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01:32:37

함평 고구마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wiki style="padding: 5px 10px; background: linear-gradient(to right, #835b38 10px, transparent 10px calc(100% - 10px), #835b38 0);"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colcolor=#835b38><colbgcolor=#f5f5f5,#2d2f34> 구성 인사(3공) · 인사(4공) · 통일주체국민회의
여당 민주공화당
연립여당 유신정우회
정책 및 방향 제1~4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 중화학공업화 · 수출주도산업화 · 남동임해공업 벨트 · 녹화사업 · 그린벨트 · 새마을운동 · 관치금융 · 관선임명제 · 국민교육헌장 · 중·고교 평준화 · 한강의 기적 · 경부고속도로 · 1기 지하철 계획 · 한일수교 · 한미행정협정 · 파독 근로자 · 중동 건설 · 베트남 파병 · 혼분식 장려 운동 · 통일미 · 율곡사업 · 핵무장 · 향토예비군 · 주민등록증 · 재형저축 · 한글전용 ·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 부가가치세 · 백지계획 · 강남 개발 · 서산개척단 · 컬러TV 송출 금지 · 금지곡 · 장발, 미니스커트 단속 · 만화 검열제 · 긴급조치 · 이중배상금지 · 국가모독죄 · 교련 · 방위세 · 방위병
평가 긍정적 평가 (사회·문화 · 안보·국방 · 외교 · 경제) · 부정적 평가 (정치 · 사회·문화 · 안보·국방 · 외교 · 경제) · 논란이 있는 평가
타임라인
대한민국 제2공화국: 박정희 군정
1961년 5.16 군사정변 · 국가재건최고회의 설립 · 혁명재판 · 전국 18개 학군단 창설 · 수도방위사령부 창설 · 농어촌고리채법 · 은행국유화(금융기관에 대한 임시조치법) · 경제기획원 설립 · 중앙정보부 창설 · 한국전력주식회사 창설 · 건설부 산하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시안 발표 · 농업협동조합 창설 · 8.12 성명(박정희 의장 민정이양 계획 발표) ·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 · 연호에 관한 법률 개정
1962년 서력기원 사용 · 문화재보호법 제정 ·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발표 · 울산공업센터 지정 · 주민등록법 제정 · 화폐개혁 · 4대 의혹 사건 · 마포아파트 준공 · 김종필-오히라 메모 · 대한항공공사 설립 · 5차 개헌 공포 · 제1차 국민투표
1963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발족 · 민주공화당 창당 · 3.16 성명(박정희 의장 민정이양 거부 및 군정연장 발표) · 군정연장반대운동 · 감사원 개원 · 박정희 의장 군정연장 철회 · 의정부역-능곡역 구간 교외선 개통 · 서울 대확장 · 부산 직할시 승격 · 박정희 의장 전역 후 민주공화당 입당 및 대선후보 지명수락 · 삼양라면 출시 · 서울가정법원 개원 · 제5대 대통령 선거 · 제6대 국회의원 선거 · 구로공단 조성 · 황태성 사건 · 의료보험법 제정
대한민국 제3공화국: 박정희 정부 제1-3기
1963년 박정희 정부 출범 · 국가안전보장회의 설치 · 파독 근로자 파견
1964년 미터법 실시 · 삼분폭리사건 ·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보완계획안 발표 · 울산정유공장 준공 · 무장군인 법원 난입 사건 · 6.3 항쟁 · 베트남 전쟁 파병안 통과 · 제1차 인민혁명당 사건 · 무즙 파동 · 서독 공식 방문 · 국가기술자격 시행
1965년 한국독립당 내란 음모 사건 · 독도 밀약 · 수출제일주의 표방 · 제2한강교 준공 · 춘천댐 준공 · 광복회 발족 · F-5 20대 도입 · 원충연 반혁명 사건 · 한일기본조약 조인(한일협정 반대투쟁) · 전매청 신탄진공장 준공 · 야당 불참 속 한일협정 비준 및 베트남 전쟁 파병 동의안 가결 · 베트남 전쟁 1개 전투사단 파병 · 이승만 대통령 서거 · 한국해외개발공사 발족 · 농어촌 전화 사업 추진
1966년 KIST 설립 · 국세청 발족 · 장면 총리 별세 · 태릉선수촌 설립 · 한미행정협정 조인 ·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수립 · 해병대 공군비행학교 습격사건 · 국회 오물 투척 사건 · 사카린 밀수 사건
1967년 산림청 개청 · 해군 당포함 격침 사건 · 한국외환은행 발족 · 대도시 그린벨트 설정 · 짜빈동 전투 · GATT 가입 · 과학기술처 신설 · 제6대 대통령 선거 · 제7대 국회의원 선거 ·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발표 · 동백림 사건 · 한국수자원개발공사 설립 · 지리산국립공원 지정 · 정부종합청사 착공
1968년 1.21 사태 ·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 684부대 창설 · 서울사범대학 독서회 사건 ·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설립 · 향토예비군 창설 · 주민등록법 개정 · 통일혁명당 사건 · 만화 검열제 · 육군3사관학교 창설 ·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 주민등록증 발급 실시 · 국민교육헌장 발표 · 경부고속도로 서울-수원-오산 구간 개통 · 경인고속도로 개통
1969년 교련 과목 개설 · 한국도로공사 발족 · 가정의례준칙 · 서울 중학교 무시험 제도 · 금화시민아파트 준공 · 경부고속도로 오산-천안-대전 구간 개통 · 호남정유 여수공장 준공 ·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 · MBC 개국 · 3선 개헌 · 제2차 국민투표 · 제3한강교 개통 · 울산고속도로 개통 · 경부고속도로 대구-부산 구간 개통
1970년 정인숙 살해사건 ·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 · 포항종합제철소 착공 · 새마을운동 제창 · 우편번호제 도입 · 경부고속도로 대전-대구 구간 개통 (완공) · 호남고속도로 대전-전주 구간 개통 · 백원 주화 발행 · 제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수립 ·국방과학연구소 설립 · 병무청 설립 · 모산 수학여행 참사 · 전태일 분신 사건 · 번개사업 · 남영호 침몰사고 · 4대강 유역 종합개발 계획 확정 · 정부종합청사 개청
1971년 전국 중입시험 폐지 ·대한항공 F27기 납북 미수 사건 · 고리 원자력 발전소 기공 · KAIST 설립 · 주한미군 7사단 철수 · 제7대 대통령 선거 · 진산 파동 · 제8대 국회의원 선거 · 제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발표 · 광주대단지 사건 · 브레튼우즈 체제 종료 · 실미도 사건 · 제1차 국토종합계획 발표 · 10.2 항명 파동 · 통일로 개통 · 영동고속도로 신갈-새말 구간 개통 · 대연각호텔 화재
1972년 정병섭군 자살사건 · 경주고도개발 10개년 계획 확정 · 7.4 남북 공동 성명 · 통일미 개발 · 8.3 사채 동결 조치 · 제1차 남북 적십자 회담 · 10월 유신 · 울산석유화학단지 준공 · 제3차 국민투표 · 통일주체국민회의 발족 · 제7차 개헌 · 서울시민회관 화재 사고
대한민국 제4공화국: 박정희 정부 제4-5기
1973년 중화학공업화 선언 · 치산녹화 10개년 계획 추진 · 남서울아파트 분양 · 장발 및 미니스커트 단속 · 승압사업 개시 · 제9대 국회의원 선거 · KBS 설립 · 베트남 전쟁 종전 · 유신정우회 창립 · 윤필용 사건 ·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 · 서울어린이대공원 개장 · 1973 서울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 화전민정리 5개년 계획 수립 · 포항종합제철소 준공 · 대덕연구단지 착공 · 불국사 복원공사 준공 ·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정 · 김대중 납치 사건 · 소양강댐 준공 · 제1차 오일쇼크 ·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 · 태백선 고한-황지 구간 개통(완공) · 호남고속도로 전주-순천 구간, 담양지선 개통(완공) · 남해고속도로 개통 · 친아랍 성명 4개 조항 발표
1974년 율곡사업 추진 · 긴급조치 1·2호 선포 · 긴급조치 3호 · 현대울산조선소 제1호선 진수 · YTL30호 침몰 사건 · 창원, 여천, 옥포, 죽도, 통영, 여천 산업기지개발구역 최종선정 및 개발 계획 발표 · 서울/부산 고등학교 평준화 첫 실시 · 창원국가산업단지 조성 · 민청학련 사건 · 긴급조치 4호 선포 · 팔당댐 준공 · 속초해전 · 제2차 인민혁명당 사건 · 박정희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 ·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 · 수도권 전철 1호선 개통 · 새마을호 운행 시작 · 긴급조치 1·4호 해제 · 현대조선폭동사건 · 대왕코너 화재사고 · 주안국가산업단지 준공 · 동아일보 광고탄압사건
1975년 제4차 국민투표 · 한강 이북지역 택지개발금지조치 · 핵확산금지조약 비준 · 민방위 결성 · 긴급조치 7호 선포 ·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사형 집행 · 김상진 할복 사건 · 종합무역상사 제도 실시 · 여의도 국회의사당 준공 · 영동고속도로 새말-강릉 구간 개통(완공) · 동해고속도로 개통 · 여천석유화학단지 기공 ·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 · 서울고속버스터미널 개장 · 1975 서울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1976년 포항 석유 발견 사건 ·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 한독맥주 사건 ·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 서울 UFO 격추미수 사건 ·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 · 제4차 경제·사회 개발 5개년 계획 수립 · 한국수출입은행 발족 · 잠수교 개통 · 국산자동차 현대 포니 첫 수출 · 코리아게이트 · 안동댐 준공 · 함평 고구마 사건 · 직업훈련기본법 제정
1977년 제4차 경제·사회 개발 5개년 계획 발표 · 백지계획 발표 · 박흥숙 살인사건 · 월성 원자력 발전소 기공 · 고리 원자력 발전소 1호기 가동 · 의료보험 시행 · 부가가치세 시행 · 남해화학 여수공장 완공 · 반국가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정 · 구마고속도로 개통 · 이리역 폭발사고
1978년 한미연합군사령부 발족 · 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 · 여천석유화학단지 준공 ·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 · 제9대 대통령 선거 · 8.8 조치 시행 · 백곰 미사일 발사 성공 · 자연보호헌장 선포 ·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 ·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1979년 서울 지하철 2호선 착공 · 정부 제2청사 착공 · 보문관광단지 개장 · 고리 원자력 발전소 3, 4호기 착공 · 2차 오일 쇼크 · YH 사건 · 성수대교 개통 ·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 · 김형욱 실종 사건 · 부마항쟁 · 삽교천방조제 준공 · 10.26 사건 · 최규하 권한대행 체제 · 서울의 봄 · YWCA 위장결혼식 사건 · 12.12 군사반란
별도 문서가 없는 평가 및 논란은 해당 주제 관련 문서를 참고
박정희 개인과 관련된 문서는 틀:박정희 참고
}}}}}}}}}}}}




파일:5267_6449_117.jpg

1. 개요2. 전개
2.1. 농협 측의 농간2.2. 고구마 피해를 보상하라
3. 여담4. 참고자료

1. 개요

고구마 수매 문제를 놓고 전남 함평군 지역의 농협이 농민들을 속이자 농민들이 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며 천주교 광주대교구와 연대, 투쟁한 사건.

1974년 민청학련 연계혐의로 이루어진 천주교 원주교구장 지학순(다니엘)주교 구속기소, 1975년 인혁당 사건을 폭로한 메리놀외방전교회 소속 진필세(제임스 시노트) 신부 추방 사건과 함께 1970년대에 벌어진 대표적인 한국 천주교와 유신정권 사이의 충돌 사건이다.

2. 전개

2.1. 농협 측의 농간

“협동으로 생산하여 공동으로 판매하자”
“피땀 흘려 지은 농사 농협 통해 제값 받자”
- 1976년 농협 표어

1976년 함평군 농협은 고구마 농사를 짓던 농민들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시중가격보다 높은 가격으로 고구마를 쳐주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농협이 농민들에게 제시한 고구마 수매 가격은 가마니당 1,317원[1] 이었는데, 평소 고구마 가격보다 높은 것이었다. 또 원래 고구마를 수확한 후에는 건조 과정을 거쳐 '빼깽이'[2]로 만들어 팔곤 했는데[3], 그런 수고도 없이 생고구마를 사겠다고 했으니 그 또한 농민들에게는 편했다. 그리하여 농협의 제안을 환영한 7,000여 곳의 농가들은 고구마 농사를 열심히 지었고, 그 해 말 고구마 수확량은 전년 대비 25% 증가를 보였다.[4] 고구마가 수확되었다는 소식에 주변의 상인들이 농민들에게 접근해 고구마를 팔라고 했지만, 농민들은 농협과의 약속을 믿으며 팔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고구마를 농협에 팔려고 하자, 농협은 수확량의 40%만 구매하곤 더 이상 사지 않았다. 농민들이 농협에서 트럭으로 실어가라고 길가에 수십, 수백 개의 포대를 쌓아놓았으나, 포대는 좀처럼 줄지 않았다. 그 때문에 함평의 고구마 농가는 쑥대밭이 되었다. 시장 출하시기도 지난 상태였건만 농협이 전량 구매를 하지 않으니, 모처럼 많이 생산된 고구마를 처리할 방도가 없었다. 결국 포대에 담아 놓은 고구마는 추운 날씨에 썩어가기 시작했고, 농민들은 뭐라도 건지기 위해 헐값에 포대를 팔아버리기도 했으나 손해를 메우는 데는 어림도 없었다.[5] 당시 시가로 농민들의 피해액은 1억 4,000만원 정도로 추산되었다.

2.2. 고구마 피해를 보상하라

파일:291084_1.0_titleImage_1.jpg 파일:291084_1.0_image_1.jpg
항의하는 농민들 피해 보상금

농민들은 참으로 억울했지만, 힘이 없었고 어떻게 저항해야 하는지 몰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민들이 그저 손해를 안고 갈 것이라고 여겼고, 농협도 그렇게 여겼는지 대응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곧 이 일의 부당성을 깨달은 농민들과 농민운동가들은 보상을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11월 23일 함평군의 한 식당에서 서경원, 노금노, 임정택, 김한경, 임재상 등 20여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이들은 대부분 가톨릭농민회에 소속되어 있던 농민들과 사회운동가들이었다. 이들을 주축으로 피해 조사가 먼저 이루어졌다.

하지만 피해조사는 곧 농협의 방해에 직면했다. 농협이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농민들에게 농협과의 구매 사실에 아무 문제가 없으며 불만도 가지지 않는다는 내용의 확인서를 받고 다녔던 것이다. 농협 직원과 경찰서 형사가 와서 강압적으로 확인서 작성을 요구하는 탓에 많은 농민들이 두려움에 확인서를 써주었다. 그럼에도 가톨릭농민회 회원들은 일일이 농가들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조사에 응해 달라고 부탁했다. 1달 동안 힘겹게 조사한 결과, 160여 가구가 조사에 응하여 그들의 피해신고액은 총 309만 원이었다.[6] 이 중 농협이 고시가격대로 수매하지 않아 발생한 손실금이 280만 원, 수매시기가 늦어져 고구마가 썩어 빚어진 손해가 223포대 29만 원이었다.
“그해 11월 말까지 각 마을별로 조사를 완료키로 했는데, 이런 사정 때문에 12월 31일에야 함평군 전체 7,300세대의 고구마 생산 농가 중 9개 마을 160농가만 조사에 응했어요. 그런 방해 책동이 없었더라면 더 많은 농가가 피해 조사에 응했을 거예요. 활동가들은 수적으로 적고 군 농협 임직원과 경찰, 행정 직원들은 천 명이 넘었으니까. 어쨌든 조사 결과 160농가 손해액이 총 309만원으로 나왔고 그것을 토대로 해서 추정해 보니 전라남북도를 합쳐서 고구마 농가의 손해액이 24억원 정도였어요.”
- 농민운동가 노금노의 증언
전남 함평의 가난한 농민들은 농협 당국의 수매 약속을 믿었다가 피땀 흘려 가꾸어 놓은 농작물을 길가에서 썩히거나 헐값으로 팔지 않을 수 없었던 사태에 대해 이미 여러 차례나 농헙에 그 보상을 요구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협 당국은 농민들에게 피해를 보상해주기는커녕 농민들의 정당한 요구를 무마하고 억누르기 위해 온갖 술책을 다해왔다. 기회 있을 때마다 농민을 위한다고 떠들어 온 농협이 어째서 농민의 정당한 요구를 묵살하려 드는가.
- 한국 가톨릭 농민회

1977년 1월 9일 천주교 광주대교구 함평성당에서 가톨릭농민회가 조사한 결과를 가지고 대책위원회가 열렸고, 농협이 보상을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와 농협에 보상을 요청했다. 하지만 농협은 보상과 관련한 답변을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고[7] 경찰에 의한 방해공작[8]은 계속됐다. 4월 22일에는 활동가들과 농민들이 광주 계림동 천주교회에서 모여 기도회를 개최하고 보상을 위한 투쟁에 나서기로 했으나 경찰들이 들어와 큰 충돌이 벌어졌다. 농민들은 전라남도 농협 건물에 다시 모였으나, 다시 경찰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가톨릭농민회는 타지의 천주교회나 단체들에 연대를 요청하면서 이 일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78년이 되자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가톨릭농민회는 이 '함평 고구마 사건'을 전국대의원대회에 특별의제로 올리면서 전국적인 투쟁을 실시하겠다고 밝혔고, 전국대책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전국대책위원회는 대규모 집회를 계획했다. 그리하여 4월 24일 광주 북동천주교회에 피해농민, 가톨릭농민 회원, 농민운동가, 사회운동가, 천주교 신자들을 포함한 700여명의 인원이 모였다. 이들은 농민대회를 개최하고 "고구마 피해를 보상하라"고 외쳤다. 이들은 또한 거리시위를 하려고 했으나 경찰의 제지로 실패하자 모인 인원 중 73명이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그러자 경찰은 성당의 문을 폐쇄하고 성당의 미사마저 금지시켰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안 신부들이 호소문을 발표하고 천주교 광주대교구와 농민회도 지지 의사를 밝혔다. 이와 함께 전국의 민주화운동가와 천주교 인사들이 농성장을 찾아와 농성자들을 격려했다. 농민들이 처음 해 보는 단식에 지쳐 쓰러지자, 함께 단식을 하기도 했다.
* 함평 고구마 피해 농가의 피해액을 즉각 보상하라.
* 함평군 농협 조합장은 고구마사건에 관한 책임을 지고 물러가라.
* 농협 전남 도지부장은 즉시 농민들 앞에 나와 농민들의 요구에 답변하라.
* 감사원은 함평 농협 감사 결과를 공개하라.
* 조합장 임면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철폐하라.
* 농민회 탄압을 즉각 중단하라.

- 당시 농민들이 발표한 6개의 요구조항
파일:5267_6447_116.jpg
보상금을 받는 농민들

이렇게 되자, 정부도 더 이상 이 상황을 외면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정부는 단식 4일째인 4월 27일 사태해결을 위한 회의를 열었다. 여기에는 가톨릭농민회 회원 서경원, 전남도지사 고건, 중앙정보부 전남국장 김광호, 천주교 광주대교구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가 참석했다. 여기서 서경원은 해산 후 해결과 졸속해결을 보려는 김광호와 고건에 맞서 올바른 피해보상을 촉구했다.
김광호 지국장이 “머리띠나 풀고 얘기합시다”라고 해서 저는 “고구마 문제 해결해주면 머리띠를 풀겠다”고 맞받아쳤습니다. 그때 고건 도지사[9]가 “309만원 중에서 100만원을 주겠다”고 했고 저는 “지금 돼지새끼 놓고 흥정하는 거냐. 이게 흥정의 대상이냐”고 따졌습니다. 사태의 본질을 파악한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는 저에게 “이제 내가 알겠다. 열심히 투쟁해라. 도와주겠다”고 격려하기도 했습니다. - 서경원의 증언

단식 5일째인 4월 29일이 되자, 쓰러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하지만 농민들은 여전히 끝까지 투쟁하겠다는 결의를 버리지 않았다. 결국 정부가 항복했다. 농협 전남지부에서부터 309만원이 농민들에게 전달되었고, 농민들은 1인당 19,300원을 받을 수 있었다. 20개월 간의 투쟁이 드디어 빛을 본 것이다. 하지만 단식은 시위 중 연행된 2명의 회원이 석방될 때까지 계속되어, 5월 2일 이들이 석방된 후에야 멈췄다.

한편, 이 사건 이후 감사원은 농협과 주정회사 등에 감사를 실시했는데, 이를 통해 농협과 주정회사가 결탁하여 80억 원의 부당이득을 취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들은 고구마를 구매할 때 농민들에게는 헐값으로 샀지만 중간 상인을 통해 비싸게 샀다고 장부를 허위로 조작하여, 그 마진으로 80억이라는 폭리를 취한 것이다. 이 일에만 600여명이 넘는 사람이 연루되어 옷을 벗어야 했다.#

3. 여담

  • 3년 뒤인 1980년 5월 19일, 함평 고구마 농민 투쟁 승리 기념식에 김의기 열사가 광주에 가게 되고 광주의 참사를 보게 되어 서울로 올라와 격문을 뿌리다 계엄군과 몸싸움 끝에 투신하여 사망하였다.

4. 참고자료

첫 번째 승전고를 울리다 - 함평 고구마 투쟁
가톨릭농민회와 함평 고구마 사건
함평고구마사건 40주년 특별인터뷰 - 서경원 전 의원
고구마 피해를 보상하라
함평고구마사건 기록 모음

[1] 통계청의 화폐가치계산 시스템을 통해 조회해보면 2018년 현재의 12,000원은 1976년 당시 화폐가치로 1,356원으로 조회가 된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통계상의 결과에 불과하고, 당시 한국 사회의 구매력 및 물가상승률을 감안해 본다면 당시의 1,300원은 현재의 15,000원 내지 17,000원 정도 될 것이다.[2] "말랭이"의 전라도 사투리[3] 고구마를 말려서 빼깽이로 만드는 이유는, 수확한 고구마를 통해 술을 만드는데 이를 위해 보관기간이 길어야 해서였다.[4] 그 해 함평군의 고구마 생산량은 2만 5,000톤으로, 전년에 비하면 5,000톤 더 많은 것이었다.[5] 현재 물가로 14,000원 정도의 1,200원이었던 고구마 포대가격이, 현재의 5천원 수준인 200~300원까지 떨어지기도 했다.[6] 원래 가톨릭농민회가 예상한 피해액은 1억 4,000만원 정도였으나, 농협의 방해로 인해 그보다 훨씬 적게 집계되었다.[7] 농협은 농민들을 회유하는 공작을 실시했는데, 무이자대출을 권유하거나 "100만원을 주겠다"며 졸속타협을 요구하거나 "보상이 곧 될 테니 참아라"며 시간을 끌기도 했다.[8] 보상투쟁에 참여한 서경원의 증언에 의하면, "정보과 형사들이 나를 공산당원 혹은 간첩으로 몰아세웠다"고 한다.[9] 당시 38세로 역대급으로 젊은 도지사였다. 박정희 정권 도지사는 주민이 선출하는 민선이 아닌 정부에서 임명하는 관선이었고, 고건이 박정희 정부의 업적으로 꼽히는 새마을 운동을 기획 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상으로 임명되었다는 시각이 있었다.[10] 농협에서 싹이 나지 않는 씨감자를 농민들에게 속여 판매하고 이를 심은 농민들이 싹이 나지 않자 보상을 요구했으나 씹은 것.[11] 고건은 서울시장은 노태우 정권기 관선으로 한번, 이후 김대중 정부 시절 민주당 소속으로 민선으로 서울시장을 또 한번, 이렇게 총 두번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