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31 23:36:10

2024년 방글라데시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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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방글라데시 시위
২০২৪-এ বাংলাদেশে কোটা সংস্কার আন্দোলন
2024 Bangladesh quota reform movement
파일:187421.jpg
날짜
2024년 6월 6일~6월 9일,(1차),
2024년 7월 10일~7월 21일,(2차),
2024년 7월 29일~8월 5일,(3차),
장소

[[방글라데시|]][[틀:국기|]][[틀:국기|]] 전역
원인
국가유공자 할당제에 대한 정당하지 않은 선정 기준
2024년 방글라데시 의회 선거의 부정선거 의혹
방글라데시의 청년 취업난
교전국 및 교전세력
파일:방글라데시 국기.svg 방글라데시 정부
파일:방글라데시 국기.svg 방글라데시 경찰
특수부대(RAB)
파일:아와미 연맹 로고.svg 아와미 연맹
시위대
파일: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 깃발.svg 방글라데시 국민당
기타 방글라데시 야당
지휘관
파일:방글라데시 국기.svg 셰이크 하시나 없음
결과
셰이크 하시나 총리 내각 붕괴
방글라데시군의 정권 장악, 과도정부 수립
영향
셰이크 하시나 방글라데시 총리의 사임 및 피신
인명피해
31명 사망
다수 부상
300명 이상 사망[1][2]
부상자 11,000명 이상

1. 개요2. 발단3. 진행
3.1. 2024년 7월 16일3.2. 2024년 7월 18일3.3. 2024년 7월 21일3.4. 2024년 7월 22일 이후3.5. 2024년 7월 29일3.6. 2024년 8월 4일3.7. 2024년 8월 5일3.8. 2024년 8월 6일 이후
4. 반응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방글라데시 반정부 시위는 2024년 벌어진 방글라데시의 반정부 시위로, 공식 수치로만 300명이 넘는 엄청난 사망자가 나왔다. 사실상 방글라데시 독립 이래 사상 최악의 유혈사태로 꼽히고 있으며, 시위의 여파는 셰이크 하시나 방글라데시 총리의 사임까지 유발했을 정도로 막대했다.

2. 발단

방글라데시가 극심한 실업난을 겪는 가운데, 정부가 1971년의 독립전쟁의 유공자 자녀 공무원 할당제 (공직의 약 30% 할당)를 추진하자 대학생들이 반발하며 시위에 나섰다.

왜 여기에 대해 대학생들이 시위를 하는지 알고 싶으면 방글라데시의 청년 실업률을 보면 된다. 방글라데시는 청년 인구가 매우 많아 청년 실업률이 40%에 달할 정도로 실업난이 심각하다. 매년 약 40만 명의 대학 졸업생 중 많은 이들이 월급은 높지 않지만 안정적인[3][4] 공직 3천 개를 놓고 경쟁하는데, 많지 않은 유공자 자녀들에게 공직의 1/3을 할당하면 경쟁률이 133:1에서 200:1로 급상승하기 때문이다.[5]

또한 무엇보다 오늘날 방글라데시에서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은 권력을 잡은 기득권이다. 그래서 이 정책이 말이 좋아 독립유공자 자녀 할당제지 실상은 기득권 자녀 할당제라는 반응이 나오면서 청년들이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6][7]

적절한 선정 기준을 세워 할당이라도 잘 해주면 젊은 층들의 반감이 약해졌겠지만 이 기준조차도 논란이 많기에 문제가 되었다. 방글라데시 독립운동사의 양대산맥으로는 방글라데시의 국부이자 셰이크 하시나 총리의 아버지인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과 독립군 총사령관을 지낸 칼레다 지아의 남편 지아우르 라흐만이 꼽힌다. 그런데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셰이크 하시나와 칼레다 지아는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다. 그래서 현재 집권하고 있는 셰이크 하시나라면 당연히 자신의 부친을 도와 독립전쟁을 이끈 사람들의 후손들에게만 공무원 자리를 할당해줄 것이고, 지아우르 라흐만을 도와 독립전쟁을 이끈 사람들의 후손들에게는 공무원자리를 할당해주지 않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논란이 된 것이다. 한마디로 하시나가 독립유공자 우대라는 명분을 내세워 공무원직에 자기 사람 심기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 실제로도 셰이크 하시나가 집권하면서 지아우르 라흐만이 독립전쟁을 이끌은 기록은 방글라데시 교과서에서 크게 축소되었다고 한다.[8]

그럼에도 셰이크 하시나 총리와 여당은 반대 시위대를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파키스탄 군에 부역했던 매국노 라자카르 민병대[9]에 비유하며 노골적으로 할당제 부활을 정당화하며 강행, 추진하려 했다.[원문] 여기에 더해 부정선거 의혹이 짙은 2024년 방글라데시 의회 선거의 결과로 선출된 하시나 총리의 할당제 추진은 타오르던 반정부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상당수 대학생은 이러한 할당제 부활과 관련해 하시나 총리가 자신의 지지 세력을 위해 추진하는 정책이며, 사법부는 정부의 '거수기'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여당측 대학생 회원 등 할당제를 지지하는 친정부 학생들은 찬성 시위를 벌였고, 찬반 두 집단이 충돌하면서 벽돌과 몽둥이가 등장하는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에 경찰이 개입했는데, 이들이 찬성측 학생들은 냅두고 반대측 학생들만 강경하게 진압하자 양측의 대치가 강경해지는 가운데 반대파의 시위는 점차 반정부 & 민주화 요구 시위로 규모가 더욱 커져갔다.

3. 진행


3.1. 2024년 7월 16일

전국적으로 시위가 벌어졌고, 8명이 사망했다.

3.2. 2024년 7월 18일

18일 들어 시위대가 다카의 캐나다 방글라데시 대학교 등지에 모였고, 다카 외곽에서는 다카로 진입하는 고속도로와 주요 도로를 봉쇄했다. 이에 경찰은 시위대에 최루탄과 고무탄, 심지어 실탄[11]을 발사하면서 강경 진압에 나섰고 대학교 입구에 검문소를 설치하기도 했다. 또 학생들이 모이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전국에 통행금지령을 내리고는[12] 인터넷, 전화, 메시지를 차단했다.[13] 시위대는 국영 방송국, 경찰서, 경찰차, 재난관리청 사무실 등에다 방화하고, 다카 북부의 교도소를 습격해 수감자 800명을 탈출시키기도 했으며, 중앙은행과 총리실 홈페이지를 해킹했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다카, 치타공 등 5개 대도시에 준군사조직인 국경수비대방글라데시(BGB) 병력을 배치했으며 전국 고등학교와 대학교, 이슬람 종교학교 등에 휴교령도 내렸다.

사망자가 당초 보도인 10여명에서 100명 수준으로 크게 늘자, 야당인 방글라데시 국민당도 이번 정책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다며 시위대를 지원하고 나섰다.
상부에서 발포 명령이 내려졌다는 증언이 나왔다! 집권여당인 아마미연맹의 사무총장 오바이둘 쿼더는 “군 병력에 극단적인 경우에는 시위대를 겨냥해 발포해도 좋다고 허용됐다”고 말했다. # 또 경찰들이 학생들을 조준사격하거나 경찰측 차가 학생들을 밀어버린 것까지 폭로된 상황. 방글라데시 교민의 증언

3.3. 2024년 7월 21일

방글라데시 대법원은 공무원 할당제와 관련해 전체 공직의 93%는 기존처럼 능력에 따라 배분하고 5%만 독립 유공자 자녀에게 할당하도록 했다. 나머지 2%는 소수 민족과 장애인 등 취약계층 몫으로 남겼다.#

3.4. 2024년 7월 22일 이후

22일 오전 기준 시위는 진정 국면에 들어왔다. # 다만 인터넷 차단과 통행금지령은 중단되지 않았다. # 링크에 따르면 경찰에게 고문을 당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정부가 법원의 중재안을 수용함에 따라 시위도 26일까지 잠정 중단될 예정이다. 물론 시위 자체가 끝날 가능성도 높다. # 일각에서는 시위가 재개되면 하시나에 대한 탄핵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나는 게 아니냐는 추측을 제기한 상황.

23일 오후 8시부터 인터넷이 부분적으로 해제되었다.

28일 방글라데시 정부가 시위를 주도한 학생 지도자 3명을 구금했다. 이에 학생단체들도 이들을 석방하지 않으면 29일부터 시위를 재개하겠다고 선언했다.

3.5. 2024년 7월 29일

전국적으로 대규모 시위가 재개되었다. #

3.6. 2024년 8월 4일

군경과 시위대간의 대규모 충돌이 발생하며 무려 101명[14]이 사망했다. 그것도 단 하루 만에. #

3.7. 2024년 8월 5일

오후 2시 30분, 셰이크 하시나 총리가 사임 발표를 한 뒤 여동생과 함께 군 헬기를 타고 접경국 인도가지아바드로 도피했다. #1 #2

분노한 시위대가 하시나 총리의 아버지인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 전 총리의 동상을 파괴하고, # 하시나 총리가 이끄는 집권당 아와미 연맹의 당 사무실에 불을 질렀다. #

육군 참모총장인 와케르 우즈 자만 장군은 군대가 평화를 회복할 것이라 밝혔다.

3.8. 2024년 8월 6일 이후

총리 사임 이후 평화가 오나 했으나 이슬람교[15] 뱅골족[16] 이외의 소수민족 내지 힌두교도들을 공격하기 시작하는 양상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한다. 참고자료

이후 셰이크 하시나 가족들은 인도 공군의 보호 아래 여러 보안 기관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안전한 자택으로 들어갔다고 밝혔다. 하시나는 인도에 남을 것인지 영국으로 망명할 것인지는 공식적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한편 시위의 영향으로 여러 인도 항공사들은 방글라데시로 가는 모든 비행편을 취소하였다고 하였고 인도 정부는 방글라데시와 접경 지역에 군대를 주둔하여 야간 통행을 제한하였다고 한다.

셰이크 하시나의 아들이자 아와미 연맹 고문을 역임한 사지브 와제드 조이는 인터뷰에서 자신을 포함하여 어머니 셰이크 하시나도 다시는 정치에 뛰어들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 방글라데시군 참모총장이 참석한 가운데 모하메드 샤하부딘 대통령와 다양한 정당 지도자 및 시민사회 대표들과 회의를 가졌다고 보도했다. 모하메드 샤하부딘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하고 조속히 임시정부를 구성하기로 합의하여 결정하였고 이후 모하메드 샤하부딘 대통령은 TV 연설을 통해 폭력적인 시위 중에 구금되고 체포된 모든 사람이 석방될 것이며, 시위 중 사망하거나 다친 사람들의 가족들에게 보상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칼레다 지아에 대해서 석방하라고 명령하였다.#

군부와 시민단체 각계 대표단이 시위대 학생대표들과 논의한 결과 그라민 은행 설립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경제학자 무함마드 유누스가 과도정부 수반을 맡을 적임자로 지명되었고, 대통령과 군부가 이를 수용하면서 과도정부 최고 고문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유누스는 8월 7일 과도정부 수반으로 선출된 후 8월 8일 오후 8시에 취임했다.#

대법원장이 대학생과 시민들의 사퇴 요구로 물러났다.#

하시나 정부에서 법무부 장관을 지낸 아니술 후크와 기업 관련 고문을 지낸 재계 지도자 살만 F 라흐만은 국외로 도주하려다가 다카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8월 13일 셰이크 하시나 전 총리는 성명을 발표해 시위 도중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한 데 대한 조사를 실시하고 책임자를 처벌하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성명은 미국에 거주하는 하시나 전 총리의 아들 사지브 와제드 조이가 X에 대신 올렸는데, 자신에게 학살의 책임이 없다면서 유체이탈 화법을 쓰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 # 마침 그 전날 하시나가 다른 고위층 6명과 함께 시위 과정에서 식료품점 주인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상황이었다. #

시위대에 대한 발포 명령을 내린 사람이 셰이크 하시나 전 총리 본인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상기한 기소를 한 식료품점 주인의 동료는 하시나 전 총리가 '시위 진압을 위해 경찰에 발포하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하시나가 군에게 발포 명령을 내리려 했다가 장성들의 거부로 실패했다는 것( #)을 보면 저 증언이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

방글라데시 보건부 장관은 이 시위 과정에서 사망자가 1,000명 넘은 것으로 추산했다.#

4. 반응

  •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대변인을 통해 방글라데시 정부에 위협이나 폭력으로부터 시위대를 보호하라고 촉구했다.
  • 매슈 밀러 미 국무부 대변인은 전날 언론 브리핑을 통해 "평화적인 시위대에 대한 어떠한 폭력도 규탄한다"며 방글라데시 정부를 향해 "평화적으로 항의할 개인 권리를 지켜줄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 방글라데시 유튜버 Team Azimkiya[17]는 해당 시위로 인해 7월 18일부로 정부에서 네트워크를 차단하면서 틱톡과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고 밝히며 현 정국에 대해 한 나라의 국민으로 힘이 없고 나라를 대표하여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상황을 알리며 한탄했다. 셰이크 하시나가 퇴진한 이후 8월 5일 10시경에 나라를 지키지 못할 정도로 무능한 셰이크 하시나는 도주했고 사태가 완전히 끝나면 다시 영상을 올려 웃음을 주겠다고 했다.
  • 하시나 전 총리가 퇴진한 이후 분노한 시위대에 의해 소수 종교인 힌두교도들이 살인과 약탈을 당하는 등 탄압을 받게 되자 방글라데시 힌두교도들이 탈출을 위해 인도 국경에 몰리고 있다. 방글라데시 힌두교 신자들이 인도로 가려는 이유는 물러난 하시나 전 총리가 이끄는 세속주의 정당 아와미연맹이 힌두교도와 가까운 관계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AFP는 설명했다.# 이슬람이 주류인 방글라데시에서 사회적 소수인 힌두교도들은 사회 혼란기에 폭력에 노출되고 약탈당한 아픈 경험이 있다. 힌두교도의 한 지도자는 "힌두교도들은 언제 공격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고 경각심을 나타냈다. 이에 학생 시위 지도자 및 야당 지도자들은 힌두교도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보호를 촉구했다.#

5. 관련 문서



[1] 출처 이는 5.18 민주화운동 공식 사망자보다 많은 수치다.[2] 이것도 독재국가 특성상 실제 대비 대폭 축소된 거라는 주장이 있다. 당장 비교사례로 제시한 5.18도 실제 사망자가 정확히 832명이라는 군 조사당국자 증언이 있다. 마찬가지로 방글라데시 현지에서는 최대치로는 2차 시위에서만 무려 950명이 죽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8:53에 나온다. 모든 사망자를 합치면 2,000명이 넘는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3] 방글라데시의 공무원 월급은 매우 낮다. 방글라데시에서 가장 낮은 등급의 공무원이 받는 급여는 8,000~20,000 방글라데시 타카 정도로 한화기준 월 8~20만원 정도이며 고위직 공무원조차도 한화기준 월 100만원(100,000 방글라데시 타카)도 못 받는 사람이 허다하다. 심지어 방글라데시 총리도 월급이 한화 130만원(130,000 방글라데시 타카) 정도이다.# 대신 방글라데시는 개발도상국답게 사회 전반적으로 뇌물이 횡행한데, 공무원이 되면 뇌물을 받기 쉬워서 축재가 용이하다. 여기다가 공무원 특유의 안정성까지 합쳐서 공무원 경쟁률이 매우 높은 것이다.[4] 대한민국은 뇌물 수수는 금지되었지만, 그럼에도 어느 정도 안정적이고 수당 등을 감안하면 9급 기준 최저임금을 약간 넘을 정도로는 받을 수 있었기에 공무원 경쟁률이 높았다. 하지만 공직사회의 보수적인 조직문화, 최근의 잇따른 악성민원으로 인한 자살, 대기업/중견기업의 고용 안정성 강화 등으로 공무원 경쟁률이 떨어지고 있다. 물론 일반행정직 공무원, 교육행정직 공무원, 간호직 공무원 등 최상위권 직렬은 경쟁률이 60:1에서 최대 100:1 정도로 높다.[5] 참고로 대한민국의 공직 중 경쟁률이 최상위급인 9급 공채 교육행정직 공무원 경쟁률이 100:1 정도이다.[6] 대한민국은 독립유공자 후손들 중 상당수가 가난하기에 오히려 독립유공자 할당제만큼은 남녀노소, 보수-진보 상관없이 모두 찬성한다.[7] 사실 독립유공자 가문 기득권화의 폐해는 로버트 무가베짐바브웨에서도 보여준 바가 있다. 물론 식민지 부역자들이 기득권을 잡고 나라를 말아먹은 사례가 압도적으로 많지만.[8] 물론 칼레다 지아가 집권했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의 독립운동 기록이 축소되는 일이 벌어지긴 했다.(...)[9] 독립전쟁 당시 파키스탄에 부역해 독립군 및 독립군 지지자 학살에 앞장선 자들로, 오늘날에도 방글라데시에서는 한국의 친일반민족행위자(약칭 친일파)나 토착왜구, 알제리의 아르키와 비슷한 취급을 받는다.[원문] "자유투사 자손이 혜택을 봐야 하냐, 라자카르 자손이 혜택을 봐야 하냐?"[11] 사망자의 절반 이상이 실탄 발포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 #[12] 식료품 구매를 제외한 이유로 외출하면 징역 1년형을 선고케 했다.[13] 때문에 방글라데시 네티즌들은 VPN을 통해 유튜브에 댓글을 달며 소식을 전하고 있으며, "우리는 또 다른 북한이 되었다"고 분개했다.[14] 경찰관 14명 포함[15] 90%[16] 인구의 98%[17] 상게망게 후후 하면서 등장해서 한국어 문장을 복창하는 밈을 다루는 유튜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