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33:49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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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왕국의 식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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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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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
Colonia Erit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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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1882년 ~ 1936년 ,구성국 시대: 1936년~1941년
성립 이전 해방 이후
에티오피아 제국 에리트레아 영국군 정부
수도 아스마라
공통 언어 이탈리아어,에티오피아어,티그리냐어
종교 가톨릭

1. 개요2. 역사
2.1. 이탈리아의 에리트레아 원정2.2. 식민지 시대2.3. 멸망

1. 개요

1882년 에티오피아로 부터 아삽 지역을 사고 영토를 확장하면서 만든 식민지로 1936년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의 구성국이 되었으며, 1941년 영국군 정부가 통치했다.

2. 역사

2.1. 이탈리아의 에리트레아 원정

1881년 프랑스가 튀니지를 점령하면서 이탈리아의 북아프리카 식민 야망이 좌절되자, 이탈리아 정부는 동아프리카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1882년 이탈리아는 루바티노 회사로부터 아삼을 구입하며 식민 확장을 시작했고, 1883년 5월 16일 네 명의 카라비니에리가 아삼에 상륙하면서 첫 군사 주둔이 이루어졌다.1885년 2월에는 탐험가 구스타보 비앙키 일행이 단칼리아에서 학살된 사건을 구실로 탄크레디 살레타 대령이 이끄는 800명의 이탈리아 병력이 마사와를 점령했는데, 당시 항구를 지배하던 이집트 수비대는 저항 없이 철수했으며 이 작전은 영국 총리 윌리엄 글래드스톤의 묵인 아래 이루어졌다. 이후 이탈리아는 마사와와 아삼 사이의 해안을 장악하고 사아티를 점령하였다. 외무장관 파스콸레 스탄리오 만치니는 마사와 점령을 수단 진출의 전초 단계로 삼으려 했으나, 마흐디가 이끄는 반란으로 인해 영국이 수단에서 철수하면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비판을 받은 만치니는 사임했고 후임 로빌란트 백작은 식민정책에 회의적이었지만 에리트레아 지역 점령을 계속 추진했다. 당시 총리 아고스티노 데프레티스는 식민정책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영국과의 협력 가능성에 대해 과도한 기대를 품은 외교적 오판을 범했다. 로빌란트가 자제 정책을 내세운 이후에도 살레타와 제네가 주도한 사아티 점령이 이어졌고, 이는 에티오피아의 라스 알룰라와의 긴장을 초래하였다. 결국 이탈리아는 튀니지 식민 실패 이후 에리트레아를 거점으로 아프리카 식민 확장을 시작했으나, 영국과의 외교적 오해와 수단 진출 실패, 그리고 에티오피아 세력과의 충돌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수단 진출이 좌절된 뒤, 이탈리아 정부는 에티오피아 제국 영토였던 에리트레아 서부 고원 지대 점령을 목표로 삼았다. 당시 에티오피아는 봉건 체제로, 각 지방 영주가 형식적으로만 황제에 복종했으며, 에리트레아 지역은 라스 알룰라의 관할이었다. 에티오피아 황제 요하네스 4세는 처음에는 마사와 점령에 반응하지 않았지만, 이탈리아가 사아티와 우아 지역을 점령하자 강하게 항의했다. 외무장관 로빌란트는 외교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군사 행동을 선택했다. 1887년 1월 25일, 라스 알룰라가 이끄는 1만 명의 에티오피아군이 사아티를 공격했지만 패퇴했으며, 다음날 보급 지원에 나선 토마소 데 크리스토포리스 중령의 부대는 도갈리 근처에서 매복 공격을 받아 430명이 전멸했다. 이 패배로 여론이 들끓었고, 로빌란트는 사임했으며 정부가 개편되었다. 후임 총리 프란체스코 크리스피는 식민정책에 비판적이었지만 작전을 계속 추진하여 알레산드로 아시나리 디 산 마르차노 장군이 이끄는 2만 명의 원정군을 에리트레아에 파견했다. 교섭이 실패하자 1888년 2월 1일 이탈리아군은 사아티를 재점령하고 요새화했으나, 에티오피아군이 질병으로 철수하자 양측은 충돌 없이 대치 상태를 끝냈다. 이후 지휘관 발디세라는 현지군인 아스카리 부대를 확충해 ‘아프리카 특수군단’을 창설했지만, 같은 해 사가네이티에서 패배해 비판을 받았다. 발디세라는 이후 외교와 협상을 병행하며 케렌과 아스마라를 점령했다. 1889년 3월 에티오피아 황제 요하네스 4세가 수단 마흐디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하면서, 메넬리크 2세와 라스 망가샤 간의 왕위 분쟁이 일어났다. 이탈리아는 메넬리크를 지지했고, 1889년 5월 2일 우찰리 조약을 체결하여 에티오피아가 사실상 이탈리아의 보호령이 되었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망가샤와 알룰라가 반발하자 이탈리아는 다시 케렌아스마라를 점령하고 직접 통치 체제를 확립했다. 같은 해 말, 망가샤가 메넬리크를 황제로 인정하며 내전이 종료되었고, 알룰라도 영토 주권을 상실했다. 발디세라는 라스들 간의 분열을 이용한 확장 정책을 제안했으나 정부의 반대로 사임했고, 오레스테 바라티에리가 후임으로 부임했다. 1890년 이탈리아의 점령지는 통합되어 공식적으로 에리트레아 식민지가 성립되었다.

2.2. 식민지 시대

1890년 에리트레아는 공식적으로 이탈리아 식민지로 선포되었고, 수도는 마사와였다. 초대 총독은 발다사레 오레로 장군이었으나 곧 프란체스코 크리시피의 신임을 받는 안토니오 간돌피로 교체되었고, ‘에리트레아’라는 이름은 고대 그리스어로 홍해를 뜻하며 작가 카를로 도시가 제안하였다. 1893년 에티오피아의 메넬리크 2세가 우치알리 조약을 폐기하였고, 이탈리아는 내륙으로 확장을 계속하여 1895년 암바 알라기 전투를 치렀으며, 1896년 3월 1일 아도와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아디스아바바 평화조약으로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의 독립을 인정하고,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레아 식민지를 승인하였다. 에리트레아의 최대 영토 확장은 1896년 초 카살라와 티그라이 지역, 악숨 점령으로 이루어졌으나, 아도와 전투 패배 이후 영토는 조약에 따른 기존 경계로 돌아갔다. 초대 민간 총독 페르디난도 마르티니는 에티오피아와 평화적 관계를 회복하고, 현지 주민과의 관계를 개선하며 효율적인 행정 체계를 구축하여 1905년 식민지 조직법과 식민지 법전을 제정하였다. 그 후 아스마라는 해발 약 2,300m에 위치해 있어 유럽인이 정착하기에 유리한 기후 덕분에 1897년 에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의 수도가 되었다.

1933년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는 11만 9천 km² 면적에 원주민 51만 명과 유럽인 3,650명(대부분 이탈리아인)이 거주했다. 수도 아스마라는 원주민 19,000명과 유럽인 3,000명을 포함했다. 파시즘 시기, 1924년 가스파리니 총독이 추진한 현대화 계획에 따라 에리트레아는 상품과 원자재 유통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1930년대에는 도로와 교량 수천 km, 마사와-아스마라 및 아스마라-비스치아 철도, 마사와 항구 확장, 이탈리아식 도시 구획 건설 등 대대적 현대화가 이루어졌고, 마사와 항구는 홍해 주요 항구이자 이탈리아 해군 동아프리카 지휘부가 위치한 곳이 되었다. 1936년 에티오피아 정복 이전까지 에리트레아는 이탈리아인 거주 비율이 가장 높은 식민지였으며, 가톨릭 선교사들 덕분에 1940년에는 인구의 60%가 기독교(33% 가톨릭)를 신봉했다. 이탈리아 행정은 의료와 위생, 농업, 산업, 도시 개발을 추진했으며, 아스마라는 도시계획 실험의 장이 되었다. 민족과 종교가 다양한 지역에서도 이탈리아 총독들은 안정과 질서를 유지하였다. 1936년 제국 수립 이후 무솔리니는 현지인과 이탈리아인 관계를 재편하고, 특히 아스카리(식민지군)를 군사적 목적으로 이데올로기에 동화시키려 했다. 1935년 10월 3일 에리트레아에서 출발한 이탈리아군이 에티오피아를 정복하고, 1936년 5월 9일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로 통합되며, 에리트레아는 확대된 영토와 함께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의 일부가 되었다. 에리트레아는 금속·기계 산업과 일부 군수·조선 시설의 중심지로 활용되었으며, 공식 언어는 이탈리아어, 화폐는 1921년까지 탈레로, 이후 동아프리카 리라가 사용되었다.

2.3. 멸망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과 이탈리아는 적대 관계가 되었고 이탈리아는 수단을 침공함으로서 양측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1941년 봄 케렌 전투에서 영국군이 이탈리아군을 격파하고 에리트레아를 점령함으로서 이탈리아는 에리트레아를 빼앗겼으며 1949년 UN 투표로 이탈리아 신탁통치가 거부되면서 에리트레아는 영국 보호령이 되었고, 1952년 에티오피아에 공식적으로 연방국가 형태로 편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