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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의 필리버스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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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4년 4월 20일의 임시국회에서 당시 민주당 소속 재선[1] 국회의원이었던 김대중이 자유민주당 소속 김준연 의원의 체포동의안 통과를 막기 위해 벌인 대한민국 최초의 필리버스터.[2][3]2. 배경
당시 5선 의원이었던 김준연은 한국민주당에서 시작해 민주당계 정당에만 머문 골수 야당 의원이었다.[4]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이자 신간회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사건에도 관여했다. 또 법무부 장관과 유엔 한국대표를 역임하고 부통령 선거와 제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등의 굵직한 경력을 지녔다. 이 때문에 박정희와 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에게는 강력한 정적으로 여겨졌다.
김준연은 민주공화당이 한일협정 협상 과정에서 1억3000만달러를 들여와 정치자금으로 사용했다고 폭로했다. 그러자 민주공화당은 김준연을 명예훼손과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했고 박정희와 김종필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도 추가해 고발했다. 야당은 정치적 탄압이라며 거세게 저항했지만 공화당 소속이었던 당시 국회의장은 회기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둔 1964년 4월 20일에 김준연 의원 구속 동의안을 전격 상정했다.
3. 진행
||<-9><tablewidth=700><tablealign=left><tablebordercolor=#580009><tablebgcolor=#fff,#1f2023> 1964년 김준연 체포 동의안 처리 반대 필리버스터 ||
그때 한건수 국민의당 원내총무가 김대중 의원에게 부탁했다. <rowcolor=#ffffff> 순번 | 이름 | 소속 정당 | 시작 시각 | 종료 시각 | 발언 시간 | 누적 시간 | 비고 | |
<rowcolor=#ffffff> 지역구 | ||||||||
1 | 김대중 | 민주당 | 4월 20일 14:37 | 4월 20일 19:56 | 5시간 19분 | 5시간 19분 | 17시 47분부터 18시 25분까지 본회의 정회 | |
전남 3(전남 목포시) |
"김 의원, 지금 낭산(김준연의 호) 선생에 대한 구속동의안 상정을 여당이 밀어붙이고 있소. 당신이 나서 줘야겠소. 안건 처리를 못하도록 오늘 밤 자정까지 끌어달라는 말이오."
"일반 안건 가지고도 1시간 끌기 어려운데 어떻게 의사진행 발언으로 몇 시간을 끈단 말이오."
"그러니까 김 의원이 나서 달라는 것 아니오. 당신이면 할 수 있다고 중진의원까지도 합의를 받으니 발언대에 오르시오."
김대중은 떠밀리다시피 발언대에 올랐다. 그의 발언을 지켜보던 공화당 의원들은 '김대중이 지금 필리버스터를 하고 있으니 대책을 세우자'고 수뇌부에 건의했다. 하지만 당시 공화당 원내총무 김용태는 이를 무시했다."일반 안건 가지고도 1시간 끌기 어려운데 어떻게 의사진행 발언으로 몇 시간을 끈단 말이오."
"그러니까 김 의원이 나서 달라는 것 아니오. 당신이면 할 수 있다고 중진의원까지도 합의를 받으니 발언대에 오르시오."
"놔두시오. 해봤자 얼마나 버티겠소. 제 풀에 지칠 것이오. 1시간도 못할 테니 놔두시오."
그러나, 김대중은 이효상 당시 국회의장이 산회를 선포할 때(오후 7시 56분)까지 5시간 19분 동안 원고도 없이 의사진행발언을 이어감으로써 결국 동의안 처리를 무산시켰다. 김대중의 발언은 30쪽에 달하는 국회 속기록을 통해 확인되는데 단순히 시간을 끌기 위한 발언에 그치지 않고 체포동의안을 처리하면 안 된다는 본인의 주장과 그 근거를 성실하게 밝혔다. 꼼수를 쓰지 않고 주제에 맞게 5시간을 연설한 이 사건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실제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필리버스터를 했을 때 원고 한 장도 없이 현장에서 즉석으로 일장연설을 했었다. 주장의 근거와 구성을 제대로 하지 않고 신변잡기식 잡담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논리를 갖추어서 5시간이나 되는 긴 시간을 원고도 없이 즉석에서 일장 연설을 하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라 거의 초인적인 능력에 가깝다.
그리고, 민주공화당 측은 국회법 97조를 들어 김대중의 발언을 강제로 중단시키고 의사진행변경안을 가결시키려는 시도를 했지만 실패했다.
국회 속기록.
4. 이후
이효상 의장은 이날 오후 8시가 넘어가면서 국회 본회의를 일방적으로 폐회시켰다. 당시 동아방송은 국회 단상 밑에 신문지로 감싸 숨겨둔 마이크를 통해 김 전 대통령의 발언 육성을 세상에 전달했다.하지만 여당과 이효상 의장은 이튿날인 21일 구속동의안을 재상정하려고 시도했다. 당시 국회 속기록에는 “장내 소란”과[5] “‘이게 뭐요 뭐요’하는 이 있음”, “장관 내려와요”, “법을 어기고 어떻게 국회를 운영할 수 있어요” 등의 발언이 다수 등장한다. 결국 야당 의원들이 김 대표 구속동의안을 몸으로 막아선 것이다. 여당과 의장은 구속동의안 상정에 실패했고 다음 회기로 넘어갔다. 하지만 김 의원은 결국 폐회 중이었던 같은 달 26일 검찰에 구속되었다.
이후 1969년 박한상 신민당 의원이 박정희 정부의 3선 개헌에 반대하며 10시간 5분간 필리버스터를 했다. 2차례의 필리버스터로 저항을 맞이한 박정희 정부는 필리버스터를 제한하기로 했다. 1973년 12월 20일 개정된 국회법은 본회의에서 국회의원의 발언 시간을 45분으로 제한하고 15분 안에 추가 1회 발언 연장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같은 의제에 대해 각 교섭단체별로 소속 의원수의 비율에 따라 각 2인 이내 범위안에서 본회의 발언 의원 총수를 제한하도록 하는 조항도 추가했다. 또 신상 발언은 20분을 초과할 수 없도록 엄밀히 규정했다.
김대중은 이때의 필리버스터를 통해 사람들에게 주목받게 되었고 이는 제7대 대통령 선거 출마의 동력과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의 당선까지 기나긴 정치 경력의 바탕이 되었으며 군사독재 세력과 김대중의 악연의 시작이 되기도 했다.
5. 출처
김대중의 '5시간 19분' 필리버스터 막전막후한국에서 필리버스터, 어떻게 행해져왔나
김대중 5시간19분 필리버스터는 어떻게 끝났을까
국회 속기록
[1] 당시 초선이었던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로는 1961년 재보궐선거 당시 강원도 인제군에서 당선된 적이 있어 재선의원이 맞다. 다만 해당 선거 후 3일만에 5.16 군사정변으로 의회가 해산되어 실질적으로 의정 활동 경험은 당선증만 두장인 초선의원에 가까웠다.[2] 다만 필리버스터 제도는 2016년에야 정식으로 국회에 도입되었다.[3] 당시에는 의사진행발언의 경우 발언 시간에 대한 제한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4] 다만 그가 이승만 정권 말기에 창당한 통일당은 민주당보다 친이승만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70년대 용어로는 소위 '사쿠라'다.[5] "장내 소연" 이라고 되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