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음악사의 주요 인물·기록물 | ||||
{{{#!wiki style="word-break: keep-all; 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고대 | 메소포타미아 음악 | <colbgcolor=#FFF,#1C1D1F>후르리인의 닌갈 찬가 | |
그리스 음악 | 세이킬로스의 노래 · 델포이 찬가 | |||
중세 음악 | 노트르담 악파 | 레오냉 · 페로탱 | ||
아르스 노바 | 비트리 · 마쇼 | |||
기타 | 란디니 · 던스터블 · 빙엔 | |||
르네상스 음악 | 부르고뉴 악파 | 뒤파이 · 뱅슈아 | ||
플랑드르 악파 | 오케겜 · 프레 · 이자크 | |||
이탈리아 | 팔레스트리나 · 라수스 · 카치니 · 가브리엘리 | |||
스페인 | 빅토리아 | |||
영국 | 탈리스 · 버드 · 다울런드 | |||
독일 | 루터 · 스벨링크 · 프레토리우스 · 하슬러 | |||
프랑스 | 샹보니에르 · 륄리 · 레벨 · 마레 · 캉프라 · 샤르팡티에 · 라모 · 쿠프랭 · 드 라 게르 · 르클레어 · 루아예 | |||
이탈리아 | 몬테베르디 · 알레그리 · 프레스코발디 · 카발리 · 카리시미 · 스트로치 · 스트라델라 · 코렐리 · 스테파니 · 토렐리 · A. 스카를라티 · 비탈리 · 로티 · A. 마르첼로 · 칼다라 · G. 보논치니 · 알비노니 · A. M. 보논치니 · 비발디 · 사로 · D. 스카를라티 · B. 마르첼로 · 포르포라 · 제미니아니 · 빈치 · 페오 · 타르티니 · 로카텔리 · 레오 · R. 브로스키 · 로그로시노 · 셀리토 · 파리넬리 · 페르골레지 | |||
중부 유럽 | 비버 · 쉿츠 · 산즈 · 프로베르거 · 파헬벨 · 툰더 · 북스테후데 · 젤렌카 · 마테존 · 하이니헨 · 텔레만 · J. S. 바흐 · 파슈 · 피젠델 | |||
영국 | 퍼셀 · 헨델 · 애비슨 | |||
고전주의 | 전고전(로코코) | 하세 · J. G. 그라운 · C. H. 그라운 · 마르티니 · 아라야 · F. 벤다 · 루소 · W. F. 바흐 · 보이스 · C. P. E. 바흐 · 글루크 · 욤멜리 · J. 슈타미츠 · L. 모차르트 · 아벨 | ||
초기 고전파 | G. 벤다 · 베르토니 · 트라에타 · 하이든 · 고세크 · M. 하이든 · C. 슈타미츠 · J. C. 바흐 · 파이지엘로 · 보케리니 | |||
후기 고전파와 과도기 | 치마로사 · 살리에리 · 클레멘티 · 모차르트 · 케루비니 · 카룰리 · 베토벤 · 훔멜 · 소르 · 줄리아니 · 쿨라우 · 리스 · 카르카시 | |||
낭만주의 | 전기 낭만주의 | 초기 낭만파 | 아구아도 · 베버 · 파가니니 · 레냐니 · F. 모차르트 · 슈베르트 · 글린카 · 슈포어 · 메르츠 | |
독일, 오스트리아 낭만주의 | 멘델스존 · 슈만 · C. 슈만 | |||
미국, 프랑스 낭만주의 | 베를리오즈 · 코스트 · 구노 · 포스터 · 고트샬크 | |||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 | 체르니 · 쇼팽 · 리스트 · 탈베르크 · 알캉 · 헨젤트 · 루빈시테인 | |||
오페라 | 로시니 · 마이어베어 · 도니체티 · 벨리니 | |||
빈 왈츠 | 라너 · J. 슈트라우스 1세 · 주페 · J. 슈트라우스 2세 · 페피 · E. 슈트라우스 · 치러 · J. 슈트라우스 3세 | |||
후기 낭만주의 | 독일, 오스트리아 후기 낭만 | 바그너 · 라이네케 · 브루크너 · 뷜로 · 브람스 · 브루흐 · 로트 · 볼프 · 말러 · R. 슈트라우스 · 레거 · 라블 · 크라이슬러 · 푸르트뱅글러 · 코른골트 · 슈레커 · 라프 · 라인베르거 | ||
이탈리아 낭만주의 오페라 | 베르디 · 폰키엘리 · 푸치니 · 레온카발로 · 마스카니 | |||
프랑스 후기 낭만 | 비외탕 · 생상스 · 비제 · 오펜바흐 · 발퇴펠 · 뒤카 · 포레 · 프랑크 · 랄로 · 이자이 · 사티 | |||
러시아 후기 낭만 | 차이콥스키 · 라흐마니노프 · 스크랴빈 · 메트네르 · 아렌스키 · 글라주노프 · 칼리니코프 · 보르트키에비치 | |||
영국 낭만주의 | 엘가 · 홀스트 · 브리지 · 본 윌리엄스 · 블리스 · 핀치 | |||
폴란드 낭만주의 | 봉다제프스카 · 모슈코프스키 · 호프만 · 시마노프스키 | |||
미국 후기 낭만 | 와이먼 · 수자 · 오르트 · 고도프스키 | |||
루마니아, 크로아티아 낭만주의 | 이바노비치 · 페야체비치 | |||
국민악파 | 러시아 | 무소륵스키 · 보로딘 · 림스키코르사코프 · 발라키레프 · 큐이 · 글리에르 · 랴푸노프 | ||
중부 유럽 | 스메타나 · 드보르자크 · 야나체크 · 에네스쿠 · 도흐나니 · 흐리스토프 · 블라디게로프 · 모니우슈코 · 비에니아프스키 · | |||
북유럽 | 닐센 · 그리그 · 시벨리우스 · 알벤 | |||
스페인 | 사라사테 · 타레가 · 알베니스 · 라라 · 그라나도스 · 파야 · 요베트 · 투리나 · 토로바 · 사인스 데 라 마사 · 로드리고 | |||
프랑스, 이탈리아 | 쇼송 · 당디 · 레스피기 | |||
20세기음악 | ||||
인상주의 | 드뷔시 · 라벨 · 고베르 · 이베르 · 호세 | |||
신고전주의 | 부조니 · 스트라빈스키 · 힌데미트 · 바체비치 | |||
제2 빈 악파 | 쇤베르크 · 베베른 · 베르크 | |||
프랑스 근현대 음악 | 풀랑크 · 불랑제 · 미요 · 테유페르 · 오네게르 · 메시앙 · 뒤티외 · 불레즈 · 뒤사팽 · 졸리베 · 디앙 · 페송 | |||
영국 근현대 음악 | 소랍지 · 월튼 · 티펫 · 브리튼 · 두아르테 | |||
앵글로아메리카 근현대 음악 | 바레즈 · 조플린 · 아이브스 · 거슈윈 · 그로페 · 바일 · 코플런드 · 앤더슨 · 카터 · 바버 · 케이지 · 낸캐로우 · 배빗 · 해리슨 · 번스타인 · 로렘 · 펠드먼 · 무친스키 · 크럼 · 존 윌리엄스 · 테니 · 라일리 · 영 · 라이히 · 글래스 · 다비도브스키 · 제프스키 · 볼컴 · 애덤스 · 에바즌 · 랭 · 체르노빈 · 리버만 · 히그던 · 캐시디 · 노먼 · 비비에 · 아믈랭 | |||
라틴 아메리카 근현대 음악 | 로사스 · 폰세 · 브라우어 · 라우로 · 레쿠오나 · 망고레 · 빌라로부스 · 히나스테라 · 피아졸라 | |||
소련-러시아 근현대 음악 | 프로코피예프 · 쇼스타코비치 · 하차투리안 · 시닛케 · 카발레프스키 · 먀스콥스키 · 스비리도프 · 구바이둘리나 · 셰드린 · 카푸스틴 · 스코릭 · 아르투니안 | |||
헝가리 근현대 음악 | 버르토크 · 코다이 · 리게티 · 쿠르탁 · 외트뵈시 | |||
폴란드 현대 음악 | 루토스와프스키 · 펜데레츠키 · 구레츠키 | |||
독일-오스트리아 현대 음악 | 슈토크하우젠 · 치머만 · 라헨만 · 헨체 | |||
이탈리아 현대 음악 | 카스텔누오보테데스코 · 로타 · 노노 · 달라피콜라 · 베리오 · 샤리노 · 페델레 | |||
한국 현대 음악 | 백병동 · 강석희 · 나인용 · 나운영 · 이만방 | |||
기타 | 크세나키스 · 바인 · 아브라함센 · 김순남 · 윤이상 · 라우타바라 · 카잔지예프 · 탄 · 타케미츠 · 진은숙 · 박-파안 영희 · 요시마츠 · 첸 · 도이처 | }}}}}}}}} |
<colbgcolor=#000><colcolor=#fff>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 Carl Philipp Emanuel Bach | |
출생 | 1714년 3월 8일 |
신성 로마 제국 바이마르 | |
사망 | 1788년 12월 14일 (향년 74세) |
신성 로마 제국 함부르크 | |
직업 | 작곡가, 건반 악기 연주자, 음악교육가 |
사조 | 고전파 |
종교 | 기독교(개신교, 루터회) |
서명 |
[clearfix]
1. 개요
독일의 작곡가, 건반 악기 연주가, 음악교육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3남으로 주요 활동지에 착안해 베를린의 바흐나 함부르크의 바흐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한다.2. 생애
2.1. 초기
바이마르에서 태어났고, 아버지 바흐의 임지가 쾨텐과 라이프치히로 차례로 옮겨감에 따라 같이 이주했다. 라이프치히에서는 1723년부터 아버지가 칸토어(교회음악 악장)로 봉직하고 있던 장크트 토마스 교회의 부속학교에서 학업을 시작했고, 졸업 후인 1731년부터는 라이프치히 대학교와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데르의 피아드리나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카를이 법학을 전공한것은 아버지 바흐가 아들들에게 "음악가로서 왕족과 귀족에게 하인 취급을 받지않으려면 학식을 갖추어야한다" 강조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1]1738년에 일단 졸업을 했지만, 이미 1731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쳄발로 등 건반 악기의 연주와 작곡 활동에서 더 적성을 찾았는지 법학을 포기하고 음악가로 진로를 바꾸었다. 첫 직장은 진로 결정 후 몇 달 뒤에 잡았던 프로이센 왕국의 궁정 악단 객원 단원직이었고, 2년 뒤인 1740년에는 당시 왕세자였던 프리드리히가 프리드리히 2세로 왕위를 계승하면서 정단원으로 승진했다.
이 시기 동안 플루트를 수준급으로 연주하고 직접 작곡도 하는 왕을 위해 여러 편의 플루트 소나타나 협주곡을 써서 진상하기도 했고, 자신의 장기였던 건반 악기를 위한 소나타와 독주곡들도 여럿 작곡해 발표했다. 이 공로로 왕의 총애를 받기 시작해 1746년에는 실내악 단원으로 추가 승급되었고, 칸타타 등 종교음악 영역에서도 작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1744년 부유한 포도주상의 딸이었던 요하나 마리아(Johanna Maria, 1724~1795)와 결혼하여 3남매를 두었다. 특히 1748년 아들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에서 따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2세라고 지었다. 당시 진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도 참석하면 좋았겠지만 사정상으로 참석하지는 못한다.
2.2. 이후
작곡과 연주 활동 외에는 특히 자신의 장기였던 건반 악기 연주 실력을 살려 1752년에 '올바른 클라비어 연주법에 대한 시론(Versuch über die wahre Art das Clavier zu spielen)'이라는 교본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 교본은 바흐 생전에만 해도 3판까지 발행될 정도로 굉장한 수요를 자랑했고, 심지어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와 베토벤도 건반 악기 연주와 작곡법을 이 교본에서 많이 참고했으며 에마누엘 바흐를 높이 평가했다.하지만 바흐와 프리드리히 2세 사이의 관계는 늘 원만하고 친근하지만은 않았다. 바흐가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하고 자신의 개성을 작곡에서 발휘하기 시작하면서 취향 문제로 종종 논쟁이 빚어졌다. 왕은 후기 바로크와 초기 고전의 연장선상에서 비교적 고상하고 우아한 음악을 추구했지만, 바흐는 보다 작곡자 자신의 감성에 충실한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럭셔리한 왕 취미 맞춰주기가 지긋지긋했는지는 모르지만, 1768년에 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친구였던 게오르크 필립 텔레만의 후임으로 함부르크의 칸토르가 되었다. 이 시기를 대개 후기 활동기로 보며, 아버지가 라이프치히 시절 그랬듯이 여러 편의 수난곡이나 종교 칸타타, 모테트, 리타나이(연도) 등 종교음악의 창작에 주력했다.
물론 기악곡 쪽에서도 당시 떠오르던 후배 하이든의 활동상에 자극받아 여러 편의 신포니아(교향곡)를 비롯한 작품들을 내놓기도 했다. 1788년에 함부르크에서 타계했으며, 유해는 장크트 미하엘 교회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3. 주요 작품들
현존작, 소실작, 의심작까지 합쳐 800여 곡에 이르는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의 작품 분류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1905년에 가장 먼저 체계적인 분류 작업을 완료한 벨기에의 음악학자 알프레드 보트퀴엔느(Alfred Wotquenne)의 성을 약어로 한 Wq 번호와 1989년에 두 번째로 재분류한 유진 헬름(Eugene Helm)의 성을 약어로 한 H 번호 두 가지가 혼용되고 있다.
종래에는 보트퀴엔느 번호가 많이 쓰였지만, 1990년대 들어 헬름 번호와 혼용하거나 헬름 번호만으로 분류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 관현악곡
- 관현악을 위한 4곡의 신포니아 (통칭 '베를린 신포니아'. Wq 174, 175, 179, 181, H 649, 650, 654, 656)
- 현악 합주를 위한 6곡의 신포니아 (통칭 '함부르크 신포니아'. Wq 182, H 657~662)
- 관현악을 위한 4곡의 신포니아 (Wq 183, H 663~666)
- 협주곡
- 쳄발로 협주곡 C장조 (Wq 20, H 423)
- 쳄발로 협주곡 D단조 (Wq 22, H 425)
- 쳄발로 협주곡 G장조 (Wq 44, H 477)
- 쳄발로 협주곡 D장조 (Wq 45, H 478)
- 첼로 협주곡 A단조 (Wq 170, H 432)
- 첼로 협주곡 A장조 (Wq 172, H 439)
- 플루트 협주곡 A장조 (Wq 168, H 438)
- 플루트 협주곡 G장조 (Wq 169, H 445)
- 오보에 협주곡 B플랫장조 (Wq 164, H 466)
- 오보에 협주곡 E플랫장조 (Wq 165, H 468)
- 실내악
- 플루트와 바이올린을 위한 2중주 E단조 (Wq 140, H 598)
- 플루트, 바이올린과 베이스를 위한 3중주 B단조 (Wq 143, H 567)
- 플루트, 바이올린과 베이스를 위한 3중주 C장조 (Wq 147, H 571)
- 소나타
- 6곡의 쳄발로 소나타 (Wq 63, H 70~75)
- 두 대의 바이올린과 베이스를 위한 트리오 소나타 B플랫장조 (Wq 158, H 584)
- 두 대의 바이올린과 베이스를 위한 트리오 소나타 C단조 (Wq 161-1, H 579)
- 비올라 다 감바 소나타 D장조 (Wq 137, H 559)
- 5곡의 플루트 소나타 (Wq 83~87, H 505, 506, 508, 509, 515)
- 플루트 소나타 G장조 (통칭 '함부르크 소나타'. Wq 133, H 564)
- 성악곡
- 칸타타 '필리스와 티르시스' (Wq 232)
- 마태수난곡 (Wq 234)
- 오라토리오 '황야의 이스라엘' (Wq 238)
- 오라토리오 '예수의 부활과 승천' (Wq 240)
3.1. 솔페지에토
C단조 솔페지에토 (Solfeggietto in C minor) (Wq 117:2, H 220)
그의 작품 중에 가장 잘 알려진 곡. 연구에 따르면 솔페지에토가 아니라 솔페지오(Solfeggio)라고 적어야 정확하다고 한다. 아동용 피아노 교재에 간간이 소개되어 콩쿠르에 나갈 때 많이 연주되는 곡이며 피아노 타일 2에 수록되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다른 악기, 다른 장르로 편곡되기도 하며, 심지어는 자동피아노를 위해 5성부 카논 형식으로 편곡된 적도 있다!
4. 작품 성향
흔히 '감정적인 양식(Empfindsamer Stil)'이라는 용어로 분류되는 것이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의 작품 성향인데,[2]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고 아버지나 텔레만 등을 비롯한 동시대 선배들의 강한 영향권 밑에 있다가 짬을 먹어가면서 점차 본능에 충실한 작곡 양상을 나타냈다고 볼 수 있다.특히 프로이센 왕과 마찰이 심해진 베를린 시대의 후반기와 함부르크 시대에 이런 경향이 전면적으로 나타나는데, 몇몇 보수적인 음악가들 사이에서는 "저 양반이 뭘 잘못 드셨나?"라고 수군댔을 정도로 당돌한 면모까지 나타난다.
가령 '함부르크 신포니아'는 초기 교향곡의 빠름-느림-빠름 3악장제를 채택하고는 있지만, 모든 곡이 전부 개별 악장으로 딱딱 끊기는 것이 아니라 중단없이 이어지기도 하고 흐름이 갑자기 끊기고 다음 악장으로 바로 넘어가는 등, 당대 작품 치고는 꽤 드라마틱하고 변덕이 죽끓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평생을 연주하고 작곡하며 탐구했던 건반 악기 영역에서도 이러한 양식 변화가 상당히 잘 나타나 있는데, 아버지 바흐와는 달리 전문가 뿐 아니라 일반 애호가들에게도 비교적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좀 더 선율적이고 간결한 양식을 추구하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이 때문에 바로크에서 고전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상징하는 작곡가이자, 그보다 훨씬 뒤인 낭만 시대를 향한 암시까지 주었다는 점에서 결코 가볍게 넘길 인물은 아니다.
5. 후대에 끼친 영향
아버지였던 바흐를 매우 존경하여서 그가 유산으로 물려받은 악보는 대부분 남아있고, 무엇보다 포르켈과의 편지로 최초의 바흐 전기가 나올 수 있게 도와준 것도 에마누엘 바흐의 공헌이다.건반 악기 교본은 19세기 중반까지도 피아니스트 혹은 여타 건반 악기 연주자들에게 중요한 자료가 될 정도였는데, 모차르트는 "그는 아버지이며, 우리는 (그의) 아이들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실제로 모차르트의 초기 피아노 독주곡이나 소나타, 협주곡에서는 바흐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며, 몇몇 곡은 아예 바흐 작품을 편작한 것도 있다.
모차르트보다 24년 가량 선배였던 하이든도 건반 악기 독주곡이나 협주곡을 쓸 때 바흐의 작품을 많이 참고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하이든의 제자였던 베토벤도 그의 모든 작품에 대해 경애해야 한다고 단언할 정도로 바흐를 존경했다. 하지만 바흐가 어느 정도 단초를 제공해 주었던 낭만 시대에 가서는 그냥 고리타분한 올드비 정도로 폄하되기도 했는데, 슈만은 "창조적인 음악가로서는 아버지의 한참 뒤에나 위치해 있다"고 깠다.[3] 반면 슈만의 후배였던 브람스는 베토벤만큼은 아니어도 바흐의 개성과 작품성을 인정했으며, 몇몇 곡은 자신이 직접 편집을 맡아 새로운 악보로 간행하기도 했다. 이후 20세기 초반 들어 보트퀴엔느를 비롯한 음악학자들이 바흐의 자필보나 필사보 등 자료에 의거해 작품들을 연대별/장르별로 재분류하는 작업을 시작했고, 전집 출판 계획도 세워졌다.
하지만 양차 세계대전 때문에 이 작업은 그리 순조롭지 못했고, 특히 후기 종교음악 작품들의 귀중한 고악보들이 많이 보관되어 있던 함부르크가 2차대전 중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되면서 수많은 작품들이 연구나 재간행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소실되고 말았다.
그나마 2005년에 영국의 저명한 고음악 연구가이자 건반 악기 연주자, 지휘자인 크리스토퍼 호그우드가 감수를 맡아 전집 악보 출판 계획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2014년에 완간할 목표로 계속 편집과 출판이 진행되고 있다.
동독 시절에는 아버지 바흐와 함께 국보급 예술인으로 평가되어 대대적인 연구와 연주, 보급이 이루어진 작곡가이기도 했는데, 이는 통일 후에도 큰 단절 없이 이어지고 있다. 과거 동베를린이었던 미테 지구에 1956년 설립된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 음악 김나지움'은 지금까지 음악학도들을 배출하고 있고, 바흐가 법학 공부를 했던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데르에는 장크트 프란체스카 수도원 교회를 1966~75년에 걸쳐 600여 석 규모의 중형 콘서트홀로 개축한 '콘체르트할레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가 있다.
6. 가족 관계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는 1744년에 요하나 마리아 다네만과 결혼했는데, 아버지처럼 아이를 많이 남기기는 했지만 대부분 일찍 죽어버린 탓에 장남 요한 아담 바흐, 장녀 안나 카롤리나 필리피나, 차남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2세 셋 만이 그나마 성인 때까지 살아남았다. 하지만 대대로 음악가를 배출한 바흐 집안의 명맥은 이 때부터 끊기기 시작했고, 자식들 중 요한 제바스티안 2세는 화가를 지망해 이탈리아에서 유학 도중 병에 걸려 겨우 서른 살에 요절하고 말았다.7. 그 외
- 지금이야 평가가 역전되었지만, 생전에는 아버지 바흐의 명성을 뛰어넘을 정도의 인기를 얻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와 비교하는 여론이 나올 때마다 오히려 '아버지가 지도해 주지 않으셨다면 이 위치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라면서 발언을 하곤 했다.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자식들 중 유일하게 왼손잡이였는데, 그 때문에 왼손으로 지판을 짚고 오른손으로 활을 켜는 찰현악기 연주에는 영 젬병이었다고 한다. 그 대신 양손을 고르게 쓸 수 있는 건반 악기 연주에 몰두했다고 하는데, 당대 작곡가로서는 최신 악기였던 피아노를 위한 작품이나 논문을 남기는 등 건반 분야에서는 그야말로 1인자 위치를 확고히 했다.
[1] 아버지 바흐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라이프치히 칸토르 시험 때 상당한 차별을 받기도 했다. 또 친구였던 게오르크 에르트만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비싼 물가와 적은 급여에서 라이프치히를 떠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로 '자식들 대학'을 들고 있다.[2] 그 외에도 요한 요아힘 크반츠, 요한 아돌프 하세, 카를 하인리히 그라운등등도 비슷한 성향이 있다.[3] 물론 이런 평가를 이해할 때 슈만 본인이 아버지 바흐의 재발견자인 동시에 어마어마한 바흐빠(...)였던 점을 감안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