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통일주체국민회의 | 장충체육관 |
2. 설명
1972년 박정희 정부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한국적 민주주의 토착화를 명분으로 유신헌법을 선포하고 유신헌법 제 35조를 바탕으로 헌법기관인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설치했다.통일주체국민회의는 유신헌법 제 39조에 근거하여 '무기명 투표에 의한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시행 역할까지 담당했는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회의장으로서 선거가 치러진 곳이 장충체육관이었다.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국민 뜻과 괴리한 선거 방식과 체육관이라는 비공개적 장소에서 진행한 작태를 비판하기 위해 이와 같이 체육관에서 간선제로 진행한 선거를 체육관 선거라고 지칭하였다.
체육관 선거는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시절까지 시행했다. 이 중 최규하는 다른 둘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데 워낙 임기가 짧기도 했고 10.26 사건 당시 국무총리로 선거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 중이었으므로 본인을 포함해 전원이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 연장선으로 보았다.[1]
3. 폐지
1979년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후 통일주체국민회의가 11대 대통령으로 선출한 전두환은 이듬해인 1980년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 간선제와 7년 단임제를 골자로 하는 8차 개헌을 추진·공포하였다.통일주체국민회의를 폐지하여 대통령 선거 방식에 변화를 준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이름만 '대통령 선거인단'으로 바뀌었을 뿐 실상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간접선거 제도를 그대로 명칭만 바꾼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단독 출마가 아니라 다른 야당 출신 복수 후보가 출마할 수 있다는 것 정도지만 어차피 관제 야당 출신 후보들이었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었다. 또 하나는 투표소를 전국으로 분산시켜 장충체육관에서 선거를 치르지 않았다는 것 정도.
1981년 2월 대통령 선거인단은 제12대 대통령 선거에서 전두환을 선출하면서 1988년 2월까지 7년간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참고로 12대 대통령 취임식 역시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잠실실내체육관에서 했다.
하지만 이 방식도 1987년 6월 항쟁으로 인해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을 개정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4. 역대 선거
선거명 | 선거일 | 당선자 | 득표율 | 선거 장소 |
제8대 대통령 선거 | 1972년 12월 23일 | 박정희 | 99.9% | 장충체육관[2] |
제9대 대통령 선거 | 1978년 7월 6일 | 99.8% | ||
제10대 대통령 선거 | 1979년 12월 6일 | 최규하 | 96.3% | |
제11대 대통령 선거 | 1980년 8월 27일 | 전두환 | 99.4% |
5. 유사 사례
독재자들이 요식 행위에 불과한 직접 선거를 통해 100%에 가까운 득표율로 당선하는 것은 상당히 흔한 일이며 특히 박정희 이상 독재자가 세계적으로 즐비했던 1970년대에는 99%대 득표율이 발에 채일 정도로 흔해빠졌을 정도다.[3]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단독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나가서 사실상 제대로 치른 선거도 아니었다. 다만 이들은 직선제라 체육관 선거와 직접적 비교는 부적절하며 '체육관 선거'와 비슷한 방식[4]으로 치러진 선거는 다음과 같다.그리고 간접 선거와 단일 후보 출마 및 사실상 100 % 득표율은 아니나, 자유로운 선거가 아닌 간접적인 대통령 선거 방식에서 비슷한 다음과 같은 사례들도 있다.[5]
* 아유브 칸 집권기 1965년 1월 2일에 실시한 파키스탄 대통령 선거[6]
* 페르베즈 무샤라프 집권기인 2004년 1월 1일 시행한 선거인단을 통한 신임투표와 2007년 10월 6일에 치러진 선거인단을 통한 간접 선거 형식 대통령 선거
독재자의 선거가 아닌, 완전히 자유로운 선거에서 순수한 국민의 의지로 100% 득표율을 받은 지도자는 조지 워싱턴이 유일하다. 간선제지만, 일반 투표(선거인단 선출투표)에서도 100%의 득표를 받은 유일한 지도자다.
6. 관련 문서
[1] 그래서 최규하는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청와대 보단 총리관저에 업무를 보았다.[2] 8~10대 대통령은 선거와 취임식을 모두 장충체육관에서 했다. 그러나 11대 대통령인 전두환은 선거만 장충체육관에서 하고 취임식은 잠실실내체육관에서 했다.[3] 우간다 이디 아민, 파키스탄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나이지리아 야쿠부 고원, 부르키나파소 토마 상카라,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장 베델 보카사, 부룬디 미셸 미촘베로와 같이 집권기간내내 어떠한 선거도 치르지 않고 집권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흔한 케이스는 아니었다.[4] 간선제+단일 후보 출마+사실상 100% 득표율[5] 대한민국 제5공화국 제12대 대통령 선거와 비슷하다.[6] 제12대 대통령 선거와 유사한 방식으로 미국 선거인단 방식을 참조하여 선거인단 8만 명을 국민이 선출한 다음에 그 선거인단들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방식이었다. 1958년 10월 27일부터 쿠데타로 집권하고 있었던 아유브 칸과 파키스탄 초대 총독이자 국부 무함마드 알리 진나 여동생인 파티마 진나가 후보로 입후보하여 아유브 칸이 약 62 % 득표율로 당선하였다. 야당 일각에서 부정선거 논란을 제기하였으나, 파티마 진나가 선거결과에 승복하면서 잠잠해졌다. 한국 체육관 선거와 완전히 방식이 같은 것은 아니지만 당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국가 대다수 독재자가 형식적 직접 선거로 단독 출마해서 99.9 %에 가까운 득표율로 당선한 것에 비하면 아유브 칸 선거는 체육관 선거와 그나마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나마도 1977년 7월 5일에 당시 파키스탄 총리였던 줄피카르 알리 부토를 몰아내고 1978년 9월 16일에 파키스탄 대통령으로 집권한 또 다른 군부독재자인 무함마드 지아울하크는 1988년 8월 17일에 비행기 사고로사망할 때까지 어떠한 선거도 없이 육군참모총장직을 겸임하면서 대통령직에 재임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