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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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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Community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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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기

1. 개요2. 배경 및 전개3. 상징물4. 결과와 계승
4.1. 전파
5. 박정희 정권 이후6. 비판
6.1. 반론
7. 새마을운동 기록물
7.1. 의의
8. 여담9. 관련 문서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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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 세대의 생존은 유한하나 조국과 민족의 생명은 영원한 것. 오늘 우리 세대가 땀 흘려 이룩하는 모든 것이 결코 오늘을 잘 살고자 함이 아니요 이를 내일의 세대 앞에 물려주어 길이 겨레의 영원한 생명을 생동케 하고자 함이다.
박정희 대통령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새마을노래의 첫 구절
1970년 4월, 대한민국 제3공화국박정희 정부가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 새마을 가꾸기 운동을 거론, 동년도 5~6월에 구체적인 방안이 마련되어 시작된 농촌 계몽 운동이며 근면(勤勉), 자조(自助), 협동(協動)을 3대 정신으로 꼽았다.

2. 배경 및 전개

1960년대 정부 주도 경제개발 정책은 산업화의 특성상 도시집중화를 야기했고 이로 인해 이촌향도 현상으로 농촌이 상대적으로 상황이 열악해지고 있었다. 정부에 대한 지지율도 농촌, 어촌에서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1969년 11월에 농촌근대화촉진법이 발표되고, 이어서 1971년부터 시행되기 시작한다.

1973년부터는 대통령실과 내무부에 관련 조직이 설치되었고, (내무부 지방국 새마을지도과,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 새마을지도자연수원(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의 전신)이 신설되어[1] 새마을운동 지도자의 교육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75년에는 도시와 공장으로도 확대되었다. 새마을 운동은 농촌을 살리고 경제를 부흥한다는 목적으로 실시되어 농촌활성화에도 기여하였다.
파일:external/www.nnnews.co.kr/593.jpg
류태영 박사
새마을운동의 계획자는 전 건국대학교 부총장이자 농업전문가, 유대인 전문가로 유명한 류태영 박사였다. 고학으로 대학까지 졸업한 류태영 박사는 앞으로 국가를 위해 뭘 할 수 있을까를 고뇌하다가 덴마크 왕실의 후진국 특례 유학생 제도가 있음을 확인하여 영문으로 자신의 농촌 계몽 의지를 피력했다. 그리고 그 뜻이 수용되어 약 10여년 간 유럽 각국과 이스라엘 등을 다니며[2] 농촌 계몽과 현대화 등을 연구하고, 이스라엘에서 농업교수를 역임한 후 귀국하여 새마을운동을 이끌었다고 한다. 이후 쌍용양회가 생산하는 시멘트 재고가 쌓여서 회사가 휘청거리게 되자 정부가 이 시멘트를 모조리 사들인 상황이었다. 이것이 마침 세워졌던 새마을 계획과 결합되면서, 전국에 한 마을당 600포씩 뿌리는 식으로 재고를 처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3] 당시 거의 전국의 초가집을 헐고 시멘트집을 짓는데 만약 이걸 다 새로 생산했으면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만들 노동력이나 자금 면에서 손실이 컸을 것이 뻔하다.

새마을운동은 다음과 같은 단계로 진행되었다.
  • 기반조성단계(1971~73): 새마을운동 의식을 확산, 기반구축
  • 자조발전단계(1974~76): 경제난 해결에 주력
  • 자립완성단계(1977~80): 국력 신장, 농어촌의 복지 향상 사업
  • 민주복지완성단계(1981~): 5공 이후 민간 주도의 새마을운동으로 바꾸었으나, 이후 1988년 5공 청문회에서 민영화 과정에서 많은 부정부패가 밝혀져 문제가 되었다. 이 단계에서 새마을운동 사업은 상당히 위축되었다.

당시 새마을운동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 초가집을 없애고 슬레이트 지붕[4]으로 고치기 및 서양식 현대화 주택[5] 건설
  • 농기계 등 첨단 장비 보급
  • 기존 흙길을 시멘트 or 아스팔트 길로 포장
  • 도시 및 도로 미화 사업
  • 새마을지도자들을 양성, 각종 교육 시행[6]
  • 전기 공급 및 전화 보급 사업 #
  • 기타 정신적 교육[7]

특히 배급받는 시멘트를 당시 안 쓰고 썩힌 마을은 다음 지원대상에서 빼는 식으로 경쟁시킨 것이나, 자발적인 경쟁을 각 마을에 유도한 것은 지금 봐도 경쟁의식을 자극하는 뛰어난 기술. 이 시멘트를 받아서 그냥 안 써먹은 마을도 있었지만, 받은 시멘트를 활용하는 마을에 한해서 철근 등 자재를 보내면서 국민적인 반응이 커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호응을 얻기 시작한 새마을운동은 정부에 의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결과적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낳았다. 옛날일 정도로 회상하는 경우가 많으나 공식적으로 새마을 운동은 끝난 것은 아니다.

3. 상징물

파일:새마을기.svg
새마을 기 새마을 노래
새마을노래
박정희 작사[8]
홍연택 → 박정희 작곡[9]

1절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2절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푸른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가꾸세

3절
서로서로 도와서 땀흘려서 일하고
소득증대 힘써서 부자마을 만드세

4절
우리모두 굳세게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워서[10] 새조국을 만드세

후렴
살기좋은 내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새마을의 대표적 상징물은 새마을기이다. 초록색 바탕에 노란색 동그라미, 그리고 그 안에 초록색 새싹이 자라나는 모습을 담은 로고에 박정희의 글씨로 새마을이라는 흰 글씨를 쓴 깃발로 1970년 새마을운동 초창기 때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기장학에 상당히 충실하다.

녹색바탕은 농촌의 녹색혁명을 상징하며, 황색원은 협동과 부 및 무한한 가능성을 표시, 녹색의 잎과 싹은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정신 및 희망과 소득을 상징, 줄기의 밑이 넓은 것은 안정과 번영을 표시한다.

1970년 새마을운동 전파와 홍보를 위해서 관공서와 농협, 수리조합(현 한국농어촌공사) 등 유관기관 국기 게양대마다 태극기와 함께 의무적으로 게양되었던 깃발이었기 때문에 관공서와 유관기관 국기 게양대에 새마을기가 게양되어 있었고 깃발 외에 마을 입구 표지판이나 비석 등에도 새마을 마크가 새겨지기도 하였다. 현대에는 농촌이나 산촌 위주로 새마을기를 계속 게양하고 있으나 문민정부 출범 이후 새마을기의 공공기관 의무 게양 조항이 사라졌고 새마을운동 정신의 무분별한 강조는 곧 유신정권의 잔재라는 지적이 나오면서 새마을기를 달지 않는 기관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물론 현재도 농촌지역 지자체 기관들이나 경로당에는 새마을기가 걸려있는 곳이 적지 않다.[11] 드물게 패션 아이템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는데, 예를 들자면 농활 봉사활동을 한다거나 체육대회에서 단체복을 만들 때 사용하는 등, 일종의 빈티지/농촌 느낌이 나는 표식으로 사용중인 듯하다. 일례로 과거 봉숭아학당에서 김준호가 마을 이장 캐릭터를 연기할 때에는 항상 새마을 모자를 쓰고 나왔으며, 장동민도 개그 콘서트의 다른 코너에서 농촌의 마을 이장 캐릭터를 연기할 때에는 카키색 점퍼에 새마을 모자를 착용했다.

4. 결과와 계승

새마을운동으로 전국적인 생활 환경 및 국민 위생 개선, 농로 등의 인프라 구축이 됐고 한국 농촌에서 초가집은 이 시기에 거의 사라졌다. 1894년신분제도법적으로 폐지 됐지만 농촌에서는 양반, 평민 등 혈통이 모여사는 마을이 있어서 신분제도가 암묵적으로 오랫동안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새마을운동으로 마을 전체가 새롭게 변화가 돼서 농촌에 암묵적으로 남아있던 신분제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단순히 새마을운동 때문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이 농촌에서 도시로 몰려들면서 기존의 집성촌들이 인구유출로 쇠락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기도 했다. 최규석대한민국 원주민에 보면 6.25 이후에도 종들이 사는 '아랫마을'이 남아 있어서 그곳 노인들도 윗마을 어린이에게까지 존댓말을 썼다는 작가 모친의 증언이 나오는데, 이 아랫마을은 산업화로 인해 주민들이 도시로 떠나며 자연히 소멸했다고 한다.# 또 다른 예로는 김영순의 '오빠 새와 인삼'이라는 작품[12]에 보면 이 당시 전라북도의 '산수리골'이라는 가상의 마을에서 벌어지는 4H구락부 운동 전개 묘사에 이 동네의 텃세와 암묵적 신분제가 없어지는 과정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오늘날에도 농촌에서 "새마을운동"이라는 문구가 갖는 힘은 대단하다. 아예 새마을 모자가 농촌을 상징하는 물건 중 하나로 자리잡았을 정도다. 예시로 정태춘, 박은옥의 노래 "고향집 가세"에는 가요로서 드물게 농촌 고향의 상징으로서 새마을 모자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TV 예능에서는 이 새마을 모자를 이장의 상징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예전 개그 콘서트 봉숭아학당의 "그까이~꺼 이장" 장동민이나 청춘불패남희석 등. 물론 원조는 같은 방송국 유머 1번지의 코너 "괜찮아유"에서 최양락이나 김학래가 쓰고 나오던 것이다.

1988년도의 제5공화국 비리규명 청문회에서 밝혀진 문제점[13]에 따라 한동안 새마을운동은 위축되었으나, 제2새마을운동으로 새롭게 사업을 전개해 왔다. 문화·시민의식의 선진화, 서로 돕는 복지공동체 만들기, 지역 활력 찾기, 친환경 조성, 국제·통일 협력사업 등을 목표로 활동했다.

현재 새마을운동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사업이 전개되는 중이다. 2018년도는 사회공동체운동, 경제공동체운동, 문화공동체운동, 환경공동체운동, 지구촌공동체운동을 중점운동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를 통해 가정새마을운동, 지역사회새마을운동, 지구촌새마을운동분야에서 활동하며 나라 발전의 기틀 마련과 공동체 의식 제고, 지구촌 공동 번영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다양한 형태로 새마을운동 관련 조직이 운영되고 있으며, 예전에 비해 역량이 줄어든 감은 있지만 그래도 지역에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 새마을운동을 주관하는 새마을운동중앙회는 1980년 12월 1일 새마을운동중앙본부로 사단법인 인가를 받아 창립되었다.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은 1980년 12월 13일 법률 제3269호로 제정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도 아버지의 새마을 운동을 계승해 '새마을운동 세계화 사업'을 구상했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2019년 10월 29일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에 참석해 "세계는 '새마을운동'이 이룬 기적 같은 성과에 주목하고 있다"며 과거 새마을운동이 한국 경제발전에 이바지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4.1. 전파

새마을운동은 전 세계적으로 상당히 높게 평가받고 있는 한국의 정책 중 하나다. ODA(공적개발원조)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제프리 삭스 역시 새마을 운동의 빈곤 퇴치 효과를 긍정했다.[14] 제3세계 국가들이 새마을운동에 괜히 큰 관심을 보이는 게 아니다. 대한민국의 급속한 경제발전에 영향을 준 것 뿐만 아니라, 농어촌 지역의 빈곤 극복과 복지 향상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큰 지지를 받는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도 새마을운동을 연구하고 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아프리카의 유엔 산하기관에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배울 것을 권고했다. 콩고, 가나, 케냐,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이 새마을운동을 수입해간 주요 국가이며, 다양한 국가에서 새마을운동을 배우기 위해 연수생 신분으로 한국에서 노력하고 있다.# 콩고에서는 지천에 널린 진흙으로 벽돌을 구워 (흡사 50년대 한국의 신흥주택처럼) 양옥집을 짓는 사업이 꽤 쏠쏠하다고 한다.[15]

파일:1683189655045.jpg

특히 르완다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는 운동인데 르완다의 대통령인 폴 카가메가 박정희를 존경하는 탓에 새마을운동 도입에 매우 적극적이라고 한다.

또한 중국의 일부 지역에도 전파되었다. 중국어로는 한국신촌운동(韩国新村运动)이라 번역하는데 특히 중국의 덩샤오핑은 중국어로 번역된 새마을운동 관련 서적을 당 간부들에게 나눠주며 새마을운동을 배우라 지시했을 정도. 위에 소개됐던 류태영 박사도 새마을운동 전파를 위해 중국을 여러 차례 방문하기도 했다. 후진타오 주석도 새마을운동을 공부했으며, 이를 모방한 "신농촌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초청 연수나 기타 인재개발원 연수 사업도 포괄해서 새마을운동 전파사업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대개 이런 초청 연수는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관, 농업기술원, 농촌 정보화마을등과 포스코,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등의 산업현장으로 견학을 하게 된다.

페루에서 당시 대통령이던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새마을운동을 수용하였다가 결과적으로 실패했던 이후로는 위상에 타격이 가기도 했다. 그러나 미얀마가 부분적인 민주화를 이룬 직후 새마을운동을 적극 수용하기로 하자 다시 이를 전파하기 위한 노력이 확대되고 있다. 미얀마의 첫 민선 대통령이 새마을연수원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특히 미얀마의 경우 새 도읍지인 네피도가 아직 건설이 충분히 끝나지 않아 이에 대한 개혁 의지가 매우 강하다.

5. 박정희 정권 이후

1980년대에는 대한민국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그동안 관이 주도하던 새마을운동을 민간주도형으로 전환하는 목적 하에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에 의하여 새마을운동중앙본부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외형상으로 민간주도였어도 실제로는 반관반민(半官半民) 체제로 운영되었으며, 정권 유지에 복무하는 관변운동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5공 기간 동안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 본부 사무총장, 회장을 지냈으니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고, 급기야 전두환이 퇴임한 직후인 1988년 전경환이 구속되고 새마을운동중앙본부는 이른바 ‘5공 비리’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하여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로 개칭되었고, 기구조직도 대폭 정리·조정되었다. 1989년에는 새마을운동센터를 만들어 도덕성 회복과 의식개혁을 내세웠으며, 1993년에는 제2단계 새마을운동을 선포하기도 했다. 2011년 국회는 「새마을운동조직 육성법」개정을 통해 4월 22일 ‘새마을의 날’을 국가 기념일로 제정하였다. 또한 새마을운동은 저개발국가의 발전모델로 선정되어 2010년까지 아시아, 아프리카 등 103개 나라 5만여 명이 교육을 받기도 하였다.

2000년 이후 한국 정부국제사회에 새마을운동을 지역사회개발 운동의 성공 사례로 홍보하는데 주력했다. 2000년에는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의 명칭을 새마을운동중앙회로 바꾸고, 유엔의 비정부 기구(NGO)로 가입하였다. 2003년부터는 필리핀 · 콩고 · 몽골 · 러시아 · 중국 · 베트남 · 아프가니스탄 · 우간다 · 미얀마아프리카 · 아시아 저개발국에 적극 새마을운동을 보급하였다. 특히 한국 정부가 공적개발원조사업(ODA)을 시작한 2009년부터는 개발도상국 농촌에 경제발전 경험을 전수한다는 점을 내세웠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새마을 운동이 산업화 시기 정책적으로 의도된 불균형 발전에 따르는 비용을 농촌에 그대로 전가시킨 채 농민들을 당대의 지배논리 안으로 포섭하려는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다른 개발도상국의 사례에 직접 적용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보기도 한다.

6. 비판

조선총독부에서 실시한 근대화 정책과도 비슷하다는 지적이 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권위적 근대화라는 차원에서 일맥상통한다.[16] 새마을운동의 경우는 총독부와 같은 일방향적인 구도보다는 일반민의 호응을 얻어 시행되는, 앞서 말한 소련, 북한 등의 인민 동원 체제와 유사하다. 조선총독부의 근대화 정책보다는, 만주국농촌진흥운동과 닮아있다. 기시 노부스케가 만주국 관료를 지내며 그 악명을 높이던 시절에 입안했던 것이 바로 만주국의 농촌진흥운동이며, 박정희 본인 또한 만주국 소속의 군인이었으니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당연히 비판점을 볼 때도, 이러한 일반민 동원 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새마을노래와 함께 아침 일찍 기상하기 등 "일사불란"을 요구하는 동원적 수단, 희망적 전망에 대한 적극적 참여 등을 이용하면서 실질적으로 반강제의 체제 협조를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새마을 청년회 등에 반강제로 가입을 시킨 후에 다리나 제방 공사 당시 "자기 마을의 일"이므로 적극적인 참여를 당연시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때문에 비판하는 측에서는 대개 국민교육헌장과 함께 박정희 정권의 "국민국가 만들기"라는 점을 짚는 편이다.

겉으로 보기 좋은 성과는 만들어냈으나, 새마을운동으로 막고자 했던 농촌 사회의 붕괴는 억제하는 수준에는 머무르지 못했다. 1970년대 농촌 쟁의는 결국 새마을운동이 농촌의 구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강 교육자 겸 동화 작가 문관식이 쓴 <밤나무골 아이들>이라는 창작 동화(꿈동산 마이프렌드라는 창작동화 시리즈에 실렸다)에서는 새마을운동 당시의 농촌을 묘사하면서, 새마을운동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은근히 보여주고 있다. 참고로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 그것도 1980년대에 쓰여진 작품이다. 그 때부터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은 비판적으로 봤다는 이야기다.

지붕 교체 사업 당시 지붕을 슬레이트로 했다가 슬레이트가 썩자 석면이 검출된 것 역시 큰 문제가 되었다. 일단 당시의 기술이나 경제 상황으로 보았을 때 석면을 쓴 것이 잘못된 결정이었던 건 아니었다. 석면의 위험성이 영국에서 대두된 시기는 1924년이나, WHO 산하 IARC에서 석면을 발암물질로 확정한 시기는 1987년이다. 때문에 새마을운동이 한창이었던 1973년~1979년에는 석면의 위험성이 제대로 입증되지 않고 그 유용성만 알려졌기에 쓰인 것이지, 위험성을 알면서 무작정 혹은 남몰래 쓰는 등 안 좋은 식으로 쓴 것은 아니다. 즉 이후의 시점에서 보면 잘못된 것이 맞지만 이런 앞 뒤 사정을 감안해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전통문화의 급격한 상실도 문제가 되었다. 물론 산업화와 그에 따른 급격한 사회변화로 어쩔 수 없는 부분도 분명 있지만 당시 보존해야 할 전통까지 밀어붙이기 식으로 파괴한 경우가 많다. 특히 무속문화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는데 각 마을마다 존재하던 서낭당, 마을 굿 같은 것은 조직적으로 파괴되었다.[17] 심지어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된 "제주칠머리당 영등굿"의 경우 조차도 미신타파의 명목으로 굿을 금지하면서 하마터면 전승이 끊길 뻔 했다. 이를 두고 논했는지는 몰라도 도올 김용옥이 대학생 시절에 "새마을운동은 문화박멸운동이다"는 논지의 글을 학교신문에 발표했다가 뼈아픈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또한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이만열)교수도 이 문제를 지적하였다. 보기 그리고 당시 전해지던 여러 고택들과 향교들도 상당수 자취를 감추었다. 그 예로 새마을 운동 당시 사라진 제주향교 명륜당을 예로 들 수 있다. 극단적으로는 당시의 전통문화 파괴를 문화대혁명의 반달리즘에 비교하기도 한다.#[18]

또한 새마을운동으로 농촌에 "개혁"을 시행해봤다고 보기엔 성과라고 할 것이 전무하지 않느냐는 비판도 있다. 새마을운동이 시행된지 5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의 농업세계적인 수준에는 전혀 미치지 못 한다는 점이 이런 시각을 떠받치고 있다. 이러한 한계로 인해 장기적 이농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은 새마을운동은 농촌 붕괴를 조장하는 것 아니었냐는 비판까지 유발하고 있다. 실제로 19세기 영국에서도 정치인들 입장에서는 이농현상을 오히려 호의적으로 해석한 선례가 있기 때문에 당시의 영국보다도 훨씬 가파른 산업화를 겪었던 한국의 경우는 정부가 아예 이농현상을 의도적으로 부추겼으리라는 시각을 가지는 것도 그다지 무리가 아니다.[19][20][21]

처음부터 시멘트를 다량으로 동원하는 사업이었기에 전쟁 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방공호를 같이 지었다면 더 효율적이었음에도 예비군까지 동원을 추진한 정권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그런 것은 지지부진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6.1. 반론

그러나 위에서 천리마 운동과 청산리 방법을 새마을운동과 1:1로 대응되는 유사품처럼 서술한 데에는 어폐가 있다. 천리마 운동과 청산리 방법으로 북한이 고속성장했지만, 이미 1960년대 후반[22]부터 제조업 가동률이 현저하게 저하되고 있다는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그리고 천리마 운동과 새마을운동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은 전자와 달리 후자는 가계소득 증진에 가장 집중했다는 점이다. 반대로 천리마 운동은 자발적 참여 운동을 내걸었지만 여전히 집단농장 체제를 전혀 부술 생각이 없었다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 오히려 젊은 당 간부들과 소련에서 유학한 경제학자들이 자주관리의 효율성을 역설하며 당시 소련과 헝가리가 했던 경제개혁을 본받자고 했지만 김일성은 이를 그저 우습게 여겼다. 더군다나 그 이후 김정일이 권력을 휘어쥐자 유일 수령제가 강화되면서 이런 목소리는 나오는 족족 입막음당하고 여전히 집단농장 위주의 대중 동원만이 강화됐다. 하다못해 집단농장의 자율성을 높여 일종의 영농법인처럼 기능하게 만들고 노동자들의 이직을 자유롭게 하였다면 유능한 노동자들은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집단농장으로 이직하거나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던 도시의 공장으로 취업하는 방식을 통해 가계소득을 효과적으로 올려나갈 수 있었겠지만 문제는 이게 되면 공산주의가 아니다.

농촌 쟁의가 당시 지역 여론의 대세를 이루었는지는 아직도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므로 함부로 단정지을 문제는 아니다. 1960~70년대 당시는 오히려 여촌야도라 하여 오히려 수도권에서 민주공화당의 득표율이 바닥을 기어 농촌에서의 득표율에 기대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농촌의 민주공화당 지지세가 옳은가 그른가에 대한 문제를 떠나서, 농촌 쟁의가 지역 여론의 대세를 이루었다면 이러한 정치적 경향실은 설명하기가 힘들어진다. 결국 농촌 쟁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수도권경공업 현장에서 일어났던 노사분규들과는 그 정도가 달랐고, 새마을운동이 농촌 쟁의의 확대를 어느 정도 저지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위에서는 새마을운동의 목적은 이농현상을 부추기는 것 아니었냐는 비판이 있으나 이는 도리어 20세기 후반에 새로운 행정부가 집권할 때마다 당면해야만 했던 문제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일단 70년대를 기점으로 농업 인구가 크게 줄었으나 이를 무조건 농촌에서 수도권 이주로 보는 것은 사실관계에 어긋난다. 이는 행정구역의 변화로 따졌을 때,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이후로 읍이 시로 승격되는 비율이 거듭 증가했음을 간과한 주장이다. 오히려 새마을운동이 정착한지 20년이 흐른 90년대는 도농복합시를 도입하여 대대적인 도농 통합을 추진해야 했을 정도다.[23]

해방 이후로 한국 농업은 기계화 및 정보화 도입을 통해 단위 면적당 필요한 인력은 계속 감소하고 있는 것이 추세였고 이 추세는 변화한 적이 없다. 이 상황에서 농촌 인구가 그대로 농촌에 남아있어야 한다고 국가가 주장한다면 이는 이 지역에서 엄청난 실업이 일어나는 것을 의도적으로 조장하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정책을 실제로 취한 것이 중화인민공화국이고 농민공 문제는 농촌과 도시 양 쪽에서 전부 난처함을 토로하고 있는 상황인데다가 호적을 기준으로 직업 선택을 강제하는 이 정책은 아예 새로운 신분제로 등극하고 있는 수준이다. 뿐만아니라 당시 도시에서는 공업과 서비스업의 급격한 팽창으로 초중등 교육을 이수한 교육받은 노동력이 시급하게 필요해지는 상황이었는데 새마을운동으로 인한 농촌 지역의 소득 향상은 자연스럽게 교육수준 향상으로 이어졌고 이 인력들이 도시로 공급되는건 일종의 필연이었다. 농촌지역의 공업화도 일부 진행될 수는 있지만 이 정도의 발전으로 농업 고도화로 인한 지속적인 노동수요 감소에 대응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대약진운동 수준의 나이브함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촌향도를 농촌 황폐화의 지표라고 보는 것은 비현실적인 측면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농촌 지역에서 필요한 인구 자체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감소하는 농업 일자리 상황에 맞게 과잉할 것으로 예상되는 인구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해주는 것이 오히려 국가가 최우선으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였다고 할 수 있고 이러한 전환은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노동인구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농촌에 남겨질 것은 심각한 수준의 실업, 불경기와 그로 인한 치안 불안과 범죄, 그리고 이로 인한 가계 소득 저하와 뒤를 잇는 교육 수준 저하로 인한 생산성의 하락이라는 악순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새마을 운동으로 인해 일어난 이촌향도는 농업 생산력의 극대화와 함께 공업화를 가능한 수준으로 진행하여 농촌에 남을 인구에게 지속적으로 높은 삶의 질을 제공하고 이런 정책으로도 전부 수용할 수 없는 떠날 인구에게도 더 좋은 일자리를 가질 기회를 제공하는 정책의 일환 속에서 벌어졌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이촌향도는 절대 모든 인구가 농촌을 떠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과잉한 인구가 새로이 성장하는 산업분야의 일자리를 찾아 이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와 문화라는 부분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농촌 사회구조는 애초에 지속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카를 마르크스가 이야기 했듯이 토대가 상부구조를 정의한다. 산업혁명의 물결이 이제 농업 생산 방식에까지 몰려오고 있는데 전통적 생산방식에 기반한 전통적 사회구조라는 것은 존속이 당연히 불가능할 수밖에 없고 제도나 문화와 같은 것들도 전환된 생산방식에 따라 재정의될 수밖에 없다. 전통문화의 몰락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

당시 정권이 수도권으로의 이주를 의도적으로 부추겼다는 믿음과 달리, 오히려 산업화 과정에서 서울의 인구과밀이 정부의 당면적 과제로 떠올랐고 이에 대한 대책이 활발히 논의되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모든 정권은 서울과 수도권에 주택을 공급하는데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수요는 항상 공급을 아득하게 능가하고 있고. 오히려 서울 인구의 폭증을 정부에서는 통제불능의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광주대단지사건은 바로 이런 정부 인식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는데 사기에 가까운 조건으로 서울 저소득층을 성남시로 밀어내면서 붙인 조건이 무려 다시는 서울로 되돌아오지 않는다.라는 것이었다. 또한 충청남도로 행정수도를 이전한다는 계획을 세워 그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다. 서울 인구 집중의 문제를 정부 차원에서 쓸 수 있는 제일 강력한 극약처방을 통해 근본적인 수준에서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행정수도 이전이 다시 논의되었던 참여정부 시기에 한나라당대통령 탄핵을 표결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 계획이 70년대에 작성되었음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24] 또한 위에서 남한 국토에 방공호가 부재함을 지적한 것도 사실관계에 부합한다고 보긴 힘들다. 결정적으로 지금도 전방이나 서해 도서지역은 방공호가 있다. 연평도 폭격 당시 주민들이 피신한 방공호가 새마을운동 당시에 지어진 것이다.[25] 그리고 효율적이었을 거란 이유로 당시에 사방팔방 방공호를 짓고 다녔다면 오히려 호평은 커녕 쓸데없는 자원낭비, 인력낭비, 노동낭비라고 비난만 나왔을 것이다. 실제로 알바니아엔베르 호자가 국토 전역에 토치카를 무차별적으로 지었다가 지금까지 까이고 있다.[26]

7. 새마을운동 기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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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해례본)』

『조선왕조실록』
[朝鮮王朝實錄
]

『불조직지심체요절』 하권-
佛祖直指心體要節 (下卷)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
(高麗大藏經板-諸經板)

조선왕조 『의궤(儀軌)』

『동의보감(東醫寶鑑)』

1980년 인권기록유산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록물

『일성록(日省錄)』

『난중일기(亂中日記)』:
이순신 장군의 진중일기(陣中日記)

새마을운동 기록물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

한국의 유교책판

조선통신사에 관한 기록 –
17세기~19세기 한일 간 평화구축과
문화교류의 역사

조선왕실 어보와 어책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4.19혁명 기록물

동학농민혁명기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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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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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국어 새마을운동 기록물
영어 Archives of Saemaeul Undong (New Community Movement
프랑스어 Les archives de Saemaeul Undong (mouvement de nouvelles communautés)
국가 대한민국
등재유형 기록유산
등재연도 2013년
제작시기 1970~1979년
파일:hd9_2013-04_i2-1024x713.jpg
새마을운동 기록물은 1970년~1979년까지 대한민국에서 전개된 새마을운동에 관한 기록물들이다. 이 기록물은 대통령 연설문, 정부 문서, 마을 단위의 기록물, 편지, 새마을운동 교재, 관련 사진, 영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새마을운동’이란 문자 그대로 ‘New Community Movement’또는 ‘New Village Movement’를 뜻한다.
2013년 6월 18일 광주광역시에서 열린 제11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는 새마을운동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할 것을 유네스코에 권고 했고, 유네스코는 등재를 결정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새마을운동 기록물은 총 22,084건으로 새마을운동중앙회가 7,437건을 소장하고 있고, 국가기록원이 14,647건을 소장하고 있다.

7.1. 의의

새마을운동은 한국이 지금의 경제적 발전을 이루는 데 이바지한 초석으로, 한국의 빈곤퇴치, 여성 인권 향상, 근대화에 이바지하였으며, 이 새마을운동 기록물은 경제개발의 시대적 흐름 속에서 잘 사는 농촌을 실현하고 빈곤을 퇴치하는 데 성공한 사례를 담고 있는 자료다. 이 기록물은 개발도상국들에게 앞으로의 국제사회발전을 위한 자료와 도구로서의 그 활용 가치가 크다. 새마을운동의 추진과정과 실적을 볼 때 새마을운동과 같은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새마을운동 기록물 역시 기록물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8. 여담

  • 새마을운동을 경험한 중장년층 이상 세대들은 "새마을 사업"으로 일컫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어린시절 겅험했던 초창기 농어촌 재건작업은 '새마을 가꾸기 사업'이라는 명칭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 새마을운동 이전에 '재건국민운동'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농촌운동가 류달영 박사(1911~2004)가 주도한 것인데, 새마을운동과 다르게 국가주도가 아닌 국민들의 자발적 생활수준 개선을 강조한 것이었다.[27] 비록 그 자체는 실패했지만 새마을운동의 모델 중 하나가 되었다.[28]
  • 당시 박정희 정권은 새마을운동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류태영 박사가 새마을운동의 성패는 고위 공직자의 정책 이해와 솔선수범에 달려있다고 말하자, 3일 후 특명으로 비서실장, 경호실장을 포함한 청와대 내의 간부 전원을 지하 대강당에 소집해서 류태영 박사의 교육을 듣게 했다. 말하자면 최초의 새마을 연수자들이다. 몇 년 후 광주에서 장관, 지역단체장 등 고위공직자 1천여명을 상대로 청와대 때와 같은 내용의 교육을 진행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처음부터 끝까지 참석해서 1,000여명의 청중이 강연이 끝날 때까지 한명도 자리를 뜨지 못했다고 한다.[29]
  • 새마을운동 사업의 일환으로 촌구석 곳곳까지 깔아놓은 전기와 전화선은 뜻하지 않게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때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생포된 상어급 잠수함 조타수 이광수는 다른 공비들과 혼자 떨어져 행동하다가 그 지역 농민 부부에게 발각되었는데 설령 신고를 한다 해도 "설마 그렇게 빨리 군경에게 연락이 가겠어?"라는 생각에 방심하고 남편과 잡담을 나누다[30] 부인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붙잡혔다고 한다. 북한 기준으로 판단하다보니 외진 산골 민가에까지 전화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31][32]
  • 새마을운동 사업때 국민 세금으로 깔아놓은 전력선과 전신선은 21세기 오늘날에도 사용하고 있는 곳이 많다. 전력선은 한국전력공사가, 전신선은 KT가 인수받아서 사용중 이다.[33][34]
  •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짙은 경상북도에서는 새마을운동을 정말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서로 자기가 운동 발상지라고 주장하는 지자체가 많다. 박정희의 고향인 구미시(구미 시가지)와 포항시(북구 기계면 문성리)에서 기념관을 세우며 큰소리를 치고 있지만 막상 정부 기록을 토대로 진짜 발상지로 인정받은 곳은 엉뚱하게도 청도군 청도읍 신도리이다(이곳에도 새마을운동 기념관이 있다). 경부선상의 폐역인 신거역 일대로 경남지방의 수해 복구 현장을 시찰하려고 열차를 타고 내려가던 중 농민들이 관의 지시 없이 자발적으로 수해 복구를 하는 모습을 보고 새마을 운동의 발상에 착수했다고 전해진다.[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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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 새마을지도자연수원설치법에 근거하여 설치되었다.[2] 이스라엘은 상품 작물 재배를 국가 차원에서 장려하는 등 고부가가치 농업이 발달한 나라다.[3] 물론 시멘트 재고를 이만큼 사들여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건설 사업을 했을 것이고, 경부고속도로 등 실제 그럴 수 있었던 건설 사업도 많았다.[4] 당시로썬 석면이 발암물질인게 알려지기 전이라 많이 사용했다. 심지어는 슬레이트 지붕 떼어다가 고기도 구워먹었다(...).[5] 당시에는 이른바 문화주택으로 불렸다.[6] 성남시에 소재한 새마을연수원에서는 새마을지도자 연수생들에 대한 교육평가를 했는데 등급을 각각 A, B, C로 나누어 A를 받은 수료생은 농림부에서 특별지원을 해주고, C를 받은 수료생을 추천한 군수는 문책하라고 지시했다.[7] 미신 타파 등을 목적으로, 이 당시 무속인들의 회고에 따르면 낮에는 미신이라고 돌을 던지다가 밤이 되면 아들이 아프니 제발 굿 좀 해달라고 찾아왔다고 한다.[8] 박정희는 젊었을 때 잠시나마 교사를 했고, 음악 과목도 맡아서 했기에 작사 능력이 있었다.[9] 처음 새마을 노래가 나왔을 때는 작곡자가 홍연택으로 나타나 있었으나 1973년 이후 박정희 작곡으로 바뀌어 적히기 시작했다. 박정희의 3녀 박근령은 MBC <기분 좋은 날> 2008년 11월 7일 방송분에서 아버지가 작곡한 것이 맞다고 주장했다. 아버지가 멜로디를 붙여 불러서 녹음한 걸 박근령에게 주고 '콩나물대가리'로 만들라고 해서 자신이 듣고 오선지에 옮겨줬다고. 실제로도 박근령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출신이었다.[10]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우자"는 당시 박정희 정권의 모토이기도 했다. 꾸준한 노동을 통해 근대화를 이루는 동시에 공산주의를 격퇴하자는 멸공 정신을 동시에 강조한 셈이었다. 박정희 정권 당시에 생긴 예비군캐치프레이즈도 "일하면서 싸우자"다.[11] 기업체나 기차역에 걸려있는 기는 "무재해"기이다.[12] 1982년, 동아일보 소년소녀문학선 작.[13] 특히 전두환의 친동생 전경환이 관련되었다.[14] 단 제프리 삭스의 ODA 견해는 빅 푸쉬, 즉 대규모 자본의 유치를 통한 빈곤의 덫 탈출을 긍정하는 입장이므로, 이에 반대하는 전문가 집단들의 의견도 존재한다. 윌리엄 이스털리 등.[15] 이 외에도 쌀 농사와 각종 채소 등을 재배하거나 양계장 등을 짓고 운영하여 여기서 나오는 쌀이나 채소, 달걀을 팔아 마을에 소득을 올려 이를 통한 상수도 사업이나 학교 등을 지어 지역발전에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으며, 특히 공동 책임제를 도입하여 마을에 생산물이나 종자 등을 저장하는 창고를 짓고 이를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운영, 관리하게 해서 책임감을 높이는 일도 진행하고 있다.[16]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정책은 이미 제국의 형태를 갖추었던 일본제국에 의해 말 그대로 위로부터 시행된 것이고, 일반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했다.[17] 당시 무속은 단순한 무형문화라거나 전통 이상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현대화와는 정면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아프면 병원이 아니라 무당을 찾는 게 당연한 사람들도 많았던 시절이다. 캄보디아 같은 국가에서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18] 사실 새마을운동의 목적과 가장 비슷한 중국의 운동은 대약진운동과 가장 가깝다. 대약진운동이 실패했던 반면 새마을운동은 어느정도 효과를 본 것은 사실.[19] "농업"이라는 단어는 서로 다른 분야의 일들을 통칭하는 것이며 이들 사이에는 세부적으로는 무수한 차이가 있는 게 현실인데 분야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한국의 농업은 수준 이하"라고 하는 것은 이상하다. 예를 들어 오히려 한국 양봉업의 경우 한국이 국토 면적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세계 5위의 밀랍 생산국이 될 정도로 크게 성장해 있다. 한국보다 밀랍 생산량이 많은 나머지 4개 국가들은 모두 한국보다 국토가 훨씬 넓은 국가들이다.[20] 한국의 동부지방은 완전히 산맥이고 평야지대는 전라도 일부 지역밖에 없다. 좁은 나라와 더 좁은 농지를 생각하면 FTA와 겹쳐 농업 경쟁력이 떨어져 갈 수밖에 없다.[21] 또한 세계적인 수준의 농업은 필수적으로 기업농의 형태를 띠는데, 우리나라는 영세농민이 농업의 중심이었고, 현재에도 정부의 농업 정책은 영세농민 중심이다. 이는 대한민국 헌법에 경자유전(경작하는 자가 밭을 갖는다.) 원칙이 박혀있고 농지법에 따라 소유면적도 제한되어 있기 때문으로 특히 후자로 인해서 기업농이 등장하기 어렵다.[22] 심지어 최근에는 60년대 초에 이미 한번 한계에 봉착했다는 연구도 있다(...)[23] 상술한 중국의 신농촌운동 또한 2016년 기준으로는 무조건 농가 소득을 올리는 방향이 아니라 각 지방마다 도농 통합이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24] 90년대 말의 한나라당은 DJP 연합으로 집권했던 김대중 대통령이 박태준 총리를 중심으로 내각제개헌하려 했을 때 이를 맹렬히 반대하기도 했다. 김종필은 이 때의 개헌 실패가 본인에게 치명타가 되었기 때문에 2015년 연재한 회고록에서 이 당시의 한나라당을 강도높게 비난하고 있다.[25] 뿐만 아니라 도시 지역에도 잘 찾아보면 민방위 마크와 함께 방공호 역할을 하는 지하시설들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게 지하철이나 지하주차장, 그리고 오래된 아파트를 보면 지하에 텅 비어져 있는 창고 같은 걸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방공호로 마련된 것이다. 물론 현재에 와서 이런 것들은 잊혀지거나 반지하 임대 등 엉뚱한 용도로 전용되곤 한다. 여의도광장 벙커처럼 아예 기관에서조차 잊어버리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한다.[26] 다만 호자의 경우 인구 300만이 채 안되는 국가에 토치카만 75만개를 지었을 정도로 정도를 지나친 면이 없지 않다.[27] 이 당시에 퍼진 인사가 "재건합시다"였다.[28] 주간동아 2015년 1013호 ‘동양의 덴마크’ 건설 꿈꾼 류달영[29] 류태영 박사 회고 칼럼 中[30] 이는 사실 출동 시간을 벌기 위한 남편의 꼼수였다. 당시 강릉 인근지역에 침투한 공비들이 민가를 습격해 약탈하는 경우(잠수함장 정용구)가 종종 있었기에 초창기 보도에는 주민을 상대로 약탈이나 협박을 하더라는 내용도 있었다.[31] 새마을운동 직전인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당시에는 전화가 가설되지 않아서 주민들은 이장 집이나 우체국 등으로 릴레이식 신고를 해야만 했다. 거기에 북한은 지금도 시외전화를 체신소에서 담당한다.[32] 사실 북한이탈주민들 역시 한국에서 놀라워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농어촌의 발전상인데, 북한 사람들은 '농촌=빈민촌'이란 개념 때문에 남한의 농어촌이 상당한 발전이 된 사실을 목격하고는 거의 멘붕이 온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처음엔 서울로 주거지를 배정받지 못해 분하다고 울던 탈북민들이 몇년이 지나면 오히려 서울에 있으면 답답하다고 하소연할 정도가 된다는 증언이 많다.[33] 한번 깔아놓은 전력선과 전신선은 선 양끝단에 있는 장비만 주기적으로 교체해주면 반영구적으로 사용가능하다. 설령 선이 타버려도 아얘 처음부터 까는 것에 비하면 난이도가 한참 낮다[34] SK브로드밴드가 유선인터넷에서 힘을 못쓰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코렁탕 먹을까봐 항의도 못하고막대한 국민 세금으로 전신선을 설치한 KT와 다르게 민간자본으로만 인터넷선을 깔아야 하니 상대가 불가능한것[35] 정작 새마을중앙연수원은 딱히 새마을운동과는 큰 관련이 없어 보이는 성남시 분당구 율동에 위치해 있다.[36] 1940년 생으로 서울대학교 국문과와 고려대학교 국문과 석사 출신의 히로시마대학 명예교수이다. 일본에서 활동을 하다가 2022년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