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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는 박정희에 대해서는 평가를 안 합니다. 쿠데타 한 사람이 제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
지지 여부를 떠나 우리나라가 6·25의 폐허에서 허덕일 때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국민들에게 불러일으켰다. 정치를 하면서 우리가 최대 정적이었지만 국민들에게 강한 자신감을 심어준 것은 평가할 만하다. |
박정희 정부에 대한 평가를 다루는 문서.
박정희는 전임자 이승만, 라이벌 김대중과 함께 한국 현대사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하나로, 긍정적인 면으로나, 부정적인 면으로나 한국 현대사에 있어 결코 건너뛰고 평가할 수 없는 인물로 여겨진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으로 피폐해진 대한민국의 재건을 이끈 지도자라는 호평과,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인권을 억압한 독재자라는 악평이 공존한다. 때문에 한국 현대사에 대해 논할 때 가장 논쟁적인 인물 중 하나로 여겨진다. 다만 박정희의 지지층은 60~70년대의 경제성장을 직접적으로 경험한 노년층에 편중되어 있기에, 시간이 지나며 민주화 이후 태어나는 세대들이 많아질수록 조금씩 평가가 떨어지는 경향성이 지속되고 있다.
제6공화국 출범 이후 보수 정권과 민주당 정권을 오가는 시대상에 따라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대중의 평가 역시 그 영향을 받아 변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호도 여론조사 중에서 꾸준하게 최상위권의 긍정평가를 기록하고 있는 인물이다. 실제로 박정희의 딸 박근혜는 박정희의 후광효과로 대통령이 되었다.
2. 정치에 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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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3. 경제에 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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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4. 사회·문화에 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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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5. 외교에 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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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6. 안보·국방에 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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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1] 2009년 SBS에서 방영한 육성 회고록 방송 中. YS는 박정희 정권 시절 초산테러, 의원직 제명 등 갖은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이 때문에 그는 한평생 박정희를 증오하였으며 3당 합당 이후 보수계열 인사들, 특히 박정희 정부의 고위인사였던 김종필과 한 배를 타게 된 이후에도 박정희에 대한 긍정적인 재평가는 한사코 거부하였다.[2] YS는 김대중 대통령이 재임중 박정희대통령기념관 건립을 추진하자 "박정희는 5.16 쿠데타로 헌정을 파괴하고 수많은 사람을 살상했으며, 영구집권을 꿈꾸면서 18년간 독재하다 부하에게 살해된 사람이다. 인권 탄압으로 냉엄한 역사적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의 기념관을 정부 주도로 짓겠다는 김대중은 정신나간 사람이다. 그런 돈이 있으면 어렵고 가난한 유신 독재의 피해자들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3] 출처. DJ 또한 YS와 마찬가지로 박정희 시절 갖은 정치적 박해를 받았고, 1973년에는 중앙정보부에 의해 일본에서 납치되어 살해될 뻔하였다. 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집권 이후 화해와 용서의 정신을 내세우며 박정희에 대해 높게 평가하는 멘트를 여러 차례 하였고, 집권 기간 박정희대통령기념관의 설립을 추진하고 예산을 지원하였다.[4] 당시의 이런 행보에 대해 DJP연합으로 공동정권을 잡은 김종필, 박태준 등 구 공화계 인사들의 존재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느냐 하는 의견도 있지만, 이미 그 이전에 서울의 봄 시기인 1980년 4월 26일 관훈클럽 기자회견에서도 김대중은 박정희 정부의 공과 과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잘한 점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국민들이 "우리도 하면 된다. 하니까 되더라"는 자기가능성을 발견토록 한 것이다. 물론 우리 국민의 높은 능력과 본질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 점은 지난 정권의 공이다. 앞으로 나올 정권도 이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다."라고 답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