.5m, 세로 3m 정도였고 우리는 33명이었다. 매우 덥다. 문은 닫혀 있고 천장은 약 2m로 낮다."고 증언했고 "온도는 약 50도 정도였습니다. 17세 정도의 소년이 곧 죽을 뻔했습니다. 우리는 말을 할 수 없었지만 문을 세게 두드렸습니다. 그들(간수들은) 우리가 멈추지 않으면 우리 모두를 죽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를 돕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설명한 수감자도 있다. #
고문도 굉장히 잔혹하여 유엔 인권보고서, 앰네스티 등이 에리트레아 난민들의 증언들을 확인한 바에 따르면 몽둥이, 발길질, 채찍질, 쇠창살 등으로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것은 기본에 더러운 물에 머리를 담그거나 고통스러운 자세로 온몸을 묶기도 하고, 손과 발을 등 뒤로 묶고 섭씨 50도 무더위에 맨몸으로 노출시키거나[27] 철로 된 컨테이너 상자에 가두기도 하며 이런 더위 속에서 2km 거리로 떨어진 수용소를 맨발로 걸어야 하는 죄수도 있고 몸에 우유와 설탕을 발라 벌레의 공격을 받도록 하는 형벌도 있는 데다 여죄수들은 성고문까지 당한다고 한다.[28] # 아이러니하게도 에리트레아는 법으로 고문을 금지했다고 한다.
결사의 자유도 미약하여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이전에는 정부 산하기관이나 정부로부터 활동 승인을 받은 4개 종교 단체의 종교 행사를 제외한 대규모 집회는 허락을 받아야 가능했으며 심지어 에리트레아 국민들은 거주지 이전은 물론이고 해외 여행도 아닌 국내 여행을 하려면 서면 허가와 허가증을 필요로 하며 허가증 없이 나라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고국을 탈출하려는 사람'으로 몰려 투옥과 고문을 당하고 있다.[29] 적어도 2009년까지는 에리트레아에서도 국내 여행이 자유로웠던 것으로 보이지만[30] 2010년의 에리트레아의 실태를 다룬 2011년 미국 국무부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부터 에리트레아에서의 국내 여행이 제한된 것으로 보인다.[31] 에리트레아의 국내 여행 제한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물론 병역의무를 수행하는 나이인 50세가 지날 때까지는 해외여행이 전혀 허가되지 않으며 출국 허가를 받을 수 있는 사람도 50세 이상이거나 고위층의 가족 정도에만 국한되어 있고 출국비자 없이 해외여행을 하려는 사람은 징역형을 선고받는 데다 다른 나라에서 송환된 에리트리아 난민과 망명 신청자들은 일반인이면 3~5년, 군인이면 평생 동안 가혹한 환경 속에서 구금된다. 게다가 이렇게 수감된 사람들의 가족들은 대부분 수감된 가족의 행방을 알지 못하며 체포된 후 가족들이 생사 여부를 알려달라고 해도 보안군으로부터 "당신은 요청할 권리가 없다"는 말을 듣는 등 연락이 완전히 두절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32]
여기에 2017년 5월에 익명의 에리트레아인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에리트레아인들의 삶은 '컴퓨터처럼' 프로그래밍되고 구성되며 에리트레아에서 태어난 모든 시민의 삶은 그들이 태어난 시점에서 결정된다고 한다. 에리트레아에서 태어난 어린이들은 고등학교 때까지는 어느 정도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으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모든 에리트레아 사람들은 성별 관계없이 1년 동안 군사 훈련을 받아야 하고 대학 입학 시험에 합격하면 '상대적 자유'를 몇 년 더 연장할 수 있으나 대학교에 들어가지 못하면 후술할 '의무병역'으로 '인간에서 로봇으로 변신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대학교에 들어간 사람들은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의무병역'을 무기한으로 해야 한다고 한다. 에리트레아군 문서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의무병역'도 조선인민군에 준하는 수준으로 열악한 환경이라고 한다.
에리트레아는 외국인의 입국을 제한하는 것은 물론 외국 언론과 인권단체의 접근을 철저하게 차단하는 등 지독한 쇄국 정책을 실시하여 북한 이상으로 내부 사정이 외부에 공개되지 않고 있는데[33] 얼마나 폐쇄적인지 세계은행도 2012년 이후 에리트레아의 GDP를 집계하는 것을 아예 포기했을 정도다.[34] 2006년 9월 초에 에리트리아 정부가 국경 지역에서 UN 평화 유지 임무를 감시하는 활동을 제한하고 UN 직원 5명을 추방한 뒤 UN 자원봉사자를 체포한 것에 대해 UN이 항의한 일도 있었던 데다# 에리트레아 정부는 모든 외교관, 인도주의 단체, UN 직원 및 외국인 관광객은 아스마라를 떠나려면 최소 10일 안에 정부의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할 수 있게 하고 심지어 연료 공급을 차단하여 NGO가 수도 외부로 떠나는 것을 막기까지 한다. 덤으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이후 한동안 해외 여객노선 운항을 중단한 투르크메니스탄 항공과 고려항공도 각각 2022년/2023년 해외 여객노선 운항을 재개했는데 에리트레아 항공은 해외 여객노선 운항을 전혀 재개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이라 에리트레아의 세계의 자유 지수 총점은 2024년 기준으로 3점[35]을 기록하여 북한과 동점이다.[36] 다만 독립 직후 기준으로는 그렇게까지 심각한 독재 국가는 아니었던 모양인데 1993~1994년에는 정치적 권리(이하 PR) 6등급, 시민적 자유(이하 CL) 5등급의 '자유롭지 않은' 국가로 분류되었고 1995~1998년까지는 PR 6등급, CL 4등급으로 '부분적으로 자유로운' 국가로 분류되었지만 1999년~2000년에 PR 7등급, CL 5등급으로 '자유롭지 않은' 국가로 변경되고 2001~2008년에는 PR 7등급, CL 6등급을 기록하더니 2009년부터는 변함없이 PR 7등급, CL 7등급을 기록하고 있다.
- [ 연도별 에리트레아의 세계의 자유 지수 ]
- 2003년 : 15점(PR 3 + CL 12)
2004 ~ 2006년 : 14점(PR 3 + CL 11)
2007 ~ 2009년 : 13점(PR 3 + CL 10)
2010년 : 8점(PR 3 + CL 5)
2011년 : 7점(PR 2 + CL 5)
2012년 : 6점(PR 2 + CL 4)
2013 ~ 2018년 : 3점(PR 1 + CL 2)
2019 ~ 2021년 : 2점(PR 1 + CL 1)
2022 ~ 2023년 : 3점(PR 1 + CL 2)
여기까지 보면 북한과 정말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데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의 독재는 진짜로 북한을 따라한 것이라고 한다. 현숙 폴리 한국 순교자의소리(VOM) 대표의 말에 따르면 에리트레아의 독재 체제는 '에리트레아 대통령이 정치 지도자를 숭배하는 북한 체제를 좋아하고 그것을 자국에서 실행하고 싶어하는 것'이 그 원인이라고 한다. 출처 다만 지도자에 대한 우상화가 없다는 것과[37] 정치범의 가족에까지 법적인 연좌제를 적용해 수용소에 가두지 않는 것[38], 모든 어린이들부터 시작하여[39] 노인이 되기까지 강제로 '근로단체'에 가입시켜 단체생활과 비교육적인 세뇌교육을 강요하지는 않는다는 것, 수도에 특별히 선별된 인물만이 살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 보여주기식이 아닌[40] 실질적으로 국민들이 믿을 수 있는 종교가 있다는 것만큼은 북한보다는 그나마 낫다고 할 수 있다.[41]
다만 이런 상황과는 완전히 정반대로 에리트레아는 사실상의 사형 폐지국이라고 한다.[42] 에리트레아에서는 1989년에 마지막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에리트레아가 1993년에 독립했으니 사실상 독립 이후 사형 집행을 한 적이 전혀 없으며 형식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도 한 명도 없다고 한다. 물론 수용소에서 고문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사망한 사람은 상당히 많을 가능성이 높은데 실제로 2008년 기준으로 에리트레아의 비밀 수용소 중 한 곳인 에이라에이로(Eiraeiro) 형무소에 2001년 이래로 수감된 35명 중 무려 15명이 사망했다고 하며[43] 사법 절차가 생략된 공권력의 초법적 살인도 만연한 상황이라 사실상의 사형 폐지국인 게 전혀 의미가 없다.
물론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의 학정에 대한 에리트레아인들의 저항 운동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라 유럽에 정착한 에리트레아인들은 북한이탈주민들과 마찬가지로 단파 라디오나 인터넷으로 모국에 반독재 방송을 내보내거나[44] 서방에 에리트레아의 실상을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으며 에리트레아 국내에는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독재정권에 대항해 사막과 오지 산간 지대에서 활동하는 소규모의 반정부 게릴라 세력들도 존재한다.
심지어 2013년에는 일부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정확히는 2013년 1월 21일에 아스마라에서 100~200명의 군인들이 정보부를 습격한 후 국영 TV 방송국 EriTV의 본부를 점거하며 1997년 헌법을 시행하고 정치범과 포로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발표했는데 메시지가 송출되는 도중에 독립전쟁의 영웅이던 살레 오스만 대령이 이끄는 대통령궁과 공항을 수비하던 군인들이 쿠데타를 '평화롭게' 진압했다고 한다. 다만 영국 주재 에리트리아 대사인 테스파-마이클 게라투(Tesfa-Michael Gerahtu)는 쿠데타 시도가 조작된 것이며 어떠한 '불안'도 없었다고 주장했으며, 에리트레아 정부는 처음에는 쿠데타 사실을 부인하다가 2월 10일 아페웨르키 봄인이 직접 "(반란을) 걱정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답하며 쿠데타 사실을 간접적으로 인정했으며, 침묵한 이유도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무런 근거도 주지 않기 위해'라고 해명했다. 영어 위키백과 문서
2017년에는 아스마라에서 문자 그대로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의 퇴진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가 열리기도 했다.[45] 아스마라의 학생들은 독재와 열악한 생활 조건, 가혹한 노동에 반대하며 2017년 11월 1~7일까지 수백 명 규모의 시위를 열었는데 시위대는 반정부 플래카드와 슬로건을 이용해 더 나은 생활 조건과 독재자의 퇴진을 요구했고 대학에 집결하면서 도시 전역에서 소규모나마 시민들의 집회가 일어났다. 물론 에리트레아 경찰은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는데 학생들을 곤봉으로 구타하거나 최루탄을 투척한 것을 넘어 실탄을 발포하며 시위 첫 날에만 28명의 시위대를 살해했고 시위가 끝날 때까지 매일 시위대에게 실탄을 발포했다. 영어 위키백과 문서의 제목이 연도 표기 없이 그냥 '에리트레아 봉기(Eritrean uprising)'인 것을 보면 이 시위가 에리트레아 역사상 최초의 반정부 시위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46]
2020년 1월 31일에 에리트레아 남서부의 금광에서 산사태가 일어나 최소 16명이 사망했다.#
에리트레아 정부도 해외에서 자국의 학정이 비판받는 것을 어느 정도 인지한 모양인지 북한과 비슷하게 자국에서의 인권 탄압 폭로들을 전부 '망명자들의 날조'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2015년 6월 9일에 UN 조사위원회가 에리트레아에서의 인권 탄압에 대해 다룬 보고서를 작성하자 에리트레아 정부는 교육부와 외무부 명의로 성명을 발표해 에리트레아에서의 인권 탄압 사례들이 '평화롭고, 안정되고, 조화롭고, 인간 개발에 초점을 맞춘' 나라인 에리트레아에 대한 '악랄한 비방 및 무고', '완전히 근거가 없고 가치가 없는 거친 주장', '극단적인 비난과 외설적인 과장법' '인권을 훼손하는 냉소적인 정치적 비극'이라고 적반하장격으로 주장한 것도 모자라 '에리트레아에 대해 긍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을 침묵시키려는 이러한 비난과 비열한 시도는 에리트레아와의 점점 더 생산적인 국제 관계를 방해하기 위해 시간과 경쟁하려는 투명한 시도', 심지어 '이러한 터무니없는 주장 뒤에 숨어 국가를 불안정하게 만들 구실을 찾는 데 사용할 세력이 있다'는 황당무계한 주장까지도 했다. # 원문 2024년 1월 29일에도 에리트레아 정부 사이트에서 주님공현축일에 그리스도교도와 무슬림이 참여한 것을 들어 "이러한 조화와 종교적 관용은 에리트레아를 제외하고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종교의 화합이 에리트레아에만 있는 것마냥 주장하기도 했다.[47] #
2024년 8월 19일 베르하네 아브레헤 전 재무장관[48]이 옥사했다. 유가족들은 아브레헤의 사망 소식만을 통보받을 뿐이었고, 시신조차 인도받지 못했다고 한다. #
4.1. 참고 자료
미국 국무부가 작성한 2022년 에리트레아 인권 보고서2024년 에리트레아 세계의 자유 지수 해설
에리트레아: 왜 아프리카의 북한이라고 불리는가?
4.2. 난민 문제
이렇듯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가 북한 수준의 학정을 일삼는 데다 나라가 워낙 빈곤하다 보니 이를 견디지 못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도망쳐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월스트리트 저널이 보도하기를 유럽연합 통계청인 유로스탯(Eurostat)의 자료를 인용해 2012년부터 2015년 중반까지 유럽으로 탈출해 보호를 요청한 에리트레아인이 전체 인구의 2.13%에 이른다고 할 정도인데 이는 에리트레아인 50명 중 1명 이상이 난민을 신청한 것으로 이 수치는 이는 오랜 내전에 시달리며 난민 신청 최우선 순위로 여겨지는 시리아(1.25%)보다 훨씬 높은 비율이다.[49]2014년 기준으로 지중해를 통해 유럽으로 향한 난민의 18%가 에리트레아 출신이었는데 이는 당시 내전과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압제에 시달리던 시리아(31%) 다음으로 높은 비중이었다. 시리아, 소말리아, 아프가니스탄 등 당시 난민 수 상위권을 찍은 국가들은 모두 내전을 겪었다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에리트레아는 이들 중 내전을 겪지 않는 유일한 나라였다.[50] 2014년 기준으로 에리트레아 국민들은 매달 약 5천 명이 국경에서 발각되는 즉시 사살되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웃 수단이나 에티오피아로, 멀리는 리비아를 통해 유럽으로 탈출했는데 그렇게 2015년까지 에리트레아에서 35만 7천~40만 명, 즉 전체 인구의 9 ~ 12%가량이 탈출했다고 추정된다. 출처, #
에리트레아 축구 선수들이 망명 신청을 하기도 했다. 에리트레아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은 2015년 10월 13일 보츠와나에서 월드컵 예선전을 3대 1로 패배했는데 이들이 그대로 망명 신청을 했을 정도로 망명이 아주 빈번하며 이외에도 많은 에리트레아 선수들이 해외 경기가 끝난 뒤 망명을 요청하고 있다. 2012년 우간다에서 18명이 망명신청을 했고 2009년 케냐에서 12명, 2007년 앙골라에서 6명이 망명을 신청했다. 거기에 2012년 10월 2일에는 북한군의 이웅평과 유사하게 에리트레아 공군 고위 장교 2명이 에리트레아 공군[51]의 유일한 고급 비행기였던 대통령 전용기 Hawker Beechcraft King Air 200을 몰고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을 요청한 적까지 있다. 2009년 이후 60명 이상의 선수가 국가대표 선수 신분을 이용해 해외에 경기하러 가서 망명을 신청했으며 가디언지에 따르면 해외에서 망명하려는 선수들이 많기 때문에 에리트레아 축구 국가대표팀이 2026 FIFA 월드컵 경기 예선전을 기권할 지경이라고 한다. #
에리트레아 정부는 북한과 마찬가지로 고국을 탈출하려는 난민이 적발되면 즉시 현장에서 총살하는 것이 원칙이어서 탈출하는 국민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고 있는데 이런 상황을 무릅쓰고 겨우겨우 해외로 탈출한 에리트레아의 난민들 중 일부는 수단과 이집트의 인신매매범들에게 납치되어 수단과 이집트의 고문 수용소로 끌려간 후 고문과 강간, 강제 노동은 물론이고 아예 강제로 전화선을 통해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자신이 고문당하면서 지르는 비명소리를 그대로 듣게 하는 만행의 피해자가 되기도 했다. 이들은 고문을 피하기 위해 몸값을 지불하기도 하는데[52] 이들 중 일부는 고문 중에 목숨까지 잃는 등 참혹한 꼴을 당하고 있다. #1 #2 에리트레아 난민들의 인신매매 피해를 담은 휴먼라이츠워치의 2014년자 보고서
2023년에도 에리트레아 난민들의 비극은 계속되었다. 2023년 4월 기준으로 수단에 머물렀던 에리트레아 난민들은 약 136,000명으로 집계되었다. 하필이면 이때 수단에서 쿠데타와 내전이 터져 에리트레아인들은 살기 위해 남수단의 공항과 대학교로 피난해 수천 명 규모의 난민촌을 만들어 살고 있으며[53] 주바로 비행기를 타려고 해도 남수단 정부가 거부하기 때문에[54]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
5.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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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아스마라의 하르네트 거리 |
에리트레아의 정치 정보 | ||
부패인식지수 | 21점 | 2023년, 세계 161위 |
언론자유지수 | 16.64점 | 2024년, 세계 180위 |
민주주의지수 | 1.97점 | 2023년, 세계 152위 |
에리트레아의 독재자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는 민주정의인민전선(PFDJ) 일당 독재체제를 유지하면서 다당제 도입을 계속 연기하고 있으며 2001년 12월 실시하기로 약속했던 다당제 국회의원 선거도 무기한 연기했다.[55] 따라서 국회를 통해 간선으로 선출되는 대통령 선거도 계속 미루어지고 있어 집권층 내부에서도 민주주의 개혁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참고로 여기서 일당독재 체제라는 것이 북한, 중국처럼 구색정당이라도 소규모로 두며 다당제 행세하기가 아니다. 나치 독일처럼 문자 그대로 합법정당이 민주정의인민전선 하나밖에 없다.
선거는 1997년, 2002년, 2003년 지방선거 이후에는 명목상으로도 아예 시행하지 않는다. 1997년에 치러지기로 약속된 대통령 선거도 무기한 연기되었다. 공화국 중에서도 이렇게 장기적으로 선거를 치르지 않는 나라는 전무하다시피 한데, 에리트레아는 보여주기식 선거조차 전혀 하지 않는다. 다만 1962년 이후의 브루나이[56]와 1964 ~ 1980년까지의 우간다, 1964~81년까지의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1973~87년까지의 에티오피아도 선거를 전혀 치르지 않긴 했지만 그 중 브루나이는 전제군주정이고 나머지 셋은 군정[57]의 영향이 크단 것을 감안하면 공화정인데도 선거를 전혀 치르지 않는 에리트레아의 질이 압도적으로 나쁘다.
유엔인권보고서에서는 에리트레아 정권이 전체주의적인 감시통제망을 가동함으로써 "아무도, 심지어는 가족도 못 믿는" 사회가 됐다고 지적했으며 에리트레아에서는 사람들끼리 서로 감시하며 정보 기관에 고자질하는 풍토가 만연해 있다고 한다.
에리트레아의 정부형태는 대통령 중심제로 1993년 4월 독립에 대한 국민투표 실시 후 구성된 과도정권이 집권하고 있는데 에리트레아 의회는 150석 정원의 단원제 국회를 채택하고 있으며 PFDJ가 유일한 정당이다. 세분하자면 75석만 PFDJ이고 나머지는 1997년에 제헌의회 의원들이 간접 선출한 무소속 임명석이다. 거기에 사법부는 행정부에 예속되어 대통령이 모든 판사의 임명과 해임을 담당하는 것은 기본에 판사들도 대부분이 군인이고 재판은 지방법원 - 고등법원의 2심제이기 때문에 대법원은 존재하지 않으며 법원 자체도 가장 부패하고 비인도적인 법원 시스템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에리트레아에서 의회는 정책 토론의 장을 제공하지도 않으며 국회의장도 1993년부터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대통령이 겸임하고 있고 당연히 삼권분립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더구나 1997년에 에리트레아는 명목상으로는 다당제 민주주의 체제를 위한 헌법이 비준되기도 했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부정부패도 심각한데 에리트레아의 2022년 부패인식지수는 22점을 기록하여 수단 공화국과 함께 180개국 중 162위를 기록했다. 이는 에리트레아의 여당과 정부, 군대가 강력한 권력 집중과 낮은 수준의 투명성으로 '하나의 권력집단'을 형성한 것에서 기인한데 에리트레아에서 대부분의 관공서의 서비스는 뇌물을 요구하는 데다 국가는 경제에 대한 민간 투자를 거의 허용하지 않으면서 공무원에 대한 임금도 극도로 낮게 잡아 부패를 조장하고 있고 에리트레아의 사업 커뮤니티는 주로 경제 관리들의 개인 측근, 집권당 고위 관리, 안보 및 군사 기관의 고위 관리들의 후원을 즐기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본인도 제창한 소위 '부패와의 전쟁'은 정적들과 반대파들을 제거하기 위한 용도로만 쓰이고 있다. 심지어 에리트레아는 유엔 반부패 협약을 비준도, 서명도 하지 않은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라고 한다.[58]
6. 경제
동아프리카의 경제 | |||||||||||||||||||||||||||||
[[에리트레아#경제| 에리트레아]] | [[지부티#경제| 지부티]] | [[에티오피아#경제| 에티오피아]] | [[소말리아#경제| 소말리아]] | ||||||||||||||||||||||||||
[[케냐/경제| 케냐]] | [[탄자니아#경제| 탄자니아]] | [[세이셸#경제| 세이셸]] | [[코모로#경제| 코모로]] |
에리트레아 정부는 2006년 한 공사장에서 노동자 한 명이 숨진 것을 구실로 모든 민간 건설사들의 사업 인허가를 취소한 뒤, 집권당과 중앙정부가 운영하는 건설사들이 이들을 헐값에 인수함으로써 집권당과 정부 소유의 건설사들만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유엔 인권보고서는 이들 건설사들이 에리트레아에 진출한 외국 건설사들에 징집 인력을 '대여'해주고 외국기업이 노동자들에게 지급하는 급여를 가로채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계 기업들도 에리트레아에 진출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에리트레아는 독립 이전에도 사막화와 인구 증가로 기근이 심각했고 독립 전쟁을 겪는 와중에 경제난이 더 심화되어 지독하게 가난하다. 실질적으로 에리트레아는 현재도 인구의 70%가 농업에 종사하는데도 식량의 70% 가량을 수입과 원조에 의존할 정도로 가난하고 공업화도 제대로 되지 않았으니 일자리도 없는 암울한 상황이다. 그나마 2011년 이후에는 국토에 매장된 구리, 금, 화강암, 대리석, 탄산칼륨 같은 자원을 이용해 한동안 빠르게 경제성장을 해나갔다고는 하지만 적도 기니와 비슷하게 고위층의 부정부패 때문에 이 부들이 국민들에게는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고 얼마 안 가 이 경제성장도 가뭄으로 흐지부지해졌다.
이 때문에 에리트레아는 1인당 GDP가 2023년 IMF 통계 기준으로도 고작 $715로, 194개국 중 181위를 차지하여 콩고민주공화국, 차드, 북한, 니제르[59]와 비슷한 수준의 세계 최악의 최빈국 중 하나로 남아 있으며 취약국가지수도 2023년 기준으로 120점 만점에 94.5점으로 179개국 중 19위의 '위험'군에 들어간 명백한 취약국가다. 특히 취약국가지수 18위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이고 20위가 1인당 GDP가 세계에서 가장 낮은 나라로 유명한 부룬디란 것을 감안하면 에리트레아의 상태가 얼마나 열악한지 알 수 있다.
7. 군사
자세한 내용은 에리트레아군 문서 참고하십시오.8. 문화
동아프리카의 문화 | ||||
남수단 | 레위니옹 | 르완다 | 마다가스카르 | |
마요트 | 말라위 | 모리셔스 | 모잠비크 | |
부룬디 | 세이셸 | 소말리아 | 소말릴란드 | |
소코트라 | 에리트레아 | 에티오피아 | 우간다 | |
지부티 | 케냐 | 코모로 | 탄자니아 |
에리트레아의 전통 춤을 추는 사람들 |
8.1. 민족과 언어
에리트레아에는 다양한 민족이 살고 있는데 티그리냐 50%, 티그레 및 쿠나마 40%, 아파르 4%, 사호 3%, 기타 3%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에리트레아 남부 고원지대에는 티그리냐어를 쓰는 그리스도교인, 북부 고원지대와 동부•서부 구릉지대에는 티그레어를 쓰는 무슬림들이 살고 있으며, 티그리냐어를 쓰는 티그리냐인은 에리트레아 최대 민족이지만 남쪽 국경 에티오피아의 티그라이 주에 더 많이 거주한다. 이웃 부족들이 반농반목에 가까운 것과 다르게 이들은 농업 위주로 생계를 유지한다. 티그레어를 사용하는 무슬림들은 대부분 목축업을 하고 있다.
해안 사막평원에서는 사호어와 아파르어, 서부 평원지대에서는 베자어와 나일 제어를 사용한다. 해안과 수단 국경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아랍어, 티그레어, 아스마라 주변 사람들은 식민지 시대의 영향으로 이탈리아어를 쓰고 있다.
널리 쓰는 언어는 티그리냐어와 아랍어인데 티그리냐어도 아프리카아시아어족 셈어파 즉 아랍어와 같은 어족, 같은 어파에 속하는 친족 관계의 언어다. 영어도 널리 쓰이고 있다.
전 식민모국인 이탈리아의 흔적은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남았다. 고령층에 이탈리아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고 카페 문화가 잘 발달되었다. 수도에는 한때 '작은 로마'라고 불릴 정도로 이탈리아인들이 많이 거주했는데 20세기 초에 이들이 지은 아르데코 건축물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유럽의 보수적인 건축의 영향권 밖에서 독특한 양식을 창출했음이 높게 평가받았다. 이탈리아계 에리트레아인들도 거주한다.
8.2. 종교
무슬림들이 많이 살고 있지만 다수는 아니다. 다수의 티그리냐족이 에리트레아 테와히도 정교회를 믿으며 인구의 50%를 차지한다. 다음으로는 가톨릭이 12%를 차지해 그리스도교 인구가 총 62%이고 수니파 무슬림[60]이 36%를 차지한다.에리트레아에서는 오순절교회나 복음주의 교회 신도들이 감금을 당할 정도로 개신교에 대한 종교적 박해가 심하며, 그리스도교 박해 지역의 그리스도교인들이나 개신교 박해지역의 개신교 신자들을 지원하는 국제선교단체인 오픈도어(Opendoor)에서도 에리트레아를 개신교 박해 지역으로 분류한다.
8.3. 스포츠
에리트레아 축구 국가대표팀 문서를 보면 군사와 같이 축구도 최약체임을 알 수 있다.사이클 강호다. 이탈리아의 식민지 시절인 1910년에 자전거가 에리트레아에 소개된 뒤 사이클 팀이 생겨났고 많은 선수들을 배출했다. 가장 유명한 선수로는 다니엘 테클라헤이마놋이라는 선수로 투르 드 프랑스, 지로디탈리아, 부엘타 아 에스파냐 등등의 경기에서 산악왕 저지를 차지한 적이 있었다. 에리트레아 수도 아스마라 자체가 해발 2,300m에 위치한 고지대라 지구력이 훌륭한 선수들이 많은 편이다.
2022년 들어 사이클로 다시 화제가 되었는데 에리트리아 출신인 비니암 기르마이가 좋은 성적을 거뒀다. 기르마이가 지로에서 스테이지 1위를 차지하자 에리트레아 전국에서 난리가 났다고 한다. 그리고 2024년 투르 드 프랑스 3스테이지에서 1위를 차지하며 아프리카 출신 흑인 선수로는 첫 투르 스테이지 우승과 포인트 저지 획득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뒤이어 8스테이지에서도 1위를 차지하여 2024 투르 드 프랑스의 스프린터 중 최고의 성적을 거뒀다.
9. 여행
대한민국 국민은 사전 비자를 발급받아야 갈 수 있는데 대한민국에는 대사관이나 영사관도 없으므로, 일본 도쿄에 있는 에리트레아 대사관에서 비자를 발급받아야 한다. 일본의 에리트레아 대사관 홈페이지의 사증 페이지(일본어), (영어)수도 아스마라에 '아스마라 국제공항'이 있는데 한국에서 이 공항으로 가는 직항 노선은 없다. 두바이 국제공항을 거쳐 새벽 3시 40분[61]에 출발하는 플라이두바이 항공편을 이용하거나 카이로 국제공항에서 이집트항공을 이용하여 환승하는 방법으로 갈 수 있다.
'아프리카의 북한'이라고 불리는 나라인데 의외로 북한과 달리 가이드를 동반하거나 계획된 경로로 돌아다니는 것이 의무적이진 않지만 수도 아스마라 외 지방으로 가려면 20 낙파를 내고 외국인 여행 허가증을 발급받아야 한다.
10. 외교
자세한 내용은 에리트레아/외교 문서 참고하십시오.11. 기타
-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대통령이 너무 오래 집권해서 현재 에리트레아는 남수단과 함께[62] 독립 이래 지도자가 단 한 명뿐인 유이한 나라다. 에모말리 라흐몬이 1994년부터 장기집권하는 타지키스탄도 라흐몬 이전에 대통령이 2명이나 있었고, 1991년 독립 이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가 1994년부터 유일한 대통령으로 집권하는 벨라루스도 루카셴코의 전임으로 스타니슬라우 슈시케비치 최고위원회 의장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기록이다.[63] 물론 이 둘도 사람인 만큼 언젠가는 사망할 테니 그 전에 에리트레아나 남수단이 멸망하지 않는 한 이 기록도 사라질 것이다.
- 2022년 기준으로도 에리트레아의 인터넷 사용자 수는 25만 명 미만이고 인터넷 사용률은 고작 6.8%를 기록하면서 전세계 230여개국 중 뒤에서 3위를 기록했다.[64] 참고자료 에리트레아는 2024년 2월 기준으로 인터넷 IP 수가 5120개로 정규 국가 중에서는 북한(1,536개)에 이어 2번째로 적다. 오세아니아 최빈국 키리바시가 5,376개, 인구가 2만 명 미만인 팔라우가 6,912개, 내전 중인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이 8,192개, 인구가 10,000명 남짓인 투발루가 8,704개로 에리트레아의 뒤를 따르며 IP 주소가 10,000개를 밑도는 단 6개뿐인 나라로 기록되었다.[65] 참고자료 그렇게 국민들이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이 힘든데도 에리트레아는 반정부 의사 표현을 막기 위해 주기적으로 SNS 접속을 차단하고 인터넷 카페를 폐쇄하고 있다. 또 에리트레아의 통신 사업자인 에리텔(EriTel)은 국제 통신 사업자와의 제휴 없이 독립적으로 운영되므로 국제 전화가 로컬 네트워크에 연결되지 않고 있으며, 관광객에게는 SIM 카드가 발급되지 않으며 발신 전화 및 메시지가 제한된다. 인터넷 접속은 소수의 인터넷 카페와 주요 호텔 로비에서만 가능하고, 그것도 간신히 이메일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속도가 굉장히 느리다. 에리트레아를 방문한 관광객들은 에리트레아를 '디지털 디톡스의 목적지'로 평가했을 정도,
- 휴대전화 보급률도 세계 최악이다. 2022년 1월 기준 에리트레아의 휴대전화 보급률은 고작 22.7%인데, 어느 정도냐면 북한(27.4%), 남수단(28.4%), 중앙아프리카 공화국(33.1%)보다도 낮다.[66]
- 철도는 수도 아스마라와 항구도시 마사와를 잇는 1개 노선 118km이 전부이며 역 수는 13개로 이탈리아 식민지 시절에 부설됐다. 그나마도 1975년 폐선되었다가 핵심적인 구간인 아스마라~마사와 구간만 2003년에 재개통했다. 궤간은 950mm 협궤이며 무려 아직도 증기기관차도 다닌다. 정규운행이 없고 전 열차가 부정기로 운행한다.
- 자일대우버스차량이 수도 아스마라에서 다닌다.
- 러시아의 작가 알렉산드르 푸슈킨의 외증조부인 아브람 간니발이 에리트리아 출신 흑인으로 추정된 적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간니발의 고향을 카메룬 근방으로 추정한다.
- 청소년 소설 《커피우유와 소보로빵》은 독일로 이주한 에리트레아 난민이 차별받는 모습을 다루고 있다. 참고로 이 책은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가 본격적으로 악명 높은 독재자가 되기도 전이던 1996년에 출판되었는데 이를 통해 에리트레아는 독립 초기부터 난민들이 많았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 아프리카에서는 유일하게 크리스마스를 2번 보내는 나라다.
-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코로나 백신 접종을 하지 않은 나라다. 하다못해 '공식적으로는' 코로나 19 확진자가 없는 유일한 나라인 투르크메니스탄도 2021년 7월부터 코로나 백신 접종을 의무화했으며 북한조차 2022년 9월 말에 접경 지역 거주자들에게 백신 접종을 시작한 것과는 정반대다. 결국 2023년 5월 5일 세계보건기구(WHO)가 엔데믹을 선언하면서 에리트레아는 코로나 백신 접종을 하지 않은 유일한 나라로 남게 되었다.
- 에리트레아에는 샤리아 법원도 존재하는데 샤리아 법원은 이슬람 가족 및 공동체 내의 가족, 상속 및 결혼 문제에 대한 관할권을 가지며 이슬람 법 원칙을 적용하여 평결을 결정한다고 한다.[67]
- 2012년 개봉된 미국의 영화 The dictator의 배경이 되는 국가 와디야는 에리트레아 위치에 있다. [68]
-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뉴캐슬 유나이티드에서 뛰고 있는 알렉산데르 이사크가 에리트리아 국적을 가지고 있다. 다만 선수는 스웨덴 국가대표로 활약중이다.
- 세계화된 현대 지구에서 한국과 매우 멀리 떨어져 있고 인지도도 거의 없는 웬만한 아프리카 국가들이나 중미 소국들에도 한국 교민들이 소수 있는 게 보통인데, 에리트레아에는 한국 교민은커녕 한국인 체류자조차 단 한 명도 없다. 사실 이전까지는 한국인 체류자도 어느 정도 있었고 심지어 독립 초반에는 한국인 교민도 1명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에티오피아와의 국경분쟁이 악화되며 교민들 대다수가 철수하고 마지막 남은 에리트레아 교민도 개신교 전도를 하다가 2009년 8월에 추방되면서 2009년 이후에는 교민은 물론이고 체류자조차 2019년의 1명 빼면 전무하다. 2023년 재외동포현황 통계자료 기준 한국 국적자(일시체류+영주권자)와 외국국적 재외동포를 모두 포함해도 한국인이 0명인 나라는 단 12개국[69]이며, 이들 중 하나가 바로 에리트레아인데, 같이 언급된 국가들이 거의 모두 한국이랑 멀리 떨어져 있는 작디작은 섬나라에 소말리아와 시리아는 아예 극심한 내전 상태라는 것을 감안하면 에리트레아의 폐쇄성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
[1] 티그리냐어[2] 아랍어[3] 1984년 이래 인구조사가 실시된 적이 없어 정확한 인구는 불명. UN은 에리트레아 인구를 360만 명으로 추산하는 반면# CIA 월드 팩트북은 620만 명으로 추산하는 등# 추정 인구에 대한 편차가 매우 크다.[4] 티그레어, 아파르어 등이 있다.[5] 후술하겠지만 에리트레아에 법적으로 인정받는 공용어는 없다. 다만, 이들 언어는 사실상의 공용어로 인정받는다.[6] 북한과도 비교될 정도로 심한 독재국가인데 점수는 의외로 최하위권이 아니다.[7] 에리트리아라고도 부른다.[8] 물론 에티오피아와의 전쟁에 대한 기억이 많이 남아 있는 에리트레아 국민들 중애는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전쟁을 일으킨 에티오피아에게 자국 항구를 빌려줄 수 없다며 반대하는 이들도 있다. 이 때문인지 에리트레아와 외교적으로 관계개선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에티오피아가 자국 항구를 빌리는 것에 대한 에레트레아 국민들의 항구 사용 반대 여론을 도저히 이기지 못한 에티오피아는 아덴만과 인도양의 해로를 통한 해안 접근권 확보 방안을 모색하여 아덴만 해역을 맞댄 소말릴란드에게 접근하기 시작했고 2024년 베르베라와 사일락 등 소말릴란드 항구들을 빌려 사용하는 조건으로 동북쪽에 이웃한 아프리카의 미승인국가였던 소말릴란드를 독립국가로 승인했다.[9] 1990년대 말 이 전쟁을 다룬 국내 언론에 따르면 에티오피아 내부에서는 "국민들은 굶어 죽는데 경제나 살릴 것이지 무슨 전쟁이냐"며 정부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고 전했다.[10] 참고로 앰네스티는 에리트레아의 독립에 대해 "격동의 지역 역사에 새로운 장이 열렸습니다. 이제 과거와 단절하고, 인권 보호를 미래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많은 고통을 겪은 사람들에게 휴식과 희망을 줄 수 있는 진정한 기회가 왔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안타깝게도 이들의 소망은 현재까지도 전혀 실현되지 않았다. #[11] 당연한 말이지만 그가 가명을 쓴 이유는 자신의 신원이 밝혀지면 에리트리아 정부가 가족을 처벌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12] 아페웨르키라는 표현은 옳지 않은 표현이다.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에서는 별도의 성씨를 사용하지 않고 본명과 부칭이 덧붙는 작명 방식을 사용하기 때문이다.[13] 그나마 불행 중 다행히 에리트레아는 북한과는 달리 에티오피아 외에는 다른 국가들과 분쟁을 겪지도 않고 의도적으로 도발을 하지도 않으며 에티오피아와의 갈등도 에티오피아 전 독재자 멜레스 제나위가 압박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측면도 없지 않다.[14] 투르크메니스탄은 여기 나열된 국가 중에서는 그나마 가장 살 만한 곳이다. 넘쳐나는 자원을 이용해 걸프만 산유국에 준하는 수준의 과감한 복지정책을 펼치고 있으며(다만 이조차 경제난으로 옛말이 되고 있다.) 1999년에 사형 제도를 폐지한 것은 물론이고 구색정당도 2개 만들어 다당제처럼 보이게 하는 등 어느 정도 해외 눈치는 보고 있다. 물론 겉으로는 피를 안 흘린다고 해도 정치범수용소의 실태가 북한에 준하는 수준이고 무엇보다 사회적 억압이 국내 여행 허가제를 실시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 빼면 에리트레아와 동급이다.[15] 투르크메니스탄도 북한에 근접한 수준의 독재국가로 간주되나 세부적으로 보면 에리트레아보다는 양반이다.[16] 케냐 출신 유튜버도 쓰는 표현이다. #[17] 이와 비슷하게 북한의 김정일도 생전에 "부르주아 어용학자들은 입법권과 행정권, 사법권을 분립시키는 것이 민주주의의 징표인 듯이 묘사하지만 사실상 3권분립은 봉건전제주의를 반대하여 부르주아가 들고 나온 주장의 하나입니다."라는 말을 남기면서 3권분립 자체를 부인했다. 다만 이는 김정일만이 아닌 마르크스주의 자체의 특징이다.[18] 이들 중 절대다수가 장관을 역임한 적이 있거나 독립전쟁 과정에서 에리트레아 인민해방전선(EPLF)에 가입하고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적이 있다.[19] 이들은 '국가 안보와 주권에 반하는 범죄' 누명을 쓰고 구금되었는데, 수감된 사람 중에는 한국으로 치면 신흥무관학교 교장 포지션인 EPLF 간부 학교 교장 출신의 하일레 볼덴세(Haile Woldense, 1946~), 에티오피아군과의 전투를 여러 번 주도하며 에리트레아의 독립을 이끈 페트로스 솔로몬(Petros Solomon, 1951~), 전 외무부 장관의 부인 아스티에 페세하지온(Aster Fissehatsion, 1956~2003. 남편도 같이 구금되었다)도 있었다. 참고로 나머지 3명은 미국으로 망명하고 1명은 후에 복권되었으나 2010년까지 수감된 11명 중 6명이 사망했고 나머지도 심각한 중병에 걸린 상황이었다고 하며 현재까지 근황은 불명이라 생존한 5명은 사실상 생사불명 상태다.[20] 북한도 평양에 해외 언론사 지국을 두는 것은 허용하고 있다. #[21] 에리트레아는 2007 ~ 2016년까지 9회 연속으로(참고로 2012년 언론자유지수는 발표되지 않았다) 언론자유지수 최하위를 기록했다. 북한의 최다 연속 언론자유지수 최하위 기록이 2002 ~ 2006년까지 5회란 것을 감안하면 에리트레아의 언론 실태는 여간 심각한 수준을 넘어선 셈이다. 물론 2002년에 조사를 시작한 이래 언론자유지수 최하위를 차지한 나라 중 북한/에리트레아가 아닌 나라는 2019년에 최하위를 차지한 투르크메니스탄 1개국밖에 없다.[22] 그 뒤로는 시리아(175위), 투르크메니스탄(176위), 이란(177위), 베트남(178위), 중국(179위), 북한(180위)밖에 없다. 다만 이는 2022년에 언론자유지수 산정 기준이 바뀌었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23] 투르크메니스탄은 175위, 북한은 177위를 기록했다.[24] 탄압 대상에는 성공회도 포함된다. 가장 많이 탄압당하는 교단은 오순절파와 감리교다.[25] 대다수가 기소, 재판도 없이 구금되었다.[26] 에리트레아 인구는 2021년 기준으로도 362만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인구 비율로 따지면 전체 인구 중 무려 0.3 ~ 0.6%가 정치범인 셈이다.[27] 이 때문에 화상을 입어 한쪽 손을 절단한 사람까지 있다고 한다.[28] 에리트레아가 반체제 인사들에게 가하는 고문들은 에티오피아의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정권이 반체제 인사(에리트레아인 독립운동가 포함)들에게 사용한 고문들을 '복제'한 것이고 한다.[29] 이게 얼마나 심각한 거냐면 전국민에 대한 국내 여행 통제 제도는 백두혈통,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이디 아민, 폴 포트 같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로 꼽히는 자들과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처럼 억압적인 통치를 좋아했던 독재자 정도만 실시하던 제도였으며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단체인 탈레반과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조차 국내 여행을 하려면 허가를 받아야 가능하게 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응게마와 니야조프는 그조차 일부 지역에 한정된 조치였다.[30] 2009년의 에리트레아의 실태를 다룬 2010년 미국 국무부의 보고서에는 '법과 시행되지 않은 헌법은 이동, 해외 여행, 이민 및 본국 송환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실제로 이러한 권리 중 일부를 제한했습니다.' '시민들은 일반적으로 국가 내에서 자유롭게 여행하고 거주지를 변경할 수 있지만 정부는 특히 수단과 에티오피아 국경을 따라 국가 내 일부 지역으로의 여행을 제한했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에리트레아가 에티오피아와 겪는 국경 분쟁을 생각하면 국경 인근 여행 통제는 어느 정도 정상참작이 가능하다.[31] 이 보고서에는 '법과 시행되지 않은 헌법은 이동, 해외 여행, 이민 및 본국 송환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실제로 이러한 모든 권리를 제한했습니다.' '시민들은 국내 대부분의 여행과 거주지를 변경하려면 정부의 허가가 필요했습니다. 정부는 국경 지역으로의 여행을 엄격히 제한하고 국경 근처 마을로 가는 버스 서비스도 제공하지 않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32] 에리트레아에서 독립 직후인 1991년 7월 17일부터 에티오피아와의 관계로 추정되는 이유로 재판도 없이 구금된 케렌(Keren)시의 판사 모하메드 메라넷(Mohamed Meranet)은 1997년까지 아스마라의 카르켈레(Karchele) 교도소에 구금된 후 알 수 없는 장소로 옮겨지고 2016년 기준으로도 생사조차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33]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국가로 알려진 북한은 그래도 세계적으로도 인지도가 높은 나라인 만큼 국제적으로 인권 실태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는 데다 북한 내부의 소식통들을 매일같이 전달하는 언론들 덕분에 역설적으로 인권 실태가 어느 정도 소상히 알려진 편인데 에리트레아는 세계적으로 인지도는커녕 관심을 가진 사람도 북한과 비교하면 없다시피하고 해외 언론인들도 제대로 입국하지 못하니 인권 실태가 제대로 알려질 리가 만무하다. 덤으로 국가 자체가 기행으로 잘 알려진 북한과 독재자들이 개그맨이랑 다를 바 없는 행각을 벌인 유명한 투르크메니스탄과는 정반대로 에리트레아의 독재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는 대신 엄격하고 지루하다는 인상까지 주기에 대중들이 흥미를 가지지 못할 수밖에 없다.[34] 참고로 세계은행이 이렇게 장기간 동안 국가 GDP 통계를 포기할 때는 나라가 혼란상에 빠져드는 경우이다. 대표적으로는 1975~1992년의 캄보디아와 1978~1979년의 적도 기니, 1982~2001년의 아프가니스탄, 1991~2012년의 소말리아, 2015년 이후의 베네수엘라&남수단이 있다.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의 쇄국 정책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셈이다. 비슷하게 투르크메니스탄도 2020년 이후의 1인당 GDP 집계가 없다.[35] 정치적 권리(이하 PR) 1점, 시민적 자유(이하 CL) 2점. 다만 에리트레아보다 PR이 더 낮은 나라는 의외로 드물지는 않지만(특히 중국/수단&남수단&시리아는 각각 -2점/-3점을 기록했다) 에리트레아보다 CL이 낮은 나라는 없고 같은 나라도 투르크메니스탄 1개국밖에 없다. 하다못해 그 북한의 CL이 3점이다.[36] 참고로 북한과 에리트레아보다 세계의 자유 지수가 낮은 나라는 투르크메니스탄(2점), 남수단, 시리아(각각 1점) 3개국밖에 없다.[37] 세계평화재단(WPF) 사무총장으로서 1980년대 중반부터 에티오피아와 그 주변 지역에서 일해 온 알렉스 드 발(Alex de Waal, 1963~)조차 '이 나라에는 '날카로운' 개인숭배가 없다'고 인정할 정도다. # 사실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입장에서는 자신이 나라의 독립을 전적으로 주도했던 만큼 실제 독립에 기여한 역할이 없었던 김일성처럼 과장된 우상화로 국민들의 복종을 강요할 이유는 전혀 없었을 것이다.[38] 오해하지 말자면 정치범을 가두면 이와 동시에 정치범의 가족까지 가둔다는 '원칙'이 없다는 거지 이들의 가족과 함께 가두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은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16살 때 수단 공화국과의 국경 근처에 위치한 SAWA(에리트레아 군사 훈련 학교)가 너무 힘들어서 도망쳤다는 한 남성의 증언에 따르면 보안군들이 자신의 마을에 와서 자신을 데려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머니를 투옥했고, 본인은 어머니가 풀려나는 것을 원해서 어쩔 수 없이 투옥을 선택했다고 한다. # 한 여성이 체포되면 그들의 어린 자녀들이 함께 구금되는 일도 가끔씩 있다고 한다.[39] 아이들이 가입하는 단체는 조선소년단이라고 부르며 심지어 여기에서조차 생활총화라며 당국에 충성하지 않은 것을 아이들을 스스로 '비판'하게 하여 서로 싸우게 한다. 태양 아래라는 영화에도 묘사되어 있다. 이런 게 3개 더 있다.[40] 북한은 1989년부터 평양에다 교회, 성당, 모스크 등을 설치하며 북한이 실질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나라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다.[41] 인권 탄압과는 관계가 없지만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본인은 정황상 부정축재를 했을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사치 생활을 한다는 증거는커녕 소문조차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는 청빈하다 싶을 정도로 검박한 생활을 하고 있다.[42] 이와 비슷하게 악명 높은 독재국가인 투르크메니스탄도 1999년에 대통령령으로 사형을 '영원히' 폐지했다.[43] 참고로 에이라에이로 감옥에 수감된 사람들은 3m*3m 정도의 좁고 창문도 없는 62개의 독방 중 하나에서 24시간 내내 족쇄를 차야 한다고 한다.[44] 가장 대표적인 게 2019년부터 파리에 망명한 에리트레아 언론인들이 운영하는 독립적으로 라디오 방송국 라디오 에레나(Radio Erena). '비정치적인' 방송국으로 알려져 있다.[45] 이로써 북한과는 달리 수도에서도 반체제 인사가 살 수 있다는 것은 확정되었다.[46] 북한도 1991년, 1993년에 신의주에서 김일성 부자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의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는 주장이 있으나 정황상 식량난으로 인한 시위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로 1989년부터 1993년까지는 북한에서 식량난과 체제에 항의하는 시위가 상당히 자주 벌어져 북한의 언론통제에도 불구하고 남한에도 보도되었을 정도였다.[47] 다만 인권 탄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에리트레아의 종교 탄압을 부인하는 글이라고 보는 것은 억지 해석이다.[48] 아페웨르키와 함께 독립전쟁에서 싸운 전우였고, 2001~2012년 재무장관을 역임했으나 국가 예산을 투명하게 공개하라는 요구를 이사이아스가 받아들이지 않자 사임했고, 2015년 해외에서 에리트레아의 실태를 비난하는 <나의 조국>이란 책을 쓴 후 2018년 재판 없이 구금되었다.[49] 여담으로 그 다음은 소말리아(0.61%), 아프가니스탄(0.44%), 이라크(0.20%) 순이라고 한다.[50] 내전 없이 인구의 10% 가량이 도피할 정도로 독재자에 시달린 나라는 인구가 1,000만~1,300만 명 정도였던 나라에서 17년 동안 인구의 7.5 ~ 9.7% 정도였던 백만 명이 도피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칠레와 14년 동안 인구의 7~8%가 도피한 프랑수아 뒤발리에의 아이티가 대표적이다.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의 적도 기니는 인구가 32만 명 정도였는데 단 10년 만에 10만~15만 명이 도피하여 거의 1/3 ~ 1/2에 가까운 인원이 도피했다.[51] 당시 병력 규모가 850명 밖에 되지 않았다.[52] 심지어 인신매매범들은 몸값을 받은 후에도 에리트레아의 난민들을 다른 집단에 팔아넘긴다고 하며 수단과 이집트의 관리들과 경찰들은 인신매매범들을 처벌하기는커녕 오히려 인신매매범들의 난민, 고문에 협조하거나 아예 탈출한 인신매매 피해자들을 다시 수용소로 돌려보내기까지 한다고 한다.[53] 난민촌 상황도 열악하여 한 난민은 "인간은커녕 동물도 살기 힘든 곳"이라고까지 표현할 정도였다.[54] 심지어 남수단 정부는 외국인들이 주바로 가면 자국으로 송환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한다.[55] 심지어 이 선거도 원래 1997년에 치러지기로 했으나 2001년 12월로 연기된 것이였다.[56] 브루나이는 1962년부터 아예 선거란 것을 하지 않았다.[57] 각각 밀턴 오보테(이쪽만큼은 문민독재자다) & 이디 아민 / 장 베델 보카사 /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58] 다만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본인은 부정부패, 사치와는 전혀 무관하다.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를 여러 차례 인터뷰한 에리트레아 전문가 댄 코넬의 말에 따르면 이사이아스의 관심사는 오직 권력뿐이라고 한다.[59]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모두 에리트레아보다 1인당 GDP가 낮다.[60] 티그레족의 대다수가 이슬람을 믿는다.[61] 두바이의 항공편 대부분은 새벽에 출발한다.[62] 남수단은 독립 이래 대통령이 살바 키르 마야르디트 1명뿐이지만 애초에 남수단은 2011년에 독립한 신생국가라 에리트레아와 직접적으로 비교하기는 힘들다.[63]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도 1990년 독립 이후 2016년/2019년까지 대통령이 한 명(이슬람 카리모프 /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뿐이었지만 각각 2016년 사망/2019년 사임으로 인해 옛말이 되었다.[64] 에리트레아보다 인터넷 사용률이 낮은 나라는 4.6%를 기록한 미승인국 서사하라와 0.07%를 기록한 북한 2개국밖에 없다. 다만 북한이 이렇게 인터넷 사용률이 기형적인 수준인 이유는 북한 수뇌부가 주민들이 해외 정보를 접하면 체제가 흔들릴 것을 우려해서 일반적인 주민들의 인터넷 사용을 완전히 금지하는 것의 영향이 매우 크다.[65] 정규국가는 아니지만 인구가 3,000명에 불과한 포클랜드 제도의 IP 수가 6,144개, 생피에르 미클롱이 6,400개, 쿡 제도는 9,472개다. 에리트레아보다 IP 수가 적은 속령도 7개 있다.[66] 사실 요즘은 아무리 최악의 최빈국이라도 휴대전화 보급률이 40%는 기본으로 넘기고 있다. 당장 2023년 기준 소말리아의 휴대전화 보급률이 44.7%고, 심지어 부룬디조차 2022년 기준 휴대전화 보급률이 58%다.[67] 참고로 '샤리아 법원'은 원래 권력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결정의 일환으로 이탈리아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68] 영화 초반부 에리트레아 지도 위에 Wadiya라고 쓰인 장면이 나온다.[69] 오세아니아의 나우루, 투발루, 사모아, 속령까지 포함하면 쿡 제도, 카리브의 도미니카 연방, 바베이도스, 바하마, 세인트키츠 네비스, 앤티가 바부다, 아프리카의 상투메 프린시페, 소말리아, 에리트레아가 있다. 보고서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아시아의 시리아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