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공화국 대통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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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대훈장 수훈자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한국인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상훈 연도 | 결정일 | 수여일 | 이름 | 직책 | 국적 | 비고 |
1949년 | 8월 15일 | 이승만 | 대통령 | 대한민국 | |||
1960년 | 8월 13일 | 윤보선 | 대통령 | 대한민국 | |||
1963년 | 12월 5일 | 12월 17일 | 박정희 | 대통령 | 대한민국 | ||
1967년 | 6월 23일 | 육영수 | 영부인 | 대한민국 | |||
1979년 | 12월 7일 | 최규하 | 대통령 | 대한민국 | 12.12 군사반란으로 하야 | ||
1979년 | 12월 7일 | 홍기 | 영부인 | 대한민국 | |||
1980년 | 8월 29일 | 8월 29일 | 전두환 | 대통령 | 대한민국 | 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 |
1980년 | 8월 29일 | 8월 29일 | 이순자 | 영부인 | 대한민국 | ||
1988년 | 2월 24일 | 2월 25일 | 노태우 | 대통령 | 대한민국 | 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 |
1988년 | 2월 24일 | 2월 25일 | 김옥숙 | 영부인 | 대한민국 | ||
1993년 | 2월 11일 | 2월 23일 | 김영삼 | 대통령 | 대한민국 | ||
1993년 | 2월 11일 | 2월 23일 | 손명순 | 영부인 | 대한민국 | ||
1998년 | 2월 17일 | 2월 25일 | 김대중 | 대통령 | 대한민국 | ||
1998년 | 2월 17일 | 2월 25일 | 이희호 | 영부인 | 대한민국 | ||
2008년 | 1월 28일 | 노무현 | 대통령 | 대한민국 | |||
2008년 | 1월 28일 | 권양숙 | 영부인 | 대한민국 | |||
2013년 | 2월 12일 | 이명박 | 대통령 | 대한민국 | |||
2013년 | 2월 12일 | 김윤옥 | 영부인 | 대한민국 | |||
2013년 | 2월 19일 | 박근혜 | 대통령 | 대한민국 | |||
2022년 | 5월 3일 | 문재인 | 대통령 | 대한민국 | |||
2022년 | 5월 3일 | 김정숙 | 영부인 | 대한민국 | }}}}}}}}}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외국인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상훈 연도 | 결정일 | 수여일 | 이름 | 직책 | 국적 | 비고 |
1964년 | 12월 3일 | 12월 8일 | 하인리히 뤼프케 | 대통령 | 서독 | 외국인 최초 상훈자 | |
1964년 | 12월 3일 | 12월 8일 | 빌헬미네 뤼브케 | 영부인 | 서독 | 외국인 최초 상훈자 | |
1966년 | 2월 1일 | 2월 7일 | 이스마일 나시루딘 | 국왕 | 말레이시아 | ||
1966년 | 2월 1일 | 2월 7일 | 틍쿠 인탄 자하라 | 왕비 | 말레이시아 | ||
1966년 | 2월 1일 | 2월 10일 | 푸미폰 아둔야뎃 | 국왕 | 태국 | ||
1966년 | 2월 1일 | 2월 10일 | 시리낏 끼띠야콘 | 왕비 | 태국 | ||
1966년 | 2월 1일 | 2월 15일 | 장제스 | 총통 | 중화민국 | ||
1968년 | 5월 10일 | 5월 18일 | 하일레 셀라시에 | 황제 | 에티오피아 | ||
1969년 | 5월 23일 | 5월 27일 | 응우옌반티에우 | 총통 | 남베트남 | ||
1969년 | 5월 23일 | 5월 27일 | 응우옌티마이아인 | 제1부인 | 남베트남 | ||
1969년 | 10월 28일 | 10월 28일 | 하마니 디오리 | 대통령 | 니제르 | ||
1969년 | 10월 28일 | 10월 28일 | 아이샤 디오리 | 영부인 | 니제르 | ||
1970년 | 9월 25일 | 9월 28일 | 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 | 대통령 | 엘살바도르 | ||
1970년 | 9월 25일 | 9월 28일 | 마리나데 산체스 에르난데스 | 영부인 | 엘살바도르 | ||
1975년 | 6월 27일 | 7월 5일 | 오마르 봉고 | 대통령 | 가봉 | ||
1975년 | 6월 27일 | 7월 5일 | 조세핀 봉고 | 영부인 | 가봉 | ||
1979년 | 4월 17일 | 4월 23일 |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 대통령 | 세네갈 | ||
1979년 | 4월 17일 | 4월 23일 | 콜레테 위베르트 상고르 | 영부인 | 세네갈 | ||
1980년 | 5월 11일 | 할리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드 | 국왕 | 사우디아라비아 | |||
1980년 | 5월 14일 | 자베르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 국왕 | 쿠웨이트 | |||
1981년 | 6월 25일 | 수하르토 | 대통령 | 인도네시아 | |||
1981년 | 6월 25일 | 시티 하티나 | 영부인 | 인도네시아 | |||
1981년 | 6월 29일 | 아마드 샤 이브니 아부 바카르 | 국왕 | 말레이시아 | |||
1981년 | 6월 29일 | 틍쿠 아프잔 | 왕비 | 말레이시아 | |||
1981년 | 7월 6일 |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 대통령 | 필리핀 | |||
1981년 | 7월 6일 | 이멜다 마르코스 | 영부인 | 필리핀 | |||
1981년 | 10월 13일 | 로드리고 카라소 | 대통령 | 코스타리카 | |||
1981년 | 10월 13일 | 에스트레야 셀레돈 리사노 | 영부인 | 코스타리카 | |||
1982년 | 5월 10일 | 사무엘 도 | 대통령 | 라이베리아 | |||
1982년 | 6월 7일 | 모부투 세세 세코 | 대통령 | 자이르 | |||
1982년 | 6월 7일 | 보비 라다와 | 영부인 | 자이르 | |||
1982년 | 8월 25일 | 압두 디우프 | 대통령 | 세네갈 | |||
1982년 | 12월 21일 | 케난 에브렌 | 대통령 | 튀르키예 | |||
1983년 | 3월 10일 | 3월 15일 | 자파르 모하메드 니메이리 | 대통령 | 수단 | ||
1983년 | 3월 10일 | 3월 15일 | 부띠나 칼릴 압불핫산 | 영부인 | 수단 | ||
1983년 | 9월 10일 | 후세인 1세 | 국왕 | 요르단 | |||
1983년 | 9월 10일 | 누르 | 왕비 | 요르단 | |||
1984년 | 4월 9일 | 하사날 볼키아 | 국왕 | 브루나이 | |||
1984년 | 4월 21일 | 할리파 빈 하마드 알타니 | 국왕 | 카타르 | |||
1984년 | 8월 30일 | 9월 13일 | 다우다 자와라 | 대통령 | 감비아 | ||
1984년 | 8월 30일 | 9월 13일 | 치렐 자와라 | 영부인 | 감비아 | ||
1985년 | 5월 17일 |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 대통령 | 파키스탄 | |||
1985년 | 5월 20일 | 루이스 알베르토 몽헤 | 대통령 | 코스타리카 | |||
1986년 | 9월 4일 | 4월 10일 | 엘리자베스 2세 | 국왕 | 영국 | ||
1986년 | 9월 4일 | 4월 16일 | 보두앵 | 국왕 | 벨기에 | ||
1987년 | 4월 7일 | 아메드 압달라 | 대통령 | 코모로 | |||
1988년 | 11월 3일 | 이스칸다르 | 국왕 | 말레이시아 | |||
1988년 | 11월 3일 | 자나리아 | 왕비 | 말레이시아 | |||
1989년 | 11월 3일 | 11월 20일 |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 대통령 | 서독 | ||
1989년 | 11월 3일 | 11월 30일 | 프랑수아 미테랑 | 대통령 | 프랑스 | ||
1989년 | 11월 3일 | 11월 30일 | 다니엘 미테랑 | 영부인 | 프랑스 | ||
1990년 | 6월 21일 | 안드레스 로드리게스 | 대통령 | 파라과이 | |||
1990년 | 11월 5일 | 괸츠 아르파드 | 대통령 | 헝가리 | |||
1991년 | 9월 13일 | 아즐란 샤 | 국왕 | 말레이시아 | |||
1991년 | 9월 13일 | 투안쿠 바이눈 | 왕비 | 말레이시아 | |||
1991년 | 9월 25일 |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 대통령 | 멕시코 | |||
1992년 | 8월 13일 | 호르헤 안토니오 세라노 엘리아스 | 대통령 | 과테말라 | |||
1993년 | 5월 20일 | 5월 25일 | 피델 라모스 | 대통령 | 필리핀 | ||
1993년 | 5월 20일 | 5월 25일 | 이멜리타 마르티네스 라모스 | 영부인 | 필리핀 | ||
1994년 | 11월 7일 | 11월 21일 | 에두아르도 프레이 루이스 타글레 | 대통령 | 칠레 | ||
1994년 | 12월 5일 | 12월 9일 | 레흐 바웬사 | 대통령 | 폴란드 | ||
1995년 | 2월 7일 | 2월 16일 | 이슬람 카리모프 | 대통령 | 우즈베키스탄 | ||
1995년 | 2월 21일 | 3월 6일 | 로만 헤어초크 | 대통령 | 독일 | ||
1995년 | 3월 28일 | 4월 3일 | 젤류 젤레프 | 대통령 | 불가리아 | ||
1995년 | 6월 26일 | 7월 7일 | 넬슨 만델라 | 대통령 | 남아프리카 공화국 | ||
1995년 | 9월 26일 | 9월 29일 | 카를로스 메넴 | 대통령 | 아르헨티나 | ||
1996년 | 7월 23일 | 9월 4일 | 알바로 아르수 | 대통령 | 과테말라 | ||
1996년 | 7월 23일 | 페르난두 카르도주 | 대통령 | 브라질 | |||
1996년 | 10월 8일 | 10월 20일 | 후안 카를로스 1세 | 국왕 | 스페인 | ||
1996년 | 10월 8일 | 10월 20일 | 소피아 마르가리타 빅토리아 프리데리키 | 왕비 | 스페인 | ||
1996년 | 11월 26일 | 자파 이브니 압둘 라만 | 국왕 | 말레이시아 | |||
1996년 | 12월 10일 | 12월 15일 | 레오니드 쿠치마 | 대통령 | 우크라이나 | ||
2000년 | 2월 22일 | 3월 3일 | 카를로 아첼리오 참피 | 대통령 | 이탈리아 | ||
2000년 | 2월 22일 | 3월 6일 | 자크 시라크 | 대통령 | 프랑스 | ||
2006년 | 3월 12일 |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 | 대통령 | 알제리 | |||
2007년 | 3월 26일 | 사마 알아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 국왕 | 쿠웨이트 | |||
2007년 | 3월 28일 | 하마드 빈 할리파 알사니 | 국왕 | 카타르 | |||
2009년 | 5월 13일 |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 대통령 | 카자흐스탄 | |||
2009년 | 11월 12일 | 알란 가르시아 | 대통령 | 페루 | |||
2012년 | 5월 30일 | 칼 16세 구스타프 | 국왕 | 스웨덴 | |||
2012년 | 11월 21일 | 할리파 빈 자이드 나하얀 | 대통령 | 아랍에미리트 | |||
2018년 | 10월 8일 | 에마뉘엘 마크롱 | 대통령 | 프랑스 | |||
2019년 | 하랄 5세 | 국왕 | 노르웨이 | ||||
2021년 | 6월 14일 | 알렉산더 판데어벨렌 | 대통령 | 오스트리아 | |||
2021년 | 6월 16일 | 펠리페 6세 | 국왕 | 스페인 | |||
2021년 | 6월 16일 | 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 | 왕비 | 스페인 | |||
2021년 | 8월 25일 | 이반 두케 | 대통령 | 콜롬비아 | |||
2021년 | 9월 21일 | 보루트 파호르 | 대통령 | 슬로베니아 | |||
2023년 | 7월 13일 | 안제이 두다 | 대통령 | 폴란드 | |||
2023년 | 11월 21일 | 찰스 3세 | 국왕 | 영국 | |||
2024년 | 11월 16일 | 디나 볼루아르테 | 대통령 | 페루 | }}}}}}}}} |
인도네시아 공화국 제2대 대통령 수하르토 Soeharto[1][2] | |
<colbgcolor=#C13130><colcolor=#ffffff> 출생 | 1921년 6월 8일 |
네덜란드령 동인도 욕야카르타 특별주 (現 인도네시아 욕야카르타) | |
사망 | 2008년 1월 27일 (향년 86세) |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 |
재임 | 제2대 대통령[3] |
1968년 3월 27일 ~ 1998년 5월 21일 | |
정당 | 골카르 |
서명 |
[clearfix]
1. 개요
제2대 인도네시아 대통령이자 독재자, 학살자다.1965년 9월 30일 일어난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쿠데타를 (날조해서 이를 구실로) 진압하고,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을 제압해 1967년 3월 12일 대통령 권한 대행에 올랐다가 1968년 3월 27일 정식으로 대통령에 오르며 권력을 잡은 후 1998년 5월 21일 시위로 인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무려 31년간 인도네시아의 독재자로 군림했다. 집권기간 동안 철권통치를 일삼아 수많은 인권유린이 일어났으며, 이 과정에서 50만에서 120만에 이르는 정적과 반대파들이[4] 무자비하게 학살당하기도 했다.
현재까지 인도네시아 내에서도 수하르토에 대한 평가는 꽤나 엇갈린다고 하는데, 일부에선 인도네시아의 경제를 성장시킨 지도자로 평가하기도 하나[5], 일부에선 수백만 명 이상을 학살한 제2차 세계 대전 후 최악의 학살자 중 한 명이란 악명[6]과 더불어 부정축재와 부정부패를 일삼았다는 상반된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로 인해 수카르노가 재평가 받게 되었다.[7]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집권한 반공권 독재자 중에서는 가장 대규모의 학살을 저지른 학살자로도 꼽힌다.[8][9]
2. 생애
2.1. 초년기
수하르토는 1921년 6월 8일에 네덜란드령 동인도 자바 섬에서 관개 관리자의 아들로 태어났다.[10] 수하르토의 부모는 수하르토가 태어난 직후에 이혼하여 어린 수하르토는 새아버지 곁에서 자랐다. 수하르토는 학교폭력을 당하면서도 정규교육을 거친 후[11] 1939년 중학교를 졸업한 후 우리안타로에 있는 은행에서 사무직으로 일한 적이 있으며,[12] 1940년 네덜란드 식민지군에 부사관으로 입대했다.[13] 그러다가 1942년 일본 제국이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점령하고 네덜란드령 동인도군이 항복하자 수하르토는 몇 개월 동안 전역했다가 1943년 일본군이 지원하던 군대에 장교로 입대하였다. 일본군의 훈련에서 수하르토는 일본의 입김이 강하기는 했지만 반네덜란드와 민족주의, 군국주의를 접하게 되었고, 이는 수하르토의 사고 방식에도 깊은 영향을 줬다.1945년 일본 제국의 패망 이후 동년 8월 17일에 수카르노를 중심으로 한 인도네시아 독립진영이 독립을 선포하자, 수하르토는 인도네시아 국군의 전신인 인민보안대에 입대한 후 부대장으로 재직하게 되었다. 수하르토는 인도네시아를 다시 식민지로 만들려는 네덜란드에 맞서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서 좋은 전공을 세움으로써 군대 내에서 승승장구했다. 1960년에는 39세에 육군참모차장으로 승진했고, 1963년에는 육군전략예비군(現 Kostrad)을 지휘하게 되었다.
1947년에는 수라카르타의 하위 귀족이자 망쿠네가란[14] 왕실의 먼 친척 출신인 시티 하르티나(Siti Hartinah, 1923~1996)과 결혼해 6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두게 된다.
2.2. 9.30 쿠데타와 집권
그러나 수하르토가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가장 큰 계기는 1965년 9월 30일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이 군부 인사 7명을 악어굴에 던저 살해하면서 일으킨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쿠데타 이른바 9.30 쿠데타를 진압하면서부터였다. 당시 반공적 색채가 짙었던 군부는 점점 자본주의 진영과 멀어지던 수카르노 대통령과 대립하던 상황이였고, 마침 공산당의 쿠데타가 일어나자 수하르토가 이를 진압하면서 인도네시아 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되었다.그러나 9․30 쿠데타는 수하르토를 비롯한 군부 세력에 의해 조작됐다는 의혹이 매우 많다. 왜냐하면 이 사건이라는 게 고작 7명 정도의 사람들이 몇몇 고위 장성들을 살해한 것에 불과하며, 당시에 무려 2백만 명에 달하는 당원을 가진 세계에서 3번째로 큰 공산당이던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쿠데타가 고작 하루 만에 순식간에 진압당하는 게 불가능했다는 것이 그 증거라는 주장이다. 또는 9․30 쿠데타는 당시 동남아시아에 퍼져가던 공산세력을 막기 위한 미국과 인도네시아의 권력을 잡으려던 수하르토와의 밀월관계에서 발생한 정치적 공작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1958년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친공산정책을 추구하던 수카르노를 축출하기 위해 중앙정보국(CIA)을 통해 반공세력을 지원하는 한편으로 인도네시아 군부의 쿠데타를 지원하고 수하르토의 집권을 도왔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살해당한 육군참모총장 아마드 야니의 궐위시 일반작전운용지침에 따라 직무대행으로 예정되어있던 이는 육군참모차장이자 육군전략예비군사령관이었던 수하르토였다. 9.30에 따른 최대수혜자는 수하르토 본인이기도 하였다.[15]
어쨌든 9.30 쿠데타의 진압 이후 수하르토는 동년 10월 16일에 육군장관 겸 육군참모총장이 된 후, 잠시 전임자인 나수티온[16]을 얼굴마담으로 앉혔다가 1966년 3월 11일에 수카르노에게 '질서 회복을 위한 일체의 권한'을 자신에게 주라는 명령서에 서명하도록 하며 그를 몰아내고는 바로 다음날에 대통령 권한대행에 오르고, 2년 후인 1968년 3월 27일에는 대통령 자리에 정식으로 오른다.
2.3. 대학살
2.3.1. 집권 과정에서의 대학살
학살에 대한 한겨레21의 기사수하르토는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좌파, 친 수카르노 인사 등에 대해 대규모 숙청과 학살을 벌이게 되는데, 이 학살은 너무 규모가 크고 잔혹해서 1968년에 CIA가 작성한 극비 보고서에서 이 학살은 1930년대 소련의 대숙청,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 마오쩌둥이 주도한 유혈 사태와 함께 20세기 최악의 대량 학살 중 하나로 보고되었다. 이 학살은 그 규모와 잔혹성에도 불구하고 수하르토 사후에도 한동안 대중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2013년 당시 학살에 가담한 안와르 콩고(Anwar Congo, 1937~2019)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액트 오브 킬링이 개봉하며 전 세계에 그 악명이 널리 알려지게 된다.
1965년 10월부터 1966년 3월까지 이 반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 동안 무려 50~12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17] 투옥된 사람들은 60만~75만 명[18]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19] 더구나 1966년 당시 인도네시아 인구는 1억 4천만 명도 되지 않았으니, 이로 미루어보면 반 년도 안 되어 인구의 0.36%~0.86%(최대치 2.14%)가 죽고 인구의 0.43%~0.54%(최대치 1.21%)가 수감된 셈이다!!
학살은 9.30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인 1965년 10월 초에 인도네시아의 수도인 자카르타에서 시작되어 자바 섬과 발리로 퍼져나갔고, 수마트라를 포함한 다른 섬들에서도 학살이 벌어졌다. 이러한 대학살은 1965년 말에 정점을 찍었다가, 1966년 초부터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수천개의 이르는 자경단과 준군사조직이 공산당원과 공산당원으로 추정되는 무고한 시민들을 대학살했다. 이 학살은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발생한 학살이였지만 공산당의 근거지였던 수마트라 북쪽과 자바 섬, 발리에서 특히 학살의 잔혹도가 심각했다[20]. 반면 공산주의자들이 뿌리를 내리지 못했던 자바 섬 서부에서는 학살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살해당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치와는 전혀 관계가 없던 지식인들, 노조원, 농부, 노동자, 학생을 위시한 중하류층과 빈곤층, 그리고 중국인이었다고 하며, 심지어는 단지 가족이 PKI와 PKI와 관련된 조직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구금되거나 학살당한 사람들도 많았다.
당시 일어난 일들 중 단적인 예시를 하나 들자면 남편이 지역의 PKI 간부라는 이유로 남편의 직함도 모르던 아내와 12살, 10살짜리 딸들을 감금하고 각각 8/5년간 감금하면서 무자비한 고문을 가했는데, 경찰들은 막내딸에게 얼굴이 손상될 정도로 무자비한 구타를 가한 것도 모자라 아내에게는 집단 성폭행까지 가한 일도 있었고[21], 심지어 한 여성은 체포된 후 어머니와 8살 딸과 함께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학살은 나치의 홀로코스트처럼 기계적인 방식으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문화대혁명과 킬링필드, 르완다 내전에서의 학살처럼 이루어졌다. 때로는 군부대가 학살에 나서기도 했지만, 대개의 경우 전면에 나선 세력은 무장한 이슬람교도 자경단[22]으로 구성된 민병대원들이었다. 물론 이들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후원하며 공산주의자들을 죽일 것을 지시한 세력은 반공기치를 내건 군부였다. 그리고 수하르토 산하의 군부는 공산주의자를 '악당'으로 규정하며 이 쿠데타 미수 사건으로 축적된 긴장과 증오심을 부추겼다. 게다가 대부분의 지역에서 학살은 군대가 승인하기 전에는 시작되지도 않았다.
군대는 총을 사용해서 사람들을 죽였지만, 민병대는 칼, 낫, 마체테, 도검, 얼음 송곳, 죽창, 쇠파이프 등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시민들을 잔혹하게 살해했다. 자경단은 사람들을 철사로 목을 조르거나 목을 베 죽이기도 하고, 각종 칼과 죽창으로 사지를 절단하거나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기도 했으며, 심지어 산 채로 피부를 벗겨내거나 거세를 하기도 했다. 게다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사망자들의 시신은 훼손된 채 거리에 버려졌으며,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잘린 머리를 쇠꼬챙이에 꽂아 행진하기도 했고, 시체들은 대부분 강물에 버려졌다.[23] 동부 자바의 케디리에서는 이슬람 청년 단체 회원들이 공산주의자로 보이는 사람들을 일렬로 세우고 목을 벤 후 시신을 강에 유기했다. 거기에 인도네시아의 가장 큰 이슬람 단체 중 하나인 무하마디야의 회원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죽이는 것은 닭을 도살하는 것과 같다"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을 입증하듯이 영화 액트 오브 킬링으로 국제적 유명인사가 된 안와르 콩고는 처음에는 둔기로 사람을 때려 죽이다가 피가 너무 많이 튄다며 살인 방식을 철사로 목을 조르는 방식으로 바꿔가며 자기 손으로 무려 1천 명 가량을 살해했다고 한다.
당시 자료들에 의하면 공산주의에 동조했다는 혐의로 처형될 뻔하다가 간신히 탈출한 마르쿠스 탈람은 <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1968년 울창하고 습한 정글 속에 숨어서 인도네시아 군인들이 수갑을 찬 포로들을 트럭에서 끌어내 자동소총을 갈겨 죽여버리는 것을 목격했다", "타탓- 타탓, 타탓- 타탓, 타탓-타탓...지금도 그 총소리들이 생생하게 기억난다"면서 "이렇게 살해된 사람들은 다른 포로들이 파놓은 거대한 웅덩이에 쓸어 넣어졌다" 증언했으며, 집단 살해 장소로 쓰인 한 바닷가에 살아왔던 수리엔(70)이라는 한 여인은 "군인들이 시체들을 이곳에 버려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기 때문에 주민들은 이곳을 '악취가 나는 시체의 해변'이라고 불렀다"고 증언했다.
또한 5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공산주의자와 연계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재판 하나 없이 초법적으로 구속되었는데, 이들은 굴라그와 비견될 정도로 열악한 교도소에서 무자비한 구타, 테이블과 의자 다리로 손가락과 발가락 짓밟기, 성기에 전기고문하기, 손톱 뽑기, 신체를 녹인 고무와 담배로 지지기, 배우자와 자녀가 고문당하는 모습을 듣거나 목격하게 하기, 성별 가리지 않고 수감자들 강간하기[24] 등의 무자비한 고문을 가했고, 심지어는 거세를 당한 남성 수감자와 문자 그대로 가슴이 도려내진(!) 여성 수감자도 있었다. 게다가 구속된 사람들은 모든 재산이 몰수되고 석방 후에도 끊임없는 감시를 받으며 정기적으로 군대에 근황을 보고해야 했으며, 자식들까지 투표, 공무원 임용, 대학 입학 등의 공적 생활 참여를 금지당했다. 그리고 1970년에 학생 주도의 반정부 시위가 발생하자 수하르토는 학생 시위를 전면 금지시켰다.
이후 수하르토는 권력을 안정화하기 자신에게 비판적인 기사를 내보내는 신문사를 폐간하는 등 언론통제 정책을 펴는 한편 인도네시아의 정당체계를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바꾸었다. 그는 1964년 10월 만들어진 군부의 정치조직인 골카르당을 확장시키는 데 집중했고, 그 결과 1967년 말까지 약 281개 조직이 골카르당에 편입되었고 이로 인해 수하르토의 정치적 기반이 탄탄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1966년 인도네시아 최대 정당인 공산당을 불법화해 공산당을 와해하는 한편 관료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인도네시아 국민당을 견제하기 위해 인도네시아 공무원들의 정치 활동을 금지했으며, 선거 집회를 열려고 하는 모든 정당들은 정부 당국의 심의를 거치게 했다.
2.3.2. 동티모르에서의 만행
사실 수하르토는 본격적으로 대통령으로 집권한 후에는 본토에서는 그렇게 심한 폭정을 저지르지는 않았으나, 그 대신 독립을 요구하는 분리주의 성향의[25] 인도네시아 지역들에 대해서는 "인도네시아는 수만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다. 만약 모두 독립을 허용한다면 인도네시아는 사라지고 만다."면서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다.유엔 동티모르 수용, 진실, 화해 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인도네시아군이 1975년~1999년 동안 동티모르를 점령하면서 최소 약 10만 3000명, 최대 약 18만 3000명이 살해, 실종, 기아, 질병 등으로 죽었다고 추정하고 있으며, 인권단체들은 이보다 더 많은 35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26] 그리고 인도네시아 외무부 장관이 밝힌 공식 통계에 따르면 1975년 12월부터 1979년 11월까지 총 12만 명의 동티모르인이 사망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동티모르에 있던 가옥의 80%와 재산의 70%가 인도네시아의 식민지배 기간 동안 파괴되었다.
수하르토는 1975년 12월 7일[27]에 인도네시아군의 정예 공수부대를 동티모르의 중심지 딜리로 침공시켜 티모르티무르 주로 강제병합시킨 후 1976년 1월에는 동티모르 내의 모든 정당을 해산하도록 명령했으며, 동년 7월에는 동티모르 합병을 공식 선언하고는 아르날도 도스 레이스 아라우조[28]처럼 인도네시아에 복종하는 인사들을 통치의 전면에 내세웠다.
독립의 기쁨을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최악의 상황에 빠져든 수많은 동티모르인들은 독립운동을 벌였는데, 수하르토는 이들에 대해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만행들을 벌이게 된다. 실제로 동티모르 침공이 시작한 날로부터 바로 다음날이었던 1975년 12월 8일에 인도네시아군은 딜리에 들어오자마자 500명의 화교를 색출해 살해했고, 많은 남성과 여성, 어린이들이 절벽에 줄지어 선 후 총살되고는 시신이 바다에 떨어지는 일이 발생했으며,[29] 1976년 2월에는 아이레우 마을에 있는 3세 이상의 모든 사람들을 총살했고, 동년 6월에는 동티모르 독립혁명전선(프레티린)의 공격으로 심한 타격을 입은 인도네시아군 부대가 보복 차원으로 서티모르 국경 근처의 라마크난에 있는 난민 수용 캠프를 찾아가 집들을 불태운 후 5~6천명이 수용된 캠프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4천 명을 학살했고, 심지어 1981년 3~4월에는 '보안 작전'을 실시하여 5천~8천 명의 동티모르인 남성과 소년들[30]을 동티모르인 독립운동가들에 대항하기 위한 인간방패로 쓰게 하기 위해 산을 행군하게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피로 속에 죽거나 '게릴라의 통과를 허용했다'는 이유로 인도네시아군에게 총살당했다.
거기다가 수하르토의 군인들은 연좌제를 적용해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하고는 이를 오히려 타당화했는데, 실제로 1976년 초에 레멕시오와 아일류에서 3살 이상의 사람들이 모두 학살되었을 때 인도네시아군은 그곳의 주민들이 모두 '프레티린의 씨앗에 감염되었다'고 주장했고, 1981년 9월에 라클루타에서의 학살에 참여한 인도네시아 군인은 "당신이라면 들판을 청소할 때, 크도 작든간에 모든 뱀을 죽이려고 하지 않겠는가?"라고까지 주장했으며, 인도네시아의 고위 장교들은 인도네시아군에 저항하는 자들이면 증손까지 절멸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겼다.
뿐만 아니라 동티모르의 많은 여성들은 '게릴라들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정기적으로 군인들과의 강제 결혼을 당하거나 불임 시술을 당하거나 무자비한 강간을 당하기도 했으며, 약 4천 명의 동티모르계 어린이들이 납치되어 가족들과 헤어진 후 고위 군인들에게 강제로 입양되기도 했다. 게다가 군부는 독립운동가로 의심되는 동티모르인들을 화장실도 없는 빈약한 초가집으로 구성된 캠프에 가두고는 아사하거나 질병으로 죽게 방치했고, 농토를 대대적으로 공습하거나 농작물과 가축을 파괴하고 적십자의 의료 지원과 외부의 식량 지원을 거부하며 의도적으로 기근을 조장해 동티모르인들의 세력을 악화시키고자 했다.[31][32] 그리고 군인들은 처형된 민간인들의 머리를 효수하거나 공군을 이용해 네이팜탄을 투하하기도 했고, 화학무기를 살포하여 주민들이 먹는 음식과 물이 오염되게 하거나 고의적으로 어린아이들의 머리를 바위에 내리쳐 죽이는 극악무도한 짓까지 저질렀으며, 심지어 어느 부대의 지휘관은 반군의 심장을 요리해 먹기까지 했다.
한편 미국은 수하르토가 집권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대학살 때와 비슷하게 이 학살을 간접적으로 지원하고 묵인했는데, 실제로 지미 카터 행정부는 대인도네시아 군사원조를 이전의 4배로 늘렸고, 뉴욕 타임즈는 1977년부터 1978년 사이에 동티모르를 다룬 기사를 한 건도 싣지 않았으며, 오히려 1981년에 뉴욕 타임즈의 특파원이던 헨리 캄[33]은 역사적으로 식량이 부족했던 이 섬에서 치열한 전투와 그에 따른 기아 때문에 발생한 대량사망 사태를 '학살'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아주 단순한 '과장법'이라며 "쏟아져 나온 증거라는 것이 프레틸린과 한 패이거나 열성적 지지자들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이런 주장에 대해 세계는 인도네시아 관리들의 부인 발언과 대비하면서 의문을 품을 필요가 있다"라는 희대의 망언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수하르토는 다른 지역의 독립운동에도 피의 보복을 가해 독립을 요구했던 서파푸아에서도 10만 명이 죽어나갔으며, 아체 주에서도 1만 5천 명의 사람들이 사망했다고 한다.
더 충격적인 것은 수하르토는 젊었을 적에는 네덜란드로부터 고국을 독립시키기 위해 독립전쟁에서 싸운 적이 있는 독립운동가 출신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독립운동가가 며칠 전에 독립한 동티모르를 침략해 그 나라 국민들의 독립운동을 악랄하게 탄압했으니 그야말로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는 속담이 어울리는 셈.[34]
2.3.2.1. 산타크루즈 대학살(Santa Cruz massacre)
1991년 11월 12일에는 동년 10월 27일에 인도네시아 군대에 의해 총살된 독립을 지지하던 청년 세바스티앙 고메스(Sebastiao Gomes, 1973~1991)를 추모하는 미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꽃을 바치기 위해 딜리에 위치한 고메스의 무덤이 있는 산타크루즈 묘지에서 평화롭고 질서정연하게 독립을 호소하던 비무장 시위대에게 인도네시아군과 경찰이 시위대에게 구타를 퍼부은 후 트럭에 올라타 2분간 발포를 퍼부었는데, 군인들은 병원에 옮겨진 부상자들까지 '증언자를 없애기 위해' 사살했다. 인도네시아 국군은 이 발포로 인한 사망자가 19명이라고 발표했지만, 1992년 9월에 있던 동티모르인에 의한 독자적인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 발포로 273명이 죽고 255명이 실종되었으며 376명이 다쳤다. 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군은 취재를 하러 온 미국인 기자 2명까지 개머리판으로 폭행하여 1명은 두개골이 골절되기도 했다.당연히 이 학살은 상술한 미국인 기자들의 녹화로 세계적으로 알려지며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지만, 당시 인도네시아군 총사령관이었던 뜨리 수뜨리스노(Tri Sutrisno, 1935~)는 학살 이틀 뒤인 11월 14일에 "우리 군을 우습게 봐서는 안된다. 마침내 우린 그들에게 발포할 수밖에 없었다. 저 선동자들처럼 덜떨어진 것들은 총을 맞아 죽어 마땅하고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라는 희대의 망언을 남겼으며, 인도네시아 정부가 조성한 국가조사위원회 역시 11월 26일에 예비보고를 통해 군의 발포가 정당방위였다고 규정하며 상부에 의한 발포명령은 없었고, 발포는 '규율 없는' 병사들의 독단적인 행위에 불과하다고 발표했으며, 덤으로 인도네시아측은 학살당한 시위대들을 '야만적, 감정적, 파괴적'이라고 폄하했고, 이들이 내건 현수막과 깃발이 치안부대를 '모욕'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2024년 현재에도 동티모르 내에서도 발포명령자가 있다는 주장이 없는 것을 보면 정말로 발포명령 없이 우발적으로 군인들이 발포했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35]
물론 동티모르는 2002년에 독립을 쟁취한 후 11월 12일을 '산타크루즈 기념일'이라는 공휴일로 삼으며 이 날을 추모하고 있다.
2.4. 판차실라와 독재
판차실라는 수카르노가 독립운동을 하던 시기에 주창한 것이며, 1945년에 제정된 인도네시아 헌법 전문에서부터 인도네시아의 기본적인 원칙으로 언급된다.사실 판차실라 자체는 일신교 신앙을 제외하면 대충 좋은 말 써놓은 관념론적인 사상 수준이었지만, 문제는 이 판차실라를 수하르토가 자신의 독재를 미화하는 데 쓰기 위해 악용했다는 것이다. 수하르토는 독재 정치 합리화를 위해 인도네시아에 맞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면서 수카르노를 푸대접하면서도 판차실라 이념만은 치켜세웠고, 학생들은 이 판차실라를 달달 외워야 했고 중고등학교 각종 시험에도 출제되었다. 게다가 이슬람 학자들은 수하르토가 홍보하는 이 '새로운 질서'가 유사종교로 발전할 수 있다고 경고했으나, 수하르토는 이들을 설득시킨 후 1983년부터 인도네시아의 모든 조직이 판차실라를 의무적으로 교육받도록 지시했다. 한국으로 따지면 국민교육헌장이나 유신헌법을 배운 것과 같다.
모든 언론과 뉴스 라디오는 판차실라를 홍보하고 수하르토를 찬양하기만 했는데, 이렇게 한 이유는 수하르토 정권에 밉보이면 그날로 언론사는 문을 닫아야 했고, 언론사에 판차실라를 홍보하라고 정권에서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자체 검열제에 의해 언론은 통제되었으며, 반대 논리를 펴는 언론은 폐쇄되고 학자들의 연구는 금지되는 독재 정치가 이루어졌다. 이처럼 판차실라가 수하르토의 독재정치를 위해 사용되었고, 수하르토 시대에 국가 공식 이념으로 교조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인도네시아 내에서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판차실라가 원칙만 보면 굉장히 단순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국가 이념으로 적용하기 위해 이에 맞는 제도와 법률을 구축해 나가며 수카르노, 수하르토 시대에 관련 법학, 정치(철)학적 논의가 축적되기는 했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일방적으로 진행된 것이므로 판차실라 연구는 한국의 박종홍류 어용 학문이나 소련의 마르크스-레닌주의와도 비슷한 위치였다고 할 수 있다. 민주화 이후 현재까지도 판차실라 자체는 인도네시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현대에는 그 자체의 지지만으로는 실제 이념적 지향과 무관하게 '인도네시아적' 정치 이념을 지지한다는 정도만을 함의하기도 한다.
그리고 1970년에 부패에 항의하는 대규모 학생 시위가 발생하자 수하르토는 학생 시위를 법으로 금지시켰고, 1978년에는 대통령의 임기 제한을 철폐해버렸으며, 동년 1월부터 3월까지는 반정부 대학생들에 대흥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 반둥 공과대학교 캠퍼스를 점거한 후 학업과 관련없는 캠퍼스 내 정치 활동을 전면 금지시켰고, 1984년에 수하르토 정부는 모든 미디어가 정보부에 의해 언제든지 취소될 수 있는 언론 운영 면허(Surat Izin Usaha Penerbitan Pers, SIUP)를 소유하도록 하는 법을 발표함으로써 언론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다.
심지어 수하르토는 '정당 통합'을 명분으로 1973년에 모든 이슬람 계열 정당을 통합개발당(PPP)로, 나머지 민족주의•비이슬람 정당은 인도네시아 민주당(PDI)로 통합하며 인도네시아에 존속할 수 있는 단 2개의 야당으로 남겨놨으며, 이들은 명목상으로는 골카르[36]의 통치에 이의를 제기하도록 허용되었다. 그러나 골카르는 의회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여 의미 있는 반대 없이 법안을 통과시키며 골카르가 지명한 사람들로만 구성된 내각을 구성할 수 있었고, 이렇게 수하르토 하의 인도네시아는 말이 다당제지 사실상의 일당제와도 같았다고 한다.[37] 물론 1985년부터 인도네시아의 모든 정당은 판차실라를 그들의 '유일한 이데올로기 기반'으로 선언해야 했으며, 당시 인도네시아 총선은 지방 당국이 해당 지역에서 골카르의 선거 결과에 대한 지시를 따르는 '선택'의 의식화된 공연과도 같았다고 한다. 물론 골카르는 매 총선마다 인도네시아 의석의 (대략적으로) 60~75% 정도를 독차지했다.
수하르토 시기의 대선은 그야말로 박정희, 장제스&장징궈 부자와 유사한 '체육관 선거'였는데, 수하르토는 간선제 대선을 통해 인도네시아 의원들이 단일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자신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게 했다. 실제로 수하르토는 1968년부터 1998년까지 있던 대선에서 7연속으로 100%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당당히 당선되었다.[38] 수하르토의 대선은 헌법상 대통령선출기구로 지정된 국민협의회[39] 위원 전원만 장악하면 자동으로 당선되었고, 수하르토가 참석한 마지막 대선이던 1998년 대선은 국민협의회 의원 1000명 중 923명이 참석해 기립박수로 수하르토를 대통령에 '옹립'한 후 20분 만에 회의를 마쳤다고 한다.[40] #
거기다가 중국계 인도네시아인들도 '외국인'의 동화를 명분으로 집권 초반부터 인도네시아식으로 들리는 이름을 강제하며 공공 장소에서 중국어 사용, 종교 표현, 중국 문화와 문학을 향유하는 것을 금지했고, 중국어 간행물도 군이 통제하는 신문 1종만 허용했으며, 중국어 학교는 단계적으로 폐쇄되었고, 1978년부터는 중국인들의 대학 입학과 공무원 지원, 여권 등록, 심지어 결혼 등은 시민권 증명서를 보유해야만 가능하게 했다. 물론 화교의 정치적 권리는 제한되고 유교의 존재는 인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수하르토는 자기와 친분이 있거나 뇌물을 준 화교들이 운영하는 기업들은 적극 지원했고, 이 때문에 많은 중국계 기업들이 성장했다는 아이러니 또한 있다.
1982년에 수하르토는 경찰과 인도네시아군에 범죄율을 효과적으로 줄일 근절 조치를 취할 것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1983년~1985년에 범죄율을 낮춰야 한다며 '신비로운 저격수'라는 뜻의 인도네시아어 'penembak misterius'를 변형한 이름을 붙인, 인도네시아판 엄타인 '페트루스(Petrus) 작전'을 실시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공식 수치로만 713명의 사망자가 나올 정도로 보안군에 의한 과도한 초법적 살인이 발생했고, 대중들을 공포에 떨게 하기 위해 대놓고 이들의 시신을 공공장소에 놓는 등 방식이 지나치게 가혹했다는 것이다. 이 작전은 특히 자카르타와 중부 자바에서 자주 행해졌다.
1987년 대통령 선거 무렵에는 수하르토를 찬양하는 노래 '인도네시아 발전의 아버지(Bapak Pembangunan Indonesia)'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대놓고 수하르토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수하르토의 위신과 미소가 인도네시아의 얼굴을 밝게 했다(...)는 등 우상화가 가관이다. 노래는 인도네시아의 유명 싱어송라이터 티틱 푸스파(Titiek Puspa, 1937~)가 불렀다. #
2.5. 미국과의 결탁
수하르토의 이러한 철권통치와 대학살은 미국의 암묵적인 호응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점도 있었다. 당시 도미노 이론에 매몰되어있던 미국은 속내야 어떻든 일단 겉으론 수하르토가 인도네시아의 독재자로 집권했음에도 꾸준히 지원해 주었다. 1969년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수하르토에게 "미국인들은 당신이 시도하고 있는 모험을 함께 하기를 바란다"고 말했으며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수하르토의 정책에 대해 인도네시아 전 지역에 "자유의 바람(?)"이 불고 있다고 극찬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수하르토가 집권 과정에서 학살을 저지를 당시 자카르타의 미국 대사관은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최대 5천 명의 명단을 인도네시아군에 제공하기도 했다.미국과 수하르토 정권의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1975년 발생한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이다. 1975년 12월 수하르토는 포르투갈로부터 독립 선언을 한 동티모르를 침공해서 20만 명의 동티모르인들을 학살했는데, 수하르토의 동티모르 침공이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 인도네시아 군의 동티모르 침공을 묵인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동티모르 침공 전날 수하르토는 자카르타를 방문한 제럴드 포드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을 만났는데, 당시 미국은 수하르토의 동티모르 침공작전을 정보기관을 통해서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헨리 키신저는 이를 말리는 것이 아니라 이날 기자들에게 “미국은 동티모르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입장을 이해한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미국의 묵인하에 동티모르에서는 20만명의 사람들이 무자비하게 학살당했다. 더구나 미국은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에 대해 유엔에서 제재조치를 취할 것을 반대하며 인도네시아를 도와주는 대신, 인도네시아가 약 1억 달러가 넘는 헬리콥터 등 미국의 신무기를 이후 20년간 계속해서 구입한다는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미국은 유엔에서 인도네시아 비난 결의안이 통과되려고 할 때 미국은 이 비난 결의안을 기권하여 수하르토 정권을 도와주었다.
미국이 이렇게까지 수하르토를 지지했던 이유는 당시 미국이 동남아시아가 공산화될지도 모른다는 도미노 이론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41] 또한 미국은 수하르토의 만행을 눈감아주는 대가로 반공 전선으로 인도네시아를 얻게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인도네시아를 미국의 무기를 잘 사는 수입국으로 만들 수 있었다. 허나 21세기 가치로 보자면 그야말로 미국의 역사적 명예를 실추시키는 바보짓이었다.
2.6. 경제정책
집권 이후 수하르토는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경제에 집중하게 된다. 인도네시아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다섯 번째 산유국이었고[42], 서방에서는 인도네시아의 자원에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수하르토는 서방 세계의 투자 유치에 총력을 기울였고, 석유와 가스 산업으로 연평균 7%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특히 오일쇼크는 수하르토에 있어서 엄청난 행운이었다. 1972년에 1인당 국민소득이 90달러 아래에 불과했던 것이 1982년에 583달러까지 도달했다. 한편 전체 국민 중 7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는 인도네시아의 성격을 고려해 농업 발전에 박차를 가했고, 수카르노 정권에서 식량 수입국이었던 인도네시아는 수하르토 정권 때에는 농업 생산력의 증가로 식량 수출국이 되었다.1970년대 중순~80년대 초까지 성장하던 경제는 1980년대 초중반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침체되기도 했지만, 저가의 노동력을 이용한 경공업 및 제조업 육성으로 눈길을 돌리면서 비교적 빨리 위기에서 빠져나오는데 성공,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순까진 다시 성장해 1995년에는 1인당 GDP 1,000달러대를 기록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 외자 유치를 목적으로 단행한 금융규제 완화로 인해 기업들의 채무가 급속히 늘어나는 결과를 낳았고, 당장은 큰 성장을 누릴 수 있었지만 경제의 건전성을 크게 해치며 외부 위기에 취약해진 탓에 1997년 IMF 외환위기에 인도네시아도 말려들어가고 GDP가 박살난 수하르토가 하야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어쨌든 경제위기 이전까진 미국식 교육을 받은 경제학자들인 버클리 마피아(Berkeley Mafia)의 협조와 수하르토의 주도 하에 경제가 성장세는 보여 그가 독재자란 이미지를 희석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고, 이로 인해 지금도 상당수 인도네시아인들이 상술한 만행들에도 불구하고 수하르토 시절을 추억 보정하는 원인이 되었다. 1967년에 약 54달러였던 인도네시아의 1인당 GDP는 30년 후 1997년에는 약 1,054달러로 20배 가까이 증가했으며[43], 또 수하르토는 많은 개발도상국 독재자들이 성장은 하면서 물가는 잡지 못한 것과 달리 물가를 잡는데도 제법 성공해 1966년에는 660%에 달하던 인도네시아의 물가상승률이 1969년에는 19%대, 1972년에는 9%대로 떨어지기도 했다.
교육정책으로는 9년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초등학생들의 등록금을 면제하며 가난한 집의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기 쉽게 하도록 했고, 그 결과 1983년 기준으로 초등학교 취학률은 90%에 도달하여 남학생과 여학생 사이의 교육 격차는 거의 없어졌다. 또 1984년에 인도네시아는 쌀을 완전히 자급자족할 수 있는 나라가 되어 1986년 7월 21일에 수하르토는 유엔식량농업기구로부터 금메달을 얻기도 했다. 1969년까지 최소 200만 톤의 쌀을 수입해야만 했던 나라가 16년 뒤에는 아프리카 기근을 돕기 위해 100만 톤의 쌀을 수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인도네시아의 쌀 생산량은 1,220만 톤에서 2,580만 톤으로 증가했다고 한다.[44]
2.7. 부정부패
수하르토는 슬하에 3남 3녀가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수하르토 집권기 부친 빽으로 인도네시아의 재벌이 되었다. 수하르토 또한 자선재단을 운영하며 엄청난 규모의 재산을 가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수하르토 집안은 현재까지도 인도네시아의 항공사, 은행, 방송국, 택시회사 등을 소유하고 있으며 인도네시아에서 상당한 경제 권력을 쥐고 있다. 당시에는 인도네시아에서 최상의 사업 파트너를 찾기 위해 딱히 수고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는데, 왜냐하면 수하르토 대통령과 그의 자식들이 바로 인도네시아 최대 재벌이자 사업가였기 때문이었다.수하르토 일가의 사업체는 모두 수백 개에 이르고 총자산 가치는 4백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며 텔레비전 및 라디오방송, 상업위성방송[45], 은행업, 제약회사, 화학공장, 제지, 펄프, 해운, 항공, 호텔, 쇼핑몰, 택시운수, 자동차제조[46] 등 돈이 될 만한 사업은 손대지 않은 것이 없어 해외 언론에서 '수하르토 주식회사'라는 조롱을 받았다.
그렇게 수하르토는 32년간 집권하는 동안 국고에서 최대 400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재산을 빼돌렸다. 1996년에 포브스지는 수하르토의 개인 순자산이 160억 달러이며 세계에서 4번째로 부유한 사람으로 언급했고,[47] 2004년 국제투명성기구(TI)는 수하르토가 재임기간 동안 350억 달러를 챙긴 것으로 추정하며 수하르토를 세계 최악의 부패 지도자로 꼽았으며, 1999년 5월 24일에 Time Asia지는 수하르토 일가가 수하르토의 집권 기간 동안 무려 732.4억 달러를 횡령했다고 보도했다.[48][49] 그래도 동시기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처럼 해외로 빼돌리는 짓은 안 했고, 적어도 본인은 과도한 사치로 구설수에 오르기는 커녕 어떠한 사치 의혹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만큼은 다행이라 해야 할까?[50] 거기다가 수하르토 일가는 동티모르의 약 40%를 포함하여 약 3.6만 ㎢의 영토를 보유하며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1,251개의 국내 기업[51]의 주식을 무료로 받았고 외국의 기업들은 수하르토의 가족이 보유한 기업과 '전략적 파트너십'을 구축하도록 권장되었으며, 수하르토 일가는 매년 공공 및 민간 부분에서 수백만 달러의 '기부금'을 받기도 했다.
수하르토의 장녀 시티 하르디얀티 룩마나(Siti Hardiyanti Rukmana, 1949~)는 고속도로 통행료를 관리했으며, 차남 밤방 트리핫모조(Bambang Trihatmodjo, 1953~)는 코코아, 목재, 호텔, 텔레비전, 자동차, 쇼핑, 보험 등 다양한 업종의 90여 개의 회사를 거느리고 있는 대기업 경영인이고 또 다른 아들은 석유 독점 사업을 했다. 또한 수하르토의 부인은 규모가 큰 인도네시아 기업 간의 거래에 개입해서 무조건 10%의 수수료를 받아 '10% 부인'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그리고 이렇게 얻은 재산은 개인적으로 설립한 재단으로 흘러들어갔고 수하르토의 추종자들과 비판자들을 회유하기 위한 뇌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수하르토의 30년에 이르는 장기집권은 족벌경영의 폐단이 계속해서 누적되는 과정의 연속이었고, 이는 1998년의 IMF 위기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인도네시아 재벌들은 정권의 특혜를 받아 원자재 수출이나 내수 산업에만 집중했고, 대부분의 제조업 수출은 외국계 기업이 담당했다. 인도네시아의 인건비가 상승하자 이들 외국계 기업들은 낮은 인건비와 더 현대적인 사회기반시설이 있는 중국으로 공장을 이전해 인도네시아 경제를 곤경에 빠트린다.
2.8. 경제위기와 실각
수하르토가 실각한 직접적인 계기는 1997년 일어난 동아시아 금융위기이지만,[52] 정확하게는 IMF와의 협상 과정에서 수하르토가 보인 태도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IMF의 구조조정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는데 수하르토가 31년 동안 이뤄놓은 부패구조를 없애라는 제안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수하르토는 IMF의 구조조정안을 거부한 것은 물론이고 7번째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되는 데에 성공한 후 단행한 개각에서 IMF에서 개혁대상으로 지목한 자신의 딸을 내각에 포함시켰다. 딸이 운영하는 택시회사는 이미 거액의 외화를 빌리다가 홍콩의 한 은행과 함께 부도가 나있었다.하지만 그 결과 IMF의 자금을 받지 못하게 되고 인도네시아의 생필품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게 된다. 그러자 이에 국민들은 생필품 가격을 내리라는 시위를 연일 계속하게 됐고, 이에 유류 및 전기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철회하자 시위는 급격히 과격화되기 시작했다. 거기에 수하르토가 이집트를 국빈 방문하던 1998년 5월 12일, 자카르타의 트리삭티 대학교에서 수하르토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시위에[53] 군대가 실탄을 발포하여 대학생 4명이 숨지고 15명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하자[54], 이 여파로 시위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자카르타를 비롯한 전국에서 약탈과 방화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수하르토의 지지기반인 군부마저도 동요하기 시작하자 각국은 인도네시아의 자국민들을 대피시키기 시작한다. 그런데도 수하르토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개발도상국정상회담에 참석해 골프나 치고 있는 등 아직까지도 시위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사태가 갈수록 심각해지자 수하르토는 이집트에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다가 5월 15일 급히 귀국해 “곧 총선을 실시하고 전 장관을 경질하고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그에게 등을 돌린 국민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즉각 하야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궁지에 몰린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과도기 대통령인 (자기 밑에서 부통령을 한) 하비비에게 장관 몇 사람의 임명권만 주면 퇴임하겠다고 권력을 구걸하였고, 마지막에는 사위인 수비안토 준장과 자카르타 수도 경비사령관을 시켜 국민의 데모를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이 조직했다는[55] 조작된 소문을 퍼뜨리고 민심을 호도해 1998년 5월 인도네시아 인종 폭동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정부의 조작만으론 이미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되었고 미국과 군부마저 수하르토에게 등을 돌리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던 수하르토는 결국 1998년 5월 21일에 장장 31년 동안 역임해 온 인도네시아 대통령직에서 사퇴한다. 이른바 개혁 시대(Era Reformasi)의 시작이었다.
2.9. 실각 이후
수하르토는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 채 자카르타의 부촌인 멘텡 지역의 자택에서 칩거하는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했고, 그의 부정부패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았다. 수하르토는 내려왔지만 인도네시아의 상당한 경제권력을 가지고 있는 수하르토 일가와 여전히 상당한 정치권력을 가지고 있는 골카르당, 추종 세력이 수하르토를 보호했기 때문이다.[56][57] 그럼에도 반독재 성향 정권이 들어서며 2000년 인도네시아 검찰은 각종 부정부패 혐의로 수하르토를 기소했으며, 2004년 국제투명성기구에서 수하르토가 국고에서 빼돌린 돈을 조사한 결과 150~350억 달러에 이르는 엄청난 금액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하여 그를 20세기 가장 부패한 정치인으로 선정하기도 했다.그러나 인도네시아 법원은 수하르토가 2006년 5월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것을 이유로 수하르토에게 불기소처분을 내렸다. 그 와중에 지병이 악화되자 수하르토를 용서하자는 여론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결국 죽을 때까지 편하게 살다가 사망했는데, 이것은 수하르토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여전히 인도네시아 집권 세력에 편입되어있었기 때문도 있었다.[58] 덕분에 수하르토는 집권 기간 동안 수백만 명을 대량으로 학살한 죗값에 비하면 굉장히 안락한 노후와 편안한 죽음을 맞았다. 물론 쫓겨났다는 것 자체가 본인 입장에선 상당한 수치였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수하르토는 퇴임 후인 1999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심장과 장 문제까지 겹치며 여러 번 병원에 입원하는 것을 반복했으며, 수하르토의 변호사들은 이러한 수하르토의 건강 상태를 근거로 수하르토의 재판 회부를 거부했다. 그러다가 수하르토는 2008년 1월 4일에 자카르타의 페르타미나 중앙병원에 입원한 후 1월 23일에 패혈증이 악화되며 유족들은 그의 상태가 개선되지 않으면 생명 유지 장치를 제거하는 데에 동의하게 되었고, 결국 수하르토는 2008년 1월 27일 오후 1시 9분에 8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수하르토의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심장, 신장 및 폐 기능 저하에 따른 빈혈과 저혈압이었다고 한다.
그의 사망 몇 분 후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당시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열고 수하르토를 인도네시아의 '최고의 아들' 중 한 명으로 선언하면서 전직 대통령에게 최고의 존경과 영예를 줄 것을 요청했으며, 수하르토의 장례는 비판 여론 속에서도 2008년 1월 28일에 수만 명이 참여한 가운데 국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시체는 자카르타에서 400㎞ 떨어진 솔로(Solo)시 인근 수하르토 가문의 가족 묘로 옮겨져서 장례에 치러졌는데, 이곳에는 1996년 사망한 수하르토의 아내 시티와 수하르토의 어머니가 이미 매장되어 있었다. 수하르토가 자신의 아내였던 시티의 곁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해 그의 말을 따른 것이다. 한편 당시 인도네시아 정부는 수하르토 사망일로부터 7일 동안을 공식 애도기간으로 선포하고 전국 각지의 관청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에게도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기를 내걸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수하르토의 사망 10일 전에 작성된, 수하르토의 일생과 유산에 관한 기사.
2.10. 사후
그가 실각한 이후 인도네시아는 민주화되었지만[59], 그의 집권 기간 키워진 세력들은 여전히 인도네시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수하르토 당시 집권여당인 골카르당은 지금도 인도네시아 정계에서 위상이 상당한 주요정당 중 하나인데, 다만 2000년대 이후엔 1, 2위를 다투는 주요 대선 후보도 못 내고 있는 실정이라 점점 하락세를 타고 있긴 하다.수하르토 독재의 후유증으로 현재 인니에서는 부정부패 등으로 말썽이 벌어지기도 하고, 21세기 들어 인도네시아의 문화적 보수화를 주도하고 있는 주류 종교에 속하는 이슬람 강경파 상당수도 이들 세력과 커넥션이 있다고 한다. 다만 수하르토는 아체 독립주의자는 때려잡았고, 수하르토 정권 시기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정치 활동도 억제되었기 때문에 정책 공조는 몰라도 인도네시아내 이슬람 보수 세력이 무조건 수하르토와 커넥션이 있거나 하진 않다.
또한 학살에 관여한 책임자들은 수하르토 퇴진 이후인 2020년대에도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제법 있다보니[60] 수하르토의 후임 정부들도 학살에 대해선 쉬쉬하거나, 인도네시아 역사교과서에서도 이 학살을 '고작' 8만 명 미만이 사망한 '애국 캠페인'으로 왜곡하는 경우가 많고, 2004년에 출간된 학살을 사실대로 언급한 교과서가 군과 이슬람 단체의 항의로 불과 2년만에 출판이 금지당하고 법무장관의 명령으로 모두 불태워진 일도 있었으며, 인도네시아 의회가 이 학살을 조사하기 위해 조성한 진실과 화해 의원회가 인도네시아 고등 법원에 의해 활동이 금지되거나 민간단체 'YPKP65' 주도 하의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운동을 군부가 '공산당 활동'으로 몰아 탄압하는 황당한 경우도 발생했다. 게다가 1998년 이후로 학살 피해자 유족들이 집단 무덤을 찾고자 했지만, 이 무덤들을 유족들이 발견하는 사례는 거의 없었다. 이는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액트 오브 킬링에서 상세히 다뤄지고 있다. 게다가 수하르토가 집권하는 과정에서의 학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단순 실행범이든 학살을 지시한 군부 인사든 재판에 회부되어 합당한 처벌을 받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61] 이런 판이니 인도네시아에서는 학살에 가담한 후 신분을 세탁하고 죗값을 치르지 않은 것을 넘어 노년기까지 편안한 여생을 보낸 사람이 수두룩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62]
2016년에는 인도네시아 역사상 최초로 1965년 대학살에 대한 공개적 논의가 이루어졌다. #
2023년,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과거 정권의 인권 침해 사례에 대해 인정하며 유감을 표명했다. 이전보다 진일보한 것이지만, 인권 단체들은 이번 대통령 유감 표명만으로는 부족하고, 가해자들에 대한 재판과 법적 해결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조코위 대통령 "수하르토 정권 인권침해 인정…유감 표명".
2024년 인도네시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예기치 않게 고인드립(...)을 당했다. 2024년 1월 7일 골카르의 부의장 어윈 악사가 골카르 지지자들을 결집시키기 위해 딥페이크로 수하르토가 나오는 영상을 만든 것. # 그리고 해당 대통령 선거에서는 '수하르토의 오른팔'로 불리며 동티모르 독립운동과 수하르토 반대파들을 탄압한 프라보워 수비안토[63]가 직전 대통령인 조코 위도도의 지원 하에 조코 위도도의 아들인 기브란 라카부밍 라카를 러닝메이트로 하여 당선되었다.
3. 여담
3.1. 식생활
부패 행각과는 달리 식생활은 굉장히 소박했는데, 너무 소박한 나머지 대부분의 장관들과 관리들이 이를 보고 놀랄 정도였다고 한다.[64] 수하르토는 사치스러운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 대신 따뜻한 밥과 튀긴 민물생선을 곁들인 사유르 로데,[65] 사유르 바얌,[66] 생선구이를 좋아했고 콜레스테롤을 예방하기 위해 티울[67]도 즐겨 먹었으며, 고기 요리 중에서는 미트볼 베르미첼리[68]와 양고기 사테를 좋아했다. 대부분 인도네시아에서 흔하게 먹는 가정식들이다.그리고 수하르토는 특히 타후 템페 바셈[69]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해외에서의 식사 시간에도 찾을 정도였다고 하며,[70] 간식과 식사 준비격으로 컵라면을 먹는 것도 좋아해 장관들을 위시한 손님들에게 컵라면 팝 미(Pop Mie)를 제공하는 것을 좋아했다. 수하르토가 엄청난 재산을 축적하면서도 소박한 식사를 즐겼던 것은 가난한 유년기를 보낸 것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3.2. 창작물
1995년 MBC 드라마 제4공화국 22부에 잠깐 등장한다. 다만 하나도 안 닮았고 인종도 전혀 다른 배우가 맡았다.
1950년대와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2022년 인도네시아 영화 나나에서 수하르토가 정권을 장악한 내용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해병문학에도 수하르토라는 이름의 해병이 나온다.
3.3. 사고뭉치 막내아들 토미 수하르토
토미 수하르토(Tommy Suharto, 1962~)의 모습.
비록 수하르토 본인은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처럼 도를 넘은 사치로 구설수에 오르내린 적은 없으나, 수하르토의 다섯째 자식이자 막내아들, 그리고 수하르토가 가장 아끼던 자식이기도 했던 토미 수하르토는 방탕한 생활과 여러 스캔들로 구설수에 올랐다. 토미 수하르토는 1962년 7월 15일에 태어났는데, 본명은 후토모 만달라 푸트라(Hutomo Mandala Putra)였다.
22세였던 1984년에는 10만 달러의 종자 자본을 가지고 험퍼스 그룹(Humpuss Group)을 설립해 10주 이내에 20개, 나중에 60개의 자회사를 가진 대기업으로 키웠으며, 1985년에는 국영 석유 및 가스 회사인 페르타미나(Pertamina)의 자회사인 페르타 오일 마케팅의 지분 65%를 인수하여 배럴당 0.30~0.35달러의 커미션을 받았고[71], 1990년 12월에는 BPPC라는 회사를 차리며 정향 무역 독점권을 얻어 모든 현지 담배 제조업체는 정향을 다른 국가의 정향 수입도 통제하는 에서 구매해야 했는데, 토미는 정향 농부들에게 정향을 낮은 가격으로 팔도록 강요한 후 의도적으로 가격을 올리며 담배 회사에 정향을 팔아 폭리를 취했고, 이 때문에 많은 정향 농가가 파산했다.
이렇게 거액을 모은 토미는 아버지가 집권할 동안 사교계의 명사로 활약하며 여배우, 나이트클럽, 카지노, 도박[72]을 좋아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특히 자동차 경주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아예 프로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을 정도였고, 1994년에는 버뮤다에다 차린 메가테크(Megatech)라는 회사 명의로 4천만 달러를 들여 크라이슬러 그룹으로부터 람보르기니를 인수했으며, 뉴질랜드에 4백만 달러 이상을 들여 사낭용 농장을 사거나 영국에 20채가 넘는 아파트를 사는 등 초호화 생활을 했다. 참고로 1999년 기준으로 토미 수하르토의 재산은 타임지 추산으로만 8억 달러에 달했으며, 2016년에도 토미 수하르토는 6억 5500만 달러를 가져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150인 목록 중 56위에 이름을 올렸고, 2018년에는 그가 보유한 순자산이 6억 7천만 달러를 기록했다.
한편 토미 수하르토는 아버지가 퇴진할 무렵에 람보르기니를 아우디에다 1억 1천만 달러에 매각해버렸으며, 아버지의 퇴진 후인 1999년 4월에는 1,100만 달러 규모의 부동산 사기 혐의로 재판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무죄를 선고받았다가 유죄로 판결이 뒤집히며 징역 18개월을 선고받았는데, 토미는 감옥에 가는 것을 거부하고 은신했다가[73] 법원이 그를 은신처에서 나오게 하기 위한 거래의 일환으로 2001년 10월에 토미에게 다시 무죄를 선고했다[74]. 그러나 토미 수하르토는 갑자기 살인 혐의에 연루되어 2001년 11월 28일에 다시 체포되었고, 이에 인도네시아의 시민들은 토미의 체포를 '인도네시아 사회와 수하르토가 진정으로 단절할 수 있는가라는 시험무대'로 여기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실제로 2001년 7월 26일에[75] 토미 수하르토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대법원 판사 샤피우딘 카르타사스미타(Syafiuddin Kartasasmita, 1940~2001)가 사무실로 가는 길에 2대의 오토바이를 탄 4명의 괴한에게 총 4발을 맞고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법원에 따르면 토미 수하르토는 이 괴한 중 2명에게 1억 루피아(약 820만 원)[76]를 주며 대법원 판사에 대한 청부살인을 지시했다고 한다. 결국 토미 수하르토는 살인, 무기 소지, 사법 회피 혐의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지만, 토미는 병을 이유로 재판에 거의 나타나지도 않고 2002년 7월 26일에 판결이 확정될 때에도 재판장에 없었다고 한다. 참고로 토미 수하르토의 범죄는 이게 다가 아니라고 하는데, 1999년 말부터 2000년 초까지 수하르토 일가를 부패 혐의로 기소하려는 재판이 일어난 전후로 자카르타에서 일어난 의문의 폭탄 테러들을 기획했다는 의혹이 있다[77].
토미 수하르토는 처음에는 자카르타의 최고 보안 교도소인 치피낭 교도소에 잠깐 구금되었다가 3주 뒤에 중부 자바 남부의 누사 캄방안 교도소에 있는 8m*3m 남짓의 감방으로 이송되었는데, 토미 수하르토의 감방은 말이 감방이지 호텔이나 다를 바 없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 감방은 카펫이 깔려 있었고 소파, 찬장, 텔레비전, 냉장고, 조리 도구, 에어컨, 정수기, 심지어는 노트북 컴퓨터와 두 대의 휴대폰까지 갖춰져 있었으며, 토미는 감옥에서도 여자친구를 만나고 득녀까지 한 데다가 의료적 이유로 감옥에 나와 자카르타를 여행하는 것이 허용되며 종종 전용 골프장에서 목격되기도 했다. 결국 이렇게 구설수에 오른 끝에 토미 수하르토는 2006년 4월에 치피낭 교도소로 이송되었고, 항소심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된 후 2006년 10월 30일자로 가석방되었다. 전문가들은 토미의 석방이 그가 갖춘 부와 수하르토 가족의 지속적인 영향력 덕분인 것으로 분석했다. 청부살인한 것만 보면 영락없는 인도네시아판 윤길자인 셈.[78]
석방 후에도 토미 수하르토는 2011년 5월에 가루다 인도네시아의 기내 잡지 2009년 12월호에 '발리에서 즐길 수 있는 새로운 목적지'라는 제목의 기사에 토미가 보유한 리조트를 홍보하면서 각주에 '유죄 판결을 받은 살인자'라고 적었다는 이유로 항공사를 상대로 125억 1000만 루피아(146만 달러)의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으나 법원은 '국내 및 국제 사업가로서의 토미의 명성을 망쳤다. 토미가 형기를 마쳤기 때문에 그의 과거를 언급하지 말았어야 했다.'라는 이유로 토미의 손을 들어줬다. 2012년에는 전직 롤스로이스 직원이던 딕 테일러(Dick Taylor)가 1990년대 초에 가루다 인도네시아가 토미에게 에어버스 A330 항공기용 엔진으로 자사의 트렌트 700 엔진을 구매하는 데 도움을 줬다는 이유로 2천만 달러의 뇌물과 파란색 롤스로이스 자동차를 줬다는 의혹을 제기했는데, 토미의 변호사는 이를 부인했으나, 영국의 부패 조사기관인 SFO는 롤스로이스가 두 명의 인도네시아 중개인에게 뇌물을 지급한 것을 인정하면서 2017년에 이 스캔들에 대해 롤스로이스와 기소유예 합의를 맺고는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7개국에 총합 6억 7,100만 파운드를 지불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토미 수하르토는 아버지가 집권할 때부터 골카르당에 가입한 것은 물론이고 입법부인 인민협의회(MPR) 의원으로 취임했으며, 2009년과 2016년에는 두 차례나 골카르당 당수에 출마하고자 했으나, 본인의 54째 생일 하루 뒤인 2016년 7월 16일에는 베르카리야(Berkarya)당을 결성한 후 2017년 5월에는 의회에서 '부패가 만연한 인도네시아의 현 상황이 안타깝다'고 말했고, 2018년 7월에도 '인도네시아 정치가 부패하여 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발언을 하여 빈축을 샀다. # 자신의 아버지가 집권 시절 부정부패를 자행한 독재자인데다 자기도 여러 부패 혐의에 연루되었고, 수하르토 일가가 부정부패, 빈익빈 부익부,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 세력 간 정치적 분란 등 인도네시아의 온갖 문제들을 다 초래한 원흉들임을 감안하면 이 발언은 그야말로 적반하장 격. 심지어 토미는 2018년 5월 20일에 2000년대 초에 회부된 재판에 대해 "재판에서 나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증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판결은 참으로 가혹했다. 나는 임기를 마치고 법에 따라 이제 다른 누구와도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되었다."라는 희대의 망언을 남겼다.
2019년 4월 17일에 있던 인도네시아 총선에서는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으나[79] 2.09%의 득표율로 패했고, 이 선거 참패에 당은 헌법재판소에 35건의 항소를 제기했으나 모조리 기각당했다.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68 | 인도네시아 대통령 선거 | 인도네시아 | 616 (100.00%) | 당선 (1위) | 초선 | |
1973 | 인도네시아 대통령 선거 | 590 (100.00%) | 재선 | |||
1978 | 인도네시아 대통령 선거 | 590 (100.00%) | 3선 | |||
1983 | 인도네시아 대통령 선거 | 590 (100.00%) | 4선 | |||
1988 | 인도네시아 대통령 선거 | 649 (100.00%) | 5선 | |||
1993 | 인도네시아 대통령 선거 | 649 (100.00%) | 6선 | |||
1998 | 인도네시아 대통령 선거 | 604 (93.06%) | 7선[80] |
5. 관련 문서
[1] 네덜란드어 정서법의 영향을 받은 표기이다. 1970년대 인도네시아어 정서법 개정 이후로는 Suharto라고 쓰는 게 맞는데 본인은 Soeharto를 선호했다.[2] '하지 모하맛 수하르토'(Haji Mohammad Soeharto)라고도 하는데 '하지 모하맛'은 그가 1991년 메카로 순례를 다녀온 후 붙인 칭호이며, 그의 공식 이름의 일부는 아니다. 그의 공식 이름은 그냥 '수하르토'이다. 자바인은 성이 없고 1어절 이름을 쓰는 경우가 많다 보니 저 앞에 붙은 칭호들을 공식 이름의 일부로 오해하는 일이 잦다.[3] 제1대 대통령 권한대행 (1967년 3월 12일 ~ 1968년 3월 27일)[4] 화교 등 딱히 별 잘못도 없는 집단까지 정권의 대중 분노와 관심을 돌리기 위한 노림수로 이용해 학살시켰다.[5] 반대로 인도네시아 경제를 파탄낸 원흉이라는 평가도 있는데, 실제로 1997~1998년에 인도네시아의 1인당 GDP가 반토막이 나버린 건 사실이고, 이 경제난 때문에 수하르토가 물러난 것도 사실이다. 덕분에 인도네시아 경제는 2000년대 들어서야 다시 혼란을 수습하며 이전보다 더 빠르게 성장한다.[6] 실제로 그가 학살한 인도네시아 사람 수는 대략적으로 잡으면 91만 명에 달한다고 하며, 2차 대전 후 집권한 지도자 중 그보다 많은 사람을 죽인 독재자는 마오쩌둥, 폴 포트, 오마르 알 바시르, 김일성-김정일 부자 정도밖에 없다고 한다. 참고자료.[7] 애초에 이 작자는 전두환도 능가하는 독재자다.[8] 이승만이 113만 명을 죽였다는 주장은 자료 오독으로 인한 것이다. 정확히는 중복으로 집계된 사례도 포함된 데다가 어느 진영에게 학살당한 것인지는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는 것. 물론 이승만이 수하르토 다음으로 많은 인명을 학살한 2차 대전 이후 반공권 독재자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9] 반공권 학살자로 유명한 프란시스코 프랑코와 장제스를 살펴보자면 전자는 매일 아침마다 사형수들(대다수가 정치범들)에 대해서 오늘 사형을 시킬 것인지 아니면 사형을 보류할지, 사형을 집행하고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할것인지 아니면 은폐할지 등을 결정했고 후자는 남의사, CC단 같은 조직들을 직접적으로 움직여 여러 테러들을 대규모로 저질렀고 대만 계엄령 당시 여러 반정부 인사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했다. 그나마 그 아들은 반대파 살상은 자제한 편이었다.[10] 참고로 몇몇 사람들은 수하르토의 친부가 사실은 어느 귀족이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나, 수하르토는 이를 부인했다.[11] 인도네시아의 근현대사 학자들은 수하르토의 권력욕이 이 시절 당한 학교폭력에서 기인했다고 보고 있다.[12] 그러나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작업복이 찢어졌다는 이유로 얼마 안 가 쫓겨났다고 한다.[13] 이때 네덜란드어를 배웠다고 한다.[14] Mangkunegaran, 인도네시아 수라카르타 지역에 1757년부터 존재해온 공국.[15] 이는 단순 정신질환자의 해프닝에 불과했던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공산주의자 간첩의 소행으로 날조하여 독일공산당을 탄압하고 제3제국을 수립한 아돌프 히틀러의 수법과 유사하다. 애초에 국가, 정확히는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역으로 권력 강화와 반대파 탄압의 기회로 삼는 것은 예로부터 많은 독재자들이 쓰는 수법인데, 당장 이승만도 북한의 침략으로 6.25 전쟁이 일어난 것을 빌미로 '북한 협조 예정자 제거'를 명분삼아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저질렀다.[16] 한국으로 치면 장도영과 비슷한 인물이며 독립전쟁에 참가했다. 9.30 때는 쿠데타군에게 피습당하자 수하르토를 지지한 후 수하르토 체제가 자리를 잡자 은퇴했고, 말년에는 원로인 국민영웅 중 한 명으로 대접받으며 2000년 82세로 사망할 때까지 여생을 보냈다.[17] 참고로 120만 명은 수하르토의 측근이던 얀 발렌도우(Jan Walendouw)가 추산한 수치다. 심지어 이때 300만 명이 사망했다는 추정도 있지만 오늘날 300만 명은 지나치게 큰 수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보도연맹 학살사건 113만명 학살설과 유사한 맥락.[18] 심지어는 약 170만 명이 수감되었다는 말도 있다.[19] 인도네시아 정부는 '대체로' 1981년부터 1990년 사이에 160~180만 명의 전직 수감자가 있다고 추정했고, 당시 수감된 사람들 중 일부는 30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20] 어느 정도였냐면, 발리에서는 1965년 12월 기준으로 인구가 절반으로 준 마을들이 많았을 정도였으며, 자바에서 희생자의 4/5가 발생했다는 설도 있다.[21] 참고로 딸들의 감금 기간이 어머니보다 짧았던 이유는 그녀들이 탈옥했기 때문이다.[22] 힌두교 우세 지역인 발리는 사제 및 힌두교도 우파 자경단이 대신했다.[23] 실제로 자바에서는 강이 피로 붉게 물들 정도였고, 수라바야에서는 시체로 인해 강물이 흐르지 못한다고 군대에 공무원의 민원을 제기할 정도였다.[24] 심지어 겨우 11살(!)밖에 안 된 소녀가 경찰에 납치당한 후 감옥에서 의식을 잃을 때까지 강간당했다는 극악무도한 실화도 있다.[25] 물론 이 문단에서 언급할 동티모르의 독립운동은 분리주의와는 결이 완전히 다르다.[26] 참고로 수하르토가 물러난 1998년에 동티모르 인구는 약 87만 명이었다. 수하르토는 동티모르 인구의 무려 12~20%를 죽인 셈.[27]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 이날은 동티모르 민주공화국이 선포된 지(1975년 11월 28일) 겨우 9일밖에 되지 않은 날이었다.[28] 동티모르의 친인도네시아파 독립운동가로, 추구하던 독립운동 방식이 동티모르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려면 인도네시아와 합병해야 한다였다. 거짓말처럼 보이겠지만 진짜다. 물론 합병 조건은 '동티모르를 인도네시아의 자치령으로 합병해 달라'이긴 했지만 수하르토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아라우조는 역사상 가장 황당한 매국노로 그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29] 이들 중에는 호주인 기자 로저 이스트(Roger East, 1922~1975)도 있었다.[30] 대부분 15~50세였으나, 9세 소년과 60세 남성이 끌려간 경우도 있었다.[31] 실제로 1979년에 국제적십자위원회의 한 특사는 어떤 수용소에서는 수용자의 약 80%가 '비아프라만큼이나 심한' 영양실조에 걸렸다고 보고했을 정도였다. 참고로 비아프라 전쟁도 나이지리아 정부군 측에서 의도적인 기근을 전술로 써서 100만에 육박하는 비아프리카 민간인들을 굶겨 죽였으며, 훗날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도 1983~1985년 에티오피아 북부(오늘날의 에리트레아 지역)에 대기근이 일어났을 당시 이를 에리트레아 독립을 외치는 반군 세력을 악화시킬 기회로 삼기 위해 의도적으로 기근 피해를 악화시켰다. 이들처럼 수하르토도 반군 진압을 명분으로 기근을 빙자한 학살을 저지른 것이다.[32] 아일랜드 대기근, 우크라이나 대기근, 대약진운동, 고난의 행군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인재라는 의견에는 이론이 없어도 의도적인 학살 여부에는 논쟁이 있다는 것과는 대조적이다.[33] Henry Kamm, 1925~2023. 참고로 캄은 1978년에 인도차이나 난민들에 대한 취재로 퓰리처 국제보도상을 수상한 사람이었다.[34] 이런 면에서 수하르토는 프랑스의 샤를 드골과도 유사하다. 드골은 자유 프랑스를 이끌며 나치 독일의 침략으로부터 프랑스를 지켜낸 인물인 것은 물론 종전 후에는 나치 부역자들을 엄격하게 처벌한 인물이었는데도 기니가 독립하자 그 보복으로 기니의 모든 인프라를 파괴하고 쿠데타를 사주하거나 위조지폐를 유포하는 등 수하르토랑 다를 바 없는 행각을 보였다. 심지어 드골은 어느 면에서는 수하르토보다 더 저질인 게 자국인 나치 부역자들은 엄격하게 처벌하고 명색이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였던 인간이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하르토는 오늘날 외국에서도 추악한 독재자이자 학살자로 간주되나 드골은 외국에서도 영웅으로 간주된다. 서양 강대국 입장에서 역사가 서술되니까 그러는 거다.[35] 물론 인도네시아군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더욱 가관인 것이 인도네시아군은 고작 자신들을 비판하는 현수막을 보고는 난 화를 총기를 난사해 무고한 시민 수백 명을 학살한 것으로 푼 저질스러운 조직이었다는 소리가 된다.[36] 당시에는 공식적으로는 정당이 아닌 '공공 조직 연합'으로 불렸다.[37] 이 3당 체제는 수하르토가 물러난 1998년까지도 계속되었고, 수하르토가 물러나고 얼마 후인 1999년에 인도네시아는 본격적인 다당제 국가가 되어 1999년 총선에서는 무려 48개 정당이 출마하게 되었다.[38] 사실 전임자인 수카르노도 (단일 후보+득표율 100%의) 간선제 대선을 2번(1945, 1963) 치르긴 했는데, 사실 이는 수카르노의 권력욕 때문이 아니라,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해 대통령 선거가 연기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수카르노도 1963년 대선을 통해 자신을 '종신 대통령'으로 선포했다.[39] 한국으로 치면 통일주체국민회의 포지션이다.[40] 이후 인도네시아의 대통령 선거는 압두라만 와힛이 출마해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과 맞붙어 53.28%의 득표율로 힙겹게(?) 당선된 1999년 선거를 마지막으로 직선제로 변경되었다.[41]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가 이렇게 되었고 태국, 말레이시아에서도 공산 반군들이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또 태국은 공산주의에 대한 대중적인 공포감을 악용해 탐마삿 학살을 저지르기도 했다.[42] 그러나 2000년대 초반에 석유생산이 파크를 찍었던데다가 외환위기의 후유증을 극복한 이후에 인도네시아의 경제가 다시 성장세에 접어들면서 석유소비가 급속히 늘어나는 바람에 석유수입국으로 전락했고, 덕택에 2009년부터 2015년까지 잠시 OPEC를 탈퇴했다.[43] 다만 2023년 환율로 환산하면 480.4달러에서 1,975.6달러로 증가하여 30년 동안 약 4배 정도 증가한 셈이다. 사실 이런걸 보면 알 수 있듯 인도네시아 gdp 자체는 구글 등을 보면 2000년대 민주정부 이후 훨씬 가파르게 성장하긴 했다.[44] 물론 기술력 발전을 고려하면 생산량 자체는 어지간히 삽질하는거 아닌 이상 증가하는게 정상이긴 하다.[45] 1980년대까지 인도네시아 방송사업을 독점했던 국영방송(현재는 공영방송으로 전환된) TVRI는 물론이고 1980년대 후반 방송법 개정으로 민영방송이 허가 된 이후로는 아예 민영방송 사업에도 손을 댔다.[46] 자동차 매니아였던 아들 토미가 기아 세피아를 자국 브랜드로 도입하였으며, 오스틴 메트로 기반의 고유모델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세피아 도입을 할 때 아들 고집에 넘어간 수하르토가 직접 국영은행들에 자금 대출을 지시했다. 그 사업이란게 한국에서 완성차를 수입해서 로고만 바꾸는 수준이라 관료들이 필사적으로 반대했지만 대출 금액을 줄이는 선에서 끝내야 했다. 그리고 토미의 회사는 경제위기 때 부도를 내 인도네시아 국민들 세금을 날려먹었다.[47] 참고로 수하르토가 당시 대통령으로서 받은 월급은 겨우(?) 21,000달러였는데, 이것도 당시 일반적인 인도네시아인의 약 19년치 봉급에 육박하는 거액이었다. 참고로 1996년 기준으로 인도네시아의 1인당 GDP는 1,129달러였다.[48] 이 금액을 2022년 가치로 환산하면 무려 1303.7억 달러인데, 이는 2022년 기준으로도 세계 부자 순위 4위 안에 드는 엄청난 거액이다. 게다가 732.4억 달러도 세계 부자 순위 15위 안에 들 정도의 거액이다.[49] 참고로 수하르토 치하에서 GDP가 가장 높았던 1996년 기준으로 인도네시아의 총 GDP는 약 2274억 달러였다.[50] 실제로 수하르토가 퇴진 후에 거주한 집의 외부 사진(#1 #2)과 내부 사진(#)을 보면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품위 유지만큼은 어느 정도 하는 느낌이긴 하나 한때 30년 동안 한 나라를 통치한 무소불위의 독재자이자 세계에서 4번째로 부유했다는 사람의 집이라 하기에는 확실히 검소하다 못해 초라해 보인다.[51] 대부분 수하르토의 중국계 동료가 운영했다.[52] 이때 인도네시아의 1인당 GDP는 1054달러(1997)에서 459달러(1998)로 단 1년 만에 이전의 절반 미만(!) 정도로 폭락했고, 결국 인도네시아는 2004년에야 겨우 동아시아 외환위기 이전의 1인당 GDP를 회복할 수 있었다. 당시 인도네시아의 경제성장률은 무려 -13.1%를 기록했는데, 동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5.1%였는데도 '6.25 전쟁 이후 최악의 국난'이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안겨줬다는 것을 생각하면 인도네시아는 거의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53] 트리삭티 대학은 명문가, 부유층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라 그동안 시위에 나온적이 없었다. 맨처음 시위에 나왔을때 타 대학교 학생들은 "범생이 도련님-아가씨들이 왜나와?"라는 뜬금없다는 반응이었다.[54] 상단 사진이 바로 트리삭티 대학교에서의 시위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55] 인도네시아 화교들은 주로 기독교 계열을 믿다보니 경제적 상류층이 많음에도 소수파로 찍혀있는 상태였다.[56] 이 때문에 인도네시아 다수 언론인들은 인도네시아가 민주화된 후에도 수하르토가 죽을 때까진 종교, 군대, 부패 세 가지 중요한 문제에 대한 비판적 보도를 금기시했다고 한다.[57] 당장 2024년 인도네시아 대통령으로 당선된 프라보워 수비안토가 수하르토의 최측근이자 친척이다.[58] 집권여당은 민주당이었지만, 수하르토가 몸담았던 골카르당도 연립내각 중 일부로 참여하고 있었다. 그래서 분위기 파악 못하고 수하르토에게 '국민영웅' 칭호를 부여하는 입법까지 제안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59] 압두라만 와힛,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처럼 야당쪽 대통령이 간선제로 나오기도 하다가, 2004년부터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되어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가 당선되었고, 최초의 직선제 정권교체는 2014년 조코 위도도가 당선되면서 이뤄졌다. 이른바 인도네시아판 개혁 시대.[60] 2016년 당시 인도네시아의 국방부 장관 랴미자르드 랴쿠두는 수하르토 집권기 학살 피해자들이 '죽어야 마땅했다'(...)는 망언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2000년부터 2002년까지 육군전략예비사령관을 역임하고 이후 영전하여 2005년까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하였다. 당연히 친수하르토 성향이 갈할 수 밖에 없는 인물이다. 이때 정권이 민주층 지지자를 둔 조코위 정권인걸 생각해보면 상당히 아이러니한데, 연립 내각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 사람의 뒤를 이어서 후임 국방장관으로는 수하르토의 전 사위이자 중장출신인 프라보워 수비안토이다. 이 사람 역시 조코 위도도와는 성향이 완전히 다른 위대한 인도네시아 운동당의 당수이다. 특정 정당이 다수를 차지하지 못하고 수많은 정당이 난립하는 인도네시아의 정치 특성상, 성향이 전혀 다른 정당과의 연립내각이 자주 이루어진다.[61] 사실상 처벌이 불가능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2024년 기준 무려 59년 전의 일인 데다가 핵심 범죄자들은 거의 다 늙어 사망했을 테니... 누릴 거 다 누리고 아흔 가까이 된 후에야 모든 악행이 드러나 처벌할 수 없게 된 하판락과 비슷한 케이스인 셈.[62] 실제로 하판락 문서에서도 볼 수 있듯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은 학살자들이 부유한 사업가로 신분세탁을 하는 경우는 매우 흔하다.[63] 아버지가 수하르토 시절 여러 장관직을 역임한 수하르토의 최측근이었으며, 본인도 (후에 이혼하긴 했어도) 수하르토의 사위였다.[64] 사실 아돌프 히틀러,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로버트 무가베처럼 사치로 악명이 높은 독재자 중에서도 식생활만큼은 채식 위주로 소박하게 한 케이스는 그리 드문 편이 아니다.(또한 나라가 아주 식량부족으로 고생하는 게 아니면 고기를 즐겨먹는다고 해도 비싼 부위를 골라먹는 것이 아닌 이상 소박한 식단으로 간주되니 이런 사람을 합치면 더 많을 것이다. 후술할 워렌 버핏도 소박한 식생활이라고 하지만 육류 위주의 식단을 유지한다.) 사실 워렌 버핏만 봐도 알 수 있듯 오늘날의 재력가/권력자들은 소박하게 생활하거나 사치를 부리더라도 식생활은 소박하게 하는 경우가 흔하고, 오히려 김씨 3대와 모부투 세세 세코가 특이 케이스다.[65] Sayur lodeh, 코코넛 밀크에 야채를 넣어 만든 수프[66] Sayur bayam, 생강으로 맛을 낸 맑은 수프에 주로 아마란스 같은 야채로 만든 야채 수프[67] Tiwul, 카사바를 강판에 갈고 종려당과 함께 끓인 요리.[68] Meatball Vermicelli, 미트볼과 당면을 볶은 요리[69] Tahu Tempe Bacem, 두부와 템페(témpé)를 코코넛 밀크, 향신료와 함께 졸인 뒤 튀긴 요리. 여기서 템페는 콩을 발효시켜 만든 음식으로, 한국으로 치면 청국장과 비슷하나 보다 단단한 편이며, 견과류, 버섯과 비슷한 맛이 난다고 한다.[70] 사실 전임자인 수카르노도 튀긴 템페를 좋아했는데, 이와 관련된 일화가 하나 전해진다. 수카르노가 대통령으로 재직할 시절에 미국의 팬 아메리칸 항공 소속 비행기를 타고 라틴아메리카 상공을 비행할 때 스튜어디스로부터 템페를 받자 어디서 얻은 거냐고 물어보니까 팬암의 스튜어디스는 이 템페가 네덜란드에서 만들어졌다고 응답했고, 이 경험에 깊은 인상을 받은 수카르노는 고국으로 돌아온 후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인도네시아 제품에 자부심을 가지고 외국에 구걸하지 않자'고 선언했다고 한다.[71] 참고로 당시 페르타 오일 마케팅은 월 1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72] 도박 1회에 100만 달러를 잃는 것은 별거 아니라 생각했다고 하며, 유럽 카지노에서 내기를 하기 위해 수백만 달러를 가지고 자카르타에서 유럽으로 날아가기도 했다. 출처[73] 그 와중에 토미는 태연하게 전직 모델과 함께 살면서 득남하기까지 했다.[74] 이에 대해 자카르타 포스트는 '국가에서 가장 높은 법 집행 기관에 남아 있던 신뢰의 조각을 모두 쓸어버렸다'고 맹비난했다.[75] 심지어 이 때는 토미 수하르토의 무죄 재선고 전이었다.[76] 당시 인도네시아의 1인당 GDP는 정확히 739달러였다. 화폐 가치 변동을 감안해도 당시 일반적인 인도네시아인의 몇 년치 연봉 수준이었던 셈.[77] 특히 수하르토의 부패 재판이 재개되기 하루 전이던 2000년 9월 14일에 자카르타 증권 거래소 지하 주차장에서 폭탄 테러가 터져 15명이 죽었는데, 폭발물의 유형으로 보면 군사적 개입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며, 실제로 그가 임대한 자카르타의 저택 2채에서 총, 수류탄, 폭발물, 탄약이 발견되기도 했다.[78] 그러나 윤길자가 청부살인한 대상은 일반 여대생이었던 것과 달리 여기서는 무려 한 나라의 법 집행자이자 최고의 법 집행 기관 종사자인 대법원 판사였다. 한국이었으면 설령 범삼성가 정도 집안이었어도 절대 상상조차 하지 못할 짓이다.[79] 참고로 토미 수하르토는 인도네시아 대통령 선거에 출마가 불가능한데, 이는 인도네시아 법에는 5년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전직 수감자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80] 1998.5.21. 대통령직 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