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21:04:52

안익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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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안익태
安益泰|Eak-tai Ahn
파일:external/www.mcst.go.kr/1290392706273.jpg
출생 1906년 12월 5일
대한제국 평안도 평양부
(現 평양시)
사망 1965년 9월 16일[1] (향년 58세)
스페인국 바르셀로나
국적
[[대한제국|]][[틀:국기|]][[틀:국기|]] →
[[일본 제국|]][[틀:국기|]][[틀:국기|]] (일본제국령 조선) → [[프랑코 정권|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1977).svg
]] 스페인국
본관 순흥 안씨
가족 형 안익삼, 안익조
배우자 롤리타 탈라베라 안(Lolita Talavera Ahn)
자녀 딸 엘레나, 안나, 레오노르
학력 평양보통학교 (졸업)
평양숭실중학교 (중퇴)
세이소쿠 중학교 (졸업)[2]
도쿄음악학교 (첼로학 / 학사)
신시내티 대학교 음악대학 (첼로학 / 학사)
커티스 음악원 (학사)
템플 대학교 대학원 (음악학 / 석사)
종교 유교 (성리학)기독교 (개신교, 장로회천주교 | 세례명: 리카르도)
서훈 대한민국 문화포장
문화훈장 대통령장
비고 친일인명사전 등재

1. 개요2. 생애3. 논란 및 사건 사고
3.1. 애국가 관련
3.1.1. 도브루자의 땅이여 표절설
3.2. 친일 및 친나치 논란
4. 평가5. 주요 작품 목록6. 가족관계 및 여담7. 대중매체에서8. 관련 단체

[clearfix]

1. 개요

한국계 스페인인 국적의 작곡가이자 지휘자. 애국가의 작곡가로 유명하지만 친일 및 친나치 의혹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비판을 받고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이다.

2. 생애

1906년, 대한제국 평양부에서 태어났다. 유소년기를 평양부에서 보냈으며, 평양보통학교와 평양숭실중학교를 다니다가 1921년 일본 도쿄의 세이소쿠 중학교에 음악 특기생으로 입학해 중학교 과정을 마쳤다.

이후 1926년에 도쿄음악학교(현 쿠니타치[3] 음악학교)에 첼로 전공으로 입학한 뒤 1930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는 신시내티 대학교 음악원, 필라델피아의 커티스 음악원, 템플 대학교 음악대학원에서 첼로와 지휘를 배웠고 1932년에는 신시내티 대학교의 학생 오케스트라에서 첼로 수석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당대 유명 지휘자였던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와 교류하며 카네기홀에서 독주회를 하고 첼리스트로서 활약했다.

1938년에는 아일랜드의 더블린 방송 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했고, 이 자리에서 애국가를 발전시켜 만든 곡인 한국환상곡이 처음 공연되었다. 이후 헝가리에 머무르면서 외트뵈시 로란드 대학교에서 코다이 졸탄과 도흐나니 에르뇌에게 작곡을 배웠고, 헝가리와 이탈리아, 독일,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유럽 각지의 관현악단들을 객원 지휘했다.

1943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게 된 이유는, 안익태의 도쿄고등음악학교 시절 스승 고노에 히데마로[4]의 대타로 들어갔던 것일 가능성이 크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도 계속 유럽에 남아 활동했지만, 1944년으로 접어들며 연합군이탈리아에 상륙하는 등 전황이 악화되자 4월에 파리에서 베토벤 연속 연주회를 마친 뒤 6월에 중립국이었던 스페인으로 거점을 옮겼다. 1944년 12월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환상곡의 자필 악보를 완성했고, 1945년 리카르도라는 세례명으로 가톨릭 세례[5]를 받았으며, 1946년에 스페인 여성인 롤리타 탈라베라[6]와 결혼했다. 이후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고, 스위스, 멕시코, 과테말라 등지에서 객원 지휘자로 출연했다. 이때 스페인으로 귀화했다.
대한뉴스 #56 안익태씨 경무대 방문 (c. 1955)

1955년 3월에는 처음으로 대한민국을 방문해 한국환상곡의 한국 초연을 지휘했고, 조국을 위해서 뭔가를 해보겠다는 생각이었는지 1962~64년까지 매년 서울에서 국제음악제를 주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음악제는 안익태에게 적대적이었던 일부 한국 음악인들의 반발과 재정 문제 등으로 1964년 이후로는 열리지 않았다.

이후 1965년 7월 4일에 런던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마지막 공연을 하였고, 이후 건강 악화로 투병하다가 1965년 9월 16일에 바르셀로나에서 생을 마감했다.
대한뉴스 #1142 고 안익태 유해 고국 도착 (c.1977)

차후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제2묘역에 안장되었고, 아내도 사망 후 합장되었다고 한다.

3. 논란 및 사건 사고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3.1. 애국가 관련

3.1.1. 도브루자의 땅이여 표절설

안익태가 애국가를 작곡하기 전까지 애국가는 작사 미상[7]의 가사에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8]의 멜로디를 붙여서 부르기가 일반적이었다.[9] 안익태는 올드 랭 사인이 애국가의 가락으로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여 새로이 작곡한 것이 오늘날의 애국가의 멜로디가 되었다고 알려졌다.

문제는 애국가가 언제 어디서 작곡되었냐는 점인데, 일반적으로는 1936년 베를린에서 그간 구상해왔던 애국가를 작곡했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1964년, 서울 국제음악제에 참석하고자 내한한 불가리아계 미국인 지휘자 페터르 니콜로프(Петър Николов)가 "애국가? 그거 불가리아 노래 표절인데?"[10]라고 말하는 바람에 한바탕 뒤집어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니콜로프가 애국가의 표절이라고 주장한 것은 불가리아 시가 '도브루자의 땅이여(О, Добруджански край)'로, 니콜로프는 직접 기자회견장에서 노래까지 불러 가면서 "만약 불가리아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도브루자의 땅이여'를 부른다면 한국인들은 벌떡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표절이 아니라고 말하는 측은 애초에 이 방면에서 가장 유명한 God Save the Queen을 일곱 나라에서 가사만 번안해서 사용했음은 차치해두고, '도브루자의 땅이여' 부분이 애국가의 "동해 물과~"하는 부분이 흡사하기는 하지만 "도브루자의 땅이여"가 못갖춘마디로서 약박으로 시작하는 것과는 달리 애국가는 갖춘마디로서 강박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차이가 있고, 멜로디도 전체적인 분위기가 다르기 때문에 표절이라 할 만큼의 유사도는 없다는 것이다. 만약 이게 표절이라면 현재 이란 이슬람 공화국 국가 앞부분 역시 애국가의 "동해 물과~"의 부분과 흡사한데, 이것도 표절이란 말인가? 그렇게 따지면 즐거운 나의 집에서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의 첫 부분 등 동일한 음계로 진행되는 부분은 클래식부터 대중음악에 이르기까지 셀 수도 없다.

니콜로프가 던진 말 때문에 애국가를 바꿔야 된다는 논란이 일었다. 거기다 1976년 음악학자 이유선이 저서 <한국양악백년사>에서 안익태의 애국가 표절논란을 소개하면서 "대한민국은 완전 민주독립국가 아닌가요? 빨리 새로운 국가를 제정해야 됩니다!"라고 역설하며 애국가 교체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결국 논란 끝에 문화공보부는 1977년 "현행 애국가가 30년 이상 국가 노릇을 해왔음으로 보아 명확한 근거 없이 표절 여부를 논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된다"며 애국가 교체 논란을 종식시켰다. 하지만 이후에도 안익태가 불가리아 노래를 일부 표절한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있었다.

음악학자 허영한[11]은 면밀한 연구를 통해 애국가가 그간 알려진 대로 1936년에 베를린에서 작곡된 게 아니라 그에 앞서 1935년 필라델피아에서 이미 작곡된 것이라는 연구를 발표했다.

1935년 11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작곡되었고[12], 그해 12월 28일 안익태의 애국가가 초연되었다.[13] 불가리아 방문 전에 <애국가>가 작곡된 점은 사실이나, 공석준의 말처럼 독보(獨譜)에 의한 참고 여부는 알 수 없다.[14] 꼭 불가리아를 직접 방문해야만 불가리아의 노래를 접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김경래는 이렇게 썼다. "필라델피아의 커어티스음악학원에서 작곡을 공부할 무렵, 그는 무려 四十여 개국의 국가를 수집하여 연구에 착수했다. 이뿐만 아니라 세계각국의 민요, 가곡, 성가곡들도 모아 애국가 작곡을 위한 기초자료로 삼았었다."[15] 불가리아 방문과 무관하게 안익태는 <애국가>의 작곡을 위해 이미 '세계각국의 민요, 가곡, 성가곡들'과 같은 다양한 곡들을 기초자료로 삼았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를 접했을 개연성은 부정하기 어렵다.

반면 안익태의 조카 안경용 측은 후술할 2022년 <월간조선> 기사에서 "큰아버지(안익태)가 1938년인가 1940년에 불가리아로 가서 국립교향악단을 지휘했는데, 표절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불렀겠냐"고 반박하며, 애국가의 불가리아 민요 표절설에 대해 추후 불가리아 정부에다 공식 입장을 묻겠다고 밝혔다.

3.2. 친일 및 친나치 논란

안익태가 미국에 있을 동안에는 친일 행적과는 거의 무관했던 게 분명해 보이는데, 문제는 유럽으로 건너간 이후, 특별히 1938년부터 1944년까지의 행적이 논란이 되고 있다.

그간 안익태의 유럽에서의 행적은 안익태의 전기 작가 김경래와 부인 롤리타 탈라베라의 전기에 전적으로 의존해 왔었지만 연구자들이 이들 자료의 오류를 이것저것 지적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대체로 알려진 바로는 안익태는 일본의 추축동맹 관변단체인 "일본-독일협회"(이하 일독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고, 이들의 지원을 받아서 유럽 각국의 오케스트라들을 지휘할 수 있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고 있다.

2000년 <객석> 5월호에서 베를린 통신원 진화영이 안익태가 베를린에서 지휘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을 독일 연방 문서보관소 산하 영상기록보관소에서 발굴했는데, 거기에 일장기가 걸려있는 것 때문에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필름이 낡고 판독이 어려울 뿐더러, 개인 신분으로 복사 및 대여가 불가능한 터라 자세히 분석하지 못하고 의문만을 남긴 채 묻혔다. 그러나 2006년 송병욱이 '객석' 지에 이 영상의 정체를 밝혀 다시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바로 '만주국 축전 음악회'의 영상이었던 것이다. 실제 영상에 버젓이 "만주국 건국 10주년 축하 음악회"라는 자막과 나레이션이 붙어있고, 촬영된 장면은 "만주국"(혹은 만주환상곡)의 후반부 연주였다. 그리고 첫 발견 때 베를린 필 공연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베를린 대(大) 방송 관현악단과 라미 합창단이 출연했고, 합창 파트 작사가가 에하라 고이치(江原綱一, 1896~1969)였다.

그리고 거기에 표기돼 있던 "에키타이 안(Ekitai Ahn)"이라는 이름이 파문을 불러왔다. 안익태가 일본식 이름인 에키타이 안으로 활동했다는 것 또한 친일 행적을 꼬집는 사항이 되었다. 서재필의 비서였고 1960년대 UN 주재 한국 대사를 역임했던 임창영은 안익태가 미국에서도 에키타이 안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써서 꾸중을 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왜 서양에서 활동하는데 굳이 일본식 이름을 쓰냐는 것. 이에 대해 이탈리아에서 건축사로 근무하고 있고 안익태의 유족들과도 친분이 있으며,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라는 책을 집필한 유명 건축사 정태남은 에키타이는 일본식 표기가 아니라 안익태 자신이 스페인에서 살면서 현지인들이 자신의 이름을 이해하기 쉽도록 바꾼 스페인어식 이름이라고 했다. 참고로 현재 스페인식 표기는 Eak-tai Ahn이다.

하지만 연구가 지속되며 위 주장은 착각이었음이 밝혀졌다. 음악학자 허영한이 <낭만음악> 2006년 겨울호에 발표한 논문 '자필 기록에 의한 안익태의 유럽 활동 재구성'에 따르면 1941년 9월에 안익태가 자신이 직접 관현악 편곡한 바흐의 파이프오르간 작품 토카타와 푸가 C장조 총보에 EkiTay Ahn으로 자필 서명한 것이 익태 안이 아닌 에키타이 안으로 자신을 칭한 최초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자필 서명보다 더 이전인 1940년 9월 3일에 부다페스트에서 개최된 공연에서도 프로그램에 EKITAI AHN (Tokio)이라고 인쇄된 것을 볼 수 있어서, 유럽 활동 초반기부터 안익태의 이러한 일본어식 이름 표기는 공적이든 사적이든 이미 일반화되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결국 스페인에서 에키타이란 이름으로 활동한 건 맞지만 이는 그 이전부터 써오던 걸 그대로 썼을 뿐인 것이란 것이다.

그러나 유럽 활동 초반기부터 Ekitai라는 이름을 써왔다 해도 그것이 친일 행적이라고 볼 만한 근거는 없다. 조카 안경용(미국명 데이비드 안)은 <월간조선> 2020년 11월호 인터뷰에서 큰아버지 안익태가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했다는 견지를 밝혔는데, 안익태가 일본 유학 이후 도항증으로[16] 잠깐 귀국하고 미국 유학을 다니고자 조선총독부를 찾았다. 막상 총독부 관리가 이름을 묻자 안익태가 자신의 이름을 말했으나, 총독부 관리가 한글 받침을 읽지 못해 '에키타이 안'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안경용은 일본인 지인에게 에키타이와 유사한 이름을 들었냐고 묻자 그 일본인은 "몽골 장군 수부타이처럼 몽골 이름 같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미 얘기했듯 당시 여권은 조선총독부에서 발급했으므로 해외에서 활동하는 조선인의 여권상 표기되는 영문 이름이 일본식 발음으로 표기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한 손기정과 남승룡 역시 원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발음한 '손 키테이(Kitei)' '난 쇼류(Shoryu)'로 표기됐다. 또한 1940년 이전까지는 친일파든 아니든 조선인이 자기 마음대로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꿀 수조차 없었다.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인종차별하기 위해 그런 행위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익태, 손기정, 남승룡 등 1930년대 해외에서 여권을 받아 공식 활동한 조선인들의 알파벳 이름표기를 두고 친일 행보라 말하는 것은 근거가 희박하다. 특히 이들 세 명 모두 1940년대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조선식 이름을 고수했다.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안익태의 영문 스펠링명도 시기에 따라 가지가지인데, <낭만음악> 외에도 <월간조선>에서 열거된 바에 의하면 일본 및 영국에서 쓰던 에키타이 안 외에도 1930년 미국 신시내티 음악원 입학허가서상 기재된 'An Iktai'를 비롯, 미국 노동부 이민심사국 서류에선 'Iktai Ahn', 미국 유학 시 'Eak Tai Ahn' 등을 썼고, 1947년 스페인 정부로부터 영주권을 받고 'Eak-tai Ahn'을 썼다. 친필 사인에서도 'Ik Tai Ahn', 'EakTai Ahn', 'Eak T. Ahn', 'Eaktay Ahn' 등 일관성이 없긴 하지만 성씨만큼은 '안'을 고집해왔다. 어쨌든 그가 정말 친일을 위해 일본식 발음을 썼던 것이라면 일본이 패망하고 한국이 독립국이 된 후에까지 굳이 그런 표기를 고집했을 리가 없으므로 친일 때문이라고 보기엔 역시나 무리가 있다.

한편 안익태는 이 시기에 일본의 궁중음악 "에텐라쿠"를 바탕으로 한 같은 이름의 관현악 환상곡(또는 교향시)을 작곡했는데, 이것을 적당히 손질해서 나중에 내놓은 게 한국의 아악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강천성악"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다. 심지어 이것은 독립기념관에 소장된 안익태 사료 중 1981년에 안익태기념사업회에서 발행한 강천성악 총보 해설에까지 그대로 실려 있다. 독립기념관 홈페이지에 소개된 해당 자료의 설명을 그대로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안익태가 작곡한 「강천성악(降天聲樂)」오케스트라 총본이다. 「강천성악」은 일본 아악(가가쿠라고 함. 상술한 에텐라쿠와도 연관성이 있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크게 3부분으로 나뉘며, 구조는 A-B-A이며, 작곡 연대는 1936년으로 추정된다." 만주국 동영상 공개 이후 송병욱이 헝가리 국립영상보관소에서 이 곡의 연주 장면 일부를 담은 기록영화 동영상을 찾아냈는데, 이 동영상에서도 강천성악과 대동소이하게 일본 에텐라쿠의 선율이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중간부가 생생히 촬영되어 있다. 또한 황기 2600년 봉축곡까지 관련되어 있음은 물론이고 1941년에 명치절(메이지 덴노 생일)을 기념하여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연주한 전력이 발굴되었다. #

이런 행적들이 드러나면서 결국 안익태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여담으로 안익태의 형인 안익조도 친일인명사전의 군 부문에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한때 친일파가 작곡한 것을 국가로 쓰는게 말이 되냐면서 국가를 바꾸자고 논란이 되기도 했다. 전술한 안경용은 <월간조선> 2020년 11월호를 통해 <만주 환상곡>은 만주를 한민족의 땅으로 보면서 만주땅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뜻으로 지었다고 반론을 제기했는데, 안경용 측의 증언에 의하면 큰아버지 안익태가 만주를 우리 땅으로 여기며 학창 시절 할머니(안익태의 모친)의 심부름을 받아 만주는 물론 시베리아까지 다녔다고 하며, 안익태 뿐만 아니라 이북 사람들도 만주를 우리 땅으로 생각하며 압록강을 건넜다는 얘기도 안익태에게서 들었다고 한다.

2015년 독일인 한국학자 프랑크 호프만이 공개한 미 육군 유럽사령부 정보국 기밀문서를 통해 당시 주 베를린 만주국공사관 참사관이던 에하라가 재독 예술인들의 정보 수집에 나섰다고 주장했는데, 1941년부터 2년 반 동안 안익태의 집에 머물렀다는 점으로 보아 일본 첩보기관의 '스페셜 에이전트'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2019년 1월에는 이해영 한신대 교수가 안익태가 친일 뿐 아니라 친나치 행적까지 있어 전쟁 후 프랑스에서 기피인물로 지정할 정도였다는 내용을 독일 정부 문서보관소에서 찾아냈으며, 더 이상 친일파의 작품인 애국가를 유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국가 교체 운동'을 국회에 건의하는 등 공론화하겠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이 교수가 그간의 안익태 친일/친나치론 연구를 집대성한 <안익태 스토리>를 냈는데, 역사학자 김형석(당시 안익태기념재단 연구위원장) 측은 가평뮤직빌리지 1939음악역 내 '1939음악홀'에서 열린 제2회 '음악역1939 포럼 음담패설'이란 행사에서 반박에 나섰다.

안경용 측도 <월간조선>에서 호프만의 주장에 대해 사실관계가 부족하다며 반박한 바 있는데, 당시 일본과 독일이 동맹관계라는 점, 스파이 특성상 비밀유지를 위해 특별 에이전트를 자기 집에 두지 않는 점, 에하라가 독일 패망 후 귀국해서 변호사로 일했다는 점 등을 들어 반박했고, 김형석도 에하라의 첩보활동 행적에 대해 물증이 없고 에하라가 베를린의 안익태 집에 머문 것도 안익태가 2년 반 동안 외지 공연만 16번을 했고, 이에 따른 연습 일정 등으로 보아 9개월 정도일지 모른다고 보았다. 안경용 측도 이를 입증하기 위해 여러 수단을 동원하여 에하라의 후손을 찾아 검증하겠다고 밝혔다.

이해영의 지적조차 과장이라는 반론도 많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제국음악원 회원에 이름을 올리는 등의 친나치 행적으로 프랑스의 기피 인물이 되었다는 주장과 달리, 안익태는 전후에도 프랑스 음악계에 출연했다. 1961년 2월 2일 밤에 파리 샹젤리제 극장(Théâtre des Champs-Elysées)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안익태는 파리 국립고등음악무용원(CNSMD de Paris)[17]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한 바 있다. 그리고 이때도 '한국환상곡'을 지휘하여 호평을 받았다.

2019년 김형석의 견해와 안경용의 인터뷰를 종합해 보면 그가 가입한 1943년 기준 독일제국음악원 회원 수는 안익태 포함 17만명이었고, 비 아리아계 회원은 1,024명이었다. 회원 자격은 일종의 노동허가증이라 이마저도 없으면 음악 활동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자격이 친나치 행적을 입증해 줄 증거가 될 수 없는 노릇이다. 또한 이해영이 주장한 '1944년 스페인 도주' 언급에 대해선 당시 중립국이던 스페인 대사가 파리 레지스탕스의 무장투쟁과 연합군의 폭격을 우려하여 열차를 타고 피신한 거라고 반박했다.

2차 대전 직후 나치 청산 광풍이 불 당시에야 잠시 배척되었을 수 있으나, 훨씬 노골적인 친 나치 활동을 벌였던 다른 유럽의 음악가들도 버젓이 다 사면받고 활동을 이어간 마당에 안익태의 행적은 큰 문제가 될게 없었다. 예컨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나치당 당원이었고 훨씬 많은 친나치 행적이 있으나, 1948년까지만 활동 금지 처분을 받은 뒤에 현역으로 복귀하여 활발히 활동했다. 역시 프랑스의 명 지휘자로 꼽히는 앙드레 클뤼탕스(André Cluytens)도 비시 괴뢰정부와 독일 점령군을 위한 음악회를 조직, 참여했다는 이유로 한때 활동 금지되었으나, 역시 얼마 안 가서 파리 국립고등음악무용원 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이처럼 대전 중 나치 치하에서 활동한 음악가들은 대부분 불가피한 생계형 부역이었다는 점을 인정받고 무난히 현역에 복귀했다. 또한 역사학자 김형석(안익태기념재단 연구위원장)은 안익태의 '친 나치 의혹'에 맞서 음악적으로 극일을 실천한 점을 강조코자 <안익태의 극일 스토리>라는 책을 냈다.

<에텐라쿠>의 친일 요소에 대해서도 안경용은 반박을 내놓은 바 있는데, 안경용 자신이 일본 정부에 편지를 보낸 결과 안익태가 일본 덴노에게 헌정한다는 의미를 담아 곡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없다는 식으로 밝혔고, 한자명인 '越天樂'이 하늘에서 내려온 음악이란 뜻이라고 하면서 큰아버지 안익태 자신도 "음악은 인간이 만든 게 아니라 하늘이 내리신 것"이라 했고, <강천성악>과의 유사성도 통일 신라 시대 거문고 명인인 옥보고가 <강천성곡>을 지었다는 역사적 기록을 언급하며 "강천성곡의 뜻이 에텐라쿠로 전해진 것"이라 주장했고, 자기 집안 사람들끼리 전해지는 얘기인 "안익태 측은 벼농사나 불교처럼 음악도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넘어갔다고 생각한 사람"이라는 견해도 덧붙였다.

2020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김원웅 광복회장이 안익태의 독일 공연 당시 영상 등을 언급하며 '친 나치 행적 자료'라고 주장하거나,[18] 라디오 방송에서까지 "안익태가 지은 국가의 가사가 불가리아 민요를 베꼈다"는 식[19]의 여러 주장을 하자, 11월 9일에 안익태의 친조카 안경용이 김원웅을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고소했지만 2021년 4월 28일 서울중부경찰서는 이를 불송치했고, 11월 26일 서울중앙지검은 이를 불기소 처분시켰다. 이에 안경용 측은 불복하며 서울고등검찰청에 항고했으나 2022년 1월 12일에 또 기각됐다. 안경용 측은 동년 2월 서울고등법원에 재정신청까지 냈으나 4월 15일에 이마저도 기각됐다.

4. 평가

친일 논란이 불거지기 전까지 안익태는 세계 무대에서 활동한 한국인 음악가였고, 애국가를 작곡한 위대한 음악가로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일각에서 그가 친일 인사라는 주장이 나오며 이런 평가에도 금이 가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1994년 탄생 88주기를 맞이하여 문을 열었던 안익태 음악제는 2000년대 와서 흐지부지되었다.

한편, 안익태의 조카 안경용 측은 전술한 <월간조선> 등지에서 안익태에 대해 "정치적 친일 행위자도, 친나치주의자도 아닌 세계적인 음악가이자 지휘자, 그리고 애국자"라는 식으로 주장했다. 또한 김형석의 연구에서 보듯 1960년 2월 <한국 환상곡>을 광복 이래 처음으로 일본에서 연주할 당시 일본인 합창단원들에게 애국가를 한국어로 부르게 했다는 점, 1965년 4월 10일 NHK TV 실황 중계 때 도쿄필하모닉 교향악단과의 공연 때 <논개>를 지휘하겠다고 고집을 내세워 이를 관철시켰다는 점 등이 꼽힌다.(중앙일보 예영준 칼럼)

5. 주요 작품 목록

  • 성악 모음곡 '한국의 생활'(1934-35)
  • 애국가(1936)[20]
  • 교향시 '강천성악'(1936?)
  • 한국환상곡(1936-37?)
  • 환상곡 '에텐라쿠': 1930년대로 추정, 1944년 이후 악보는 행방불명. 강천성악과 동일 작품으로도 간주됨.
  • 교향 환상곡 제2번 '교쿠토(극동)': 1930년대로 추정, 1944년 이후 악보는 행방불명. 한국환상곡의 1차 개작판으로도 간주됨.
  • 만주국 축전곡(혹은 만주국, 만주환상곡): 1940년대로 추정, 1944년 이후 악보는 행방불명. 한국환상곡의 2차 개작판으로도 간주됨.
  • 교향시 '마요르카'(1948, 2006년에 자필악보 발견)
  • 교향시 '포르멘토르의 소나무'(1951, 2006년에 자필악보 발견)
  • 교향시 '논개'(1962)
  • 애국지사 추모곡(1962)
  • 한국무곡(1963)
  • 서강대학교 교가(1964)
  • 유한공업고등학교 교가(1964)[유한중학교]악보

6. 가족관계 및 여담

  • 그가 1946년부터 사망 시까지 19년간 거주해 온 스페인 마요르카 자택은 사후 아내 로리타 안이 관리해 오다가, 한국 국적을 유지한 탓에 생활고에 시달리자 조그만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1990년 스웨덴 인터불고 그룹 창업주인 권영호가 매입하면서 유족들이 옛 집에 돌아오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냈다. 뒤이어 권영호 측은 그 집을 수리하고 1991년 대한민국 외무부에 기증했다. 당초 외무부 측은 재외공관 외의 해외 재산을 취득한 전례가 없던 데다 재원 조달 문제 등으로 거부했으나, 1992년 8월 4일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유택 보존 대책을 강구토록 하면서 이는 성사되었다. 이후 한국일보 측이 기념사업을 위한 국민성금 운동을 벌여 '안익태기념사업재단(현 안익태기념재단)'이 세워졌고, 재단 측은 한동안 유택 관리비를 내가며 지원해 왔으며 2016년 개/보수를 거쳐 '안익태기념관'으로 재탄생했다.
  • 아내 로리타 안(1915~2009, 마리아 돌로레스 탈라베라, 애칭 로리타)은 바르셀로나 백작 가문의 딸로 태어나 안익태의 팬이 되었고, 안익태의 매니저로 활동하다가 1946년 결혼에 골인했다. 한국 국적을 버린 남편과 달리 안익태와의 혼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취득한 한국 국적을 평생 유지하며 1981년부터 몇 차례 한국을 찾아왔고 특히 1982년 한국 영주를 위해 방한하여 정착금 3백만원 및 압구정 현대아파트를 받았으며 1983년 12월 14일자 KBS2 <11시에 만납시다>에 나오기도 했으나, 동월 23일 3녀 레오노르의 결혼 때문에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2005년에는 문화관광부를 방문해 "애국가는 한국인들의 것이니 마땅히 한국에 돌려 주어야 한다"는 말과 함께 애국가의 저작권을 영구 기증함으로써 길고긴 저작권 논란의 고리를 끊었다. 자신을 한국인으로 주장하며 2002년 한일월드컵 스페인 전에도 한국을 응원했다고 하니, 이방자, 프란체스카 도너처럼 진심으로 남편의 나라를 사랑했던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한국 정부도 그 사실을 기려 2009년 그녀가 사망하자 국립서울현충원에 예우를 갖춰 안장했다. 3녀 레오노르 안은 1982년 어머니를 따라 한국에 머물 적 KBS 국제방송국에서 1년여 간 스페인어 방송을 진행한 바 있으며# 최근에는 마요르카의 유택(안익태기념관)을 관리 중이다. 또한 2022년 스페인 나토 정상회의 참석차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을 만났다. 친조카로는 안경용(데이비드 안, 막내동생 안익범의 장남)이 있는데, 1982년 미국 이민 후 '리모트컨트롤 시스템'을 운영 중이다.
  • 조카 안경용의 <월간조선> 증언에 따르면 안익태의 평소 성격이 평양 출신이라 직설적이고 신경질적이며 성급했다고 언급했는데, 이는 안익태 가문의 주 특성이었다고 한다. 1955년 귀국 당시 낡은 가방에 다 찢어진 구두 차림인 터라 막내동생 안익범이 "구두 한 켤레 사 드릴까요?"라고 하자, 안익태는 "아, 됐어, 됐어!"라며 손을 내저었다는 일화가 이를 증명한다. 또한 집에 와서도 일본인을 '왜놈'이라 칭한 일화가 있는데, 다른 집안 사람들도 썼던 표현이었다고 한다.
  • 약간 의외일 수도 있겠지만, 학창시절 야구선수로 활동한 이력이 있다. 1922년 전조선야구대회에 숭실중학 대표(2루수, 4번타자)로 출장한 기록이 남아있다. 기사에 따르면 안익태가 일본으로 유학한 시기가 1921년으로 알려져 있어 연도가 맞지 않는데, 1922년의 동아일보 기사에 안익태가 숭실중학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한 기록이 있는 점, 안익태 주변인물들의 증언 등을 종합했을 때 당시의 야구선수가 안익태 본인이 맞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 KBS2 스펀지 2005년 3월 19일 방영분에 의하면 그 악명높은 교도소알카트라즈에 잠깐 수감된 적이 있다고 하였다. 안익태가 미국으로 향할 때 탑승한 배에서 뜻밖에 제의로 매주 일요일 선상예배에서 첼로 독주회를 열었는데,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후 세관의 첼로 소독을 이유로 실랑이를 벌여 당시 이민국이 공무집행방해죄, 관세법, 이민법을 적용해 그를 알카트라즈에 수감하였다. 그는 교도소에 근무하던 교도관의 도움으로 첼로를 건네받아 감방에서도 첼로 독주회를 열었고, 이에 첼로 연주에 감동받은 한 교도관의 도움으로 하루만에 풀려났다고 한다. 그러나 방영 당시 지식의 별은 아쉽게도 4개 반밖에 못땄다.
  • 2000년대 와서 애국가의 저작권료가 스페인에 거주하는 후손들에게 지급되어 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친일에 표절까지 거론당하면서 돈까지 뜯으려고 한다는 비난이 터졌다. 애국가를 새로 바꾸자는 이야기가 또 다시 떠올랐고, 결국 2005년 후손들은 애국가의 저작권을 완전히 포기하고 대한민국 정부에 넘긴다. 이렇게 저작권 포기가 된 상태에서 KBS교향악단이 녹음본에 대한 음원 저작권 등록을 하였고, 마땅한 음원이 달리 없었으므로 공익의 목적으로 애국가를 틀 때를 제외하곤 KBS에 저작권료를 지불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으나 2018년 12월, 정부에서 애국가의 새 음원을 만들어 상업적으로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7. 대중매체에서

  • 단독 작품으로 1981년 12월 1~2일 이틀에 걸쳐 KBS 1TV에서 방영한 TV방송 20주년 특집극 <코리아 환상곡(극본 이상현, 연출 심현우)>이 있는데 당시 안익태 역은 배우 강태기(청년기) 및 이순재(장~노년기)가 각각 맡았다. 제작 당시 탤런트 200여명, 엑스트라 2,500여명 등 총 제작인원 9천여명이 동원되었으며 여의도 KBS 별관 옆 공터에 1930년대 평양 거리를 재현한 세트장을 차렸고, 미국, 일본, 스페인 등 총 6개국 8개 도시를 돌며 해외로케까지 진행할 정도로 공을 들였다. 이 과정에서 커티스 음악원 학장/교수진 및 학생들, 스페인 마요르카 합창단 및 관현악단도 찬조출연시켰으며 유진 오먼디(1899~1985)를 모셔다 인터뷰를 시키기도 했다.(#1, #2)
  • 1994년작 애니메이션 <초롱이의 옛날여행>의 에피소드 중 하나로 나왔다.
  • 2023년에는 안익태기념재단과 팔컴이 영화 <코리아 환타지(가제)> 제작을 위한 업무 협약을 맺었다. 2024년부터 미국, 일본, 독일, 헝가리, 스웨덴 등을 돌며 해외로케를 진행하여 2025년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다.#

8. 관련 단체



[1] 스페인과 한국의 시차를 반영하여 일부 자료에서는 9월 17일로 나온다.[2] 음악특기생 입학.[3] 쿠니타치는 한자로 쓰면 國立기 때문에 일본의 국립학교로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으나, 일본어로 국립의 발음은 코쿠리츠 이며, 소재지인 도쿄도 구니타치시의 이름을 땄을 뿐인 사립학교이다. 지금은 도쿄도 다치가와시로 이전했지만 명칭은 그대로 쓰고 있다. 개교 당시에는 23구 내에 있었다.[4] 일본 수상 고노에 후미마로의 동생.[5] https://maria.catholic.or.kr/dictionary/term/term_view.asp?ctxtIdNum=2262&keyword=&gubun=01[6] 2009년 작고[7] 작사가가 누구인가가 역사학의 단골 떡밥이다. 애국가 문서 참조.[8] 한국에는 '작별' 내지는 '석별의 정'이란 제목으로 알려졌다.[9] 영화 실미도에서 극중 684부대원들이 애국가 가사에 올드 랭 사인의 가락을 붙여 부르는 모습이 나온다.[10] 당시 불가리아는 공산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한국과 외교 관계가 없었다.[11] 안익태의 미국과 유럽에서의 활동을 면밀히 연구하는 사람이다.[12] 허영한, 「미주 <한인학생회보>를 통해 본 안익태의 미국 유학시절」, [낭만음악\] 제40호, 낭만음악사, 1998, 18쪽.[13] 이해영, [안익태 케이스\], 19쪽.[14] 공석준, 「愛國歌의 剽窃是非에 關한 小考」, [愛國歌와 安益泰\](金景來 著, 서울: 성광문화사, 1978), 328-329쪽.[15] 金景來, [코리아 幼想曲: 安益泰의 榮光과 슬픔\], 서울: 玄岩社, 1966, 132쪽.[16] 당시에는 한일 합병 이후라 일본 여권으로 통일되었다.[17] 1795년 설립된 세계 최초의 음악무용원(Conservatoire)으로, 예술계 최고 명문학교 중의 하나이다. 흔히 '파리 음악원'으로 줄여 부른다.[18] 김원웅이 제시한 해당 영상은 2006년 재독 유학생이던 송병욱이 발견한 베를린 필하모닉 대극장 공연 장면으로, 독일 정부도 이를 '친 나치의 증거'라고 규정해서 전달하지 않았다.[19] 1979년에 공석준 연세대 음대 교수는 논문을 써서 표절이 아니라고 밝혔으며, 문화공보부 역시 표절이 아님을 인정했다.[20] 상술했듯 1935년 11월경에 작곡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1936년이다.[유한중학교] 지금은 없어진 과거 유한중학교 교가와도 통용된다.[22] 국군 헌병장교로 임관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빼도 박도 못하는 사형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