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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문서: 박정희 정부/평가/부정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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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제5~9대 대통령 박정희에 대한 부정적 평가 중 사회·문화 정책 관련 내용을 작성한 문서이다.2. 인권 탄압
2.1.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자세한 내용은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박정희 정권은 1975년 내무부 훈령 제410호[1]를 발표하여 대대적인 부랑아 단속에 나섰다. 문제는 인신매매, 강제 수용, 무자유 노동으로 수백여 명을 죽인 형제복지원에 설립 허가를 내주고 매년 국고를 지원함에도 관리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으로 1987년 진상이 밝혀진 이후 전두환 정권과 같이 큰 비판을 받았다.[2]
2.2. 선감학원
자세한 내용은 선감학원 문서 참고하십시오.[3] |
"경기도 안산 대부도에 선감학원이란 말뿐인 아동교화시설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아무 이유없이 끌려가 고초를 당했던 한 원생이 40년이 지나 초로의 중년이 돼서야 가족찾기에 나섰습니다."
"1960년대 말 경기도 수원에 살던 당시 8살배기 은주라는 꼬마는 차를 타고 온 누군가에 의해 납치됐습니다. 그가 끌려간 곳은 안산시 대부도에 있는 선감학원. 일제강점기인 1942년 설립돼 1982년까지 40년간 운영된 말뿐인 아동교화소였습니다. 대략 6천여 명의 아동과 청소년들이 끌려와 강제노역과 굶주림에 시달렸고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선감학원이라고도 한다. 선감도는 아예 미성년자들을, 경찰이라는 작자들이 무차별로 부랑아로 단정 짓고 납치하는 등 인권 탄압과 수감자 선정 기준 모든 것이 삼청교육대 이상으로 답이 없었다. 다만 선감학원은 경기도청이 직접 운영하던 시설이었기에 박정희 본인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기는 하지만, 어쨌든 박정희가 국가의 최고 지도자였고 당시에는 지방자치가 완전히 무력화되었던 시절이던 이상 박정희는 간접적으로나마 선감학원의 인권탄압에 대한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더욱이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 후부터 부랑아 단속에 관심을 기울였단 것을 감안하면 박정희의 부랑아 인권탄압에 대한 책임은 더욱 커진다. #
2.3. 대한청소년개척단
자세한 내용은 대한청소년개척단 문서 참고하십시오.대한뉴스 <내고장 소식> 보도[4] | |
전두환의 삼청교육대의 시초로 평가받는 사건이다. ##2 1961년 박정희 정권은 노숙인, 깡패, 성매매 여성 등 수천명을 총으로 위협해 '대한청소년개척단(서산개척단)'을 만들고, 충청남도 서산군(현 서산시) 인지면 모월리에 끌고가서 아침부터 밤까지 폐염전을 개간시켰다. 게다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남녀를 깡패와 창녀의 새 출발이라는 이름 아래 강제로 결혼시키는 악행까지 저질렀다. 한마디로 사람들을 납치해 강제노동과 강제결혼을 시킨 것이다. #2 심지어 박정희 정권은 1964년에 대한청소년개척단의 단장이던 민정식에게 '인권옹호에 공이 크다'는 이유로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5]
이 서산개척단 사건은 선감학원과 함께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인 악행으로 꼽힌다. #3#4#5
이 사건은 1박 2일의 유일용 PD의 제보로 스토리 펀딩에 들어가 이조훈 영화감독의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되었다. #6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에서도 다루었다.
3. 국민건강보험 관련 논란
외국의 보건의료전문가들이 단기간에 전국민 의료보험제도를 완성한 케이스로 대한민국을 뽑으며 긍정적인 평가를 주면서도 정작 각국에 도입 못하는 이유는 [6] 바로 건강보험제도의 도입 과정과 방법이 비정상적이었다는 점인데, 당시 박정희 정권은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사회보장 제도의 필요성을 느꼈고, 정치적 계산으로 도입된 의료보험제도는 1977년 직장의료보험을 시작으로 12년만인 1989년에는 지역의료보험을 아우르는 전국민 의료보험으로 확대됐다. 그런데 미국 등의 선진국들이 수십 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확대해온 의료보장제도를 암살 사건 이후 혼란에 빠진 다음 정부가 단기간에 서둘러 완성하는 바람에 정상적으로 제도화되지 못해, 국내 전문가들에게서 2010년대 후반부터 부상하고 있는 필수의료 위기를 초래한 원흉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3.1. 모든 의료기관에 강요
먼저, 정상적인 방식이었다면 국가가 건강보험의 적용을 받는 의료기관을 설립.확충하는 방식이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독재정권이었기 때문에, 정책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여 실현하는 대신, 민간 의료기관을 건강보험 적용 기관으로 지정하는 방식을 선택했고 해외차관 자금을 도입해 민간병원 시설 및 의료 장비 구입을 지원했다. 도시를 중심으로 민간병원이 급증하기 시작하자, 정부는 건강보험의 도입을 확산시키기 위해 초기에 계약제로 운영하던 건강보험 적용 요양기관을 강제지정제로 바꿨다가 다시 당연지정제로 변경했다. 외국 어느 나라에도 이런 제도가 없는데다가 의료기관 입장에서는 이만큼 불합리한 처사도 없었으니 울며 겨자먹기로 피해를 감수할 수 밖에 없으니 더 많은 손해를 보기 싫어하는 병원들은 최소한의 구색만 갖추려고 한다. 이국종 교수는 자타공인 국내 외상외과의 권위자지만 적자의 원흉이라 아주대학교병원의 골칫거리 취급을 받았다.3.2. 공공병원 무확충
만일 건강보험제도 도입 초기에 정부가 공공병원을 적극적으로 확충했더라면 굳이 당연지정제를 도입할 필요가 없었겠으나, 문제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고 민간병원을 이용해 전국민 건강보험제도를 완성하려고 하다보니 이런 비정상적인 제도가 도입되었다.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를 통해 절대적으로 부족한 공공병원의 공백을 민간병원으로 메운 결과, 건강보험제도의 틀을 유지하는 의료공급체계에서 공공병상 비율이 14.2%라는 비정상적인 비율이 나오게 된다. 민간의료 천지라는 미국도 25.8%인데 말이다!#이러다보니 한국의 공공의료는 상술한 당연지정제로 민간의료인프라를 착취해 어거지로 구현한 속 빈 강정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3.3. 의료계의 부담
의사 문서 참조. 대한민국의 건강보험제도는 강제가입 방식으로, 가입자에게 선택의 연지가 없어 누구나 의무적으로 가입한다. 이때문에 건강보험 의무가입으로 발생하는 비용에 따른 국민적 저항을 해소하고자 적용된 것이 바로 낮은 보험료 부담이다. 낮은 보험료 부담은 건강보험 재정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러다보니 건강보험의 보장성은 낮게, 의료기관에 지급하는 의료수가도 낮게 책정됐다. 이른바 저수가-저부담-저급여의 3저 시스템이란 또 다른 비정상적인 구조가 완성됐다.이렇게 지극히 비정상적인 시스템은 많은 문제를 초래하였는데, 저수가로 인해 건강보험 진료만으로 수익 보전이 힘든 병원들은 비급여 진료, 박리다매식 3분진료와 과잉진료를 남발했으며 저수가 탓에 대형병원은 지속적으로 덩치를 키우고 더 많은 환자를 유치하며 성장을 모색했다. 이는 의료전달체계의 심각한 왜곡을 불러왔다.
특히 경증환자마저 대형병원에 빼앗긴 중소병의원은 생존을 위협받았으며, 의료계의 불만이 거세지자 박정희 정부는 낮은 의료수가로 인한 병원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의약품 리베이트를 눈감아 줬다. 여기에는 국내 제약사의 제네릭 의약품에 대한 비정상적인 높은 약가 정책이 한몫을 했다.
여기서 발생한 높은 약가마진은 다시 의료기관의 리베이트로 돌아갔다. 제약사가 신약 개발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비정상적인 제약시장이 또 그렇게 형성됐다. 환자들은 낮은 보장성 탓에 큰 병에 걸리면 ‘재난적 의료비’로 인해 가정경제에 심각한 위협을 받았으며, 그 결과 또 암과 같은 중증질환을 보장하는 거대한 민간보험 시장이 형성됐다.
국민의 정부부터는 의약분업을 하면서 이렇게 눈감아주던 리베이트를 악으로 규정하고 본격적으로 규제하는 법안을 입법하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리베이트를 눈감아주게 한 근본 원인인 당연지정제와 공단과 건정심 일방의 수가결정구조는 그대로 놔두고 있다는 점이다.[7] 이로 인해 조제료에 의존하던 내과와 소아과가 몰락하기 시작했다.
4. 잇따른 사건·사고
[사건사고 100년 점검] 부정부패, 참사 연속, MBC4.1. 선박 침몰 사고
4.1.1. 남영호 침몰 사고
자세한 내용은 남영호 침몰 사고 문서 참고하십시오.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와 더불어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여객선 침몰 사고. 326명이 사망하였다. 사고 발생 직후 송출된 긴급구조신호(SOS)를 일본 순시선이 탐지하고 한국정부에 알렸으나 무시당했다. 정해진 적재량을 크게 초과하는 안전 부주의와 이를 단속해야 할 해양 경찰, 해운당국의 감독 소홀 등으로 인한 전형적인 인재였다.
4.1.2. 통영 YTL 침몰 사건
자세한 내용은 통영 YTL 침몰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대한민국 해군 역사상 최악의 수치로, 이 사건은 현재까지도 전시가 아닌 평시 해난사고 중 세계 해군 사상 가장 큰 인명손실사건으로 기록되었다.
4.2. 화재 참사
대한뉴스 <서울 대연각호텔 화재 200여명의 인명피해> 보도 | |
박정희 정권에서 일어난 화재 참사의 특징은 빈민층 거주지역에서 많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좁은 지역에 주택들이 밀집되어 있는데다가, 정부에서 건물을 건설할 때 가연성 물질을 내장재로 쓰게 허가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골목이 좁고 비탈진데다가 급수시설이 잘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소방차가 진입하기도 어려웠고, 소방장비도 매우 원시적이어서 한번 화재가 발생하면 순식간에 번졌다.
이로 인해 1966년의 남산동과 숭인동 판자촌 화재사건, 1968년 신설동 판자촌 화재사건,1969년 창신동 판자촌 화재사건 등 대형 화재가 빈민 거주지에서 일어나 많은 인적, 물적 피해를 낳았다. 1971년에는 대연각 화재사건이 발생하여 259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1974년 대왕코너 화재사건에선 88명이 숨졌다.
4.3.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
자세한 내용은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 문서 참고하십시오.박정희 정권은 1968년부터 1977년까지 서울특별시의 무허가 건물을 정비하기 위하여 수백 억원의 예산을 들여 수백 개의 시민아파트를 건립하였다. 박정희의 측근인 김현옥은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시민아파트를 지었지만, 건설 과정에서 부실공사와 안전불감증, 관료와 건설업자 간의 결탁, 뇌물수수 등으로 문제점이 많았고, 그 결과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가 발생하면서 74명의 사상자가 발생, 관련자들이 무더기로 구속되면서 계획은 전면 백지화됐다. 얼마나 개판으로 지어졌는지 헛간을 짓기에도 버거운 재료로 아파트를 지었다는 분석까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언제 붕괴할 지 모르는 시민아파트들을 모조리 철거하기 시작하였는데 철거 비용만 해도 건립 비용과 맞먹은 수준이었다. 전문성이 부족한 독재정권의 문제점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꼽히고 있다.
5. 문화 검열
"예술의 창조는 자유로워야 하고....예술의 발전이 어떤 검열에 의해서 제약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박정희의 저서 <우리 민족의 나갈 길>
박정희의 저서 <우리 민족의 나갈 길>
박정희는 전통문화나 문화재 보호에 나선 것과 정반대로, 당시 젊은 층이 누리던 외래 문물에는 탄압을 가했다. 박정희는 자신이 집권한 남한이 자유 대한이라며 자유민주주의를 운운하면서도 정작 자유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우방들의 문물을 검열하고 단속하였다.[8] 미국의 팝 음악과 미니스커트, 장발 문화, 일본 만화가 대표적이다. ##2#3
1973년 경범죄처벌법 개정[9]으로 박정희는 외래 문물을 누리던 사람들을 탄압하였으며 장발[10]과 미니스커트[11] 단속이 대표적[12] 대중음악과 만화도 퇴폐적이라며 탄압을 가하면서 많은 가수들과 출판업자들이 이 시기에 활동을 중지하였다. #3 한국 락의 대부인 신중현도 대마초 사건으로 이 시기에 잡혀들어간 적이 있다.[13]
박정희 정권이 최초로 벌인 문화 탄압 작업은 1961년 6월 1일 대학생 제복 착용과 고교생 삭발을 강제로 시행한 것이다. 집권 이후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 '한국아동만화윤리위원회', '방송윤리위원회' 등의 온갖 심의기구를 만들어 문화검열의 기틀을 다졌다.
당시에는 사상 검열의 일환으로 불온 서적과 주의 서적 목록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러한 서적 중 유명한 책이 최인훈의 광장이 있는데 당시에 이 책이 불온 서적이라는 근거가 무엇이었냐면 '이명준이 6.25 전쟁 때 포로로 잡히고 나서 대한민국이 아닌 중립국을 택했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구체적인 문화 검열 사례는 #1, #2, 만화 검열제를 참고할 것.
1960년대~1970년대는 철완 아톰을 시작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이 본궤도에 올라 처음으로 발전 가도를 진행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박정희의 문화 검열은 일본 애니메이션이 한국에 들어오는데 어떻게든 차질을 빚게 만들었다. 그래서 일본 만화 팬들에게 박정희가 철천지 원수라는 논란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명작들 상당수는 국민의 정부의 일본 대중문화 개방 조치 등의 변화를 전후해서야 한국에 들어왔다.
5.1. 대중가요 금지곡 지정
박정희 정권은 별의별 이유로 대중가요를 탄압했다. 이 시절 금지곡이 된 가요는 수백 개가 넘는다. 실제로 박정희 시절에는 별것 아닌 가사를 트집잡아 금지곡 지정이 이루어졌는데, 그 우스꽝스러움은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의 기행에 비견될 수준일 정도였다.
김추자는 1975년에 거짓말이야를 부른 뒤, '간첩과 교신하는 것 아니냐?', '정권에 대한 불신을 조장한다'란 사유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당시 정권이 김추자를 탄압한 것에는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있다. 먼저 이 노래는 1971년에 발표됐는데 같은 해 한국에서는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박정희는 이때 유세 현장에서 한 번만 더 뽑아주면, 두 번 다시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고 발언했다.[14]
그런데 박정희가 이 선거에서 아슬아슬한 표차로 김대중을 이기고 재선하자, 박정희는 1년 후에 대통령의 무제한 임기와 무제한적 권력을 보장하는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이후 선거 금지에 대한 국민의 불만은 날로 높아져만 갔고, 김추자의 노래는 1975년에 한창 인기몰이를 했었는데, 곡의 제목이 문제의 유세 발언을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로 잡혀간 것이다. 박정희가 선거에 나서 문제의 발언을 외칠 때, 국민들은 "다음에는 선거에 나오지 않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박정희가 재선한 뒤 선거를 금지시켜 장기 독재를 추구한 것을 비판한 게 아니냐는 이유에서였다. 한 마디로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과대해석한 것이다. 김추자는 이후 한국이 민주화되기 전까지 북한에서 보낸 간첩이란 딱지가 붙어 연예계에서 은퇴하고 말았다.
다른 사례도 있다. 가수 양희은의 아침 이슬은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란 가사가 문제가 되었다. '붉은 태양'이 김일성을 상징하는 것(???)이란 이유여서였다. 태양이 붉은 색깔이지 그럼 뭐란 말인가? 참고로 양희은은 아침 이슬 말고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란 노래도 불렀다. 그런데 박정희는 이 노래도 "왜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냐? 부정적이다. 사회를 비판하다는 노래 아니냐?"라면서 금지시켰다.
이미자의 '기러기 아빠'는 "아빠가 월남 파병 용사로 죽어서 돌아오지 못하는 걸 빗댔다."는 이유로 금지곡 목록에 올랐다.베트남 전쟁 과정에서 남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의 규모는 34만 명에 달했고, 그렇게 보내진 군인 상당수는 징병제에 의해 군대에서 의무 복무하던 젊은 남성들이었다. 국가의 강요로 아무 상관도 없는 남의 나라 전쟁에 간 것도 서러운데, 고엽제 중독과 전투 중 부상으로 다쳐서 돌아온 상이 용사들에 대한 사회의 인식과 보상은 매우 좋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장애인을 경멸하는 시선이 팽배하다. 하물며 전쟁에서 팔다리를 잃거나 몸이 성치 않은 채로 돌아온 군인들을 국민들이 무슨 눈으로 봤겠는가. 바로 이걸 비판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사서 노래가 금지된 것.
이금희가 부른 키다리 미스터 김이 키가 작은 박정희를 놀렸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다.[15] 이금희는 방송 출연 금지 1년 처분을 받았다.
배호의 '0시의 이별'은 박정희 독재 정권이 시행한 야간 통행 금지(밤 12시=0시)를 암시한다는 이유로, 송창식의 '왜 불러?'와 '고래 사냥'은 각각 반말과 국가원수(박정희)를 모독한다는 사유로 금지됐다. 한대수의 '물 좀 주소'는 경찰의 물고문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이장희의 '한 잔의 술'은 나라 발전을 위해서 열심히 일해도 모자를 판에 술 타령이냐란 이유로 퇴출됐다.
한대수가 부른 다른 노래 '행복한 나라로'는 그럼 박정희 각하께서 다스리는 지금은 행복하지 않다는 말인가?란, 심히 북한을 연상시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된다.
6. 기생관광
이순신 숭배한다며 기생 관광 부추겨?성매매 단속하는 척하며 여성을 외화벌이 수단으로 여겼던 한국 정부
매매춘, 한국을 벗기다: 국가와 권력은 어떻게 성을 거래해왔는가
박정희 정권 당시의 한국도 성매매를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정작 한국을 찾아온 일본인들을 상대로 합법적인 '성매매'를 할 수 있도록 국가 차원에서 외화벌이란 명목으로 여성들을 동원해 비난받았다.[16][17][18]
당시 야당 여성의원 이우정은 박정희 정권의 기생관광 현실을 꼬집으며, '몸 파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라면 장관들 딸들이나 먼저 일하게 하라'고 비판했을 정도다.##2#3
7. 무즙 파동
자세한 내용은 무즙 파동 문서 참고하십시오.중학교 입학시험 당시 중복 정답 인정을 두고 벌어진 사태이다.
8. 컬러TV 송출 저해
박정희는 '컬러TV는 소비성만 높아지므로 우리나라 여건상 시기 상조이다'는 이유를 들어# 컬러TV의 내수 보급을 금지하였다. 참고로 박정희가 컬러TV 내수를 금지할 때도 한국은 국내에서 수출용으로 컬러TV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기술이 없어서 못한게 아니라, 기술이 있지만 일부러 안한 것.결국 이 때문에 한국에서 컬러 TV 송출은 전두환 집권 후인 1980년 12월 1일에야 가능하게 되었는데, 이는 여느 공산독재 국가들과 개발도상국들들과 비교해도 상당히 늦은 거였다. 중국은 1973년, 북한은 1974년, 베트남은 1978년, 에티오피아는 1979년, 방글라데시는 한국과 똑같은 1980년[19] 컬러 방송을 시작했으며, 심지어 북한도 울고 갈 수준으로 폐쇄적인 국가이던 알바니아마저 첫 컬러 방송 시기가 한국하고 별다른 차이도 나지 않는 1981년이다.
9. 전쟁 피난촌 강제 철거
재개발로 인한 철거 반대 시위 중 경찰에 끌려가는 성북구 철거민 |
해방 이후 서울은 아직 현대적 도시의 면모가 갖춰지지 않은데다가, 6.25 전쟁으로 그마저 폐허로 변하였기 때문에 체계적인 도시계획에 따른 개발을 추진할 여력이 없이 마구잡이로 집들이 지어지고 넘쳐나는 인구를 감당하지 못해 주거시설은 매우 열악했다.
더구나 전쟁 당시 월남한 주민들은 생활의 근거지를 마련하지 못해 국공유지 등에 무허가로 대규모 집단을 이루어 정착하기 시작했다. 용산구 남산자락에 위치한 해방촌이 대표적인 월남 피난민 마을 중 하나이다. #
그런데 박정희 정권이 도시 재개발을 위해 무허가촌을 철거하고 주민들을 대책 없이 추방하려 하자 그곳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강력히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철거에 항의하여 공화당사에 모여 있는 해방촌 주민들이 애처로운 모습으로 어떤 사람에게 말을 하고 있고, 철거 반대 시위를 벌이던 성북구 재개발지역 주민이 경찰에 사지가 들려 끌려나가고 있는 모습이 당시의 사정을 말해주고 있다.
10. 투기 공화국의 근간 마련
한국 사회의 문제점 중 하나인 땅투기, 빚내서 땅 사는 풍조, 강남 과열 현상 역시 박정희 정권에 근간을 두고 있다. ##2#3
대한민국 최대 부촌이라 불린 강남구는 과거에는 시골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러한 강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시점은 1966년 9월 경이다. 1960년대 인구의 급증으로 강북지역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박정희 정권은 도심 기능을 분산시키고자 했으며, 나아가 1960년대 후반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김신조의 청와대 습격사건 등으로 서울 인구를 분산시키고 유사시 피난에 대한 부담을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강남 개발을 선택했다. 강남 개발 당시 서울시는 막대한 공사자금을 토지구획정리로 확보한 체비지 매각에 의존해야 했고 이 땅을 팔기위해 정부는 다양한 유인책을 내놓게 된다. #
1973년에는 영동지구를 개발촉진지구로 지정해 강남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면세 혜택을 부여했고 일부 도시계획전문가들의 반대에도 지하철 2호선이 강남과 강북을 연결하는 순환선으로 결정됐다. 이 무렵에 경기고 등 이른바 명문고들이 강남으로 이전해 8학군을 형성했다. 강북 지역이 특정시설제한구역으로 지정되면서 룸살롱, 고급 요정 등 유흥업소도 발빠르게 강남으로 옮겨왔다.
2004년 MBC의 현대사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강남을 "한국 경제의 근본적인 도덕성을 위협하는 부동산 투기가 시작된 곳"이라 비판하면서, 박정희 독재 정권은 정치적 정당성을 경제성장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고 유신 체제의 또 다른 축은 건설개발이었다고 평가하였다. 김상현 전 신민당 의원은 불도저 시장이라고 불렸던 김현옥 전 서울 시장의 대서울 구상에서 아파트 지구 지정까지 모두 정권차원의 생각이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
강남의 의도적 개발과정에서 땅을 선점한 사람들이 거대한 부를 획득하면서 부동산 중산층이라는 새로운 계층을 형성했고 부동산 투기가 돈이 된다는 사실을 체험한 대다수 국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투기 현장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8년 현대건설에서 사원용으로 지었던 아파트를 고위공직자와 사회 저명인사들에게 특혜분양한 비리사건이 밝혀졌다. 정권 실세들이 땅투기를 주도하면서 양극화 문제와 계층 고착화가 진행되었다. #
11. 문화재에 대한 전시행정
혼란했던 이승만 정권을 지나 박정희 정권이 되면서 경제 발전과 함께 일제강점기 및 한국 전쟁 시기를 거치며 파괴되고 유실된 문화재들을 복원하려는 시도가 이뤄졌다. 시도는 좋았는데..대표적인 것이 경복궁과 광화문의 복원. 광화문을 콘크리트로 복원하게 했으며, 경복궁 부지에 불교식 현 국립민속박물관 건물을 지어 복원은 커녕 복원을 방해하는 걸림돌만 만들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경복궁, 경복궁 광화문, 국립민속박물관, 봉정사문서 참조.
무령왕릉 발굴 때 발굴된 금팔찌를 구부렸다가 펴서 그걸 지켜보던 학자들의 얼굴에서 핏기를 뺀 것은 매우 유명한 일화다. 황룡사 9층 목탑도 콘크리트로 복원하라고 지시했다가 학자들이 말려서 다행히 무산되었다고 하며, 경주 월성에 호텔을 지으라는 등...경주에서의 박정희 정책 고찰.
또한 전통 양식의 복원이란 명목으로 관공서 등에 외형만 한옥인 콘크리트제 한옥을 양산했다. 건축학계에선 이를 비꼬아서 박조건축이라고 부르기도한다.
12. 사회 전반에 뿌리박힌 군국주의 문화
자세한 내용은 박정희 정부/평가/부정적 평가/안보·국방 문서 참고하십시오.박정희는 정치 · 경제 · 교육 · 문화 등 일상생활 전반의 영역을 군사적 가치에 종속하려는 시도를 했고, 실제로 일제강점기 군국주의 정책을 많이 벤치마크 했다. 이는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대한민국 사회 곳곳에 반민주적, 권위주의적 잔재를 남기며 한국 사회 · 문화를 크게 후퇴시켰다.
[1] 보면 부랑인의 범위를 매우 넓게 잡아놔 자의적인 단속과 수용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2] 참고로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상을 묵인하고 덮어준 것은 전두환 쪽이다. 이쪽은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덮어줬으니 더더욱 비판을 받아야 마땅하다.[3] 다만 이 사진은 박정희가 선감학원을 방문한 모습을 담은 사진은 아니며, 정확히는 1956년에 경기도측 시찰단이 방문한 모습이다. # 실제로 박정희는 선감학원을 방문한 적은 없다.[4] 영상 설명에 "충남 서산군 모월리에 있는 대한 청소년 개척단 광장에서 125쌍의 합동 결혼식. -불량 청년들과 윤락녀였던 사람들의 결혼식"이라고 나와 있다.[5] 정확히는 '지난 54년 7월부터 현재까지 무의무탁한 청소년 800명에 대해 기술교육을 습득시켜 직업을 알선, 취업시키는 한편 윤락여성 450명을 선도했다'는 이유였다.[6] 대한민국은 1977년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한 이후 12년 만에 전국민 의료보험을 달성했는데, 의료선진국 미국이 한국보다 40여년 앞서 의료보장 제도를 고민해 왔지만 이루지 못한 것을 한국은 불과 12년 만에 달성했다.[7] 참여정부의 유시민 보건복지부장관이 당연지정제 폐지와 영리병원 도입을 시도했지만 의료민영화라는 시민단체의 거센 비판을 받고 철회했다.[8] 1960~70년대는 정부 주도의 경제성장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개인에 대한 각종 규제가 있었다. 이 시기에 1960년대 중반 미국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번져나간 히피문화가 팝 음악과 함께 들어오면서, 장발과 미니스커트는 자유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이에 대해 정부는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대표적인 퇴폐 풍조로 규정하고 엄중 단속하였다.[9] 휴지·담배꽁초를 버리거나 침을 뱉는 행위, 술주정행위, 유언비어 유포행위, 장발·비천한 복장 착용, 비밀댄스 교습 행위 및 장소 제공행위, 암표매도행위, 새치기행위, 출입금지구역이나 장소에의 무단출입행위, 폭발물의 조작·장난행위 등이 경범죄의 종류에 추가되었다. 이로써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할 법적 근거를 갖게 되었다.[10] 장발에 대한 단속기준은 남·여의 성별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의 긴머리, 옆머리가 귀를 덮거나 뒷 머리카락이 옷깃을 덮는 머리, 파마 또는 여자의 단발형태의 머리였다. 장발로 적발되면 대부분 경찰서로 연행되어 머리를 깎겠다는 각서를 쓰거나 구내 이발관에서 머리를 깎은 후 풀려났으며, 머리를 깎지 않고 버틸 경우 즉결 재판에 넘겨졌다. 좀 과장섞어서 남자(특히 청소년 중고등학생들)는 빡빡이 아니면 군인처럼 깎거나 스포츠머리, 여자는 귀밑 3cm 이하까지만 오는 보브컷이 당시 사회보수주의적인 통념상 허용되는 머리길이라고 보면 된다.[11] 경찰은 자를 들고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들을 단속하였는데, 단속 기준은 무릎 위 20㎝였다.[12] 심지어 티셔츠에 영어가 많다고 경찰에 잡혀가서 조사받은 사람도 있었다.미국은 한국의 우방국인데 왜 그러냐면 당시엔 미국등 서방의 자유주의,평등주의는 퇴폐적인 문화가 만연하고 정신적으로 한국식 민주주의(이른바 아시아적 가치. 권위주의,사회보수주의)에 두수 쳐진다는 선전이 만연했다.이당시엔 영어등 외래어를 직수입 하기 보다는 최대한 한국어로 번역해서 사용하라는 지침이 있었다. 1970년대는 축구팀의 골키퍼도 방송에서 순우리말로 번역해 문지기로 불렀다.[13] 그의 노래는 신군부 시대가 끝나는 1987년까지 금지되었다.[14] 1971년 4월 25일, 서울 유세[15] 실제로 박정희의 키는 158~160cm였던 것으로 전해진다.[16]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 - 5.16에서 10.26까지[17] "이 사건은 아직도 기생 관광이라는 굴레를 벗지 못한 한국 관광의 수치를 드러낸 것이었어", 1979.12.29 경향신문[18] 정작 본인은 젊었을 적 딸까지 둔 유부남이었는데도 내연녀를 두고 간통을 저질렀으며, 혼외자식까지 두는 행동을 저질렀다.[19] 풀타임 방송이 1980년 12월 시작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부분적 컬러 방송은 한국 이전에 시작했을 것이란 것만큼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