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424242><colcolor=#fff> 김길선 | |
출생 | 1955년 10월 3일 ([age(1955-10-03)]세) |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 남시구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본관 | 나주 김씨 |
거주지 | 충청북도 괴산군[1] |
가족 | 남편, 딸 한수정 |
사위 성락삼[2], 외손녀 2명 | |
종교 | 무종교(무신론) → 개신교[3] |
학력 |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문학부 고전문학과 (고전문학 / 학사) |
경력 | 제2자연과학원 강연선동편집부 기자 |
병역 | 교도대 예비역 중위[4] |
이메일 | [email protected]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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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탈북과정 관련 증언 | 미사일 개발 관련 증언 |
대한민국의 전 연구기관인, 현 유튜버, 방송인.
북한이탈주민으로, 북한에서는 기자였다. 북한의 소위 '항일 빨치산' 집안에서 태어나서 제2자연과학원[현]에서 기자로 근무했지만, 동료의 밀고로 인해 지방으로 좌천되어 수난을 겪었고 고난의 행군 당시 처참한 상황까지 목격한 후 체제에 환멸을 느껴 탈북했다.
개인적으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할 뿐만 아니라, 다른 유튜브 채널이나 방송 활동도 가장 적극적으로 하는 북한이탈주민 중 한 명이다. 발언 논조는 대북 강경파를 아득히 넘어서는 수준으로 북한 정권 체제의 치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냉혹한 태도로 비판한다.[6] 발언이 정제되지 않은 점을 제외하면, 북한 내부 사정에 대한 디테일이 살아있는 설명을 하는 경우가 많아서 내용 자체는 참고할 부분이 상당히 있다.
2. 생애
1955년 10월 3일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 남시구에서 태어나 1962년 가족과 함께 북한으로 이주하였다. 1972년 김일성종합대학 예비과에 입학한 후 이듬해에 본과로 진학했으며, 1979년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문학부 고전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1995년 말까지 대한민국의 국방과학연구소에 대응되는 제2자연과학원[현] 산하 제2자연과학출판사 강연선전편집부 기자로 재임했다. 1995년 5월 1일부터 국책연구소인 통일정책연구소의 연구위원으로 근무했다.북한에서 기자는, 남한의 기자와 달리, 당의 일꾼으로 조선로동당의 정책과 수령의 교시를 인민에게 교양하는 것이 임무였고, 특히 김길선은 군수분야의 정책기자라서 김일성과 김정일의 교시 로작 저작물을 섭렵하여 글을 짜내야 하는 극한의 임무를 수행하는 고충이 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길선은 본인의 직업을 "내가 하던 일은 당 검열부서[8]와 매일같이 싸움하는 것이 일이었다."라고 말한다. #
한 번은 자신의 동료 기자가 자신의 이름과 소속까지 밝히면서 북한 체제에 대한 모순을 함양하는 내용을 김정일에게 직접 올린 적이 있었는데 다음 날 그와 그의 가족까지 전부 다 실종되었다고 한다.[9] 실종된 이후 출판사 담당 보위지도원이 특별강연회에서 그 동료기자를 두고 "반혁명분자이자 남조선 괴뢰도당과 손잡고 양봉음위(陽奉陰違)[10]했다."라고 비난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길선은 기가 막힌 태도로 "어제까지 시간에 쫓기면서[11] 나랑 같이 일하던 동료가 무슨 시간이 남아돌아서 언제 남조선까지 하루만에 갔다가 다시 북한으로 돌아와서 남조선 괴뢰도당 사람들과 같이 손을 잡고 몰래 작당모의를 시도했을까?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라고 생각하며 어이없어했다고 한다.
사실 북한에서 로동신문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높은 확률로 김일성 족속의 골수 충성분자로 분류될 확률이 높은데다, 주민들끼리 생활총화를 빙자한 상호간에 감시를 일상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가까운 이웃이 언제 어느 시간에 어디서 뭐를 하고 있었는지 대부분은 잘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김길선은 적어도 자신의 동료가 김정일에게 "공산주의로 가는 길이 이게 맞습니까?"라고 우회적으로 북한의 현실에 모순을 제기했을 뿐이었지, 최소한 남조선 괴뢰도당과 무슨 작당모의를 꾸밀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기자들에게 이 정도의 비판마저 허용되지 않는 김일성 족속이 지배하던 북한 체제의 거짓된 현실을 매우 환멸하게 되었다.
이렇게 기자들을 형편없이 대우하는 북한의 현실에 대하여 김길선이 말하길, "북한 기자들은 겉으로는 누구보다 김일성 족속의 선전과 찬양에 앞장서지만 속으로는 그 누구보다도 김일성 족속의 선전이 거짓이라는 점을 잘 아는 집단이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현실과 괴리가 되는 글을 써가는 것에 자괴감을 느끼고 목숨을 걸고 체제에 반하는 발언을 하는 기자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12] 그만큼 북한에서 제일 위험천만한 직업 중의 하나였고 그래서 그녀는 "아마도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수감자의 30~40%는 기자 출신일 것이다. 기자들은 펜을 든 노예일뿐이다."라고 증언했다.
그리고, 김길선은 가방끈이 짧았고 공부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던 김일성과 김정일을 대신하여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명의의 축전도 김길선이 대신 작성을 해줬을 정도로 북한 언론계와 출판계의 핵심이었다. 그야말로 최상위권의 엘리트 출신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로동신문에서 기자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집안도 빨치산 출신이라 출신성분까지 갖춰진 엘리트 명문가 집안이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엘리트로 알려진 인물답지않게 공부에는 그다지 관심도 없었던 데다 달리기를 좋아해서 운동선수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공부를 잘해서 상을 받았거나 학급에서 반장을 해본 적도 없었다. 대학 진학도 1지망부터 3지망까지 모두 체육인을 지망했었고, 기자를 하고 싶었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저 놀기 좋아해서 공부를 그다지 잘 한 것도 아니었던데다, 글을 쓰는 것에는 재능이 없고 관심이 없어서 거리가 멀었는데도 그저 집안이 김일성과 가까웠던 '빨치산 줄기' 출신이라서 김일성종합대학도 쉽게 합격할 수 있었고 기자도 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김길선이 이에 대해 말하길, "나는 스스로 기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도 않았다. 김일성 족속 때문에 강제로 끌려다녔던 인생이었다."라고 개인 유튜브 채널에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2.1. 탈북 동기
친한 동료들과 성혜림에 관해 언급한 것이 문제가 되어 고초를 겪은 것이 발단이라고 한다. 단순히 대화에서 풍문식으로 풀어놓은 것인데, 당시 김정일의 정실부인은 부친인 김일성이 직접 고른 김영숙으로 알고 있었고 이것도 일부 핵심계층 내에서만 암암리에 전해지고 있어서 그렇게 믿고 있던 와중에 갑자기 성혜림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 것이다.그래서 "아니, 우리 지도자에게 내연녀가 있었다니 뭔 소리인가?"라고 의문을 표했는데 같은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이 신고를 해 버렸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다른 북한이탈주민과 탈북 스토리를 나누는 과정에서 증언했는데, 같은 직장 동료였던 여성이 김길선에게 돈을 꾸었고 다른 직장 동료에게도 돈을 빌렸는데 빌린 돈을 갚지 않으려고 같이 동석한 자리에서 이를 듣고 그대로 고자질을 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에 그 고자질을 한 그 여성은 죽었다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어느 날 직장에 출근하는데 사장의 호출을 받고 사장실에 갔다가 낯선 남성을 따라가라는 지시에 차에 타고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 10호실로 끌려갔는데, 10호실은 핵심 계층에서 수령의 권위를 훼손한 사람으로 소위 말하는 '말반동'들을 다룬다고 한다.[13] 연행되어 40일간 구속수사를 받았다. 40일간 감옥에 갇혀 고초는 겪었으나 정신적으로 완전히 파탄날 정도로 한평생 한 일과 발언을 모두 적어서 검토 대상을 거쳤는데 조사관들도 사람인지라 조사 중에 들은 정보로 수령에 대한 충성심이 줄어들까봐 조사관을 발언마다 다른 사람으로 조사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성혜림 관련 김정일의 추문을 접한 죄로 잡혀가 혹독한 심문을 받은 끝에 함경북도 김책시[14]로 추방되어버렸고, 엄중히 감시받는 와중에 하필이면 김정일이 하사한 러시아 민요 테이프를 들은 것이 꼬투리가 잡히면서 또 다시 박해를 받았다.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이름, 심지어 초상화조차 함부로 말하거나 취급했다간 소위 '불경죄'로 걸려서 엄청난 후폭풍을 겪어야 한다. 이는 고위 공직자나 일반 간부급이라도 예외가 아니다. 더구나 김씨 일가의 사생활은 엄격하게 금기시되어 누설이라도 했다간 집안이 완전히 멸문지화를 당한다.
이후 추방을 당하고 내려온 김책시에서 지방 사람들의 참혹한 현실과 북한 체제의 실상을 깨닫고 염증과 환멸을 느끼게 되면서 탈북을 결심했다고 한다. 게다가 이때는 고난의 행군 중이었던 때였고 평생동안 평양에서만 거주하던 핵심계층이었던 그녀에게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김책시에 위치한 공장의 노동자로 재배정되었지만, 첫 출근날 공장에 가보니 공장 가동은 이미 전부 정지된 상태였다고 한다. 공장 지배인이 "더 이상 출근하지 마라."라고 말했고[15] 그래서 자신은 탈북 이전까지는 사실상 무직인 채로 살았다고 한다. 거기다가 거리에는 밥을 못먹어 뼈가 다 보이는 아이들도 있었고, 아사한 시체에서 이가 마구 들끓는 것도 보았다고 한다. 이를 본 김길선은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고난의 행군의 처음 문항에 등장하는 주성하의 증언에 따르면, 실질적인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것은 1994년 12월부터였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평북 구성에서 온 여인에게서 들은 현지 상황을 증언해줬는데, 특히 평북 구성은 평양에서 불과 100km밖에 되지 않은 거리에 위치한 로동자구였다.
김책시로 유배를 와서 이웃해 살던 노인이 "왜정 때보다 못하다. 그때는 왜놈들은 쌀밥을 먹고 조선인은 조밥을 먹는 게 배알꼴렸지만 그래도 굶고 살지는 않았다."라고 한탄할 정도였다고 한다.[16] 그리고 이미 그때 당시부터 남한의 영화, 드라마와 노래가 밀수되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여러 가지 일을 거쳐서 탈북을 결심하고 실행하였다고 한다.
본인의 유튜브에 밝힌 바에 따르면, 중국에 체류할 당시 작성하였던 수기가 계기가 되어 남한으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작성한 수기는 여기서 확인 가능하다.
2.2. 탈북 이후
1997년 8월 남편, 딸과 함께 탈북하여 중국에서 약 1년 반 동안 조선족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국정원 요원들을 만나 1999년 1월 남한에 정착하였다.입국 후에 군수공업 분야에 종사했기 때문에 국정원 산하 연구기관에 재직하였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패널로 출연한 국정원 직원에 따르면 북한의 미사일 개발 초창기 시기의 정보를 한미 측에 제공했다고 한다. 황장엽의 비서로도 짧게 일했지만 황장엽이 아직도 주체사상에 빠져있음에 실망하고 그만두었다.
2010년대 이후 아마도 정년퇴직 이후 각종 방송과 언론에 출연해서 북한정권의 실체에 대해 알리는 한편, 김씨일가에 대해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운동을 하고 있다. 김길선은 김씨일가를 김일성 족속이라고 표현하며 방송상에서도 김일성 족속만을 팬다고 할 정도로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을 세우고 있다. 본인 스스로도 북한만 비판한다고 밝힌 만큼 현존하는 남한의 정치세력에 대해선 가급적 비판을 자제하고 있다. 다만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선 매우 호의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다.
<김길선's평양만사>라는 제목의 유튜브도 개설해 주기적으로 게스트도 초청해가며 매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 딸이 편집을 맡고 있다. 부제가 자극적인데 김일성 족속만 팹니다이다.
북한의 핵개발에 대응한 주한미군 전술핵 재배치나 대한민국의 핵무장에는 반대한다고 밝혔다. 또한 북한군 위협론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며 북한군의 장비들은 전부 고물이거나 써먹지 못할 폐품들이라 한다. 이에 대해선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장담할 수 있다고 자신할 정도.
남북통일 이후 북한 정권 청산작업에 대해선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소속 간부들에게는 엄벌을 내리되, 행정부 관료들이나 말단 관료들에 대해선 주민들의 동의하에 조건부 사면시켜줘야한다고 밝혔다. 특히 내각 관료들의 경우 현지 경제 실정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통일 이후에도 활용할 가치가 있다는 입장이다.
2020년대의 북한 시사[17]를 분석, 평가한 바로는 비록 숙청과 정치범수용소 때문에 본심을 드러내진 못해도 북한 주민과 간부들이 전부 김정은의 지시를 잘 안따르거나 태업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평가했으며 4대 세습을 성공하지 못하고 국가 멸망에 이를 거라고 예측했다. 이는 동아일보의 주성하 기자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주성하와 함께, 검증이 안된 북한의 정보들을 마구잡이로 보도하는 국내 언론사들의 실태에 대해서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2.2.1. 게스트 목록
- 양영일: 월요일 남성 게스트. 북한에서 삭주군의 청수화학공장에서 철도 엔지니어로 근무했다고 한다.[18]그 역시 김길선과 비슷한 고초를 겪었는데, 동료가 김일성이 사실 소련군 88여단 장교였다는 소문을 알리자 “아니, 수령님이 소련군이었단 소리야?“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위부에 의해 체포되어서 몇 일 동안 심문을 당하다가 겨우 풀려났다고 한다.[19] 보위부 장교들이 양영일을 풀어주면서 그가 들은 정보는 “지상의 비밀”이라면서 다시는 발설하지 말라고 경고를 주었다고 한다. 탈북한 이후 남한에 정착하고 나서는 중소기업의 사장이 되었다고 한다. 그 역시도 북한 체제에 환멸과 배신감을 느꼈던지라 김길선보다도 더 격한 어조로 북한 체제를 비판한다. 북한의 지도자들을 칭할 땐 대놓고 그 새끼라고 욕한다.
- 장해성: 1944년생 남성 게스트. 김길선과 마찬가지로 기자 출신 탈북민이며 그녀의 선배였다. 그의 집안은 항일빨치산이어서 대우가 좋았던 것은 물론이고 군복무를 호위사령부에서 했으며 김일성종합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중앙방송에서 10년 동안 기자로 근무했던 북한의 엘리트 계층이었다. 김일성 사망 당시 김일성 동상에서 추모를 하던 도중 몰래 일찍 빠져나왔는데, 이 일이 세포비서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고초를 겪을 뻔했다고 한다. 다행이 자신의 친구가 장해성의 거짓 진술에 동조를 해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2년 뒤, 자신의 친구에게 '6.25 전쟁은 김일성의 남침으로 발발했으며, 김정일은 백두산 밀영 출생이 아니다.'라고 알린 것이 발각되는 바람에 신변이 위험해져 1996년, 탈북했다고 한다. 탈북한 이후 국가안보통일정책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한 뒤 정년 퇴직한 현재에는 국제망명북한PEN센터의 명예이사장을 재직하고 있다.
3. 여담
- 친가 외가 모두 빨치산 가문 출신으로 한두 명이 아닌 여러 명이 항일 빨치산 출신이며 북한에선 알아주는 명문가였다고 한다. 특히 고모부는 김일성이 직접 병문안을 와서 날씨 좋은곳인 베트남 대사를 제안할 정도였지만 감히 가기 싫다고 거절하고도 무사할 정도로 친분이 있었고, 고모는 김일성이 만주에서 빨치산 하며 굶고 다닐 때 한두 달에 한 번씩 와서 밥먹여주고 숨겨주는 사이였다고 한다. 그 덕분에 고종사촌 형제는 북한군 중장이있으며, 자신은 여자라 기자가 되었지만 아버지와 남자 형제는 모두 보위국 군관이며 특히 아버지는 인민무력부[20] 후방총국 보위국장까지 지낸 명문가였다.
- 아버지는 1932년 태생, 라선시 라진구역(당시엔 함경북도 라진시)에서 태어나 조부모를 따라 두만강을 건너 카이산툰(開山屯, 개산둔)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나이 18세 때 6.25 전쟁이 일어나자 중국 인민지원군 탐지기부대에 자원 입대하여 전쟁에 참전하였다고 한다. 하얼빈공업대학 출신으로 김일성이 직접 중국공산당에 요청해서 북한으로 입국했다고 한다. 막상 북한에 오자 이공계 인력임에도 김일성에 의하여 보위국 군관으로 배속되었다고 한다. 한 때 월북한 대한민국 국군 장병들에 대한 심문도 담당했을 정도였고 장성까지 진급했을 정도였지만, 아버지마저도 결국 체제에 환멸을 느끼면서 자신에게 탈북을 종용했다고 한다.
- 어머니는 함경북도 길주, 명천 지역 출신이며 한산 이씨[21]라고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하얼빈공업대학에서 동창생으로 만나 1955년 1월 결혼하였고 1964년 초에 남편과 더불어 북한에 들어갔다고 한다. # 김길선을 포함, 5자녀를 낳았다. 60년대 북한에 와서 로동당 입당 시 면접 때 "내각수상이 누구시냐?"는 질문에 최용건[22]이라고 답하고도 타박만 받고 무사히 입당했다는데, 만약에 70년대였으면 수용소에 끌려 갔을 것이라고 한다.
- 북한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전형적인 북한 어문 규범인 문화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본인이 김대 조선어문학부 출신인데다 수십년 간 기자 생활까지 했기 때문에 문화어 전문가다. 로동신문 등의 북한의 기자들은 글로 선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문학 전공을 데려다가 혹독하게 훈련을 시켜서 길러낸다. 당장 본 문서 위쪽의 생애 부분에도 김길선 본인의 고초가 잘 드러나 있다. 평양 사투리라고 하지만 사실은 진짜 평양 사투리에 비해서도 '데거이' 같은 말을 '저거'라고 하는 서울말같은 말투다. 김일성이 문화어의 서울 방언과의 연관성을 극구 부정하며 내부적으로도 평양말이라는 세뇌 공작을 벌이며 남한에서도 반박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에서의 습관대로 평양 사투리라고 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집안이 함흥 출신이며 김길선 본인이 김책으로 추방되어 산 경험이 있어서인지 함경도 사투리도 섞여있다. 그래서 '미사일'을 '미싸일'로 발음하고, '다치다'를 '건드리다'의 뜻으로[23] 사용한다. "이제 무서워서 '다치지' 못하겠답니다." 최근에는 '뇌피셜', '폭망' 등의 남한 신조어도 거리낌없이 사용한다.
- 문화어 전문가이자 김대 조선어문학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정치나 사상 관련된 북한 단어는 모조리 남한식으로 고쳐부르거나 풀어쓴다. 예를 들어 북한 특유의 두음법칙 비적용식 단어는 고유명사여도 무조건 남한식 두음법칙으로 고쳐서 자막을 쓴다. 단, 발음은 그대로 두음법칙이 되지 않은 채 발음한다. 예: 조선로동당은 '노동당', 또는 '당', 로동신문은 '노동신문'이라 쓴다. 그외로 아예 이름을 바꿔부르는 경우로는: 사회안전성은 '공개경찰', 국가보위성은 '비밀경찰', 김일성종합대학은 김일성 자가 맘에 안 든다며 그냥 '종합대학'이라 칭한다. 사실은 자신들의 규정을 북한에 적용하지 않으려는 경향도 있는 남한과 달리 북한에서는 오히려 남한 고유명사를 문화어 규정으로 고쳐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도 '대한민국'을 과거에는 '남조선', 최근에는 '괴뢰한국'도 쓰는 예외를 제외하면 아예 이름을 바꿔부르는 건 아니다.
- 어릴 때 중국에서 살다가 1962년 약 7~8살 때부터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서 자랐다. 그래서 당시 처음에는 중국어가 더 편했고 우리말을 전혀 못했지만, 60년대 북한의 그나마 자유로운 분위기로 여러 출판물들을 접하면서 우리말을 익혔다고 한다. 학창시절에는 서툴렀지만 자신의 의사와 상관 없이 조선어문학과로 전공이 결정되었고, 김일성대 은사 중에 한 명은 벽초 홍명희의 아들 홍기문도 있었다고 한다. 졸업 후 역시 당의 결정으로 기자가 되었다고 한다. 대학내내 한자옥편 끼고 다니며 공부했는데 뜬금 기자로 발령나서 황당했었다고 한다. 후일 알고보니 집안 토대가 좋아서 군수분야 기자는 아무나 시킬 수 없기에 김정일이 핵심군중에서 선발하라는 1호 지시 때문에 배치된 것이라고 한다. 결국, 김길선 본인은 체육인이 되고 싶었지만 당의 결정으로 원하지 않던 진로를 가게 되었다고 한다.
- 황장엽의 장녀와 같이 대학교를 다녔는데 자신은 고전문학 쪽이고 황장엽의 장녀는 한 학년 위에다가 어학 쪽이라서 전공은 다르지만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그 덕분에 탈북 후 황장엽이 딸처럼 반가워했다고 한다.
- 남편은 발전기 분야 엔지니어로 대학생 농촌 봉사 때 만난 김책공업종합대 출신이며 당시 두 번이나 동유럽 유고슬라비아와 소련의 구성국이었던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유학을 갔다온 북한 체제에서도 흔치 않은 경력자이고 수리공학원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 남편이 홀어머니 아래에서 외아들로 성장했는데, 그래서 처음 결혼한다고 했을 때 어머니가 시댁 식구가 단촐하다고 좋아했다고 한다. 이유는 층층시하 온갖 시댁 식구들 아래에서 살았던 어머니의 시집살이가 너무나 고달팠다보니 시댁 식구가 적어서 시집살이를 덜할 것이라고 좋아했던 것. 하지만 그런 친정의 바람과 달리 김길선 본인은 매서운 시집살이로 온갖 설움을 겪으면서 고생을 했다고 한다. 남편 대신 의지하고 살았던 아들을 빼앗겼다는 시어머니의 피해의식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는 듯 하다. 게다가 남편이 유학이나 출장으로 장기간 집을 비우는 일이 잦고 김길선 본인이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함께 살면서 온갖 기상천외한 구박과 학대로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부부의 직장 당비서가 "이러다 젊은 두 사람 잡겠다." 라면서 시어머니의 재혼을 주선할 정도였다고 한다.
- 기자로 근무했을 때 007 시리즈를 본 적이 있었다고 한다. 김정일이 해외 무기체계들의 동향을 확인하라며 국방과학원과 군수분야 성원들에게 서방세계의 군사, 첩보 영화들을 보여주었는데 특히 007 영화들을 자주 보여줬다고 한다. 북한 기자와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쉰들러 리스트도 보여줬다고 하는데, 막상 북한이 홀로코스트 못지 않은 끔찍한 정치범수용소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 추방 이후 황장엽 망명 사건을 김책공대 학생들로부터 접하고 난 뒤 탈북을 결심했다고 한다. 주체사상의 핵심이자 김일성대 총장을 지냈고 당중앙위원회 비서까지 지낸 황장엽과 김덕홍의 탈북을 바라보고 "그 사람들이 아무렴 배가 고파서 달아났겠는가? 더 이상 이 체제는 안된다."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물론 실질적인 탈북의 계기는 다른 사건이 기폭제가 되었지만, 그때부터 이미 탈북을 결심하고 있었다고 한다. 재미있게도 탈북 후 한국에 오게 된 실마리는 먼저 망명해 있던 황장엽과 김덕홍이 제공했다고 한다. 당시 안기부로 넘어가게 된 그녀의 수기를 본 두 사람이 "이 사람은 북한의 깊은 곳까지 속속들이 본 사람이니 무조건 데려와야 한다." 고 안기부 직원들에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 YTN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에 있을 때 외국영화를 보며 자가용을 몰고 싶은 로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남한에 와서 그 로망이 실현되었다고 한다.
얘들아 내가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단다.[26]
-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도 과거 패널로 자주 참여했는데 시원시원한 입담으로 인기가 좋다. 그래서, 김길선씨는 기본적으로 북한 정권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어서 북한 정권에 관해서만은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런데 그 비판의 수위가 방송용으로는 상당히 높은 편이다 보니 심지어 보수 성향 방송사/언론사에서도 부담스러워 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일부 네티즌들이 댓글로 정치적인 성향에 대해 따질 때도 "성향은 보수이지만 맹목적인 보수 옹호는 하지 않는다. 그럴만큼의 정치적인 식견도 없는 사람이다. 북한에 대해 열렬하게 비판하는 모습을 보고 그러는 것 같은데 그 사회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보고 경험했던 것으로 인해 그리 된 것이니 너그러이 이해해달라" 라고 이야기를 한 적도 있다. 관련 명대사는 김일성 족속이다.
- 북한에 지하자원이 많다는 것에 "그렇지 않다" 라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김일성 시대에 이미 지하자원을 조사했고, 이것을 팔아서 부국강병을 만들겠다는 선언을 했으나 나중에 알고보니 보고된 지하자원 상당수가 과장되어 보고되거나, 쓸모없는 저질 자원들이라서 팔아먹을게 아무것도 없다." 라는 말을 김일성 자신이 직접 했다는 북한 측의 기록이 있다는 얘기를 하였다. 그래서, 정말로 북한에 지하자원이 있다면 이미 수백만 명을 갈아넣어서라도 무조건 채굴했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북한 지하자원은 "자원의 백화점"이란 별명을 갖고 있는데, 다양한 종류가 채굴되지만 운산·대유동 금광과 함경북도의 탄광 외에는 채산성 있는 자원이 드물기 때문에 백화점 쇼윈도와 같다 하여 이런 별명이 붙어 있다. 애초에 남한을 포함한 한반도자체에는 고가치 자원이 없다.
- 유튜브 시청자와의 소통을 통해 밝힌 바에 따르면 그녀의 꿈은 북한이 자유화된 이후, 북한으로 넘어가서 고아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고 씻겨 주고 먹여 주고 재워주고 공부시켜서 유학보내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평양으로 당장에 달려가서 김일성 동상을 전부 때려부수고 모든 김일성 일가의 우상화 명칭을 개칭하는 작업도 하겠다고 언급한 바 있다.
- 프룬제 군사대학 쿠데타 모의 사건에 대해서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것을 부정하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 "우리 아버지가 군 보위사령부 출신이었고, 나도 그 때 평양에 있어서 그 사건의 경위를 잘 알고 있다. 그 사건은 김정일을 향한 쿠데타같은 것이 아니라, 그냥 군대 내부에서 외화벌이를 위한 이권싸움에서 패배하고 숙청된 것에 불과하다." 라고 이야기를 하였다.#
- 북한의 언론 검열 과정에 대해 소상한 증언을 남기기도 했다. 11:44~16:24 부분 그리고 2021년 5월 월간 북한와 인터뷰를 하면서 북한의 언론 검열 실태를 전하기도 했다. # 언론 검열 외에도 대북전단은 소규모로 몰래 날리는 게 더 낫다고 봤으며, 김여정 명의의 원색적인 담화는 회의 중 김정은이 엄청 원색적으로 남한을 비방한 것을 어느 정도 순화해 김여정 명의를 갖다 붙인 것이라고 보았다.
- 북한에서 한류 관련으로 공개총살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북한이 자신들의 체제는 너무 깨끗하게 정화되어 있다고 보여주기 위해 그 체제를 '오염'시키는 일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주민들에게 각인시키고자 한류 관련자들은 비밀리에 처형한다고 보았다. # 다만 이제는 북한도 반체제 인사의 존재를 대놓고 주민들에게 알리는 세상인 만큼 여기에 한해서는 김길선의 주장은 틀렸다고 할 수 있다.[27]
[1] 전에는 서울특별시 노원구 중계동에 살았으며 이후에 이사한 것으로 보인다. 2022년 11월 10일 지진에 관한 콘텐츠를 다루면서 거주지를 공개했다. 출처[2] 남한 출신으로 아내 한수정과 이혼 후 재결합했음 뿐만 아니라 해병대 출신임을 밝혔다.[3] 탈북 이후에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4] 김일성종합대학 재학 중 군사훈련을 수료하여 졸업과 동시에 예비역 중위로 편입되었다고 한다.[현] 국방과학원. 제2자연과학원은 방위산업체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명명한 위장명칭이었다.[6] 그래서, 발언 내용 자체는 평이할 수도 있으나 발언 도중 사용하는 어휘나 어법이 과격한 경우가 많다. 이는 공격적이고 노골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북한 체제 하에서 오랫동안 살아가면서 길들어진 화법으로 추정된다. 또한 북한에서 기자는 본질이 선전·선동 파트에 속하니 직업 특성상 그런 쪽으로 특화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김길선이 북에서 기자로 활동했던 시기는 지금의 북한보다 더욱 여성에 대한 인명경시와 억압적 시선이 만연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보통 성깔로는 살아남을 수 없는게 당연했고, 이러한 환경도 그녀의 강경한 성향을 만드는데에 크게 한 몫했을 것이다.[현] 국방과학원. 제2자연과학원은 방위산업체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명명한 위장명칭이었다.[8] 조선로동당 선전선동부 산하기관일 것으로 추정[9] 해당 기자는 아버지가 6.25 전쟁 때 연대장이어서 권위 있었다고 한다.[10] 양지에선 봉양하고 음지에선 위배하다. 즉, 겉으로는 북한 체제를 옹호하나 안으로는 배반했다는 뜻[11] 북한의 언론사는 마감기한을 주면서 일하는데 마감시간이 너무 빡빡해 일정 제한기간까지 검열부서에 기사를 넘기고 그걸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이로인해 시간이 많이 걸려서 북한 기자들은 시간에 쫓기다시피 일하는 상황이다.[12] 물론, 북한 체제의 특성상 이는 거의 불가능했고, 몇몇 기자들은 당대 남한 독재정권의 외압에도 굴하지 않던 탐사기자 조갑제를 부러워하는 식으로 대리만족을 느껴야 했다. 참고로 조갑제는 민주화 이전에도 극우 반공 성향이었다.[13] 이외의 계층은 국가안전보위부(현 국가보위성)에서 취급한다.[14] 김길선 양친의 고향은 함경도이나, 본인은 평양 토박이 출신에, 북한 특유의 폐쇄성으로 인해 지방에 내려갈 일이 많이 없었으므로 처음엔 김책시가 어디에 붙어있는 동네인지조차 몰랐다고 한다. 기자라고해서 지방에 출장을 간다던지 취재차 지방으로 내려길 일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저 김일성 족속의 귓맛에 맞는 기사만 쓰면 됐으므로 취재 안 나가도 얼마든지 기사를 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김길선 본인조차 지방의 참혹한 현실에 대하여 동료기자들이 하는 말을 듣고 "그 정도인가?" 정도로만 생각했지, 그 정도로 처참한지는 추방당하고 눈으로 직접 본 이후로 알았다고 한다.[15] 그녀의 유튜브 채널에 월요일 게스트로 출연하는 양영일에 의하면 당시 북한 모든 공장 지배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출근해서 사망한 노동자들의 수를 집계하는 것 밖에 없었다고 한다.[16] 실제로 김길선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 주민들의 반일감정은 일제강점기 시절보다도 형편없는 고난의 행군으로 인하여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17] 로동신문, 김정은의 연설 등[18] 그의 증언에 따르면 화학공장 화학약품 부서가 보라색 안개로 뒤덮여 있었고 그 부서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은 제대로 된 보호복도 없어서 젊은 나이임에도 탈모가 오고 이가 빠져 있었으며 몰골도 초췌했다고 한다. 기관차를 교체하기 위해 한 번 흥남비료연합기업소로 가본 적도 있었는데 그 공장 역시 상태가 열악한 것은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그는 그 광경을 보고 트라우마가 생겨 화장품을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며 오로지 비누로 세안한다고 한다.[19] 고문을 당하진 않았지만 여러번 맞았다고 한다. 그리고 진술서를 여러 번 쓰게 했다고 한다.[20] 현 국방성[21] 어머니는 반드시 자신의 성씨를 량반 한산 리씨라고 말했으며 '량반'을 떼고 말하면 성을 내며 꼭 량반 한산 리씨라고 부르라고 말했다고 한다.[22] 최용건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었고, 내각수상은 다름 아닌 김일성이었다. 당시의 북한은 명목상으로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국가수반을, 내각수상이 정부수반을 맡고, 그 정부수반인 수상은 (명목상 인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되었다는 제1당인) 조선로동당의 당대표인 총비서가 맡는, 일종의 의원내각제 형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물론 허울일 뿐 실제로는 수상 김일성이 전권을 장악한 비정상적 독재 체제였다.[23]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준어로 실린 단어인만큼 한국 표준어 규정으로도 쓸 수 있긴 한데 실생활에서는 60년대에 쓰이던 옛날 말투에 더 가깝다. # 그러니까 옛날 서울말이다.[24] 표면적으로 내세운 이유는 째포인 주정기와의 불륜이었으나,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았다.[25] 후에 결혼했다.[26] 현재 하고 있는 유튜브에서 한국의 우월성을 나타낼 때 쓰는데 자랑이 아닌 "니들도 정신차리고 바뀌면 (대한민국에서 사는 것처럼) 누릴 수 있는 것들이다" 같은 힐난 겸 걱정이다. 실제로 탈북민 중에 북한 장교 출신이었던 모 여성은 벨로스터N의 오너이기도 하다.[27] 일단 여기서 허구라고 언급한 대표 사례인 '한류를 접한 중학생 30명이 공개처형'은 기존 북한의 한류 탄압 관련 뉴스와 비교해도 터무니없이 허황된 수준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