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대법원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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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김병로 | 제2대 조용순 | 제3·4대 조진만 | 제5·6대 민복기 | 제7대 이영섭 | |
제8대 유태흥 | 제9대 김용철 | 제10대 이일규 | 제11대 김덕주 | 제12대 윤관 | |
제13대 최종영 | 제14대 이용훈 | 제15대 양승태 | 제16대 김명수 | 제17대 조희대 |
역임한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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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496><colcolor=#fff> 출생 | 1913년 12월 12일 | ||
경기도 경성부 (現 서울특별시) | |||
사망 | 2007년 7월 13일 (향년 93세) | ||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묘역 18번 | ||
본관 | 여흥 민씨[1] | ||
아호 | 인재(仁齋) | ||
재임기간 | 제5대 법무부차관 | ||
1951년 11월 30일 ~ 1952년 5월 26일 | |||
초대 해무청장 | |||
1955년 2월 26일 ~ 1955년 9월 30일 | |||
제5대 검찰총장 | |||
1955년 9월 30일 ~ 1956년 7월 5일 | |||
대법관 (조진만 대법원장 제청 / 윤보선 대통령 임명) | |||
1961년 9월 1일 ~ 1963년 4월 22일 | |||
제16대 법무부장관 | |||
1963년 4월 22일 ~ 1963년 12월 16일 | |||
제17대 법무부장관 | |||
1963년 12월 17일 ~ 1964년 5월 10일 | |||
제18대 법무부장관 | |||
1964년 5월 11일 ~ 1966년 9월 25일 | |||
제5대 대법원장 (박정희 대통령 임명) | |||
1968년 10월 21일 ~ 1973년 3월 13일 | |||
제6대 대법원장 (박정희 대통령 임명) | |||
1973년 3월 14일 ~ 1978년 12월 21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5496><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민병석[2], 어머니 심경섭 | |
형제자매 | 형 민홍기 | ||
자녀 | 슬하 2남 2녀 | ||
친인척 | 처숙부 이병도[3] | ||
학력 | 경성중학교 (졸업)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 / 수료)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 / 학사) | ||
경력 | 경성지방법원 판사 경성복심법원 판사 법무부 검찰국장 법무부 법무국장 이승만 대통령 대통령비서실 비서관 제5대 법무부차관 초대 해무청장 제5대 검찰총장 대법원 판사 (1961.09. ~ 1963.04.) 제16-18대 법무부장관 제5·6대 대법원장 (1968.10. ~ 1978.12.) 국정자문회의 위원 | ||
서훈 |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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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판사 출신 친일반민족행위자이자 대한민국의 前 법조인. 법무부장관과 대법관, 제5·6대 대법원장을 역임했다.친일인명사전 수록자이자 박정희 정부의 주요 인사였고, 인민혁명당 사건과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의 주범이기도 하다.
그의 아버지는 조선귀족 자작이자 경술국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민병석이다.[4]
2. 일생
여흥 민씨로 일제강점기의 경성부에서 1913년 12월 12일 출생했다. 당시 주로 일본인들이 진학하던[5] 구제중학교였던 경성중학교를 졸업했다.1931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해 1933년 수료 후 법문학부로 진학하여 1937년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경성제대 재학 중이었던 1936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司法科)에 합격하였다. 1939년 경성지방법원 예비판사로 임명었고 이듬해인 1940년에 경성지방법원 판사로 부임하여 해방을 맞을 때까지 근무했다. 판사로 일한 시절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재판에도 여러 번 참석했고,[6] 이 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판사 시절에는 이와모토 후쿠키(岩本復基)라는 창씨개명을 사용했다.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 미군정 시기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 판사가 되었다. 1947~1949년 법무부 검찰국장과 법무국장이 되었다. 1949년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비서관이 되었다. 1950년 법무부차관을 역임하였다. 1955년 해무청 청장을 잠깐 역임하다가 1955년 9월부터 1956년 7월까지 검찰총장을 지낸 후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에 대법원 판사가 되었다.
1963년 박정희 정권이 출범하면서 법무부장관에 임명되었다. 법무부 장관 재임 중이던 1966년에 국회 오물 투척 사건으로 김두한[7] 의원에 의하여 똥물을 맞아 사임한 바가 있다.
1968년 제5대 대법원장에 취임하였으며 1973년 제6대 대법원장에 재취임하였다. 1975년 4월 8일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희대의 사법살인 사건인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전원합의체[8]에서 피고인의 상고를 기각하여 8명에 대한 사형을 확정지었는데, 민복기는 방청석에 몇몇 가족들만 띄엄띄엄 앉아 있는 썰렁한 법정에서 무표정한 얼굴에 '모기처럼' 작고 건조한 목소리로 판결문을 10분 동안 읽은 뒤 상고기각을 선고하고 곧바로 퇴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1976년에는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최종심 재판에서 판결을 내리기도 했으며[9], 1977년에는 긴급조치 5호 2항[10]이 긴급조치의 해제가 아닌 또 다른 긴급조치이며 민청학련 사건도 내란선동이라고 판결하기도 했다.[11] 또한 그의 휘하에 있던 대법관들이 긴급조치와 조작된 간첩 사건 재판에서 피해자들에게 형을 선고할 때에도 민복기는 눈감아줬다. 이 덕분(?)에 민복기는 '질서확립에 공헌'을 했다는 이유로 1978년 박정희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1971년 6월 22일 전원합의체에서는 이중배상금지가 위헌이라고 판결하기도 했으며. 당시 판결문[12] 1974년 7월 26일에는 1963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된 재일교포 판결에 위법사유가 있다며 원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에 환송한 바가 있기도 하다.
이후 1980년 국정자문회의 위원에 위촉되었으며, 이듬해인 1981년 전두환에 의해 국정자문회의 위원에 선출되어 1987년까지 해당 직을 역임했다. 1980~1984년에는 국토통일원 고문을, 1987년에는 헌정제도연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이후에는 1987년부터 2002년까지 법무법인 태평양의 변호사로 조용히 살았으며, 2000년 자랑스러운 서울대 법조인에 뽑혔다. 신문기사
만 88세 생일 하루 전이던 2001년 12월 11일까지 주기적으로 전.현직 대법원장 만찬 모임에 참석할 정도로 정정했으나(#) 2002년 이후로 대법원장 만찬 모임에 불참한 것으로 보아 2002년부터 건강이 악화된 것으로 보이며, 2007년 7월 13일 오전 4시 17분 향년 93세[13]를 일기로 사망한 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2023년 김용철이 향년 99세를 일기로 사망하기 전까지는 역대 대법원장 중 가장 장수한 인물이었다.
3. 변명
후에 본인은 1990년 7월 17일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가 군 출신이다보니 사법부를 군법무감실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았고, 본인이 이끌던 사법부는 '민주주의 국가이니[14] 사법부의 독립을 내세우지 않을 수는 없었겠지만 제사에 대추 밤 놓듯이 구색을 맞춘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또한 자신이 보기에도 유신 헌법은 민주주의 원칙에 벗어난 법에 방향을 잘못 잡은 것 같은 '유치한 법'이었다며 이중배상금지법에 대해서도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법'이라고 비판하는 모습도 보였다. #다만 그런 변명이 별로 소용이 없는 게 민복기는 명백한 독재 정권의 대법원장이었고, 헌법에 불만을 품었다고 하면 나름대로 정권의 사법부 통제에 대항할 수 있었을 텐데 정권에 대항하기는커녕 오히려 정권에 아부하면서 비굴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특히 제1차 사법 파동 당시에 검찰 측의 보복 수사에 대해 사법권 침해나 보복으로 보지 않는다고 입장을 밝혀 정권의 압력에 맞서 소장판사들을 보호해야할 소임을 저버린 것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의 압박에 '억울하면 절차를 밟아 항소하라'고[15] 맞받아쳤던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인 김병로와 대조된다. 더욱이 상기한 인터뷰에서 대법원장 시절 '헌법상의 규정에 묶여 어쩔 수 없이 (정부의 방침에) 따라가긴 했다'고 밝힌 것은 궤변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또한 속으로는 유신 헌법에 불만을 품었다는데도 오히려 1974년 12월 10일 인권선언기념일에 축사를 하면서 '유신은 인권 보장의 첩경'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권력에 아첨했다는 비판은 결코 피할 수가 없다.
사실 민복기도 대법원장 재임 초반에는 이중배상금지법이 위헌이라고 판결을 내리는 등 소신 있는 모습을 보여줬으나, 이에 불복한 행정부에 의한 사법파동을 겪은 후 정부의 압박에 대한 두려움과 좌절감으로 인해[16] 정부에 대한 불만을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하며 박정희 정권에 순응하는 것이 더 낫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꾼 것으로 보이고, 결국 민복기는 '사법살인의 주범',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는 오명을 역사에 남기게 되었다.[17][18][19]
4. 가족 관계
부인 이인남(1914~?)[20]과의 사이에서 3남 2녀를 낳았다. 결혼 시기는 장남 민경성의 생년으로 미루어보아 1932년경으로 추정되며,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민복기 대법원장 부인상' 관련 뉴스가 없는 것으로 보아 부인도 21세기까지 장수한 것으로 보인다. 이게 사실이면 민복기 부부는 무려 70여 년 가까이 결혼생활을 누렸던 셈이다.- 장남 민경성(1933~)은 히토쓰바시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후 나고야에서 회사원으로 일했다가 일본계 기업체인 유니콘재팬 사장을 역임했다.
- 차남 민경택(1935~1996)은 아버지처럼 서울지법 판사와 서울지검 형사부장을 역임한 후 변호사로 활동했다.[21]
- 삼남 민경삼(1938~)은 서울대와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을 나온 후 1992년 화학제품 회사인 한합산업(현 삼팩 에이앤씨) 사장을 역임한 기업인으로 활동했다.
- 장녀 민경자(1943~)와 차녀 민경숙(1944~)은 모두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했다.
1977년 시점으로 이미 다섯 자녀가 모두 결혼해 있었다고 한다. #
5. 기타
- 별명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관운이 좋은 사람'이었는데, 판사에서 시작해 대통령비서실 비서관, 법무부 차관, 검찰총장, 대법원 판사, 법무부 장관, 대법원장 등 법조계 관련 요직을 모두 거친 사람은 민복기가 유일하다. # 상기한 1968년 주간한국과의 인터뷰에서도 "경력이 화려하다고들 하는데 그걸로 손해도 봅니다. 너는 법무장관까지 지냈으니 그만 해도 되지 않느냐 하는 사람도 나오는 거지요. 사촌이 논을 사면 배 아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인간의 본능이겠지요."라며 자신의 관운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했다.[22]
- 인혁당 사건 때문에 가려졌지만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할 뻔한 것을 막은 공로도 있다. 6.3 항쟁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각하 트럭 1000대를 징발해 주십시요. 학생주동자 놈들을 무인도로 격리해 쥐도새도 모르게 해치우겠습니다"라고 요청하자 "그건 초월적인 위법 행위이고, 그랬다간 시위만 더 확산된다"고 반대했던 사람이 민복기 법무장관이었던 것. 이후 박정희는 "그래 그건 할 수 없다. 그 짓을 해서 전 국민을 적으로 만들겠다는 건가?"라며 그만두며 6.3 항쟁이 유혈사태로 번질 뻔했던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다른 버전도 있는데, 민복기의 발언에 김형욱이 성냈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
- 술, 담배를 피하고 조깅, 골프와 바둑, 수영을 취미로 즐기는 건강한 생활습관을 가졌으며, 일흔이 넘어서도 하루 한 시간 30분씩 헬스클럽에 다녔고, 법률신문에서 가장 먼저 보는 것이 강석복[23] 건강칼럼이었을 정도로 건강에 많이 신경을 썼다. # 이 덕에 민복기는 88세까지도 대외 활동을 할 정도로 정정했던 데다가 94세에 사망했다.
- 대한제국의 매국노의 후손 중 민영휘 집안[24], 이종찬[25][26]과 함께 해방 후에도 일제강점기에 자신의 집안이 누린 것과 같은 수준의 권세를 누린 몇 안 되는 케이스다.[27]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는 달리 다른 매국노들의 후손들은 광복 이후 해외로 이주하거나 나름대로의 유력 인사가 된다고 해도 증손대 이후가 되어야 가능하게 될 정도로 위세를 완전히 잃었지만,[28] 민복기는 일제강점기에 실무 부역자(판사)로 일했던 덕분에 광복 이후에도 등용되며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29][30]
[1] 삼방파 31세손 ○기(○基) 항렬.(족보)[2] 1858. 12. 12. ~ 1940. 8. 6. (향년 81세), 대한제국의 매국노.[3] 1896.9.20 ~ 1989.8.14 (향년 92세), 前 제7대 문교부 장관.[4] 사실 대법원장 선출 무렵에도 민복기의 아버지가 이왕직장관이란 것은 언급되었다. 그러나 경술국적이란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언급되지 않았다. #1 #2 사실 민복기가 아버지의 정체를 숨길 수밖에 없었던 게 국회의원이었던 윤석순도 아버지 윤종화가 조선인 중 최고위 경찰이었단 것이 드러난 게 국회의원직 재선 실패에 영향을 미쳤다는 설이 있는데 하물며 민복기가 법계 요직으로 일했던 시절에 대놓고 '민복기의 아버지는 이완용과 함께했던 매국노'라는 소문이 퍼졌다면 민복기의 커리어는 완전히 끝장났을 것이다.[5] 일본어를 상용하는 자는 소학교에 입학해 구제중학교로 진학했고, 일본어를 상용하지 않는 자, 즉 조선어를 상용하던 대부분의 조선인은 보통학교를 거쳐 고등보통학교로 진학했다.[6] 참고자료 물론 민복기는 후에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면서 자신은 독립운동가 재판에 참여할 수도 없었으며 임관 직후 백백교 사건 재판에 딱 한 번 배석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독립운동가 재판 가담을 전면 부인했다고 한다. #[7] 김좌진의 아들이다. 민복기의 아버지의 정체를 생각하면 묘한 느낌이 든다.[8] 사실 인혁당 사건의 상고심 판결은 두 차례나 담당 재판부가 바뀐 끝에 이례적으로 당시 민복기 대법원장을 재판장으로 하는 13명의 대법원 판사들로구성되는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9] 당시 재판에 피고로 회부된 사람 중에는 (반공 성향) 독립운동가였던 함석헌도 있었고, 함석헌은 징역 5년, 자격 정지 5년을 선고받았다. 그나마 함석헌은 고령이었기에 실제로 형이 집행되지는 않았다.[10] 해제당시,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또는 동 제4호에 규정된 죄를 범하여, 그 사건이 재판 계속중에 있거나 처벌을 받은 자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아니한다.[11] 몇몇 사람들의 오해와는 달리 민청학련 사건 당시 재판에 민복기는 참여하지 않았다.[12] 이는 사법파동을 야기하게 된다.[13] 2007년 한국 남성 평균수명이 76.1세였고, 2023년 기준으로도 80.6세였다. 참고로 여성은 82.7세/86.4세.[14] 제3공화국은 비자유민주주의라 볼 여지도 있겠지만 제4공화국은 말만 자유민주주의일 뿐 실질적으로는 빼도 박도 못하는 독재 국가였다. 그리고 제5공화국은 사실상 일당독재 국가였다.[15] 1956년에는 이승만이 국회 연설을 통해 “우리나라 법관들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권리를 행사한다”며 사법부를 정면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자 가인은 이렇게 맞받아쳤다. “억울하면 항소하쇼!” #[16] 실제로 민복기는 대법원장으로 재직했을 때 가장 고통스러운 사건으로 1971년 이중배상금지법 위헌 판결과 1972년 사법파동을 꼽았으며, 이때 민복기는 자신이 사표를 쓰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회고했다. #[17] 오히려 이때 대법원장직에서 물러났더라면 6.3 항쟁 당시 학살을 막아낸 것(자세한 것은 후술)과 엮이며 '김병로도 능가하는 역대 최고의 대법원장' '우장춘, 이순용과 같은 견부호자'라며 역사에 좋은 이름을 남겼을 것이다.[18] 실제로 (본인은 논외로 하더라도)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 중 직접적으로 독재정권의 악행에 가담한 사례는 민복기가 유일무이하다. 심지어 민복기 부자처럼 부자가 나라를 파탄내거나 국민들에게 악행을 자행한 경우는 세계사적으로도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케이스인데, 해외에서 민병석-민복기 부자와의 유사 사례를 꼽자면 남아시아판 이완용인 미르 자파르의 직계 9대손 이스칸데르 미르자가 독립한 파키스탄의 대통령으로 방글라데시에 대한 탄압으로 방글라데시 영토를 잃게 만들고 파키스탄을 군부독재의 수렁으로 밀어넣은 최악의 지도자였지만 이조차 9대손 관계다. 참고로 미르자도 민복기처럼 영국령 인도군 중령에까지 오른 식민부역자였다. 또 고대 중국에서도 가규-가충-가남풍 3대가 각각 후한, 조위, 서진의 망국에 가담하거나 크게 일조하여 '세 왕조를 망하게 한 가씨'로 꼽히며 민씨 부자와 가장 유사한 케이스지만 저들은 북방 유목민족에게 고국을 팔아먹으며 부귀영화를 누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남풍은 민복기와는 달리 아버지처럼 한 나라 자체를 말아먹었다.(다만 가규는 조조의 부하에 조위의 건국공신으로 볼 여지도 있는지라 아들, 손녀와 같이 싸잡혀 비판받는 것은 억울한 감도 없지는 않다)[19] 다만 독립운동가의 자식이 극악한 악행을 저지른 경우도 있다. 전두환 정부의 핵심 중 한 명인 최세창은 민복기와 정반대로 누구보다 열성적인 독립운동가의 아들이었음에도 민복기도 뛰어넘는 악행들을 저질렀으며,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조인원의 아들 조병옥은 4.3 사건 당시 유혈진압의 중대한 책임자다. 외국 방글라데시에서는 방글라데시 건국의 아버지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의 딸 셰이크 하시나가 집권 말미에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기득권을 확장하는 것(공무원 자리의 30%를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할당하는 방식이었다)에 대한 국민들의 대규모 항의 시위에 발포를 명령해 공식 수치로만 1000명 이상을 학살하며 분노한 시위대에 의해 아버지 동상까지 파괴될 정도로 아버지 얼굴에 먹칠을 제대로 했으며, 인도에서도 자와할랄 네루의 딸 인디라 간디가 독재 정치를 저지르고 분리주의 단체 진압을 명분으로 시크교도 수백 명을 학살했다가 분노한 시크교도 경호원들에게 암살당했다.[20] 역사학자 이병도의 조카딸이다.[21] 여담으로 1980년 10월 17일에는 8차 개헌에 대해 '새 헌법안은 민주복지사회구현을 위한 새로운 정치질서를 확립하는 데 초석이 될 내용을 담고 있다'고 찬양하기도 했다. #[22] 실제로 민복기 개인의 일생만 놓고 보면 곽자의에 비견되는(곽자의보다 10년을 더 살았다. 물론 시대상 변화를 감안하면 곽자의도 만만치 않은 장수다.) 최상의 복록만을 누리다 죽은 셈이다.[23] 1904~2002. 민복기의 선배로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시행된 제1회 판검사 특별임용시험에 합격, 광주지원 판사와 서울지검 부장검사를 지냈다. 1949년 부장검사 시절 초대 상공부장관이던 임영신을 구속한 후유증으로 판사직을 그만둔 후 1952년 변호사로 개업했으며, 1980년 4월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법률신문에 '건강칼럼'을 기고했다.[24] 우연히도 민영휘도 민복기 일가와 똑같은 여흥 민씨이다. 직접적으로 국권 피탈에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매국 관련 단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기에 사실상 매국노라 봐도 무방하다.[25] 할아버지 이하영은 을사조약에 표면적으로는 반대했기에 공식적으로는 매국노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일각에서는 을사오적에 당시에는 소극적이었던 박제순 대신 이하영을 추가하기도 한다.[26] 이종찬도 구 일본군에 자원입대하여 친일인명사전에 들어갔다. 그나마 이종찬은 후에 본인의 친일 행적을 반성했다.[27] 물론 이순용도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기는 했으나, 애초에 이순용은 한국광복군과 협력했던 독립운동가 출신이기에 논외로 봐야 한다. 덤으로 이순용은 UCLA에서 공부한 엘리트이긴 했으나 독립운동 과정에서 미국 시민권을 얻은 후 공부한 것이라 집안 배경과는 완전히 무관하다.[28] 경제적 기득권을 유지했다 해도 권력 기득권은 완전히 잃었다.[29] 비매국노 조선귀족까지 합하면 왕족 출신인 이해승 일가도 해방 이후 대대로 기득권을 유지했으나 이조차 경제적 기득권에 국한되었다.[30] 공평하게(?) S급 독립운동가 집안까지 따지면 김구, 김좌진(아들, 손녀가 2대째 국회의원을 역임했다)의 후손들도 기득권층으로 자리잡았으며, 이회영의 손자들도 고위층으로서 잘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