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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타 왕조 पृथ्वी Pṛthvī [1] | |||||
320년 ~ 550년 (230년) | |||||
위치 | 인도 북부 | ||||
수도 | 파탈리푸트라[2]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
국가 원수 | 마하라자디라자[3] | ||||
주요 황제 | 사무드라굽타(335/350?~375?) 찬드라굽타 2세(375?~415?) 쿠마라굽타 1세(414?~455?) | ||||
왕조 | 굽타 왕조(गुप्त राजवंश) | ||||
언어 | 산스크리트어, 프라크리트어 | ||||
민족 | 인도인[4] | ||||
종교 |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 ||||
건국 이전 | 쿠샨 왕조, 사타바하나 왕조, 서사트라프 | ||||
멸망 이후 | 후굽타 왕조, 바르다나 왕조, 에프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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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320년경부터 마가다 일대로부터 일어나 인도 북부를 통일했던 왕조.고전 인도 문화를 크게 발전시켰다. 굽타 왕조, 굽타 제국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당시에는 산스크리트어로 단순히 국가나 지역을 뜻하는 राज्य(Rājyá), राष्ट्र(Rāṣṭra), अवनि(Avani) 또는 고대 인도의 또다른 이름인 पृथ्वी(Pṛthvī)로 불렸다.
2. 역사
3세기 중반, 서아시아의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아프가니스탄과 인더스 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대했다. 이에 쿠샨 제국의 영향력이 약해지자, 북인도에는 또다시 수많은 나라들이 들어섰다. 굽타 가문은 마가다 지역의 작은 나라를 다스렸는데, 4세기 초반 찬드라굽타 1세가 굽타 왕조를 열고, 갠지스 강 일대를 모두 차지했다.그의 뒤를 이은 사무드라굽타는 정복 군주로 이름을 날렸다. 그가 연이어 승리를 거두자, 북부 대부분이 굽타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각 소국간 균형을 깨트리게 되는데, 후일 에프탈의 침입에 대해 펀자브 및 라자스탄이 갠지스 강 계곡의 완충 지대 역할을 더 이상 할 수 없었으므로, 후기 굽타 왕조에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사무드라굽타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데칸 고원 남부까지 나아갔다. 이곳의 여러 동맹국들이 저항했으나, 그의 세력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결과 굽타 왕조는 인도 아대륙 대부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인도 전역으로 사무드라굽타의 세력이 완전히 스며들었다는 것은 좀 의문이 간다는 의견도 있다. 비록 세력은 약화되었지만, 쿠샨 왕조와 사무드라굽타와의 관계는 확실한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7세기 중엽 인도를 여행한 왕현책의 기록을 보건대, 실론의 왕은 그에게 사절단을 보냈으며, 부다가야에 불교 사원을 지을 수 있도록 굽타의 왕에게 간청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요청이 조공을 바친 것으로 취급될 수 없으며, 아마도 다른 이국의 왕과의 관계도 이와 비슷한 처지였을 것이라 본다. 여전히 굽타 왕조와 도서 지방과의 관계도 모호한 채로 남아 있다. 그들이 인도에서 가까운 지방인 말디베와 안다만을 의미하는지, 넓은 인도의 판도를 자랑하려는 의도에서 남아시아를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사무드라굽타는 약 40년 동안 인도를 지배했기 때문에, 그의 지배 체제를 계획하고 조직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정복을 선포하는 마사제를 자주 거행했다. '마사제'란 말을 희생시켜서 행하는 종교 의식으로, 인도에 최고의 주권을 선포하는 왕들이 반드시 행하는 제식이었다. 하지만 사무드라굽타는 오로지 정복과 전쟁만을 제일로 하는 군주는 아니었다. 그는 시와 음악을 사랑하였다고 명문에 기록되어 있듯이, 좀 더 온화하고 문화를 존중하는 인물이었다. 비나를 손에 잡고 의자에 기댄 왕의 모습을 담은 금화는, 그가 연주에 능란했음을 보여 준다.
굽타 제국의 전성시대를 연 인물은 할아버지의 이름을 이어받은 찬드라굽타 2세였다. 박트리아의 공격에 성공한 그는 군사를 몰아 땅이 비옥한 동부의 벵갈까지 차지했다. 가장 큰 성과는 강력했던 서부의 사카족의 서사트라프 왕국을 물리친 것이었다. 이로써 굽타 제국의 최대 영토가 확보되었는데, 일찍부터 대외무역이 발달한 서부의 항구 도시들은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찬드라굽타 2세는 인도의 여러 군소 왕국과 혼인이라는 동맹 관계를 통하여 그 지배 영역을 강화시켰다. 특히, 이러한 동맹 관계는 데칸 고원에서의 굽타의 위치를 공고히 해 주었다. 그의 부왕 사무드라굽타는 동부 데칸을 무력으로 정복했으나, 서부 데칸에 대해서는 비교적 그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래서 옛 사타바하나 왕조의 근거지였던 서부 데칸은 바카타카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차츰 데칸 지방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특히, 굽타 왕조와 바카타카 왕조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한 동맹은 그 둘 사이에 친밀한 관계를 맺게 해주었다. 이런 역사를 통해 굽타 왕조가 인도 중남부 지역에서도 어느 정도의 지배권을 확립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전 마우리아 왕조와 같이 확실한 지배권을 가지지는 않았다. 이후 그의 아들 쿠마라굽타 1세 때까지 굽타 제국은 1세기 내내 전성기를 자랑하게 되었다.
[5]
쿠마라굽타 1세는 부왕 찬드라굽타 2세를 비롯한 선대 왕들처럼 새로운 영토에 대한 정복을 적극적으로 시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비에 있어서는 확실하게 잘 막아냈다. 즉위년도인 415년부터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인 에프탈이 인도 서북부를 통해서 침입해왔는데, 쿠마라굽타 1세는 이를 대체적으로 잘 막아내어 제국을 평화롭게 유지시켰다. 이렇다고 정복전쟁을 아주 안한 건 아니었다. 만다소르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서부 말와 지역이나 박트리아의 영향력이 강했던 서북부를 비롯한 인더스 계곡쪽으로 진출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때 찬드라굽타 2세 때 결혼동맹을 맺는 등으로 관계가 원활했던 바카타카 왕조와의 사이도 악화되고, 그 쪽과 가까운 인근 지역에서 푸샤미트라가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6]
이후 쿠마라굽타 1세의 아들 스칸다굽타가 즉위했는데, 그 역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에프탈의 침입에 대비했다. 460년 스칸다굽타가 대승을 거두게 되면서 약 50여 년간은 외부적으로 평화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푸샤미트라의 반란도 이 스칸다굽타 때 완벽히 토벌되었다. 하지만 이로 인하여 굽타 왕조의 인도 내 영향력은 많이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467년 스칸다굽타가 사망한 후 이복형제인 푸루굽타가 즉위했다. 이 푸루굽타와 스칸다굽타 사이에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 이는 아직 역사적으로 완전히 검증되지 않은 내용이며 그 명확한 증거가 아직 없다.
이들의 아버지 쿠마라굽타 1세가 아직 살아있을 적에 에프탈이 굽타 왕조의 서북부 지역을 공격해왔다. 이에 쿠마라굽타 1세는 아들 스칸다굽타를 파견하여 이들을 물리치게끔 명령했다. 그래서 스칸다굽타는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서북 국경지역으로 출전했고, 부왕 쿠마라굽타 1세의 명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토벌 도중 쿠마라굽타 1세가 사망했다. 여기서 원래 왕위 후계자는 스칸다굽타였는데, 푸루굽타가 멋대로 찬탈했다는 내용이다. 다만 에프탈의 침입을 무찌르고 돌아온 스칸다굽타에게 바로 왕위를 넘겨줬다고 한다. 여기에 일부 학자들은 스칸다굽타가 에프탈을 토벌함으로서 전국적으로 긍정적인 민심을 형성했으며, 이에 푸루굽타는 자신의 힘이 아직 스스로 견줄 수 없다고 생각하여 포기하고 넘겨줬다는 것이다.[7] 하여간 이 내용은 앞서 말했다시피 확실히 검증된 부분은 아니니 그냥 참고하는 수준으로 보면 될 듯하다.
이후 스칸다굽타가 사망한 후에 푸루굽타는 자신의 조카 즉, 스칸다굽타의 아들인 쿠마라굽타 2세와 왕위 경쟁을 하게 되었고 여기서 승리한 푸루굽타가 결국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지 얼마 안돼서 금방 사망하고 말았다. 그 다음은 쿠마라굽타 2세가 왕위에 올랐으며 그가 사망한 뒤에는 또 다른 스칸다굽타의 아들인 붓다굽타가 왕위에 올랐다. 붓다굽타는 약 20년간 왕위에 있었으며, 인도에서의 굽타 왕조의 광대했던 세력은 이를 마지막으로 급격히 몰락하기 시작했다.[8] 후에 비슈누굽타가 다시 한 차례 에프탈의 공격을 막아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것만으로 망해가는 굽타 왕조의 붕괴를 막을 수가 없었다.
굽타 왕조는 푸루굽타가 즉위하면서부터 명확히 힘이 빠지게 되었으며 전성기의 영광은 끝나버리게 된다. 이후로도 쭉 굽타 왕조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더욱이 무역이 발달한 서부 지역이 떨어져 나간 이후에는 세금이 줄어들어 상황이 더욱 나빠지게 된다. 여기에 황제의 자리를 놓고 서로 세력다툼이 일어나면서, 굽타 제국의 지배를 받던 여러 나라들이 독립을 선언하고 굽타 왕조도 끝을 바라보게 되었다.
멸망후 여러 국가들 중 마가다 지역에는 후굽타 왕조가 있었는데 기존 굽타 왕조와의 연관성은 없다. 훗날 이 지역의 패권은 바르다나 왕조가 이어가게 된다.
3. 정치
3.1. 정부 체제
찬드라굽타 1세가 굽타 왕조를 확립이기 이전 스리굽타 및 가토트카차 시절만 해도 굽타 지역은 군주제가 아닌 공화정[9] 형태의 정부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찬드라굽타 1세가 마가다 왕국의 명맥을 이어나가던 리차비족의 공주와 결혼하게 되면서 마가다 지역의 정통성을 획득함과 동시 군주제로 바꾸게 된다. 마우리아 왕조 이후 인도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굽타 왕조의 역대 왕들은 왕중에 대왕이라 하여 거의 황제급에 비슷한 권력을 휘둘렀다. 여기에 아슈바메다, 즉 마사제(馬祀祭)[10]라 불리는 브라만교의 제례를 지내어 왕권 강화를 꾀하려 했다. 이와 같은 제례로 인해 이시대에는 제왕을 신성시했고, 그 전제적 지배를 인정하는 사상들이 형성되었다.일반적으로 굽타 왕조의 정치체제형태는 군주제였다. 다만 마우리아 왕조때와는 달리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이루지는 못했고, 그 광대한 지역들에 소번후들을 임명하여 관리했다. 즉 전제적 형태보다는 봉건적 군주 체제 형태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결국 스칸다굽타 이후 지도세력들간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왕권이 약화되자마자 각지에서 독립을 종용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왕위는 기본적으로 세습형태였다. 그러나 스칸다굽타와 푸루굽타의 사례를 보면 일반적인 장남 우선 세습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3.2. 행정
굽타 왕조의 중앙 정부 행정은 일반적으로 마우리아 왕조에서 행하던 전통적인 관료제도를 대부분 답습하여 세분화시켰을 뿐이었다. 중앙 정부에는 각각 수상처럼 국사를 총괄하던 마하 만트리, 국방을 책임지던 마하 발라디크리타, 사법의 최고 책임자였던 마하 단다나야카, 일반 행정의 최고 책임자라 불렸던 마하 프라티하라를 두었다. 각 부서의 최고 책임자들은 대왕과 함께 국정을 다스렸다. 또한 따로 지방의 행정을 살피는 쿠마라마트야라는 직책도 있었다.중앙 정부를 제외한 각 지역을 주 또는 도로 나누었고, 해당 지역에는 여러 소번후들이 있었다. 그 각각의 소번후국 안에는 행정을 맡는 관리가 있었으며, 신분의 차이는 고정화되었다. 또한 직업은 대체로 세습되었고, 백성은 토지에 묶여 있었으며, 화폐는 통일되어 있었다. 이처럼 사회가 고정화되어 감에 따라, 이것을 뒷받침해주는 이론체계인 힌두교가 득세하여 브라만들의 권위가 상승했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밑에 종교항목에 설명하고 있다. 하여간 이를 토대로 '브라만 법전'이 표준이 되었고 학술, 문예 방면에서도 브라만 교학이 두드러졌으며, 산스크리트어가 공용으로 사용되어졌다.
굽타 왕조는 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몇 개의 촌락을 합해서 군으로 삼았고, 이 군 위에 현을 두었다. 군과 현에는 각각 장관을 임명했는데, 군의 장관은 징세관 등의 몇 사람들이 보좌했다. 촌락은 토착 세력의 촌장과 촌로에 의해 운영되었는데, 여기서 ‘군’은 국가와 촌민을 연결시키는 접점이 되었다. 촌장이 촌락의 대표였지만, 촌로는 촌의 유력자로서 한 촌락에 몇 명의 촌로가 있었다. 이 촌로들은 좋은 가문 출신으로 《베다》와 '다르마'에 정통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 촌락사회의 중심적 존재는 토지 소유 농민이었다. 이들이 국가의 조세와 부역을 부담했다. 토지 소유 농민 외에도 촌락에는 소작인과 노예와 불가촉천민이 있었으며, 이들의 신분은 명확히 구분되었다.
4. 문화
찬드라굽타 2세와 쿠마라굽타 1세에 걸쳐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넉넉해지자, 학자들과 예술가들을 보호하는 한편, 이들에 대한 후원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산스크리트어와 문화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 그 결과 문학과 예술, 자연과학과 수학 등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불교 문화의 융성은 아잔타 석굴 문서 참조. 한편으로 브라흐미 문자에서 데바나가리 문자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문자인 굽타 문자가 등장하여 여러 기록이 남게 되었다.4.1. 문학과 예술
굽타 왕조 시대에 인도의 고전 문학은 상당히 발전하게 되었는데, 왕실에 소속된 학자와 문학가들은 오랜 세월 입에서 전해 내려오던 설화를 정리하여 결과를 발표했다. 인도의 2대 서사시인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가 오늘날의 형태로 정리된 것도 이때였다. 또한 문학 부분에서는 사무드라굽타가 시를 읊은 왕으로서 이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를 찬미한 하리세나가 지은 알라하바드 석비내용은 산스크리트 문학의 걸작이다. 그리고 예로부터 시성으로 숭배해온 칼리다사가 4∼5세기의 교차 시기에 활약하여, 《샤쿤탈라》 등의 희곡과 시를 지었고, 또 시, 희곡, 설화문학 등의 뛰어난 작품이 출현했다.참고로 굽타 왕조 시대에는 산스크리트어로 된 문학작품 외에 프라크리트어 혹은 타밀어 등으로도 많은 문학 작품들이 쓰여졌다.[11] 이를 통해 당시 문학은 왕실 차원에서 후원되어졌음을 알 수 있다. 보통 산스크리트어는 상류 계층들이 많이 사용했고, 프라크리트어는 하류 계층 혹은 자이나교도들이 많이 사용했다. 실제로 굽타 왕조 시대의 프라크리트어 작품들은 대게 자이나교도들이 쓴 것이었다. 하여간 산스크리트어로 이루어진 문학작품이 가장 많았기 때문에 이 시대의 문학은 주로 귀족적이고 궁중문학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대왕들은 자신들의 공적을 나타내는 시를 짓게 하고 이를 위해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예술 분야에서는 인도의 개성이 이때 만들어졌고, 이는 아잔타 석굴 사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있는 많은 불상과 벽화는 서양인의 모습을 한 간다라 불상과 달리 인도인의 얼굴을 닮았다.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와 일본에까지 전해져 동아시아 불교 미술에도 영향을 주었다. 다만 힌두교 미술은 당시의 힌두문화의 번영과는 병행하지 못하고, 다음 시대에 들어가 융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4.2. 자연과학과 수학
자연과학도 세계 수준이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아리아바타를 들 수 있다. 그는 대수학과 기하학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했으며 특히 원주율 값을 3.1416으로 계산했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지구의 둘레를 정확하게 측정했다. 거기다 지구의 자전을 밝혀 내고, 태양과 달을 비롯한 행성의 운행을 기술했을 뿐만 아니라 지동설을 주장했다.[12] 아리아바타 외에도 이 시대에 뛰어난 천문학자 바라히미히라가 있다. 그러나 그는 천문학을 아라아바타와 달리 과학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주로 점성술적인 입장으로 연구했다. 또 다른 천문학자로 바스카라 차리아는 지구가 각 물체를 그 무게에 따라 끌어당긴다고 하는 인력의 법칙을 처음으로 밝혀내는 성과를 거두었다.수학의 발달도 눈부셨는데, 가장 큰 성과로 무한대와 영(0)의 개념을 발견한 것이다. 흔히 불교에서 무한대는 무량수(無量數), 영은 공(空)으로 표현하는데, 이러한 인도 수학의 발전에서 탄생하게 된 언어들이다. 또한 삼각함수가 발명된 것도 굽타 왕조 시대이다. 인도의 수학은 천문학과 결부하여 《싯단타》라고 하는 책들을 만들었다. 아리아바타의 《아리아 바티얌》과 브라흐마굽타가 쓴 《브라흐마 싯단타》가 이런 유형의 책들이었다. 이 가운데 《브라흐마 싯단타》의 경우, 아라비아어로 번역되어 서아시아를 비롯한 지역으로 인도의 수학을 전하게 된다. 이는 훗날 아라비아 숫자와 함께 유럽에 전해져 수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한편 굽타 왕조 시대에 《나바니타캄》이라고 하는 유명한 약학서가 쓰어지기도 했으며 《하스트야아유르베다》나 《아슈바샤스트라》 등과 같은 수의학 서적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보통 굽타 왕조 시대의 의학은 대부분 이전에 저술된 의학서를 기초로 하고 있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창시자격인 용수는 약학과 화학, 야금술 등에 뛰어난 재능을 나타내어 새로운 약품들을 많이 발견했다고 하는데, 이 시대에 야금술의 성과는 델리 교외의 쿠트브 마나르에 있는 철탑에서 발견할 수 있다.
4.3. 건축
굽타 왕조 시대를 잘 나타내주는 건축물들은 아쉽게도 석굴 종류를 제외하면 그리 많이 남아있지가 않다. 하지만 몇 가지 석조로 이루어진 가구 건축들의 유례를 확인할 수가 있으며, 불교 외에 힌두교 사당 같은 것들도 볼 수가 있다. 보통 사당 건축은 중후하면서 안정감을 표현해주는 것들이 많으며, 평지붕과 문광 등의 장식들을 특히 잘 확인할 수가 있다. 대표적으로 5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산치 제 17호 사당이나 아이호리의 라드칸사 그리고 7세기의 데오가리 사당 등이 있다. 중세에 넘어서는 보급된 고탑상의 시카라 건축이 있는데, 이 형태는 굽타 왕조 시대 혹은 조금더 이전에 시작된 듯 보이고 5~6세기 양식의 유구가 남•북에 산재되어 있다.유명한 부다가야의 대정사도 이 무렵에 조영한 것으로, 후세에 보수했으나, 여전히 굽타 시대의 건축미를 간직하고 있다. 굽타 왕조 시대의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불교의 석굴사원이고, 힌두교 석굴도 이 시기에 처음 조성되어졌다.
굽타 시대의 불교 석굴은 고대 이래의 배경들을 가지고 있으며, 굴을 파는 기술이나 장식의장 같은 것들도 가장 발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들은 서인도 산악지대에 밀집되어 있으며 아잔타, 버그, 칸헤리, 에로라 등이 있다. 여기에 차이토야굴과 비하라굴의 두 굴이 있으며, 모두가 종전의 목조식의 건축 요소가 적어지고, 그 대신에 정면과 기둥 및 작은 벽에 너무나도 많고 풍부한 부조장식들이 있다. 그리고 주로 승원굴[13]의 경우에는 다시 전랑이나 좌우랑의 벽을 채화로 채우고 실내장식을 가일층 강조하는 모습을 보인다. 차이토야굴의 경우 정면창이 점차 작아지고, 본존의 불탑 정면에 불상을 조각하며, 또 승원굴에서는 오전을 두어 불상을 모신 일 등은 이 시대 석굴사의 특색이다.
5. 사회
5.1. 상업
굽타 왕조 시대에는 쿠샨 왕조때 성행한 서방과의 교역 활동은 쇠락했다. 그렇지만 국내의 상업 활동은 여전히 활발했다. 도시에는 금융업자, 도시 사이를 오가는 무역상인, 수공업자의 3가지 조합이 있었으며, 이 조합의 대표자는 도시 행정기관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이 조합의 대표자는 촌락의 촌장과 촌로처럼 도시의 사회질서를 유지하는데 기여했다. 이처럼 조합과 국가의 결합은 도시상업을 번영하게 했다.그렇지만 굽타 왕조가 쇠퇴하자 도시들도 점차 영향력이 줄어드는 추세가 되었다. 대신에 신흥 도시들이 등장했다. 카나우지 [14]와 같은 새로운 정치의 중심지와 힌두교의 성지로서 사원을 중심으로 발달한 종교 도시가 새롭게 힘을 발휘했다. 그리고 원거리 도시 무역은 점차 힘을 잃었고, 상업은 작은 지역에 한정되었으며, 각 지역들은 자급자족의 분위기로 바뀌어졌다.
굽타 왕조 시대에도 화폐가 발행되어졌는데, 일반적으로 기존 왕들의 모습이 세겨진 금화나 은화들이 사용되어졌다. 보통 금화가 은화보다 가치가 더 높았고, 사용률도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화폐경제 수준은 많이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 화폐들은 주로 브라만 및 사원에 대한 기부나 도시들 간의 무역 혹은 토지의 매매, 관청에서의 벌금 납부 등으로 사용되어졌다. 이마저도 유통 상태가 원활하지 않아 농촌이나 어느 시골 깡촌에서는 아예 사용되지 않았다. 특히나 에프탈의 침입이 활성화되었을 때는 금화의 순도조차 떨어지게 되었고 유통상태도 더욱 불량해졌다. 참고로 찬드라굽타 2세때는 금화가 아닌 은화가, 쿠마라굽타 1세때는 동화가 유통되기도 했다.
[15]
5.2. 법률
브라만을 정점으로 하는 4성 계급의 사회질서도 굽타 왕조 시대에 확립되었는데, 유명한 《마누 법전》은 4성 계급을 기본으로 해서 생활규범, 종교적 의무, 왕의 직무, 법률, 속죄의 방법 등을 제시한 것이었다. 여기에 《나라다 법전》, 《브라하스파티 법전》, 《카티야야나 법전》의 세 가지 법전이 추가되었다. 이는 《마누 법전》의 부족한 내용을 채우기 위해서 새로 편찬된 법전들이었다.이 세 가지 법전은 법률을 중심으로 해서, 특히 소송법 규정을 상세히 가다듬은 것이었다. 그래서 실제로 재판의 준칙이 되었다. 촌로가 알아야하는 '다르마'는 이 세 가지 법전들을 뜻했다. 나아가 농촌뿐만 아니라 도시에서도 이러한 법전이 생활속에 활용되었다.
5.3. 종교
이 무렵 사람들에게서 한 걸음 멀어져갔던 브라만교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복잡한 제사 의식과 제물을 간소화해 사람들의 부담을 줄여준 것이다. 브라만의 역할과 더불어 신상에 대한 참배도 존중되었다. 또 제사외에 고행, 명상 등도 해탈에 이르는 길임을 인정했다. 이런 변화를 거치면서 브라만교가 힌두교로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다.힌두교가 힘을 얻자 굽타 왕조의 역대 왕들은 브라만에게 많은 땅을 주면서 힌두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리고 스스로 '비슈누의 화신'이라 주장하면서 왕권을 신성화시켰다. 힌두교가 널리 확산되자, 브라만의 권위가 크게 강해졌다. 현세보다 내세를 중시하고, 의무의 이행을 강조하는 교리가 확산되면서 엄격한 신분 질서에 대한 저항도 약화되었다. 이에 수드라와 불가촉천민의 구분이 명확해지고, 혈통에 따른 '바르나' 제도와 구별되는 직업에 따른 '자띠'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법률 항목에서 이미 설명했었지만, 이 과정에서 각 바르나의 권리, 의무, 생활 규칙 등이 총망라된 《마누 법전》이 만들어졌다. 이는 힌두교도가 지켜야 할 종교적 계율인 동시에 일상생활을 규제하는 가장 강력한 규범이었다. 이로써 바르나와 자띠를 기본으로 한 인도 특유의 사회 체계인 카스트 제도가 인도 사회 기층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에 반해 굽타 왕조 시대의 불교는 점차 쇠퇴했다. 이는 당시 인도의 불교 신자 상당수가 상공업자 계층이었으나, 로마 제국과의 무역이 쇠퇴하면서 인도의 무역항과 상공업 도시들이 대폭 축소된 것에 기인한다. 인도를 방문했었던 중국인 승려 법현의 기록에 의하면 굽타 시대에도 불교가 여전히 널리 신봉되고 있었다고 적혀있는데, 물론 불교의 태생지라 불리던 비하르나 웃타르 프라데쉬 지역에서는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으나, 마가다 지역에서는 불교가 크게 쇠퇴했다. 당시 굽타 왕조의 지배층들은 힌두교를 신봉하고 있었고, 농촌 사회의 실세인 브라흐민 계급의 지지를 받기 위한 목적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널리 선포되고 있었다. 이처럼 국가의 강력한 보호 아래 힌두교가 급격히 성장하면서 불교는 자연스럽게 예전의 영광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굽타 왕조에서 불교나 자이나교 등을 배척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사무드라굽타는 자기 자신은 힌두교를 믿으면서 바스반두와 같은 위대한 불교 학승을 오히려 자기 아들의 스승으로 삼기도 했다. 또 유명한 나란다의 불교 대학도 왕들의 적극적인 보호 아래 성장해 왔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이토록 굽타 왕조는 다른 종교 간에 서로 배척하거나 시기하기보다는 평화와 조화를 유지하면서 공존토록 했다.
5.4. 카스트 제도
굽타 왕조 시대에는 앞서 서술했다시피 브라만교가 힌두이즘으로 진화하면서 카스트 제도에도 크나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고, 인도 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특히 브라만 사제들의 권위가 상승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근본적인 이유는 왕권의 강화와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굽타 시대의 왕들은 이전의 마우리아 왕조와 달리 자신에 대한 칭호를 단순히 '라자'라는 표현에서 벗어나 '왕중왕' 혹은 '신의 화현' 등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칭호의 격상을 통한 왕의 신격화는 불교적인 사고 속에서는 절대 이루어 질수가 없었다.[16]그리하여 왕들은 당시 폐쇄적이며 쇠퇴해가던 브라만교를 힌두교로 변화시켜 왕권 강화를 이루고자 한 것이다. 이러면서 자연스럽게 브라만들의 권위는 상승하게 되었고 왕족, 귀족, 무사 계급의 크샤트리아 계급 또한 브라만 계급과 같이 지위 향상이 이루어진다. 이는 당시 브라만과 크샤트리아 계급 간의 상호 협력 관계가 서로의 필요에 따라 자연히 밀착되어짐을 알 수가 있다. 크샤트리아는 브라만의 권한인 제사 의식을 독자적으로 거행할 수 있는 권한도 얻게 되었다.
바이샤나 수드라 계급에도 역시 그 지위에 사뭇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바이샤 계급의 성장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지역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굽타 왕조의 특성상 경제를 담당했기 때문에 필연적인 결과였다. 이와 같이 지역의 경제권을 바탕으로 바이샤는 지역의 행정회의에도 참석하는 등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발언권도 획득하는 수준으로 지위가 향상되었다.
마지막으로 수드라는 장사와 농사에 관련해서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선택할 권리가 주어졌다. 굽타 왕조 시대에 불가촉천민이 확립되었기 때문에 수드라를 이들과 엄연히 구분짓기 위한 양상으로 보인다. 수드라는 불가촉천민들처럼 노예는 아니었고, 육체노동자의 개념에 더 가까운 계급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주인에게 얽매여 자유가 전혀 없는 불가촉천민들과는 엄격하게 다른 대우를 받고, 제한적이기는 했지만 소소한 자유 정도는 누릴 권리가 분명 존재했다.
굽타 왕조 시대의 카스트 제도에는 특이한 것이 있었는데 종래의 신분에 의한 '바르나' 대신 점차적으로 직업에 의한 구별로 변화되어갔다는 것이다. 경제적 여건의 향상은 다양한 직업을 산출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각각의 카스트 구성원들은 브라만을 제외한 그 계급이 허용하는 한도 안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직업을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를 가졌다. 이와 같은 사실로 봤을 때, 직업이 세습제로 굳어진 후대의 카스트 제도에 비하면 훨씬 자유로웠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시대에 카스트 제도에 대한 법과 사회관습이 엄격하게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근본적으로 폐지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브라만 계급의 경우, 자신들의 순수성과 절대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다른 계급과는 차별을 분명히 했다.
유독 굽타 시대에 카스트 제도가 자유롭게 행사되어졌던 이유는 바로 다양한 이민족들의 유입에 있었다. 굽타 시대에는 서쪽으로 샤카족의 서사트라프, 그리스계 박트리아의 잔존세력을 흡수한 인도-파르티아 왕국, 쿠샨 왕조 등이 있었고 북쪽으로는 에프탈과 같은 유목민족들이 존재했었다. 인도에 남게 된 몇몇들은 그대로 정착하게 되었고 힌두교 사회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이 이민족들도 힌두화되면서 자연스럽게 인도 사회의 신분 및 경제 부분에서 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경우에 따라 크샤트리아 계급으로서, 직업에 따라 알맞은 카스트를 받게 되었다.
5.5. 생활상
굽타 시대 사람들의 식생활의 경우, 크샤트리아와 하층 계급을 제외하고 육류와 술을 금기시했다. 그들은 주로 채소와 과일, 우유와 유제품들을 섭취했다. 일반 여성들의 의복은 전통적인 복장 이외에 샤카족이나 쿠샨인들의 유입에 말미암아 코트나 바지가 등장하여 이것들을 입기도 했다. 의복은 주로 실크, 면화, 양털 등으로 만들었다.귀걸이, 팔찌, 발찌, 목걸이, 반지 등의 다양한 모양의 장식품이나 사치품들도 함께 등장하였고, 이때 이러한 장식품들은 주로 금, 은, 진주, 다이아몬드, 상아 등으로 호사스럽게 만들어져 이 시대의 풍요로운 생활상을 잘 드러내줬다. 또한 남녀 모두가 화장품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아름다움과 멋을 마음껏 뽐내기도 했다. 일반 지방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은 단순했지만 도시인들은 크고 화려하게 치장된 아름다운 정원을 갖춘 집에서 온갖 향연을 즐기며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다. 도시들 자체도 대체적으로 깨끗하고 아름답게 정돈되었다.
6. 의의
굽타 왕조 시대는 인도 역사상 황금시대라고 볼 수가 있다. 정치적으로는 엄격한 왕정 제도가 확립되었으며, 중앙과 지방의 행정 조직도 상당히 유기적으로 체계화되었다. 정치적 안정은 상업의 발전과 더불어 문학, 예술, 종교, 건축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그러나 굽타 왕조의 지배력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곳은 북인도 정도이고 잘 봐줘야 데칸 지역을 비롯한 중부 지역 언저리 수준이다. 그 외 지역에서는 비록 굽타 왕조에게 조공을 바치는 하였으나 정치, 행정 등 다른 부분에 있어 그들 나름대로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한채로 있었다. 또한 내부적으로도 한때나마 영토 전역에 관료제 도입을 시도했던 마우리아 왕조만큼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전쟁사 측면에서 보자면 굽타 왕조는 인도 서북부의 유목민들로부터 보다 진보된 형태의 기병 전술을 받아들였으며, 전투 코끼리와 고대 전차에 의존하는 전술에서 탈피하여 보다 기동력있는 군대 편성을 단행했다. 중국 조무령왕의 “호복기사”[17]와 마찬가지로 굽타인들은 쿠샨 왕조의 토하라인들로부터 안장, 고삐, 단추 달린 외투, 승마용 바지, 장화를 도입하여 우수한 기병을 육성했다.
이렇게 정치나 행정 조직들로만 보면 인도 역사에서 굽타 시대보다 오히려 마우리아 왕조 시대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앞서 언급했던 사실들의 기초들이 이미 마우리아 왕조때 기틀이 잡혔다는 부분에서 더욱 그러하긴 하다. 그러나 굽타 왕조 시대를 고대 인도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것은 문화, 과학, 종교, 사회 등 정치 부분을 제외한 다른 모든 부분의 측면들이 매우 눈부시게 발전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굽타 왕조는 고전 인도 지역 내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7. 역대 군주
- 1대 찬드라굽타 1세 (320 ~ 335)
- 2대 사무드라굽타 (335 ~ 380)
- 3대 찬드라굽타 2세 (380 ~ 415)
- 4대 쿠마라굽타 1세 (415 ~ 445)
- 5대 스칸다굽타 (455 ~ 467)
- 6대 푸루굽타 (467 ~ 473)
- 7대 쿠마라굽타 2세 (473 ~ 476)
- 8대 붓다굽타 (476 ~ 495)
- 9대 나라시마굽타 (495 ~ 530)
- 10대 쿠마라굽타 3세 (530 ~ 540)
- 11대 비슈누굽타 (540 ~ 550)
- 기타 반야굽타 (507?), 바누굽타(510?)
[1] 본래 대지, 대지모신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인도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확대되었다.[2] 현재 비하르 주의 주도인 파트나 부근.[3] 마하라자의 왕중왕격 칭호[4] 인도아리아인, 드라비다인[5] 서사트라프 정벌을 나가는 찬드라굽타 2세의 모습.[6] 450년경 굽타 왕조의 영역. 북인도의 분홍색선으로 둘러싸인 부분이 굽타 왕조의 영역이고, 연보라색이 바카타카 왕조의 영역이다.[7] 이것이 사실이면 스칸다굽타는 정말로 엄청난 대인배일 것이다. 꼭 죽이지는 않더라도 여전히 정치적 영향이 상당히 있던 걸로 보아 추측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일반적으로 저런 상황에서는 백이면 백, 반역으로 몰려 최소 사형이고 잘 봐줘야 귀양수준이다. 하지만 스칸다굽타 본인이 오래 살았더라면 몰라도 고작 재위 12년 만에 붕어하니 푸루굽타로 인해 다시 왕위 분쟁이 불거져 국력을 쇠퇴시키는데 일조하였으니, 일시적인 관용이 결국 돌이키기 힘든 문제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8] 굽타 왕조의 붕괴는 이전 푸루굽타계와 스칸다굽타계간의 권력다툼에서부터 이미 몰락할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고, 붓다굽타 사후에는 이가 눈에 띄게 보일 정도로 쇠락한다.[9] 정확히는 가나상가라고 불리는 부족연맹 체제다. 근대적인 의미의 공화정 체제는 기원전 6세기경에 형성된 로마 공화국이 시초다.[10] '아슈바'는 말을 뜻하는 단어이고, '메다'는 희생을 뜻한다. 즉, 말을 희생하여 지내는 제례다.[11] 물론 전체적인 양을 따져본다면 산스크리트 문학작품 수에 비교할 수는 없었다.[12] 유럽의 대표적인 지동설 학자로 유명한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갈릴레이 등은 16~17세기 사람들이다. 단 지동설이라는 아이디어자체는 기원전 그리스에서도 나오던 것이긴했다. 유럽에서 천동설이 주류가 된것은 지동설일 때 필연적으로 나오던 연주시차가 관측하기 어려웠다는 것과 같은, 더욱 더 복잡한 이유가 있었다.[13] 보통 비하라굴을 뜻한다.[14] 후에 바르다나 왕조의 하르샤 왕이 타네사르에서 천도했던 도시.[15] 사무드라굽타의 모습이 세겨진 금화[16] 애당초 불교는 카스트 제도 자체를 아예 반대하고 나서는 종교이다.[17] “오랑캐 옷을 입고 (전차 대신) 말 위에 올라탄 상태로 활을 쏜다.”는 뜻